오늘 말씀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질병에서 치유 받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가 마음과 육신의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한 무엇을 해서는 안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해서는 안 될 일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미신적인 신앙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합니다. (1-2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어느 날, 예수님이 유대 명절을 지키려고 성전 제사에 쓰일 양이 수송되는 양문(Sheep Gate)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베데스다 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된다는 전설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미신적인 전설에 희망을 걸고 정작 낫지도 못한 채 수년, 수십 년 동안 그곳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은 오늘날의 미신적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쳐준다. 예언을 한다. 신령한 불이 있다!”고 하는 베데스다와 같은 미신적인 교회로 몰려들지만 주님은 결코 그런 삶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8절에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은 “이제 미신의 대상인 베데스다를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그에게 그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원했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를 치유한 것은 베데스다의 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즉,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으면 고질병과 시험은 계속됩니다.
둘째,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6절)
6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주님은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병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소망이 있는지를 확인하시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처음 병을 발견했을 때는 어떻게든 낳아보겠다고 의지와 소망을 가지다가 치유가 늦어지거나 고통이 심해지면, “이제 안 돼!”라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정성껏 간병하다가 병 수발이 길어지면 마음속 깊은 곳에 “이럴 바엔 차라리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긴 병에는 장사가 없다는 것이죠. 그와 같은 포기와 체념을 극복해야 치유 받을 수 있기때문에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으로 병자의 의지를 확인하고 일깨운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병자는 병이 나으면 더 이상 동냥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치유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치유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질병과 장애를 이용해서 다른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미국의 한 청년은 베트남 전쟁 때 군대에 안 가려고 이빨을 다 뽑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런 작은 이익에 사로잡혀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변화와 치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변화와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간절한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게는 항상 더 나은 세계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고 그 세계로 나가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병들었을 때 낫기를 정말 원해야 치유도 일어납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병든 경우에는 자기가 자신을 이미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땀 흘리고, 헌신하려는 의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몸을 가꾸는 기본적인 일도 귀찮게 생각합니다.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먼저 외모부터 잘 가꾸려고 해야 합니다. 옷을 멋지게 입고, 머리 손질도 잘하고, 외출할 때는 정성으로 단장하는 단순한 행동들이 삶의 의욕을 키워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포기하면 점점 자기가 더 싫어지고 병의 극복은 힘들어집니다. 이제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의욕을 가지십시오. 축복의 손잡이와 응답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무조건 은혜를 부어주실 수도 있지만 먼저 행동하는 믿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믿음이 치유의 은혜를 증폭시킵니다.
셋째, 변명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처지를 불평하며 “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지나친 피해의식이죠?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면 받은 피해만 뚜렷이 기억하게 됩니다. 자연히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잘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하며 “그게 내 잘못입니까?”라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배우자나 부모나 사회, 그리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에 잘하면 됩니다. 변명하는 습성을 깨뜨리지 않으면 결코 변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치유를 위한 삶일까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감사해야 합니다. 8절에서 왜 주님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은혜 받은 자리를 항상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감사를 체질화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결국 우리의 건강을 위해 주신 은혜의 명령입니다.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조건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해요.
서울에 딸만 셋 낳은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가문의 대가 끊겼다고 눈을 흘기고 말로 상처를 주면서 며느리를 구박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고 기미가 벗겨질 날이 없었습니다. 딸들도 괜히 미워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안양 교도소로 교도소 전도를 갔다가 큰 감사거리를 발견했습니다. 교도소에 가보니까 여자는 없고 다 남자였습니다. 그때 속으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딸만 주셔서 이런 곳에 올 가능성을 낮춰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그렇게 밉게만 보이던 딸들이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면서 얼굴의 기미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불평거리는 자세히 뜯어보면 감사의 제목입니다. 감사는 감격을 부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얻겠다고 신령하다는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하기 힘들 때도 감사하면 그 때가 성령님의 감동이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둘째,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8-9절 말씀을 보면 38년 된 병자는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병이 나은 것을 봅니다. 순종은 치유의 징조이고 성숙함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원래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원죄가 왜 생겼습니까? 원죄의 근원은 살인죄와 같이 큰 죄를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한 죄입니다. 선악과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려서 생긴 죄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죽음과 병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병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고장 난 것입니다. 영어로 ‘고장 났다’는 것을 ‘out of order(질서가 나간 상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질서가 깨진 상태에서 ‘질서 안에 있는 상태(in order)로 돌아와서 병에서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까? 정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질서(order)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해서 세상 지식이 다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 지식을 갖추되 중요한 판단은 말씀을 따라 해야 합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할 때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권면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석학과 지식인들이 당신을 보필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하라 스스로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 지식은 참고하되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셋째,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가 치유 된 후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본문을 조금 지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결국 그의 38년 된 고질병은 죄 때문에 생긴 병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질병과 불안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살수록 치유의 능력은 현저하게 커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이상하게 행동하는 삶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는 “누가 어떤 체험을 했느냐?”보다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때로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는 괴상한 삶을 살아야 신령하다고 생각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사실은 그런 심리가 문제입니다. 사단이 그 심리를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순수한 성도들이 베데스다 교회로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 신령한 것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단에게 영혼이 농락당하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목사는 계룡산을 갔다 온 후 말세의 종이라는 모 목사를 통해 하늘의 비밀과 계시를 전수받았다면서 교회에 돌아와 밤낮 금식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에게 계시가 들려왔습니다. “네 아내와 살지 말라!” 그는 그 음성을 듣고 별거한 후 4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39일째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그런 영적 영웅심을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신기하거나 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진실과 충성’이란 뜻을 가진 진충 씨가 여행을 거의 마치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상처와 흔적을 주님을 사랑한 증거로서 제게 상급주실 그분께 가져가겠습니다.” 실생활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언어 속에 예수님의 향기가 느껴지게 하시고, 저의 눈동자가 예수님처럼 따뜻한 눈동자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게도 주님의 흔적이 있게 하소서. 그래서 항상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소서!”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산에서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사랑에 너무 감격해 고백했습니다. “주님! 제게도 주님의 흔적이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형상이 저 멀리 지평선에 보이며 온몸에 십자가의 강렬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십자가의 삶을 겸손하게 실천하면서 점차 성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자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고 하는 바로 여러분이 성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치유를 위해 성도가 피해야 할 3가지 삶과 추구해야 할 3가지 삶을 보면 치유가 ‘나의 신앙적인 삶’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입니다. 남이 나를 도울 수도 있지만 사실상 남의 도움보다 내 도움이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엄청난 약속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면 심하게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지만 믿음이 굳건하면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원합니다. 항상 주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변화와 치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첫댓글 첫째, 미신적인 신앙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합니다. 첫째,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변명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셋째,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_^*
수고 많으셨네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