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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이루었다는 뜻’ 의 이름이다.(왕궁 건설에 약 1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 (新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답자(畓字)는 속자(俗字)이다. 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 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2.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將)
에서 밝혀진 ‘ 將 ’ 의 의미 http://kbs.daum.net/tracehistory/episode/21250(2008.12)
중국 낙양의 고 미술가에서 백제와 관련된 주요 유물 한 점이 발견된다. 비의 주인공은 예식진.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백제 웅진 출신의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백제의 유력가문 출신이다. 또한 백제 금석문의 경우,
‘숫자’가 귀한데 그 정보가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금석문의 발견인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대당좌위위대장군, 백제웅천인, 좌평 집안..
중국 낙양의 고 미술가에서 백제와 관련된 주요 유물 한 점이 발견된다. 비의 주인공은 예식진.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백제 웅진 출신의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백제의 유력가문 출신이다. 또한 백제 금석문의 경우, ‘
숫자’가 귀한데 그 정보가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금석문의 발견인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대당좌위위대장군, 백제웅천인, 좌평 집안이라는 예식진에 대해 알려주는 몇 가지 글자. KBS 취재진은 직
접 중국에 가서 예식진 묘지명을 수소문 끝에 취재하고 이 탁본을 국내 최초로 입수했다. <예식진은 누구인가?>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 백제 8대성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라고 역사서에 적
혀있다. 그러나 대대로 좌평을 지냈다는 예씨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예씨가 대당좌위위대장군이
란 정삼품의 고위직을 지낸 백제의 유력 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즉 이 비가 백제 지배층을 연구하는데
큰 가치가 있는 유물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식진이라는 이름. 그러나 우리는
‘예식’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다.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신당서 소정방전> 예식진과 예식. 이 둘은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동일인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일치한다.
약간씩 다른 이름은 단지 표기상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이 사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예식진은 백제의 마
지막 왕 의자왕과 함께 있었던 웅진의 예식 장군임을 알 수 있다. <예식진. 그의 공적은?> 최고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흑치상지. 백제 패
망 후 당에 들어와 예식진과 비슷한 좌위위대장군을 지낸 당나라 명장이다. 그의 묘지명에도 증조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그런데 예식진 묘지명의 경우 그의 조부부터 시작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예씨 집안이 조
부 예다 때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예식진은 백제에서 웅진성의 예씨 집안 고위 장군 출신이었지만,
당나라의 무장으로 출세하게 된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예식진 출세의 비결은 하극상?>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구당서 :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將(장):데리고 가다. 체포해 가다. 즉, 부하인 예식이 왕을 잡아서 투항했다는 의미이다. 부하의 쿠데타, 즉 하극상인 것이다.
예식진 묘지명에 나타나 있는 내용은, 백제 멸망과 관련해 격동의 시대 민첩하게 주군을 바꾸는 예식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에 있는 모든 사료는 바로 의자왕의 충복, ‘예식진’이 출세한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한 후 가락의 자손이 신라에 공헌
1.법흥왕十九年, 서기532년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
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2. 진흥왕十四年,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新州>?, 以阿?<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진흥왕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무력은 가락국주 아들 김무력- 김유신의 할아버지)
*梓州——隋改新州为梓州,治所在今四川三台。宋分西川路置梓州路,以梓州为治所。徽宗重
和时,以梓州为潼川府,梓州路为潼川府路。(신주의 치소는 사천성 삼태이다.)
*梓潼——汉末刘备分广汉郡置梓潼郡,治梓潼(今属四川)。隋废。唐有梓州梓潼郡,即上条所
述。旧梓潼县,西魏改名巴西,隋唐时为绵州巴西(先名金山)郡地。*신주(新州)新丰——汉置新丰县,高帝仿丰邑而作,以慰其父思乡之情,在今陕西临潼东北。
潼川——宋重和时以梓州为潼川府(今三台)。又改梓州路为潼
川府路,辖地在今四川中部。元废路存府。明改为潼川州,清雍正时又为府,民国废府。
*绵州一隋置,治巴西(今四川绵阳东)。元废巴西县入本州。清绵州辖有绵竹、德阳、梓潼等县。民国废,以州为绵阳县。 (수 이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김수로가 건국한 금주이다. 그것도 수가 완곡히 금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옛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금관가야가 지배했던 군현이 아주 농후한 것이다.)
*巴郡——秦以巴国地置巴郡。东汉末刘璋改巴郡为巴西,治阆中(今属四川)。另以江州(今重庆)为治所,置巴郡。南北朝后期为楚州,隋改渝州,又以渝州为巴郡。
*巴——古有巴国,周以前在鄂西,后迁川东。公元前316年为秦所灭。
*巴东——东汉末置巴东郡,治鱼复(今四川奉节东)。南朝梁以鱼复为治所,建信州。隋以信州
为巴东郡。唐改夔州,以秭归、巴东另置归州。以后又曾以归州为巴东郡,夔州为云安郡。
*巴陵—即今湖南岳阳。晋置巴陵县,南朝分长沙置巴陵郡。隋唐巴陵郡即岳州。治所都在岳阳。
3)여기에서 금관가야 금주(錦州)의 치소는 파서(현 사천의 금양 동쪽)로 되어 있다. 파사의
석탑으로 잘 알려진 김수로의 부인 허황후의 전설이 금관가야의 치소와 이름이 같다.(고려
사엔 金州로 되어 있다.) 신라에 복속된 가락국주 김구해왕의 아들 김무력이 신주(사천성
삼태)의 군주로 임명받고 급기야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므로 한반도 김해의
금관가야가 아닌 대륙의 금관가야가 틀림없는 것이다.(김유신은 김무력의 손자로서 삼국통
일에 이바지 하게 되고 나아가 진골의 왕통이 계승된다.)
4)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가지가 글속에 숨어 있다. 곤명호의 글자 해석을 보면
금이 김해로 되어 있다.(金称为金海) 즉 ,금관가야의 김수로가 김해 김씨의 조상을 의미하는
단서인 것이다. 그런데 곤명의 이름을 딴 호수는 당연히 곤명시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왜?
이 곤명호를 북경의 서쪽으로 이동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하기야 중국의 많은 지명이 이동 되었으므로 크게 이상할 바는 아니다. 하나, 곤명호 해설
에 왜 아무런 관계가 없는 金称为金海(금이 곧 김해이다.)를 사용했을 까?
이 용어는 금관성에 있어야 할 내용이 되어야 문맥이 맞는 것이며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을 파 헤쳐 곤명호에 붙이고 사천성 곤명에 있어야 할 곤명호를 저 멀리 하북성 북경서
쪽으로 곤명호를 유배보낸 중국의 저의는 무엇인가?
심지어 곤명의 조그만 연못인 곤명지(昆明池)도 섬서성 서안으로 가져다 놓았다.
명 시절엔 서호로 불리웠다가 청에 이르러 다시 곤명호로 불리우게 된다.
*昆明湖——在北京西郊颐和园内。金称为金海。元引玉泉山及昌平泉水汇入,水量增加,名瓮
山泊。明称西湖。清乾隆时称昆明湖,面积三千余亩。곤명호는 북경 서쪽 신화에 있으며
‘금이 바로김해’이다. 원때는 옥천산에서 물을 대었으며 창평천물이 선회하여 들어왔다.
*昆明池——西汉在今西安西南斗门镇东南洼地开湖,周围四十里。历代几次修浚。唐大和时干
涸为陆。
5) 가락국기 해설(고려사)
高麗史云金州本駕洛國新羅儒理王十八年駕洛之長我刀干汝刀干彼刀干等九人率其民稧飮
望見龜旨峯有非常聲氣就視之有一童子年可十五容貌奇偉衆皆拜賀盡禮童子日就岐嶷身長
九尺九人遂奉以爲王是首露王也國號駕洛又稱加耶後改爲金官國四境東至黃山江東北至伽
倻山西南際大海西北際智異山卽位一百五十八年薨
고려사에서 말하기를 금주(金州)는 원래 가락국이고 신라 유리왕 18년에 가락의 촌장 아도
간, 여도간, 피천간 등 9명이 그들의 백성을 거느리고 마실 것을 즐기면서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나아가 바라보니 한 아이가 있었는데 나이는 15살 정도이고 용모
가 아주 아름다웠다. 무리가 모두 절하고 경하하며 예의를 다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
키가 9척이 되었다. 9명의 사람들이 마침내 왕으로 모시니 이분이 바로 수로왕이다. 국호는
가락이라 하고 또는 가야라 칭하였고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사방의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
산강(현 황하),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에 이르고 서남쪽은 대해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과 접하였다. 즉위한지 158년에 서거하셨다.
6) 편년 ‘가락국기’ 에서
建武二十四年戊申(건무24년무신) 七月二十七日(7월27일)에 九干等(구간등)이 朝謁(조알)할
때에 아뢰기를 “大王(대왕)이 降臨(강림)하신 以來(이래)로 좋은 配匹(배필)을 얻지 못하시었
으니 臣(신)등이 둔 處女中(처녀중)에서 絶妙(절묘)한 자를 宮中(궁중)에 뽑아 드려 配匹(배
필)을 삼게 하소서” 하였다.
王(왕)이 가로되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命令(명령)이요 나의 配匹(배필)로 后(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命令(명령)이니 그대들은 念慮(염려)치 말라”하고 드디어 留天干(유천
간)을 명하여 輕舟(경주)와 駿馬(준마)를 가지고 望山島(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神
鬼干(신귀간)을 명하여 乘岾(승점)<望山島(망산도)는 서울南方(남방)의 섬이요 乘岾(승점)
은 輦下(연하)의 國(국)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忽然(홀연)히 바다 西南(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旗(기)를 휘날리고 北(북)쪽
을 행하여 오는 배가 있었다. 留天(유천)등이 먼저 望山島(망산도)에서 횃불을 드니 앞을 다
루어 下陸(하륙)하려 하였다. 神鬼(신귀)가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아뢰니 王(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어 九干(구간)등을 보내어 蘭橈(난요)와 桂楫(계즙)을 갖추어 맞이하여 곧 모
시고 闕內(궐내)로 들어오려 하였다.
王后(왕후)가 말하되 “나와 너희들은 본래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랴” 하였다.
留天等(유천등)이 돌아와 王后(왕후)의 말을 傳達(전달)하니 王(왕)이 너그러이 여겨 有司(유
사)를 거느리고 闕下(궐하)에서 西南(서남)쪽 六十步(60보)쯤 되는 山邊(산변)에 가서 ?殿(만
전)을 베풀고 기다리었다.
山外(산외) 別浦津頭(별포진두)에서 王后(왕후)는 배를 매고 陸地(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
서 쉬며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선물로 삼아 山靈(산령)에 주었다.
其他(기타) 侍從(시종)하여온 ?臣二人(잉신2인)의 이름은 申輔(신보)와 趙匡(조광)이요 그 아
내 두 사람의 이름은 慕貞(모정)과 慕良(모량)이며 혹은 奴婢(노비)까지 아울러 二十餘人(20
여인)인데 싸가지고 온 錦繡綾羅(금수능라), 衣裳疋段(의상필단), 金銀珠玉(금은주옥), 瓊玖
服玩器(경구복완기)는 이루 헤일 수 없었다. 王后(왕후)가 점점 行在所(행재소)에 가까이 오
매, 王(왕)이 나아가 마저 함께 ?殿(만전)으로 들어왔다.
臣以下(신이하)의 여러 사람은 뜰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가니 王(왕)이 有司(유사)에게 명하
여 ?臣(잉신)의 夫妻(부처)를 인도케 하되 各人(각인)을 各房(각방)에 두고 그 以下(이하) 奴
婢(노비)는 한방에 五六人(오육인)씩 두어 蘭液(난액)과 蕙?(혜서)를 주고 文茵(문인) 彩薦
(채천)으로 자게하고 衣服(의복) 疋段(필단) 寶貨(보화)의 類(유)까지도 주며 軍人(군인)들을
많이 모아 보호케 하였다.
이에 王(왕)과 后(후)가 함께 寢殿(침전)에 계실세(后:후가) 王(왕)께 조용히 말하되...
“나는 본래 阿踰?國(아유타국)의 公主(공주)인데 姓(성)은 許氏(허씨)요 이름은 黃玉(황옥)이
나 나이는 二八(이팔)이라 今年五月(금년5월)에 本國(본국)에 있을 때 父王(부왕)이 皇后(황
후)로 더불어 나에게 말씀하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上帝(상제)를 뵈오니 上帝(상제)의 말씀
이 駕洛國王(가락국왕) 首露(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登極(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
말로 神聖(신성)서러운 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配匹(배필)을 定(정)치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公主(공주)를 보
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울라갔다. 잠을 깨인 후에도 上帝(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父母(부모)를 작별하고 거기로 가라하시었다.
그래서 내가 바다에 떠서 蒸棗(증조)를 구하고 하늘에 가서 蟠桃(반도)를 얻어 ?首(진수)로
외람히 龍顔(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하였다.
王(왕)이 대답하되 “나는 生來(생래)로 자못 神聖(신성)하여 먼저 公主(공주)가 멀리 올 것을
알고 신하들의 納妃(납비)의 청을 듣지 않았더니 지금 賢淑(현숙)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사람의 다행이다.” 하고, 드디어 同寢(동침)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드디어 (그들의)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 合十五人(합15인)에게 각각 쌀 十石
(10석)과 베 三十(30)필을 주어 本國(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八月一日(8월1일)에 (本宮:본궁으로) 還駕(환가)할 때 后(후)로 더불어 輦(연)을 타고 臣夫
妻(신부처)도 다 수레를 타고 漢肆雜物(한사잡물)을 모두 실어 徐徐(서서)히 대궐로 들어오
니 때는 午正(오정)이 되려 하였다. 王后(왕후)는 中宮(중궁)에 처하고 ?臣夫妻(잉신부처)와
私屬(사속)들에게는 空閑(공한)한두 집으로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從者(종자)는 賓?(빈
관) 한채의 二十餘間(20여간)에 人數(인수)를 작성하여 區別(구별) 安置(안치)케 하고 날마
다 풍부한 飮食(음식)을 주며 그들의 싣고 온 珍物(진물)은 內庫(내고)에 두어 王后(왕후)의
四時(사시) 費用(비용)을 삼게 하였다.
一世(1세), 始祖首露王(시조 수로왕),
姓金氏諱首露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建國于駕洛 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 春秋一百五十八
성은 김씨이고 휘는 수로로써 한나라(후한) 광무(1대 황제)의 건무(연호) 18년(서기 42년) 나라를 세워 가락이라 하였다. 헌제(14대 황제)의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 24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였다.
葬納陵在金海府內三百步龜旨峰東北隅子孫世世享祀今 上壬子遣官致祭 命建祠如崇德殿例官修祭祀始置殿監
장례는 김해부내의 구지봉 동북쪽으로 300보의 거리에 있는 납릉에 장사지내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 임금(철종) 임자(1852)년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숭덕전(박혁거세왕을 모신 사당)의 예에 따라 사당을 지으라고 명하여, 예관이 제사를 지내고 비로소 전(사당)의 관리자를 두었다.
妃普州太后許氏諱皇玉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薨春秋一百五十七
왕비는 보주태후 허씨로서 휘는 황옥이고 한나라(후한) 영제의 중평6년 기사(189)년 3월 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였다.
葬龜旨峰子坐午向原南 距王陵二里許每歲春秋自 朝家推擇日字香室磨鍊封香祝本府使及陵監迭相參祭
장례는 구지봉의 자좌(子坐)로서 오시방향(午向)의 언덕에 지냈으며, 왕릉과는 남쪽으로 2리정도 떨어져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조정에서 날짜를 가려서 택하여 향실에서 향과 축문을 준비하여 올리고, 김해부사와 능의 관리가 교대로 제사에 참석하였다.(* 김해대동보에서)
다. 지형학적으로 본 가락(金冠)의 건국과정
1. 한반도에서 서기 42년에 흉노의 일파인 김수로가 건국했다는 금관가야는 지형학상 잘못 계산된 것으로 현, 사학자들의 다수설은 중국의 5호16국시대를 거치면서 흉노일파가 자연스레 한반도로 유입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금관가야의 건국은 마땅히 대륙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륙에 위치한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했다는 것이 지형학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사학계에서 숙제로 남겨 놓은 것인데 그 숙제는 동신라격인 대륙신라인 것이다. 북부여계의 흉노족인 김일제의 후손이기에 신라의 건국이 빨랐던 것이다.
가락(駕洛)의 가(駕)는 북부여계의 구가(狗加),우가(牛加),저가(猪加),마가(馬加)와 고추가등과 같은 부족이다. 김수로가 세운 가락(駕洛)의 가(駕)는 ‘성’ 가로 마가(馬加)와 같은 종족이며 한문으로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 가(駕)는 말 馬에 더할 加가 위에 붙은 것이다.
우가, 저가는 농경생활의 흉노족이라면 마가(馬加)즉 ,가(駕)족은 수렵,기마종족인 것이다.
변한의 북방일부는 신라에 복속되고 남부에 산재한 아도(我刀),유천(留天), 여도(汝道),
신천(神天),피도(彼刀),오천(五天),축도(丑刀), 신귀(神鬼), 유수(留水)의 9부족이 있었다.
처음 도읍지는 구야국(狗耶國)으로 하였고 국호는 가락(駕洛)으로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개의 ‘구’(狗)를 사용한 것으로 북부여게의 구가(狗加)와 같은 것이고
국호 또한 마가(馬加)와 같은 것으로 가(駕)이다. 이런 것을 살펴 볼 때 김수로 왕통은 북부여
와 같은 것이며 나아가 김수로는 북방 흉노의 지파로 보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김일제의 후손인 신라가 먼저 감숙성에서 건국하여 변한의 북방 흉노부족
을흡수하게 되는 것이고 나중에 남하하여 건국한 김수로는 남방 진한부족을 통괄하여 국가
를 형성하게 되며 신라에 복속된 뒤에도 다스리던 그 땅을 식읍으로 분봉받고 진골로 신라의
왕통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가야연맹제는 왕의 친형제들이 여러 부족들을 통솔하
여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기에 운남지방과 귀주성,광서,호남,광동성등지에(남방오랑캐) 여러 가야(남방가야)가 형성되는 것이며 신라의 진흥왕에 이어 문무왕 (20년)은 흩어져 있는 대륙의 남방가야를 복속하고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2. 금관(錦官)과 금관(金冠) 그리고 금관(金官)의 고찰
고서엔 가락을 가라(加羅) ,금관(金冠)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도읍지가 금성이니 당연코 가락국을 쇠금을 붙여서 金官으로 표기한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금성으로부터 벼슬을 하사 받았으므로 금관으로 표기했을 수도 있고 김수로의 성을 따서 금관(金官) 으로 표기 했을 것이다. 순수한 동음이자(同音異字)의 표현인 것인가?
1,살펴보면 금관성(金官城)과 금관성(金冠城)은 확연히 다르다.
전자는 ‘金(김)의 벼슬을 한 성’ 으로 한문의 음역이 되고, 후자는 ‘황금관을 쓴 성‘ 이 되는 것
이다. 다른 사서엔 금관(金冠)으로 나온다. 그런데 중국의 고지명 대조엔 비단 금(錦)으로 표기되어 금관성(錦官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음역은 ’비단관리가 머무는 성‘ (직조국) 이다.
그러면 어느 기록이 맞는가? 신라를 중심으로 사서를 기록한 김부식은 응당 신라로부터 벼슬을 하사 받고 식읍을 받으니 ‘김씨가 벼슬을 한 성’(구해왕은 상대등에, 아들 무력은 각간에 임명된다)으로 기록되어 금관성(金官城) 기록이 한문 음역에 맞는 말이 된다.
그런데 1973, 1974년도에 출토된 신라의 금관을 보면 북방스키다이 표시의 토탬 새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계열인 김수로의 국호는 금관(金冠)이 맞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고지명에 무엇인가 은폐된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인가? 비단(실크)이 생산된 시기는 BC 2640년경 중국의 황제비 ‘시링치’가 누에를 발견하여 시작된 것으로 실크로드(비단길)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고고학계에서 밝히고 있다. 비단길은 감숙성 난주를 거쳐 무위(고비사막의 접경)를 시작으로 하여 서역에 이르는 통상길인 것이다.
2.錦(금)은 급취편에서 織絲爲文也(직사위문야)라고 하였으며, 석명에서는 金也(금야), 作用
之用也(작용지용야), 重於價如金(중어가여금), 故其字制字, 帛與金也(백여금야)라 하였다.
뜻을 풀이하면 금은 견의 문양직물이며, 원래 금(錦)은 금(金)과 백(帛)의 합자이고, 그 가
치가 금(金)과 같다고 하여 금직물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비단은 그 가치가 금과 같고, 비단 ‘백’ 또한 ‘금’이다. 란 것을 이해 한다면 금(錦)은 곧 금
(金)이니 금관(金冠)이 바로 금관(錦冠)이 되는 것으로 금관성(錦官城)이 표기되는 것이
다.
사실 감숙성은 흉노가 머무르던 땅이며 실크로드가 열리는 시기에 감숙성밑의 사천성
성도에 가락국이 건국한 것으로 보아 서역,즉 파사(페르샤)와의 무역거래가 성행하였고 차
츰 흉노가 남하하매 이웃의 사천성 성도인 가락국내의 주변 군현을 금주(錦州)라 불렀으며
그 치소를 파서(巴西)라 호칭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래의 직조국에 대한 자료는 찿을 수 없으나 명대의 직조 기록을 보게 되면
明制, 兩京織染, 內外皆置局. 內局以應上供1), 外局以備公用. 南京有神帛堂、供應機房, 蘇、
杭等府亦各有織染局, 歲造有定數.
명의 제도는 양경의 직염국을 내외 모두 설치하였다. 內局은 上供에 응하였고 외국은 公用
을 준비하였다. 남경에는 神帛堂과 供應機房이 있었고 소주, 항주등 府에는 각각 織染局이
있었는데 歲造에는 定額이 있었다.
洪武時, 置四川、山西諸行省, 浙江紹興織染局. 又置藍靛所於儀真、六合, 種青藍以供染事. 未幾悉罷. 又罷天下有司歲織緞匹. 有賞賚, 給以絹帛, 於後湖置局織造. 永樂中, 復設歙縣織染局. 令陝西織造駝. 正統時, 置泉州織造局. 天順四年遣中官往蘇、松、杭、嘉、湖五府, 於常額外, 增造綵緞七千匹. 工部侍郎翁世資請減之, 下錦衣獄, 謫衡州知府. 增造坐派於此始. 孝宗初立, 停免蘇、杭、嘉、湖、應天織造. 其後復設, 乃給中官鹽引,, 鬻於淮以供費。
홍무제 때 사천, 산서 여러 행성 및 절강, 소흥에 직염국을 설치하였다. 또 남정소를 儀眞, 六合에 설치하고 靑藍을 심어서 염색하는 일에 공급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없어졌다. 또 천하의 有司들이 해매 짜는 緞匹을 없앴다. 상으로 하사함이 있으면 絹帛으로써 주었는고 後湖에 직염국을 설치하여 직조하였다. 영락년간에 다시 흡현에 직염국을 설치하였다. 섬서로 하여금 낙타 모직물을 직조케 하였다. 정통년간에 泉州에 직조국을 설치하였다. 천순4년(1460)에 환관을 보내어 소주부, 송강부, 항주부, 가흥부, 호주부 5부에 가서 정해진 액수 외에 綵緞 7천필을 늘려 직조하게 하였다. 공부시랑 翁世資는 줄일 것을 청하였으나 錦衣衛의 옥에 하옥당하고 형주지부로 좌천되었다. 늘려 직조하고 활당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孝宗(弘治帝)가 처음 제위에 올랐을 때 소주, 항주, 가흥, 호주, 응천부의 직조를 멈추고 면하였다. 그 후에 다시 설치하여 환관에게 염인을 주어 회수에 팔아서 비용을 공급하게 하였다.
正德元年, 尚衣監言:「內庫所貯諸色紵絲、紗羅、織金、閃色,蟒龍、斗牛、飛魚、麒麟、獅子通袖、膝襴,並胸背斗牛、飛仙、天鹿, 俱天順間所織, 欽賞已盡. 乞令應天、蘇、杭諸府依式織造。」帝可之. 乃造萬七千餘匹. 蓋成、弘時, 頒賜甚謹. 自劉瑾用事, 倖璫陳乞漸廣, 有未束髮而僭冒章服者, 濫賞日增. 中官乞鹽引、關鈔無已, 監督織造, 威劫官吏. 至世宗時, 其禍未訖. 即位未幾, 即令中官監織於南京、蘇、杭、陝西. 穆宗登極, 詔撤中官, 巳而復遣。
正德元年(1560), 상의감이 말하기를 “내고에 저장된 바인 각종 紵絲, 紗羅, 織金, 閃色과 蟒龍, 斗牛, 飛魚, 麒麟, 獅子通袖, 膝襴과 아울러 斗牛, 飛仙, 天鹿을 胸背한 것은 천순년간에 직조한 바이나 하사품으로 이미 써버렸습니다. 응천, 소주, 호주 등 여러 부로 하여금 규범에 따라서 직조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에 만 7천여필을 직조하였다. 대개 성화제, 홍치제 때 하사하는 것이 매우 신중하였다. 劉瑾이 집권한 때로부터 총애받는 환관이 요청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서 머리를 묶지 않고 분수를 지키지 않고 章服을
하는 자가 있고 함부로 상을 내리는 것이 날마다 늘어났다. 환관이 염인과 關鈔를 청하는 것이 끝이 없었고 직조를 감독하고 관리를 협박하였다. 세종(가정제) 때에 이르러서도 그 화가 그치지 않았다. 즉위한지 오래지 않아 즉시 환관으로 하여금 남경, 소주, 항주, 섬서에서 직조케 하였다. 목종(융경제)가 登極하여 환관들을 불러 들였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보내었다.
萬曆七年, 蘇、松水災, 給事中顧九思等請取回織造內臣, 帝不聽. 大學士張居正力陳年饑民疲, 不堪催督, 乃許之. 未幾復遣中官. 居正卒, 添織漸多. 蘇、杭、松、嘉、湖五府歲造之外,又令浙江、福建, 常、鎮、徽、寧、揚、廣德諸府州分造, 增萬餘匹. 陝西織造羊絨七萬四千有奇, 南直、浙江紵絲、紗羅、綾紬、絹帛, 山西潞紬, 皆視舊制加丈尺. 二三年間, 費至百萬, 取給戶、工二部, 搜括庫藏, 扣留軍國之需. 部臣科臣屢爭,皆不聽。末年,復令稅監兼司, 姦弊日滋矣。
만력7년(1579), 소주, 송강이 수재를 당하여서 給事中 顧九思등이 직조환관들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으니 황제가 허락지 않았다. 대학사 장거정이 힘써서 흉년인 백성들의 피폐함을 진술하여서 제촉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허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환관을 보내었다. 장거정이 졸하니 직조를 더하는 것이 점차 많아졌다. 소주, 항주, 송강, 가흥, 호주 5부는 歲造 외에 또 절강, 복건, 常、鎮、徽、寧、揚、廣德 등 여러 부와 주로 나누어 만들케 하니 만여필이 늘었다. 섬서는 캐시미어를 7만 4천여필을 직조하였고 남직예 절강의 紵絲、紗羅、綾紬、絹帛와 산서, 潞의 紬는 모두 옛 제도에 비해 장척을 더하였다. 2, 3년간에 비용이 백만냥에 달하였고 호부와 공부 2부에게 공급받고 창고에 모았으며 군대와 국가의 수요를 착취하였다. 각 부의 장관과 科道官은 여러 차례 직언하였으나 모두 들어지지않았다. 말년에 다시 세와 감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니 교활한 속임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明初設南北織染局, 南京供應機房, 各省直歲造供用, 蘇、杭織造, 間行間止. 自萬曆中,頻數派造, 歲至十五萬匹, 相沿日久, 遂以為常. 陝西織造絨袍, 弘、正間偶行, 嘉、隆時復遣, 亦遂沿為常例.
명 초에 남북에 직염국을 설치하였고 남경에는 機房에 공급하였고 각 성은 직접 세조를 공용하였고 소주와 항주의 직조는 행해졌다가 멈춰졌다가 하였다. 만력년간부터 연속으로 직조에 파견하였는데 해마다 15만필에 이르렀고 답습한 날이 오래 되어 마침내 상례로서 되었다. 섬서는 絨袍를 직조하였는데 홍치, 정덕년간에는 간혹 행해지다가 가정, 융경년간에는 다시 파견하여 또한 마침내 답습한 것이 상례가 되었다.
다시, 검토해 보면 중국에서 금(錦)은 금(金)으로 동일시하게 취급했기에 錦이 바로 金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금관성(錦官城)이나 금관성(金官城)은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금관가야의 금관성(金官城)이 바로 중국 사천성 성도의 금관성(錦官城)인 것이다.
3,아마도 금관성 지명해설에 金称为金海(금이 곧 김해이다) 를 놓게 되면 한국에서 금관가야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륙신라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서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 하면 앞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천성의 곤명호를 멀리 북쪽의 하북성 북경 서쪽으로
유배시켜 찿지 못하게 지명이동시켜 방해하였으며, ‘금이 김해이다’의 용어를 금관성에서 파헤쳐 여기 곤명호 해설에 끼워넣은 것으로 볼 때 중국의 공작이 맞는 것이 된다.
아마도 조작 되기전의 원문을 추측해보면 “錦之金也, 帛與金也(백여금야),金稱爲金海”로
된다.
김해의 어원에 대해 알아보면 중국의 사서엔 동해,남해,서해,북해가 있는데 김해는 없다.
사실 지형학적으로 보면 중국은 발해만인 서해와 남중국해인 남해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해를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해’ 는 곧 ‘바다’라는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김해”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금(金)은 방위상 서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김해”는 서쪽에 있는 대륙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다.
곤명호 해설에 나와 있는 ‘금이 곧 김해이다.’의 의미는 서쪽의 광활한 대륙을 의미하는 것이며 ‘흉노의 지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와 더불어 김해김씨의 후손들은 서쪽지방에서 온 흉노지파의 자손이란 귀결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실로 금강(錦江-양자강)이 흐르는 지류에 錦官城이 있으며 지금의 사천성 성도이다. 그중 셋째 아들인 무력은(김유신의 할아버지) 신주(新州)의 군주로 임명받는다.(가락국기와 삼국유사엔 둘째 아들로 나온다.) 이 신주는 사천성 삼태 부근이다. 신라가 백제의 동북면을 공격하여 확장해 만든 주가 신주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은 신주의 김무력 군사에게 살해된다. 사천성의 조그만 국가인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되는데 같은 사천성에다 확장한 사천성 삼태의 군사로 강력한 군사를 가질 수 있었다.
4.상세히 살펴보면 관산성 전투에 아들의 전투를 격려하고자 출발한 성왕이 매복된 신라 군사
에 의해 사망함으로서 지명에 그 슬픈 사실이 녹아 있음이니 신주에 (以慰其父思乡之情-- 위
로한 그 아버지의 정을 생각하여 만든 고을 이름)기록된 바 더 무엇으로 설명하고 증거를 대야 하는가? 금관가야는 중국대륙의 사천성이란 것이 명확해 진 것이다.
*신주(新州)新丰——汉置新丰县,高帝仿丰邑而作,以慰其父思乡之情,在今陕西临潼东北。
潼川——宋重和时以梓州为潼川府(今三台)。又改梓州路为潼
또한 신라 시조는 흉노에서 큰 벼슬을 한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밝혀졌기에 역시 김수로왕은
같은 김일제의 흉노지파인 것이다. 같은 종족이다 보니 나중에 김수로 계열의 진골이 신라의 왕통을 자연스레 이어받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집필자 김부식은 중국연호를 법흥왕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무라고 있다.
(독자 연호 사용)후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은 아주 잘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대모화 사
상이 뿌리 박힌 사람이 어떻게 역사서를 올바로 집필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고려시대엔 김일제도 몰랐을 것이고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감추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해 보면 같은 흉의 일파인 김수로왕이 흉노족이었다 하더라도 중국이 아닌 한반도의 김해로 비정하였을 것이다.
라. 금관가야와 신라와의 관계 설정
1) 金城——今甘肃兰州,古称金城。汉置金城县,在今兰州西北;又宜金城郡,治允吾(今永靖
西北),辖境除今甘肃兰州以西,兼有青海一部分。汉末以后西境逐渐缩小。前凉移郡治于子
城,即今兰州地。隋唐为兰州金城郡。曾属吐蕃。宋元丰年间再置兰州。明一度降为县。清设兰州府,以府治为皋兰县。
金陵——楚灭越后置邑名金陵。五代吴升异州为金陵府,南唐为江宁府,以后金陵为南京的别
称。唐人亦称今镇江为金陵。
신라의 처음 수도는 서라벌(徐羅伐)인데 이 표기는 훗날 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 같습니다.
서라벌로(西羅伐),내지 소라벌(蘇羅伐)로 표기 되어야 맞습니다. 同音異字의 현상이거나 음
차를 잘못하였던 것입니다. 중국 대륙에서 보면 서쪽에서 펼쳐 일어난 국가로 당연히 서라
벌(西羅伐)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사가(史家)가 신라를 백제의 경계인 산동에서 출발
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산동성에 있는 서(徐)로 번역한 것입니다. 서는(徐) 고을이름 서로
서 서주 즉, 산동에서 신라가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하나, 삼국중 제일 먼저 건국한 신라는
북방흉노족의 일파로 맞지 않는 이치입니다.
사실 백제는 진평2군에서 건국하여 한성과 웅진성, 사비성으로 이어지는 산동을 그 무대로
하여 과거 제와 노나라의 영토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신라는 더 이상 동쪽으로
올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일찍이 신라 왕손의 비조인 김일제(BC135-85)는 북방의 흉노족으로 한무제때 투후벼슬을
7대를 전하여 내려 왔다. 그러기에 차츰 그 부족들이 남으로 내려와 감숙성에 자리 잡았으
며, 신라 조분왕(231년) 때에 감문국을 토벌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 명실
상부한 감숙성의 큰 부족국가인 감문국을 토벌하여 감숙성 남부를 장악하였다고 보아야 합
니다. 사실 진(秦)나라는 감숙성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이며 신라는 진시왕의 폭정에 못이겨
나온 진의 유민들과 북방 흉노족으로 국가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환단고기에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국가가 형성되
기전의 부족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고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봉지를 받는 후가 5명이
나옵니다. 고조선의 역적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한 무제로부터 고조선 영토를 식읍으로
분봉받아 통치하게 되는 5제후(侯)인 것입니다(우거왕 아들 장,이계상 삼,왕겹,한음,최).이 5
제후들은 발해지역과 산동,산서, 하남성 일부지방까지 통치하게 되지만, 곧 사분오열된 속에
서 많은 소부족국가가 생겨나고 신라도 골격을 갗춥니다만, 요동의 진평2군을 차지한 백제
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신라는 이동을 하여 감숙성에서 첫 수도를 금성으로 정하고 건
국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일제의 후손이 건국하였으므로 소호 금천씨 후손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의 성을 따서
중국에선 서라벌을 금성으로 본 것이기도 하고 알타이가 중국표기론 금이 되는 것입니다.
(라(玀)족 -- 운남,귀주, 사천지방에 살던 오랑캐만족으로 ‘라’ 라고 부른다.)
중국이 부르는 북방 오랑캐만족으로 공자는 6적으로 구분하였다.
적(狄)--북방 오랑캐 민족으로 ‘적’이라 불렀다.
일윤(一狁--한대이후 흉노라 부름)---험윤(玁狁)-周 , 북적의 이름--흉노(匈奴)
*공자는 예기(禮記)에서 4夷(이) 8蠻(만) 5戎(융) 6狄(적)이라 구분하였습니다.(23 오랑캐)
중국 고지명 대조를 보면 금성은 감숙성 란주 서북으로 나와 있다. 고칭 금성이다. 수,당시절엔 토번에 의하여 복속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하나,후고구려를 자칭하는 양길이 9세기 말 신라의 영토인 감숙성(북원경)에서 도읍을 정하고 봉기하고 있다. 중국이 고의로 감추는 것이다.)
*云南——云南省旧以在云岭之南得名。今云南祥云县东南云南驿,西汉曾设云南县。蜀汉曾设
云南郡,以云南县为治所。云南古有滇国等,唐为南诏,宋为大理。元置行中书省。明置云南
省。운남엔 고래로 진국등이 있었다, 즉 진한을 말함이다. 진(辰)-眞-진(滇)으로 표기된 것
으로 본다. 양자강이 흐르므로 자연스레 삼수변이 붙어 된 것이다. 그 진국등은 남방오랑캐
족인 것이다.(唐为南诏--당은 남방오랑캐라고 불렀다.)--- 진국12국중 구야국(김해가야)
2, 환단고기에서의 파소(婆蘇)의 의미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十三 岐祥然夙成有聖德 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斯盧 (사로)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帝室(부여 제실)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간)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桓檀古己 -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231p ~ 232p
이것은 예수의 어머니 즉 ,처녀인 성모마리아가 예수를 탄생시켰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신화
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문해석을 그대로 빌리면 흉노, 즉 페르샤로부터 온 것을 암시하고 있
다. 파사와 파소는 같은 음이다. 즉 파사는 페르샤의 한문 음을 빌린 것으로 신라 태생의 흉노
를 말하는 것이며 사라가 서라로 발음되듯이 소벌은 서벌로 음차되며 오랑캐 라족이기에 서벌에다 ‘라’를 끼워서 서라벌이 된 것이다. 김부식은 사기에서 소(蘇)는 북방계열이라 인식했던지 일부러 소를 빼고 서(徐)로 지칭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북방 흉노족인 신라의 비조인 김일제가 있었다고 밝혀진 것은 최근이다. 파사는 지금의 페르샤와 그 일부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페르샤는 중국에선 돌궐로 투르크족등 북방 오랑캐라 하였으며 투르크족은 터어키이다. 같은 흉노 일파이다.
3. 흉노와 파사석탑
고고학계에선 흉노를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그 하나는 우랄산맥의 스키다이 문화와 알타이 산맥의 흉노문화로 보고 있다. 일찍이 고고학계는 한반도 경주에서 1973년과 1974년에 발굴된
적석목곽분은 유라시아 북방초원지대의 흉노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장품인 금관도
스키다이 계통의 샤머니즘 토뎀에서 얻어지는 새 모양의 장식이 같다고 하였다. 또한 1998년 중국의 언론에서 감숙성과 산서성에 살고 있는 김씨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이라고 밝혀졌다.최근에 발견된 문무왕 비문에서 투후 김일제가 조상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신라를 떠나 조부때부터 당나라에 정착하여 살았던 김씨 부인의 묘비명이 중국 서안의 비림박물관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김일제가 김씨의 조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 왕후가 파사석탑을 가지고 왔다던 파사석탑은 가락의 정통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후대에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파사는 파소이고, 흉노인 것이다. 환단고기에 나타난 파소는 바로 신라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파소가 이민족이 아니고 원천이 스키다이 부여 계열로 본 것이며 부여는 부여인 고추가의 불가리아와 이란과 카자흐스탄,키르기르스탄,이라크,내몽골등을 포함한 대제국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북부여의 한 갈래가 고구려이다.여기에선 파사즉, 파소가 전설이나 설화로 내려 온 것이다. 즉, 신라는 환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서편 우랄산맥의 사카문화인 이란,페르샤등 흉노는 같은 방계 혈족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금관가야(金冠伽耶)의 김수로는 신라가 태생될 무렵 흉노의 일파가 남하하여 다시 건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중에 김수로왕계인 김씨 즉, 진골이 자연스럽게 왕통을 이어 받는데 지증마립간부터 법흥왕, 진흥왕, 무렬왕, 문무왕등에 이르기 까지 신라 김씨의 왕통을 이어 갔던 것이다. 같은 혈족, 종족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고조선 3세 단군 가륵때(BCE 2175) 열량의 욕살이던 ‘삭정’을 약수지방
(현 감숙성 장액현)에 유배했다가 용서하여 그 땅에 분봉한것이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흉노는 단군30대에서 37대까지 조공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弱水(약수)——古人常称不通舟楫,赖皮筏交通的河流为弱水,故历代被指为弱水的河流很多。如甘肃山丹河与下游山丹、甘州二河合流后的黑河,即《禹贡》所说的弱水。
사학계에선 BC 5세기경 북방기마민족을 주대 때는 ‘험윤’이라 호칭했고 통칭 ‘적’이라 했는데 한에 이르러 ‘흉노’로 통일하게 된다고 한다. 흉노족은 한과의 투쟁을 통해 5호16국 시대 전,후에 150년간 중국의 역사에 오르내리게 되며 그 일파는 한반도로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석탈해왕에 이은 파사마립간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이런 과정을 보면 대륙의 서신라와 한반도의 동신라가 형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를 보면 고구려 9대 고국천왕 13년(191)때 을파소(乙巴素)가 있다. 빈민을 구제한 법으로 진대법(조적법)을 시행한 국상이다. 여기에서도 북방의 냄새가 난다. 파소는 파사이다. 을파소란 갑,을로서 하나의 북방계열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이다. 허황후가 가져 왔다던 파사의 석탑은 훗날 지어낸 이야기로 북방 김수로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남방에서 온 허 황후에 대한 백성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고 황후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김수로의 정통성은 파사(북방흉노)이다. 중국 고지명에 나오는 금주(錦州) 와 파군(巴郡)등을 통하여 파사를 재삼 확인하였다. 금관성에서 다스리던 지역의 금주가 파사로 되었음에 가락국은 어김없는 흉노 혈통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허황후 입도를 보면 진해 용원(현 창원시)에 타고 왔다던 돌배가 전설로 내려온다. 용원에서 가락까지는 반나절도 안되는 이웃이다. 가락국기를 보면 7월 27일에 배가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고, 공주를 기다려 천막을 치고 만나서 그곳에서 2일통안 동침을 하게 되며 8월1일 정오에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김수로와 허황후간의 남은 3일이란 기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 사천성 곤명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성도에서 파견된 김수로의 신하를 만나고 출발하였고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오므로 여러 날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와 고지명인 금주(錦州),금관성(錦官城),파군(巴郡)등을 통하여 흉노일파가 현 감숙성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 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금관가야(가락국)의 위치가 1,500년 만에 완전
히 벗겨지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는 가락국 군대가 대륙으로 원정 올리 없으며 삼국 중 제일
먼저 건국한 신라가 한반도 동쪽 모퉁이에 존재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신라와 금관가야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실과 바늘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금관가야가
사천성 성도에 있었으며 신라가 대륙에 있었기에 중국 천진을 잇는 발해만으로 나오는 패수
이남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 진골로서 신라의 왕통을 잇게 되는 것이다.
4.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일까?
KBS 1TV 22일 '역사추적'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星漢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KBS1 TV는 '역사추적'을 신설하고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를 풀어보는 2부작 '문무왕릉의 비밀'을 22일 오후 8시 10분 첫 방송한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비문의 암호는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림의 금궤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몰락한 흉노의 자손임을 내세운 신라 김씨 왕족. 북방의 오랑캐 족으로만 여겼던 ‘흉노족’의 후예들이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대제국을 세웠던 흉노의 후예들, 그들은 왜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암호와 의문들을 따라가는 미스터리 역사여행은 2편(29일 오후 8시 10분)에도 이어진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마, 정리된 결론
1)김수로가 내 세운 가락(駕洛)의 국호가 북부여계 ‘마가’(馬加)인 흉노의 지파로 밝혀졌고(신라의 방계)
2)곤명호 해설에서 “금이 곧 김해” (金称为金海)라고 하여 김해 김씨의 시조와 김해는 서쪽 대륙이며 흉노일파라는 것을 밝힌점
3)곤명의 고지명 해설에서 드러난 ,入南诏后仍有昆明城之名이라 하여 남방오랑캐 왕가의
공주(왕비-후)가 들어와 의지했던 지명이라고 밝힌 점
4)성도(成都)는 성을 이루었다는 뜻의 지명으로 김수로왕이 서기43년에 시작하여 44년에
끝마쳤다는 것이 가락국기에 나와 있다.
5)금관성(錦官城)의 고지명 해설에서 后入遂将锦城 으로 황후(공주)가 들어올 때 순응하매 데리고간 금성이란 해설에서 허황후의 왕성 입도를 재확인 시키는 것이다.
6)법흥왕 19년(532년)에 금관국주인 아버지와 함께 투항하여 김무력은 각간이란 벼슬을 받았으며 나아가 신라는 진흥왕 14년에 아찬 벼슬과 함께 백제에게서 빼앗은 동북면을 포함한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은 군주를 임명받는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관산성(管城)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사비천도 538년)을 김무력 군대가 살해하게 된다.
*진흥왕 15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다.--- 서기550년 정주(河南성 鄭州)의 관성(管
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가 신주(新州)군주 김무력의 군사
를 데려와 관산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관산성은 하남성 정주시에 있다. )
○진흥왕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
德>?伊?<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
都刀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
馬無反者.
7)*绵州一隋置,治巴西(今四川绵阳东)。元废巴西县入本州。清绵州辖有绵竹、德阳、梓潼等
县。民国废,以州为绵阳县。 (수 이전의 기록이 없는 것은 그 이전에 땅 임자가 없었다는
것으로 김수로가 건국한 금주이다. 그것도 수나라가 완곡히 금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수는
5세기의 국가로서 금주의 옛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일찍이
금주는 흉노일파가 다스리던 땅인데 중국이 조작한 것으로 보여지며 금관가야가 지배한 군
현이 아주 농후한 것이다.)
고려사에선 김부식이 금관(金官)으로 부르듯이 금주(金州)로 부르고 있다. 김해의 주인이
금주를 다스렸던 것이다.
*巴郡——秦以巴国地置巴郡。东汉末刘璋改巴郡为巴西,治阆中(今属四川)。另以江州(重庆)今
为治所,置巴郡。南北朝后期为楚州,隋改渝州,又以渝州为巴郡。
*巴——古有巴国,周以前在鄂西,后迁川东。公元前316年为秦所灭。
여기에서 보면 금관성이 김수로의 왕궁으로 보면 금주는 주변을 다스리던 군현의 이름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 금주의 치소가 파사이다. 파서(파서)는 한문음을 차용하면 파사가 되며
파사는 페르샤등을 뜻하며 북방흉노를 일컷는 것이다. 파(巴)국과 파군이 사천성에 나오는
데 파국은 고래로 부터 있었던 나라로 파군은 사천에 속한다고 하였다. 파국은 파사국으로
흉노가 세운 부족형태의 소국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락국의 후손들은 진골로서 지증왕,법흥왕,무열왕,문무왕등으로 신라 왕통을 이어간다.
8) 구지가(龜旨歌)와 구지봉(龜旨峰)은 구자국(龜玆國)에서 유래되었다.
구지가(龜旨歌)와 구지봉(龜旨峰) 은 서로 맞물려 있다. 옛 서역고국에 구자(龜玆)국이
있었다. 자(玆)는 나라이름 '자'로 해석되고, 자(滋)로 통용되기도 한다고 했다.
이 滋는번식할 '자, 자랄 '자'로 해석된다. 신강 위구르 자치구 고차(庫車)일대에 있었던 나라이었다. 지(旨)는 천자의 뜻으로 즉, 거북의 천자, 거북나라가 되며 구자국(龜玆國)인 것이다. 거북을 토템으로 하는 나라였다, 같은 토댐을 사용하는 나라는 같은 혈통이며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사학계의 중론이며 문화인류사 측면에서도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구자국은 김수로의 모국인 것이다.
그 구자국은 천산산맥밑의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돌궐이 있었던 땅이었다.
오늘날의 김해는 신라 문무왕이 금관소경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김해소경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태조23년 김해부로 고쳤고, 조선 세종대에 口子를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신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이 口子는 龜玆(구자)의 동음이자의 표현인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졌던 龜玆(구자)를 口子로 표현 한 것이다.
*安西四镇——唐安西都护府所属 龟兹、疏勒、于阗、碎叶四镇。后碎叶属西突厥,乃以焉耆为四镇之一。당의 서안도호부 소속에 구자국이 4진의 하나로 나온다.
*安西都护府一一640年唐罩,初治西州(今新疆吐鲁番东),后移龟兹(今库车),曾移碎叶,692年还治龟兹。贞元年间府治被吐蕃攻陷。640년 신강성에 설치한 당의 안서도호부는 구자국을 지금의 고차(庫車)로 옮기게 되며 692년 치소를 서주에서 구자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강위구르자치구 중에서 龟兹國의 중요성과 그 역할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고차(庫車)지역에 차사국(車師國)과 사차국(沙車國)이 있었다. 그런데 차사국은
한나라대에 별칭 ‘금만’(金满)이라는 성을 축성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북방흉노족의 특징인
금(金)을 앞세우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괘(金匮) -(금상자-김수로가 알에서 나왔던 상자)의 설명엔 청나라에 이르러 설명이 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옛지명 해설은 빼버린듯 하다.
금창(金阊)은 ‘금대궐의 창’이란 뜻인데 소주의 별칭이라고 되어 있다.
이 소(蘇)는 한단고기에 나오는 파소의 소와 같은 이름이다. 연구가 되어야 할 이름이다.
*金满——汉在车师后部建城名金满,即唐庭州治所所在。
*金匮——清雍正二年(1724年)分无锡置金匮县。民国仍并入无锡。
*金阊——苏州的别称。旧时阊门外有金阊亭。
金微——唐羁縻都督府名,在今蒙古国肯特省一带。
金源——女真语谓“金”为“按出虎”。金以按出虎水(今哈尔滨东南阿什河)发源于会宁府,称为“金源”。
김수로는 건국시에 구지가(龜旨歌)를 통하여 본인이 신강위구르에서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김수로는 구자국의 혼란기에 비단보자기(금괘)에 싸여 남쪽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김수로는 자기의 모국인 그 구자국(龜玆國)을 잊지 못하였고 사후에 구자봉 즉, 구지봉(龜旨峰)에 안장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안장된 그 터를 구지봉으로 후세 사람들이 불러주기를 원하여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것이다. 구자봉이나 구지봉은 같은 맥락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구자국의 자(玆)를 파해 해보면 초두변에 실사변이 양쪽에 붙어있다. 뽕나무에서 실을 뽑아내는 글자인 것이다. 어쩌면 우수한 비단직조 기술을 지닌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은 안서도호부에서 신강내륙에 있던 구자국을 고차(庫車)지방으로 옮기게 하였고 , 그 사람들로 하여금 비단을 직조시켰는지 알 수 없다. 금관성(錦官城)은 구자국의 우수한 직조기술을 대변하는 성이다. 이렇게 구자국과 구지봉, 구지가를 연결시키면 김수로는 어김없이 신강 위구르쪽에서 온 것이 되는 것이다. 과거 신강위구르족은 당연히 북방흉노 일파였다.
고선지 장군은 747년 안서절도사가 되고 751년 이슬람제국의 30만 호라산군대와 전투하였
는데 돌궐의 반란으로 패배하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로 신강 위구르를 포함한
이북은 이슬람권에 들게 되며 다시는 한족이 회복하지 못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 발굴된 각종 비문과 자료등을 종합해 볼 때 신라김씨 왕족은 흉노의 일파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 흉노일파인 가락국은 왕통승계등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로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락국인 금관가야는 결코 한반도 김해에 있지 않았다.
신라가 대륙에서 건국하였고 삼국의 각축전을 통하여 대륙에서 삼국통일을 이루었기에 금관가야인 가락국도 당연코 대륙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며 여러 가지로 확인되고 정리된 사실(史實) 에 의거 금관가야는 대륙의 사천성에서 부침을 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락의 기원을 보다 상세히 알기 위해선 신강위구르와 북부지역의 국가를
답사하여 거북토템 민족을 찿아 내어야 할 것이며 그 구자국(龜玆國)이 어떻게 건국되고 멸망되어 갔는가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구자국과 김수로와 연관되는 계보파악등 상세한 연
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
9) 보주태후.(普州)허씨의 보주는 사천성 안악(安岳縣)의 고지명이었다.
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였던 김병모교수의 논문에서 ‘허황후는 사천성 성도밑의
안악현(安岳縣)에 자리잡았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것은 허황후의 묘비명에서 밝혀진 ‘보주
(普州)태후 허씨능’의 보주는 안악의 고지명으로 드러났다.
같이 온 일행등이 김수로에게서 허씨 성을 사성받아 지금까지도 집성촌을 일구어 살았으며 현장 답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 허황옥과 가야, 보주, 아유타국| 동북아 원류
이랑 | 조회 65 |추천 0 | 2012.05.05. 20:22
(관련근거 01)
출처 :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sanggosa1&nnew=2&y_number=3
차인과의 대화│허황옥의 차가 四川省을 거쳐 金海로 들어왔다김병모(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최석환(본지 발행인)
김병모 교수에게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 다니는 것은 허황옥의 그림자였다. 30년 전 허황옥의 능비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의 비밀을 화두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그 결실은 14년 전 사천성 안악을 탐방하면서 극적으로 풀렸다. 지난해에는 안악에서 후한 때 금석문인 「神井記」에 '보주허여황옥(普州許女黃玉)'이 새겨진 명문을 발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허황옥이 김해로 시집올 때 차씨앗까지 가져왔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병모(金秉模), 그는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학자였다. 인류학자이면서도 사물을 직관적으로 파헤쳐보려는 저널리스트적 시각이 앞서 있었다. 14년 전인 1991년 그가 한 신문에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온 것이 아니라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安岳)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다는 학설을 내놓자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는 김수로왕의 후예로 허황옥의 능비(陵碑)에 있는 '普州太后'라는 실마리를 추적하면서 처음 인도 지역을 샅샅이 뒤지다가 '보주(普州)'라는 지명이 인도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중국의 고지도를 뒤지다가 사천 안악 지역에 보주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뒤 사천성을 직접 찾아 허씨 집성촌을 찾아내고 허황후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김해로 들어온 경로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김 교수는 허씨족의 원류를 밝혀주는 후한(後漢) 때의 금석문(金石文)인 「신정기(神井記)」에서 허여왕옥(許女王玉)을 찾아내는 개가를 얻었다. 학계의 시각 또한 제각각이었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들어왔다는 설과 중국을 거쳐 왔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칸슈는 최근 출간한 저서에서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왔다는 설을 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 사천성 아안시 정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허황후가 김해로 갈 때 차까지 가져갔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기로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직접 가
져 온 차종자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 설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그런데 최근 차연구가 중의 한 사람이 백월산이 김해 금강사 유지라는 사실을 들고 나왔다. 그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가야차가 전면에 부각된 이상 허황옥이 인도에서 김해로 시집올 때 사천을 거쳐 김해로 왔다는 주장을 해 온 인류학자인 김병모 교수를 만나 허황후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열정을 듣고자 독립문 근처에 있는 고려문화재연구원장실에서 만났다.김 교수와 인연이 깊은 인류학자인 박정진 씨가 가세하여 한층 분위기를 이끌었다.
김 교수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93~95년 한국고고학 회장을 지냈고 근년까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을 거쳐 지난해에는 세
계박물관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에는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와 고려문화재연
구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역사 밝히기에 앞장서 오고 있다. 『금관의 비밀』과 『김수로
왕의 혼인길』 등의 저서를 냈고 허황후가 중국 사천성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다는 가설을 밝
힌 연구가로 그가 밝혀낸 지 15년이 지난 오늘 그의 생각과 사상을 되짚어 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13년 전에 허황옥이 사천성에서 김해로 들어왔다는 역사의 실마리를 밝힌 이래 처음이지요.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올 때 인도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사천을 거쳐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 계기는 어디에서 출발했습니까. 김해시에 있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허황옥(許黃玉)의 능비에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 이
라는 글이 있는데 그 중 '普州太后'라는 부분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면 그 '보주'가 어디인가 곰곰이 생각했지요. 처음 인도 어디엔가 있겠지 생각 끝에 인도 지도를 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다음 중국 고지도를 놓고 단번에 보주를 찾아냈습니다. 그 지역이 오늘날 사천성(四川省) 안악(安岳) 지역임을 밝혀내고 당시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92년 섬서성 국립섬서박물관 개관식 때 역사학자 나철문의 천거로 어렵사리 사천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천성 안악(安岳)은 보주(普州)의 옛 지명이었지요 ?
보주(普州)는 중국 사천성 안악(安岳) 지방의 옛 이름이며 허황옥(許黃玉)은 인도의 아유타국
(阿踰馱國)에서 살다가 중국 사천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예로 당시 중국에 존재했던 허
황옥이 이주해서 살았던 땅 지명을 능비에 그대로 사용했었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습
니다.
게다가 우리가 안악 지역을 답사한 결과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허씨 성을 가진 집성촌과 그
지역에 아직도 있는 보주여관이라든지 보주상점(普州商店) 등 보주라는 지명을 그대로 볼 수가 있었던 점이지요.
당시 보주 땅에는 정부군과 맞선 농민 봉기가 일어났었지요 ?
그렇습니다. 후한정부군에 맞선 토착인들의 봉기가 두 차례(서기 47년과 101년) 있었고, 그 민중봉기의 주동자가 허성(許聖)이라는 인물이라고 후한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천성 안악에서 허씨 집성촌도 발견하지 않습니까.허영선(許永宣) 이라는 족장(族長)을 만났는데 이 동네의 원래 이름은 허가압원(許家鴨原)으로
허씨들이 살고 오리가 놀던 언덕이란 뜻입니다. 안악 지역이 허씨 집성촌이었는데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강제로 해산되어 뿔뿔이 흩어진 사실을 발견했지요.
그 뒤 계속 허씨 원류를 밝히는 작업을 늦추지 않았지요.
그뒤 놀라운 성과는 허씨족의 원류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후한 때의 금석문인 「신정 기(神井記)」에 '허여황옥(許女黃玉)' 이라고 쓴 명문이 나왔었지요.
김교수는 허황옥이 사천에서 김해로 들어올 때 차씨까지 가져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최근 사천성에서 허황옥이 김해로 들어갈 때 차를 가져갔었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습니다.허황옥은 서기 48년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했는데 배에는 20여 명과 함께 결혼예물도 실려
있었는데 그 결혼예물 중에 차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 허황옥 보다 늦게 도착한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출가한 뒤 가락국의 차문화 전파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해 허씨의 시원은 허황후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습니까.수로왕이 사성(賜姓)한 허황옥의 자손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고 김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고 믿기에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김수로왕의 후손들은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김해 김씨 후손들이 아유타국에 기념비를 세워 허황옥의 고향이 아유타국임은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아유타국에 살다가 사천성 보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도 인정합니다.
2002년 안악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보주태후연구회가 결성되었다지요.2002년 결성된 뒤 보주태후(普州太后)연구회의 역사연구가 등 6명이 김해시의 송은복 시장을
예방하고 수로왕릉과 허황후비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갔었지요. 그때 글씨 한 폭을 써서 내게
주었습니다. '천년의 그 은덕 향기 되어 흐르네. 수천 년간 감감했던 조상의 뿌리 찾기 두 마리 물고기가 태고를 이었고 황후 한 분이 대양을 건넜다네'
지금까지 허황옥의 이동경로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연구해왔습니다. 그런데 허황옥이 김해로 들어올 때 배에 실은 결혼예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차에 지난 9월 사천 아안에서
개최된 국제차문화절 행사 중에 사천성 아안시 부시장이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허황이
김해로 들어갈 때 차를 가져갔다는 선언을 해 허황옥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지난해 운남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루트가 차마고도라고 들은 바 있습니다. 차마고도는
잘 알다시피 차와 소금을 실어 나른 길입니다. 허황옥이 김해로 시집올 때 가져 온 결혼예물
중에 단연 차가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마치 허황옥이 김해로 온 신행길은 중국이 차마고도
를 통해 차가 실크로드를 거쳐 구라파로 전파되는 경로를 연상케 됩니다.
수로왕의 17대 손인 갱세가 661년 조정의 명을 받고 가락국의 시조 묘에 제사할 때 제물 중
차를 올린 기록이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김해로 들어온 뒤 출가하여 차를 전파했다고 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허황옥이 사천에서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혀왔으나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허황옥이 차를 전파한 사실은 허황옥의 연구에 새로운 발판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가야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나 그 여인의 후손들인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 문중 어느 누구도 김병모 교수가 주장한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추적해보지 못했다. 김 교수가 196년 풀었던 허황후릉비의 '보주태후'라는 글의 실마리를 30년 뒤에서야 풀 수 있었던 것은 학문적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인류학자 박정진 씨는 김병모의 그런 열정은 인류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허황옥릉비에 새긴 보주태후라는 뿌리를 밝히는 작업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가야차의 시작이 허황옥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뿌리가 사천을 경유,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과 가야차, 죽로차, 장군차로 각인되는 다시 부는 장군차 바람에 2000년 전 우리 앞에 온 허황옥이 뚜렷이 각인되고 있다.
* (관련근거 )출처 : http://kr.blog.yahoo.com/dongyulfl/2318 고려문화재연구원
김수로왕비 허황옥 ( 쌍어의 비밀 )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 | http://booklog.kyobobook.co.kr/rlqjs/B58397/38870
『 삼국유사 』 는 삼국 시대 정사 ( 正史 ) 인 『 삼국사기 』 에서 빠진 전설, 풍속, 기담 (
奇譚 ) 등이 수록되어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에서 가야를 체계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신라와 관계있는 2 ~ 3 곳만 간략히 기술하였다. 고려 시대 일연 ( 一然 ) 이 지은 『 삼국유사 』 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시대인 1512 년 ( 중종초 ) 재간된 것이 도쿄대와 교토대에서 영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책 속에 「 가락국기 」 라는 부분이 있다.
편년 ( 編年 ) 「 가락국기 」 는 서기 1076 년에 금관주, 즉 오늘날 김해 땅의 행정관인 지주
사 ( 知州事 ) 가 편수한 책이다. 그 책 내용의 일부를 후에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지
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금관 지주사였던 사람의 저술 내용 일부만이 일연 때문에 살아남아 오늘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수로왕은 서기 42 년 알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 6 년 후인 48 년, 즉 여섯 살에 열여섯 살의 아리안계 인도인인 ‘ 아유타국 ’ 공주 허황옥 ( 許黃玉 ) 과 결혼했다. 아요디아 ( Ayodhia ) 는 인도 전체로 보면 동북쪽에 있었고, 갠지스 강의 한 지류에 걸쳐 있는 땅이었다. 아요디아라는 말은 ‘ 정복할 수 없는 땅 ’ 이라는 뜻이다.
* 아요디아 에 있는 힌두사원 정문에 있는 쌍어문
아요디아 ( 코살라 Khosala 國 ) 출신 공주와의 국제결혼은 곧 한국과 인도가 불교로 관계를
맺는 첫 번째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전진 ( 前秦 ) 의 승려 순도 ( 順道 ) 가 고구려에 도착한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 년이 아니라 허황옥이 가락국에 온 서기 48 년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불교는 남방불교 ( 南方佛敎 ) 라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허황옥의 도래와 불교 전래 관계와 더불어, 가락 ( 가라, 가야 ) 라는 이름과 불교와의 관련성 여부에 대해, 언어학자 강길운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여, 가락과 가야는 모두 물고기라는 뜻의 드라비다 계통의 말이라는 것이다. ( 드라비다어 Dravidian 는 고대 인도인의 토착어 )
가락 ( Karak ) 은 舊 드라비다 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고, 가야 ( Kaya ) 는 新 드라비다 어로 물고기라는 것이다.
인도인에게 있어 물고기는 매우 신성한 동물이다. 또한, 불교적 의미에서 쌍어 ( 물고기 두 마리 ) 는 부다의 눈 ( 雙魚 ) 을 의미한다.
가락국 왕비 허황옥 ( 許后 ) 의 오라버니의 이름은 기록과 논문에 등장하지 않으나 이 책에서는 두 가지 이름의 사료 ( 史料 ) 를 제시한다.
장유 화상 ( 長遊和尙 ) : 김해 은하사의 한 건물인 취운루 ( 翠雲樓 ) 의 중수기 ( 重修記 ) 보옥 선사 ( 寶玉禪師 ) : 경남 하동 쌍계사 ( 雙磎寺 ) 의 칠불암 유사 ( 七佛庵遺事 ) - 칠불암 현판기에서 나옴.
김해 신어산 은하사의 쌍어문 장식으로서의 물고기는 한국 땅에서는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 고조선, 부여, 고구려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 이에 대해, 著者
는 신라와 가야가 형성될 때 사회의 상류 계층을 구성한 사람들이 물고기 숭배 신앙이 퍼져 있던 곳에서 이민해 온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쌍어 ( 雙魚 ) : 쌍어 신앙은 가야인들의 신앙 단어 ( 單魚 ) : 신라 - 유목민들의 물고기 토템, 몽골인의 물고기 숭배사상
쌍어문 이 있는 가락국 ( 김해 ) 김수로 왕릉의 정문
고고학자인 著者 김병모 박사는 쌍어문 ( 雙魚紋 ) 의 분포 를 통해, 역사의 퍼즐을 아래와 같이 나름대로 완성한다.
허황옥은 서기 32 년에 태어났다. 기원전 165 년경, 지금으로부터 약 2000 년 전에 허황옥의
6 ~ 7 대 선조들은 2 세기에 걸친 <마우리아 - 숭가 왕조 교체기 >의 혼란을 피해 고향인 아
요디아, 즉 아유타국을 떠났다. 이들은 사라유 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 갠지스 강 본류에
도달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벵골 지방을 거쳐 아삼 지방을 통과해서 현재 중국의
운남성에 도달한다.
수로왕비릉의 비문 (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 ) 왕후의 시호인 ‘ 보주 태후 ’ 의 보주가
관향 ( 貫鄕 ) 일지도 모른다 ?
이 곳은 중국 사천성의 성도밑의 안악 ( 安岳 )이며, 당시로서는 촉 ( 蜀 ) 땅이다. 한 ( 漢 )
나라 때 양자강 유역에는 쌍어문을 사용한 신앙 집단 ( 허성 許聖 집단 ) 이 살았다. 허성 ( 許
聖 ) 의 ‘ 허 ’ 는 성 ( 姓 ) 이 아니라 세습되는 직업 무사 ( 巫師 ) 즉, 이교도의 신앙 지도자
로서 신분이 세습되는 사람을 종교적 칭호로 ‘ 허 ’ ( 許 : 브라만 ) 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邊
疆民族史, 대만 ) 그들은 한 ( 漢 ) 나라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에 불만으로 충돌이 생겼고, 그
결과 반란에 실패한 토착민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사천 지방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이주해 살았다. ( 광무 23 년, 서기 47 년 ; 후한서 ) 이 곳은 오늘날 무창 ( 武昌 ) 지방이다.
허황옥은 그들의 정착지인 양자강 중류의 무창 지방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하게 된다.
쌍어는 허황옥이 한국에 시집 오기 천 년 전인,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 년 전 메소포타미아
로부터 시작된다. 쌍어는 어떤 신을 보호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는 신어 ( 神魚 ) 들이다. 메
소포타미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물고기는 두 마리, 즉 쌍어라야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쌍어는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중앙에 있는 어떤 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을 하였다.
이러한 신어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났고, 이 사상은 히말라야와 인도,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들어왔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著者는 구마모토 ( 熊本 ) 현 야쓰시로 ( 八代 ) 시 후루호모도 이나리 신사 의 쌍어를 통해,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에는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옮겨 와 살았음과 야마대국의 히미코 ( 卑彌
呼 ) 여왕과 그를 보좌한 남자가 수로왕의 역사에서 사라진 아들 딸인 신녀 ( 神女 ) 공주와 선견 ( 仙見 ) 왕자 오누이였음의 증거로 삼는다.
이라크 ( 메소포타미아, 아수르 ) 와 한국 ( 가락국 ) 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가까워진다.
앞서 김병모교수의 입증된 학설을 빌려 보면 보주허태후는 김수로에게서 허씨라는 사성을 받았기에 오랜 세월동안 허씨의 집성촌이 성도의 안악현(고지명-보주)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보주태후허씨’ 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김교수는 학설에서 허황후가 갠지스강 본류를 타고 뱅골만을 거쳐서 아삼지방으로,
다시 운남성에 도달하여 상해로 해서 한반도 김해에 정착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론 고지명 해설에 드러난 바와 같이 운남성에서 양자강 지류를 타고 오다 곤명에 표류하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김수로왕의 신하에 의해 성도로 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 곤명과 성도의 고지명 해설에도 허황후가 온것이 기록되어 있다.
김교수가 발표한 학설에서 허씨성을 사성받은 집성촌의 고지명이 사천성 보주(현 안악현)라고 확인하였음에 김수로가 있었던 금관성, 즉 성도(成都)는 보주위의 ‘성을 이루었던 ’고도’ 로 그 역사적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김교수의 학설과 발표문을 인용하였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새롭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다.
후한서에서 밝힌 농민봉기가 서기47년과 101년이며 그 주동자는 ‘ 허성’ 이라고 한다.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후가 서기 48년에 김수로를 만나게 되며 왕자를 7명 낳아 그중 3명의 왕
자를 허씨성으로 사성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면 후한서가 잘못 집필한 것인지 가락국기
가 잘못되었던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첫 번째의 농민봉기는 그곳 토착주민이라고 본다면 허황후가 한반도 김해로 오기 1년전의 일이었고, 두 번째 농민봉기는 서기 101년이라고 보면 이미 허씨 성을 사성받아 52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봉기인데 허황후가 한반도 김해로 서기 48년에 들어갔다면 이곳 사천성에서 ‘허성’에 의한 농민봉기는 없어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이 된다.
한반도 김해에서 왕자를 포함하여 허씨로 집성촌을 일구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 52년 세월이 지나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그것도 1세기에 중국의 사천성에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데 이건 소설같은 이야기 이다.
그러므로 보주태후 허황후가 157세로 졸하셨으니 사천성에 남아서 농민의 2차봉기를 바라보았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고 이치에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즉, 허황후의 자손들이 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맞는 말이고 허황후는 101년까지 사천성에 있었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반도 김해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허황후가 사천성에서 101년동안 있었다면
김수로는 바다건너 한반도에서 혼자 살았단 말인가?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사천성 성도에서
가락국을 건국하였다. 43년에 성쌓기를 시작하여 서기 44년에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김교수의 ‘쌍어의 비밀’ 빌표문에서 한나라 정부의 소수민정책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켜무창지방으로 옮겨 살았다.(후한서(광무23년 서기 47년) 고 되어 있고 허황후는 그 사람들과 함께 무창으로 가서 상해를 걸쳐 한반도로 건너 온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허황후가 김수로를 만나지 못한 서기 47 년에 이르러 이미 종교지도자 역할을 하는 ‘허씨 종
족’(브라만)이 존재했다는 후한서의 연대가 역시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종교지도자 역할을 하는 종족이 있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허씨’ 가 아닌 것이고,
단, 2차 농민봉기(서기101년)후 무창지방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 말이다.
김수로를 만나기 전 허씨 성의 집단이 이주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잘못 전해진 것이다.
김교수가 사천성 안악현에서 만났다고 한 ‘허영선’이란 족장이 보주태후 허황후의 자손이 맞다면 적어도 허황후는 한반도에 한번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한반도에 허황후가 가지 않았던 이유로 1세기에 이곳 사천성에 집성촌이 생겨 난 토대가 되는 것이고, 2차 농민봉기를 통해
(서기101년) 호북성 무창지방으로 그 주동자들은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호북성과 사천성은 중경시를 기준으로 바로 경계이다.)
가락국기엔 서기 48년에 보주태후 허황후를 왕비로 맞는다. 중국의 성도 금관성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왕자10명을 낳아 그중 2명에게 허씨성을 사성하게 되며 그 자손들이 성도밑의 촌락인 안악현(옛 보주)에 살면서 후한에 맞서 농민봉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앞뒤의 문맥이 맞아 떨어지고 누구나 이해가 가는 것이다.
왜? 김해인가? 김해의 어원은 무엇인가? 김해의 정확한 뜻과 사실(史實)을 모르고 무조건 한반도 김해로 정당화 시키고 고착화 시키고 있다. 이러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녕 동해,남해,서해,북해 다음엔 김해이다. 김해는 동서남북에서 어느 방향인가?
그냥 한반도의 지명이 ‘김해’ 라고 해서 김해이다. 아닌 것이다. 김해는 서쪽대륙을 통칭하는
것이다. 즉, 신강위구르,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등 흉노의 일파로 남하한 사람들이 ‘금은 김해’이다.‘(金稱爲金海)로 주장하였고 훗날 김해의 흔적이 지명으로서 한반도 경남의 한 고을에 남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김해는 대륙신라에 이어 한반도로 들어 온 신라왕이 신라김씨 진골의 위상을 생각하여 식읍으로 주었고, 사천성에서 불렀던 김해를 이곳으로 지명 이동시켰을 뿐이다.
또한 편년체 ‘ 가락국기’ 의 집필은 1076년 錦官州 지주사(知州事)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며
일연은 삼국유사를 쓸 때 참고를 한 것이다. 이 때의 금관주(錦官州)는 바로 성도이다.
신라가 흉노일파라는 것이 비문등 유물을 통해 재삼 확인 된 마당에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고 또한 신라의 왕통을 이어받는 신라김씨의 조상이 흉노일파라는 것이 요즈음 학계에서 대두되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신라김씨의 조상은 누구인가? 바로 김수로이다.
지금 잘못된 사학자들 때문에 한반도 김해에다 김수로 왕능을 짓고 나아가 허황후 왕능까지
김해의 구지봉으로 비정하는 바람에 이 땅의 많은 김해김씨와 허씨 후손들이 턱도 없는 곳에서 고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 잡지(지리)엔 후대에 이르러 금관성이 절강성으로 되어 있는데 사천성 성도에서 언제 금관성을 옮겼느냐에 대해선 세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절강성의 김해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 김해의 지명이 들어가기 전의 일로 추측된다. 1076년 가락국기를 저술할 당시 금관주의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의 태조는 ‘애신각라’의 성으로 신라왕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간도에 일본이 세웠던 만주국(1913년)의 행정구역도를 보면 11개성에 유독 신라에 복속된지 1,300년이 지났는데도 가락의 금주(錦州)를 앞세워 금주성(錦州省)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것 또한 연구할 과제라 할 것이다.(지도 참조)
*** 서기 101년 사천성 안악에서 ‘허성’등이 주동하여 농민봉기를 일으키나 진압당하여 강하군(현 호북성 무창지방)으로 이주당하게 된다. 至建武 23年(47년) 南郡潳山蠻 雷遷等始反亂, 寇掠百姓, 遺武威將軍劉尙將萬餘人討破之, 徒其種人 七千餘口置江夏界中, 今沔中蠻是也, 和帝永元 13년(101년), 巫蠻許聖等以郡 收稅不均 , 懷怨恨 遂屯聚反 , 明年夏, 遺使者督荊州諸郡兵萬餘人討之, 聖等依憑隘溢, 不久破, 諸郡乃分道竝進 , 或自巴郡, 魚復數路攻之, 萬乃散走, 斬其渠帥, 乘勝追之,大破聖等 聖等乞降, 復悉徒置江夏.
건무(建武)23년(서기47년)--- 후한 광무제 남군 도산만 뇌천등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켜 백성들을 노략질하자, 무위장군 유상을 파견하여 만여명을 이끌고 토벌하였는데, 그 종족 7천여구를 강하군 안으로 이주시켰으니 지금의 면중만(沔中蠻)이다.
화제(79-105) 영원 13년(101년)남부의 무현만(巫縣蠻) 허성(許聖)등이 군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것에 원한을 품고 마침내 함께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후한서 권4 화제기에 12월에 반란) 이듬해 여름 사자를 보내 형주 여러군의 병사 만여명을 도독하여 토벌하였다. 허성등은 깊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격파하지 못하였다. 여러 부대가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일부가 파군(巴郡)과 어복(魚復)에서 여러길을 통하여 공격하니 반란민들이 흩어져 도망갔다. 그 거수들을 참수하고 계속해서 추격하여 허성등을 대파하였다. 허성등이 항복을 청하자 모두 사면하여 강하군으로 이주시켰다.(현, 호북성 무창(武昌)지방)
신라와 가락국(금관가야)은 실과 바늘과 같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일찍부터 대륙신라가 있었기에 금관가야 또한 서기42년에 사천성 성도인 금관성에서 건국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앞장 서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삼한과 더불어 가야연맹체에 대한 새로운 학설과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본인은 북방가야(북방오랑캐)와 남방가야(남방오랑캐)로 구분하고자 하며 다시금 대륙가야와 한반도가야로 나뉘어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 -
< 참고문헌 >
삼국사기
삼국유사(가락국기)
삼국사절요
중국 고지명대조표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 중국북경 미술사교양실
명의 직조국 편제에 관한 자료
사기 조선열전(재야사학자 송준희 교수 번역본)
구한말 역사교과서
고려사(가락국기)
KBS 보도(의자왕 항복의 비밀,신라김씨왕족은 흉노인가?)
김해김씨 대동보
환단고기-고구려국 본기(파소)
흉노에 관한 문헌등 다수 참조
한민족사연구회 지도모음집
COO2.NET(다음)- 대방과 관련하여
다물역사관 지도모음집
김병모 교수 발표문 (허황옥의 차는 사천에서 유래 , 김수로와 허황옥)
( * 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한국고고학 회장, 전통문화학교 총장, 현, 고려문화재 연구원장 )
후한서 외국전 번역본(동북아역사재단)
첫댓글 근거는 없구요, 가야의 분파가 왜로 발전한것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예전부터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위 글에서 일본이 만주에 세운 나라의 지명이 옛 가야의 지명인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드네요.
그리고, 신라가 휴도왕 계통이라면, 일본은 혼야왕 계통이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흉노의 선우 계통이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 계통인 북한과, 신라 계통인 경상도와, 왜 계통인 일본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경상도와 일본이 연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도 대충 설명이 되는거 같습니다.
증거는 없구요, 현재의 정치 역학적인 관계에서 역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고구려가 흉노 선우 계통이라는 말도 얼핏 들었습니다.
아무튼 과거 휴도왕과 혼야왕이 선우를 배신한 것은 사실에 가깝고, 이러한 원한관계가 대대로 계승되어 현재의 정치구도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혼야왕의 후손인 것이 거의 사실로 드러났고, 가야는 휴도왕이 피신하여 세운 나라로 설명하면 흉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역학관계가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흉노 선우계통으로 설명하면 될 듯 하구요
과거 강력했던 흉노족이 현재까지 그 강성한 기질을 이어져 왔을거라 생각합니다.
혼야왕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흉노의 중심이었던 선우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력이 고구려에서 북한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모두 북방 유목민족인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재의 중국은 대륙의 원래 토착민이었던 남방계 한족이 북방 흉노족들에게 중원땅을 수천년간 내주고 나서, 근대에 와서 다시 자신들의 땅을 찾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대륙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현재는 과거의 거울입니다.
가문의 원한관계는 화해를 하지 않는 이상 대를 이어서 계속되어집니다.
소설같은 이야기 같지만 단순한 상식에서 출발하면 복잡한 관계가 오히려 쉽게 풀릴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저는 이 속담의 기원이 북방 유목민족이 남방계 한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예전부터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역사가가 아니기에 검증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저만의 합의점을 내려서 이러한 생각들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인지 역사가 분들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