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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마포 와우산의 시민아파트 한 동이 붕괴되면서 서울시의 '개발행정'이미지는 크게 실추된다.
이 와우아파트의 아픔을 딛고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키 위해 등장한 단지형 고층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단지이다.
여의도내 고밀도 고층 주거지역 33,619평의 부지에 12,13층 높이의 복도식 주거동 24개, 분양면적 기준으로
48평 36평 24평 18평 규모의 아파트 1,584세대를 1971년 10월에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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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범아파트 분양당시를 다룬 신문기사의 일부를 아래 옮겨 그때 분위기를 살피려고 한다.
"이런 모래밭에서 어떻게 사나"
1971년 10월15일 오후 여의도시범아파트를 분양받는 예비입주자 가족들은 단지를 둘러보고 걱정부터 앞섰다.
서울 도심에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없고 주변에는 온통 모래벌판 뿐인 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통신회선이 부족해 전화걸기도 불편하고 변변한 상가도 없어 물건을 사려면 다리를 건너 노량진쪽으로 나가야했다.
그래도 단지 규모는 큰 편이었다.287만㎡(87만평)의 거대한 택지에 12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불쑥 솟아있었다.
이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으로는 단지가 완성되기 이전의 상황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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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에 발표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안에
따라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돼 결실을 맺은
첫 작품이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12층 높이의 시범아파트는 당시 우리나라에
지은 아파트 중 가장 높았다. 최신식아파트로 불리던 이촌동 공무원아파트도 5~6층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1971년 10월 30일 서울시가 건설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준공되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여의도 개발을 위해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고층아파트로, 12층 높이 24개동 1,500여 가구 규모였다.
냉온수, 난방, 전기, 전화 등이 처음으로 지하배관되었으며, 내부에는 엘리베이터 24대, 에스컬레이터 2대 등이 설치되어
건설 당시에는 최첨단 아파트로 불렸다. 모델하우스를 지은 최초의 아파트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세대마다 냉온수급수, 스팀난방 시설을 갖췄다.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지 가까이에 들인 배치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여의도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여의도중학교로, 여의도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특수학군제 때문에 사람들은 여의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 입주자 어머니의 70%이상이 대학졸업자라는 조사결과가 나올 정도로 고학력자,
전문직 종사자가 모여들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가장 큰 158㎡(40평형)이 571만원, 소형인 59㎡가 212만원 선에 분양했다.
입주 시작 후 두 달만에 158㎡가격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생긴 '아파트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한 취지에서 태어났다.
그 파급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시범아파트의 성공으로
민간 업체들이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간업체들도 택지를 사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1974년 시범아파트 남쪽에 삼익주택이 삼익아파트(360가구)를, 한양주택이 은하아파트(360가구)를 지었고
대교아파트, 삼부아파트, 라이프아파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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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분양 때 경쟁률이 치열하면서 경찰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아파트분양 추첨을 하는 풍속도까지 등장한다.
여의도 삼부아파트1970 년대 후반 중동건설경기 호황으로 늘어난 유동자금이 여의도 아파트로 몰려 '투기열풍'을 빚기도 했다.
1977년 목화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45대1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주거목적보다는 재산을 불리기 위한 투기대상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기록한다.
이 치열한 경쟁률을 똟고 분양 받은 아파트는 현장에서 당장 '충격적인 윗돈'을 붙어 거래되기도 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에 따르면 한 부동산업자가 89㎡짜리 아파트 100채를
현금 2억원을 내고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당첨되면 프레미엄(당시 표기)을 붙여 팔아주겠다."
청약결과 발표현장에서 중개업자들이 명함을 돌리면서 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