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
나는 TV를 자주 켜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케이블 텔레비전 매일방송( MBN.채널 20)에는 매주 수요일 저녁 10시에
‘나는 자연인이다.’를 방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100% 리얼 휴먼스토리를
지닌 자연 다큐멘터리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 중에서도
홀로 산 속에서 원시의 삶을 사고 있는 자연인을 취재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둔 이유가 있다. 자연을 벗하며 사는 자연인의
삶의 모습과 그러한 삶을 사는 생활철학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20년을 주말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 아마추어
농부 생활로 친근하게 느낀 자연에 대한 관심도 있다. 게다가 편리하고
약삭빠른 물질문명보다 불편하더라도 원시적이고 순수한 정신문화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식재나 약재가 되는 산야의 풀, 꽃, 나무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구에서이다.
취재 형태는 연예인 중에서 개그맨 윤택 씨나 이승윤 씨가 탐방자가 되어
산 속에 살고 있는 자연인을 찾아가서 2박 3일동안 같이 자고 먹고
행동하면서 의식주 생활을 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체험하면서 보여준다.
그러한 삶의 모습 외에도 주고받는 대화를 통하여 과거 비자연인 시절의
삶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면서 이와 대비시켜 현재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철학을 가늠하게 한다.
자연인의 소개는 ‘성명, 나이, 산중 생활 ㅇㅇ년’을 자막으로 처리하였다.
출연자의 신상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자연인의
연령대는 4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거의 다 남성이었으며 혼자 살고 있었으며
산중생활은 최하5년에서 최고 35년에 이른다.
의복은 주로 작업복 차림에 있는 대로 몸에 걸쳤으며, 거주하고 있는 곳은
천차만별이었다. 바위 밑, 비닐, 천막, 판잣집, 슬레이트, 벽돌집, 기와집 등등
형편 따라 달랐으며, 집의 위치는 산비탈이나 산자락, 길가 등에 허술한 형태로
오독하니 앉아 있었다. 식수는 계곡물을 떠서 사용하는 이도 있었지만,
산 속 땅 밑에 흐르고 있는 물을 호스로 연결하여 마당의 대형 고무통에
넘쳐흐르게 하였는데 탐방자가 바가지로 물맛을 보고서는 “죽여 준다.”고
극찬하는 바람에 그 산중약수를 맛보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일었다.
전기는 마을 가까이 사는 자연인은 끌어다 사용하였으나 해발 수 백 미터에
사는 자연인은 자가발전기나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용변은 판자나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세워두었거나 녹색 비닐 천을 둘러친 곳에서 보며
화장실을 만들지 않은 곳에서는 풀숲에 엉거주춤 앉아 엉덩이를 감추고
쩔쩔매며 볼일을 보는 탐방자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가장 안쓰러웠던 것은 식생활이었다. 나 같은 주부 입장에서 보면 그곳으로
달려가 따끈한 국물이 흥건한 국이나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게라도 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지극히 초라하고 간단한 상차림이었다. 부인이라도 옆에 있어
부엌살림을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흰 밥에 반찬이라곤 된장이나 고추장에
산나물이나 더덕이나 버섯을 넣고 적당히 끓인 것인데 끼니만 때운다거나
연명을 위한 것으로 느껴졌다. 남성인데도 자신이 담근 김치와 한두 가지
마른 반찬으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인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들의 공통된 일과는 밥을 짓고 집을 보수하며 창고를 만들고 땔감을 마련한다.
푸성귀도 기르고, 풀도 베고, 운동도 하며 계곡물에 멱을 감고 고기도 잡는다.
산에 올라 당귀, 곰취, 명이나물, 곤드레, 취나물, 더덕, 도라지 같은 산나물도
얻고 돌복숭아, 돌배, 산머루, 충영, 겨우살이, 잣나비걸상, 상황, 노루궁뎅이,
목이, 석이, 송이, 능이, 팽이, 싸리, 느타리, 표고 등 식용식물이나
약용버섯들을 채취하여 발효액이나 약술로 만들어 먹거나 마을로 내려가
시장에 내다 팔아 쌀이나 생활용품을 구입하기도 해서 그들에게 자연 약재는
참으로 중요한 생활재원이 되고 있었다.
그들에겐 불편과 불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치약이 없으면 계곡바닥의 모래로
치아를 문지르고 빨래비누가 닳아지면 나무막대기로 옷을 두들겨 패서 계곡물에
휘적휘적 흔들어 때를 빼내고, 세숫비누가 닳아지면 맨얼굴로 세수를 하고
수건 없어도 세수 끝이다. 폴리에스터 합성섬유로 된 잠바가 여기저기 찢어지면
비닐 테이프로 쫙 붙여 입고 약초를 캐려 산에 오를 때에는 빈 비료 부대자루에
끈을 달아 망태기로 어깨에 걸친다. 그런데도 만족하고 행복하느냐 하는 질문에
하나 같이 대답은 같다. “ 자유롭고 편안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산을 떠날 생각이 없다.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오히려 반문한다.
자연은 그를 품에 안고 그는 자연의 품에서 숨쉰다. 아니, 자연이 곧 그이며
그는 곧 자연이 되어 하나가 된다. 자연의 이슬을 맞으며, 자연 속에서
자연의 존재를 느끼며,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자연이 내린 푸성귀를 먹으며 사는 멋과 맛이야 말로 실로 소중한 은혜와
축복이 아닐까.
그들은 달인이고 도인이며 철학자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삶의 철학이
흘려내린다. “ 저 나무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 봐”,“ 자연은 평화를 줘.”,
먼 산 바라보는 게 마음 달래는데 최고여.”,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지 뭐.” ,
“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혀.”,
“ 먹을 만큼만 캐면 돼. 욕심 낼 필요 없어.”,
“ 마음 다스리는 데는 자연이 최고야.”, “불편하냐고? 전혀.”,
“ 다시 태어나도 자연과 살고 싶어”,
“ 산을 내려가면 불편해 못살아. 걸리적거려.”…….
한 마디 한 마디가 깨달음을 안겨주는 금언이다. 산은 이렇게 자연인을 삶의
예지자로 탄생시킨다. 산 밑의 인간사회에서는 삶의 지혜를 담은 책도 무수히
많고 존경 받는 지도자, 선구자도 많건마는 그들의 영향력으로 삶을 달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걸까?
그러한 자연인도 사람이기에 인간애에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자연인 이전의 과거사와 자연인이 된 까닭을 묻는 탐방자. 그리고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여는 자연인. 이에 따르면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거나
가정의 불화와 파탄, 사업의 실패, 고립적, 비관적 성격 등등, 그리하여 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회상하며 두고 온 부모, 형제, 처자식을 그리워하는 모습에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니 결국 자연인이 된 것은 스스로의 의지이지만 처음부터
산이 좋아서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점점 순응하게 되고
산이 좋아지면서 산을 사랑하는 자연인이 되어간 것이다.
또 한 번 가슴이 찡한 것은 탐방자가 떠날 채비를 하자 취재차 촬영 때에는
의연하고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것과는 달리 아쉬움과 외로움이
서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자연인이 수십 년 세월에 걸쳐 하루 종일
본 것은 구름과 산과 나무와 물과 땅밖에 없었다. 이제 며칠간 사람들과 더불어
어울렸으니 오가는 사람의 정에 새삼 가슴이 떨렸으리라.
그들이 구가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물질의 풍부와
결핍으로 행복과 불행의 잣대로 생각한다. 자연인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초가집에 몸을 뉘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불행했어도
자유와 행복은 현재에서는 그들의 것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하였다. 인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이나
가축은 각종 규제나 제도 같은 인위적인 시스템으로 울타리 안에 갇혀 사육되어
길들여지면서 자유가 없고 불행하다고 한다. 가축은 요행히 울타리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그야말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사람은 이와 다르다.
울타리 바깥을 뛰쳐나가도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연인은
그 울타리를 넘어서 살면서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진실이 아닌가!
매주마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면서 내 자신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내면적이든 외형적이든, 나의 몸과 마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각종 규제와 제도의 울타리 앞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던가? 내면적이든 외형적이든, 소유하고 싶고, 성취하고 싶어서 탐심을
냈던 것들이 어떤 연유로 이루지 못했을 때에도 행복하였다고 할 수 있었는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 나를 발견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이며 그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점을 밝히고 실천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론과 실제, 현실과 이상이 어긋나는 삶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이다.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생 설계와 행복 추구의 청사진도 없이
부초처럼 표류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자연인의 삶의 모습에서 내가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말에만 자연의 품에 안길
것이 아니라, 아예 전원생활에 정착하는 자연에의 귀의심을 대리 충족시키고
싶어함이리라. 또한 물질문명에 역겨워하고 정보화시대 팽이가 되어 팽팽 도는
여러 현상에 외면하거나 이탈하고픈 욕구나 현실 도피일지도 모른다.
라 브류이에르는 말하였다.
“인생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며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나는 인생을 비극으로 느껴야 할지 희극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삶의 예지를 얻기 위한 치열한 인생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김 경 남(수필가,문학평론가)/수필연재(2월호 중에서)
진인사재천명(盡人事待天命)
甲午年의 일상이 두장 남은 달력!
시작이 반이라는 새해가 엊그제 같았는데...
행운을 부르는 기술 그것은
시작과 마무리를 잘하는 거라고...
오늘 내가 시작해야 할 일과 마쳐야 할 일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올 한해 행운의 여신이 늘 내곁에 머물도록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마지막 열성을 다하십시요.
진인사재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고
하늘은 늘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노력한 자만이 기회를 잡을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차마고도
십이령 보부상길과 금강소나무 숲길을 넘으며...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1리/서면 소광리/광회2리=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1리. 금강소나무숲길 시작을 알리는 대형 표지목판
내성행상불망비각 (褓負商(보부상)의 우두머리인 行首(행수)들의
공적을 기려 세운 功積碑(공적비))
울진 십이령 보부상 옛길의 시작지점 이며, 오늘 트래킹의 들머리.
부상대장군, 보상여장군 두 장승이 산찾사의 무사 산행을 위해
액운을 막아준답니다.
첫고개 "바릿재"의 정상부
그 옛날 보부상들의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비소리" 들리는 듯
십이령 보부상 옛길, 이 길은 백두대간에서 갈리진 낙동정맥으로
산새가 험하고, 산적이나 맹수의 습격이 많아 보부상이나
길객들은 여럿이 함께 다녔다는데, 저 멀리 아련한 준령이
트래커의 가는길을 안내해 주는 듯 합니다.
잠시 쉬어 이마의 땀을 씻어보며...
들국화 "쑥부쟁이"/ 아무도 찾지 않고 그 누구 봐줄 이 없어도,
깊은 산 숲길가 양지에서해바라기 하면서 곱게 단장하고,
철 지나도록 오지 않는 고운님을 애써 기다립니다
"합수나달"의 산양 서식지 안내 표지목 / 산양은 본시 천적을
피해 고산 암릉에서만 서식함
심산 옥계의 옥수가 빚은 아름다운 계석지대(溪石地帶)
세속을 벗어난 속세의 청음 낭랑한 암반위의 폭포
俗世淸音石上泉(속세청음석상천)이라 했든가?
이어지는 금강소나무숲길은 찬물내기를 향해
더 깊은 협곡으로 닦아오고...
좀작살나무와 그 보랏빛열매 / 접사용 렌즈 없이 근접으로 담아 봄.
청천 녹산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한 이 곳이 "산양서식지" 일원이라 하네.
산양의 고고한 그 품성은 오직 올곧은 금강송의 기품 받아서 일테고...
샛재를 향해 오솔길 오르며 뒤돌아 본 '찬물내기 '
낙엽진 산골의 갈색의 향연(饗宴) 끝없는 오솔길~ , 詩 한 수 없을 수야...
"관중"의 비감./ 만추의 낙엽이 질때도 그는 혼자 불루홀(푸른깔데기)을
그리며 독야 청청하였으나, 샛재의 한풍에 그 기력 쇠잔해
팔 벌려 누웠소.
옹달샘./ 그 엣날 보부상은 저 푸른 표주박대신 애기동백나뭇잎 따다
물 마시고 쉬어 갔는데...
샛재로 오르는 깊은 계곡엔 고드름이 자라고...
인동덩굴(곁말, 겨우살이) / 언덕 참나무 높은 가지에 있어 줌인
샛재 / 금강소나무숲길 두번째 고개.
조령성황사 (조령, 곁말 샛재)
이 지역 주민과 보부상들이 함께 세운 이 성황당은
샛재 고개를 넘 나들때 무사함을 기원하며 빌든 곳
샛재 옛 주막터 / 크다란 무쇠솥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려는 듯
그 자리를 지켜 섰네.
샛재 협곡 달려서 내린 물은 너삼밭에 이르러 유유히 한가롭다.
울진 금강소나무숲길과 500년된 금강송 한그루...
너삼밭 금강소나무숲길 제1, 제3구간 갈림길 삼거리. 금강송 붉게 빛나고...
너삼밭재를 오르며 길가의 "움막집" / 분명 사람이 밤을 세우며 자는 곳이라
"너삼밭재" 너머의 "속새군락지"/ 너삼(일명,고삼)은 없고
계곡을 뒤 덮은 속새군락은 산객의 마음까지 푸르게...
저진터재를 오르며 뒤돌아본 모습.
저진터재 / 어머니의 가슴골 처럼 포근 합니다.
고즈녘한 산촌의 붉은 함석집에서 서산자족(捿山自足)하는
참 삶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산새의 산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보다 더한
어미 산새의 지혜는 이 가시나무(두릅나무) 위의 성근집을
보면 경탄을 하게 됩니다. 천하의구렁이도
이 가시나무는 타고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조차 모를텐데
가을 걷이 끝나고, 겨울 김장 끝났어도 무우청은 곱게 빗어 말리고
출타한 주인의 덕(德)에 "지게"도 망중한 중입니다.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현대판 "십이령주막"집의 내부 벽과 벽장은
올 곧은" 금강소나무판재"로 지어 져 그 고운 나뭇결이 빛나고,
고운 솔향기에 한잔의 탁주 더욱 감칠맛 돕니다.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제1구간이 끝나는 소광2리
"금강소나무팬션앞 십이령주막.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은 현재 제1(하루80명),제3(하루100명)구간이
예약탐방으로 운영하고,제2구간(소광2리 금강송팬션~광회1리
광비합동정류장)은 2012년 초개방 예정으로 있으며,
제4구간 (소광2리 금강송팬션~통고산 휴양림), 제5구간
(통고산휴양림~박달재)은 2012년 조성 예정으로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제 1구간은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부터 서면
소광 2리 금강송팬션으로 이르는 13.5km 구간으로, 특히 이 구간은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울진 십이령 보부상옛길"과
겹쳐 있어, 역사문화자원과 자연생태자원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환상적인 트래킹 코스라 하겠다.
십이령 보부상(褓負商) 옛길의 十二嶺은 바릿재, 샛재, 너삼밭재
(저진치), 너불한재, 한나무재, 넓재, 꼬치비재, 곧은재, 막고개재,
살피재, 모래재를 이른다.
수많은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한국판 차마고도"라는
별칭(곁말)을 얻은 이 제1구간의 트래킹코스는 ㅡ두천1리 출발지
-내성행상불망비-바릿재-장평-합수나달(산양서식지)-찬물내기-
샛재(일명 조령/조령성황사)-샛재주막터-너삼밭-너삼밭재-
속새군락지-저진터재-소광2리(금강송팬션)-주요 역사문화자원으로
내행성불망비,성황당,두천원, 말래주막거리,샛재 주막터 등이,
자연생태자원으로는 금강소나무숲,산양서식지,산림유전자원보호림,찬물
내기 등이 있다.
보부상(褓負商)에 대하여...
부상(負商)은 무게나 부피가 크고 값이 비교적 낮은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다니며 판매하는 등짐장수로 주로 어물,소금,미역,
토기, 목물(木物)을 취급함.보상(褓商)은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봇짐장수로 포(布),면(綿), 지물, 비단(帛), 금, 은등취급함.위의
보보상은 부상과 보상을 합해 통칭하는 말.
울진 십이령옛보부상 길은 울진과 봉화,영주,안동의
내륙 시장을 오가던 길로,
지난 한때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의 아픈 역사로 인해 오랫동안
폐쇠되었던 길이었으나 최근에 개방하여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적 가치가 높다하겠다
<경북 울진군과 영덕군은 7번국도의 태백산맥과 동해안을 함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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