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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쿨에 관한 생각
김준봉
서양인들은 후진국에가서 일하면 어김없이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는데 제일 먼저 힘을 쓴다. 혹 그러한 여건이 되지 않으면 자녀들을 홈스쿨로 교육하다. 내가 처음 연변과학기술 대학에서 일할 때는 멋모르고 한국 학부형들이 자녀들을 중국학교 혹은 현지 조선족학교에 보냈다. 물론 일부 잘 적응하는 아이들도 일었지만 대부분은 그 결과가 참담했다. 한국에서는 모범적인 아이들이 중국학교에 대부분 적응하지 못했고 조선족학교의 경우는 더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들이 모여 최초의 한국 국제학교를 연길시에 세우게 되었다. 2002년 북경으로 이사온후 중국의 수도이니까 연변 시골과는 다르겠지하고 중국학교에 보냈었다. 결국 한학기를 집에서 홈스쿨(거의 휴학에 가까움)을 하고 한국 국제학교를 거처 지금은 한동대학에 다니다. 만약 그때 홈스쿨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둘째를 더 잘 교육 시켰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한다.
중국은 교육에 있어서는 후진국형이라 할 수 있다. 일단은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 주입식 대량생산식이기 때문이다. 대학이나 대학원도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은 중국의 특색이기도하다. 잘하는 학생들만 골라내는 것도 힘이들 지경인데 잘 못하는 학생들은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나 할 까? 특히 한국 학생들을 대하기는 물론 더하다. 등록금과 입학금을 비싸게 받을 수 있으니 한국학생을 받는 것이지 별 다른 이유는 거의 없다.
그 대안으로 홈스쿨을 제안 할 수 있는데 아직은 경험이 없다면 경험이 있는 가족을 중심으로 맘이 맞는 가족이 여럿이 모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두 세 가정으로는 대안학교를 당장할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홈스쿨은 당장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송정복선생의 홈스쿨이야기를 첨부한다. 참고하시길.......
홈스쿨(Home school), 창의적인 맞춤 교육
글쓴이 - 송정복(peterssong@hanmail.net)
‘요셉 미라가 되다’의 저자
고신대학교, 합동 신학대학원(M. Div.),
미국 리버티 대학(Th. M)에서 수학
오엠 선교회 둘로스에서 사역,
미국에서 이민목회을 했으며 네 아이를 홈스쿨링하고 있다.
현재 북경에서 이민 목회중에 있다.
1. 홈스쿨의 정의
“홈스쿨이 좋습니까?”
“왜 홈스쿨을 합니까?”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그런 질문이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프랑스 음식이 맛있습니까?”
“당신은 하고 많은 한식당을 두고 왜 프랑스 요리를 즐깁니까?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다. 먹어 보지도 않은 음식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홈스쿨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음식의 맛은 누가 대신 볼 수 없고, 관광도 대신 즐겨줄 수 없듯이 교육도 그러하다. 처음 먹는 음식은 그동안 먹었던 음식과는 달리 보이기도 하며 이상하기도 할 것이며 맛도 역겨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깊이 음미할 수 있듯이 교육코스를 스스로 찾아가는 홈스쿨의 인상도 그럴 수 있다.
며칠 전 한 부부와 식사를 하면서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부부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물었으며 나는 홈스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부부 중 부인은 홈스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우리 가정의 홈스쿨 커리큘럼을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홈스쿨의 커리큘럼보다는 홈스쿨의 정신과 지혜에 중점을 두고 홈스쿨의 정신이 홈스쿨을 이끌어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인은 홈스쿨의 구체적인 커리큘럼에 더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어 생각했는지, 홈스쿨의 정신이 홈스쿨을 이끌어 간다는 이야기를 다소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일전에 만났던 어떤 분에게 홈스쿨에 대해서 말해 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홈스쿨이란 뜻있는 학부모들이 각 가정의 자녀를 모아 놓고 한 과목씩 맡아서 가르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홈스쿨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Home school은 가정에서 학교교육을 대신하는 대안교육이다. 홈스쿨은 단순한 것이긴 하지만 깊고 넓은 교육이다. 홈스쿨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홈스쿨이 다를 수 있다. 마치 고급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의 교과과정은 비슷한 것 같지만 내용과 질이 다르듯이 홈스쿨도 다를 수 있다.
홈스쿨이란 말은 근래에 와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홈스쿨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학원광고나 학습지 프랜차이즈도 홈스쿨이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학습지 프랜차이즈 같은 곳에서 홈스쿨을 사용하는 것은 학원이 아닌 가정에서 학습지를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홈스쿨의 사전적인 의미 혹은 외적인 의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홈스쿨은 아니다.
홈스쿨의 진정한 의미는 아이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배우며, 여러 교과를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이들을 부모가 책임지고 가정에서 교육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홈스쿨이 생긴 이유
산업혁명 이후 공교육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분업화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의 공교육은 인간존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업화를 위한 것이었다. 교육기관들은 앞 다투어 산업화의 요구에 맞추었고, 인류는 많은 재화를 생산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재화보다는 인간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산업구조도 1,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생산성이란 단어도 양(quantity)보다는 질(quality)과 디자인(deign)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인문학에 있어서도 정보의 양 보다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무엇보다 의식주가 해결되면서 인간존재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교육의 요구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공교육 시스템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개인적인 교육 욕구가 늘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더 이상 공교육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 높은 질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립형 대안학교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자녀를 자립형 대안학교에 보낼 수 없는 부모들이나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를 가진 부모들은 홈스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홈스쿨은 서양의 일부 가정에서만 실시되고 있었고, 한국의 학부모들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안학교들이 효과를 발휘하자 홈스쿨이 시작되었다.
근래에는 홈스쿨을 소개하는 기독교 단체들과 홈스쿨을 체험한 기독교인들의 모임과 컨퍼런스들이 홈스쿨을 소개하여 홈스쿨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3000여(홈스쿨 연합회 회장 추산) 가정에서 홈스쿨을 하고 있다.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유대인들의 창의적인 교육 비결이 홈스쿨이라는 사실을 늦게야 깨달은 한국 가정들은 홈스쿨로 인재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성경을 접하며 유대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홈스쿨러들은 홈스쿨을 대안교육을 넘어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교육추세도 홈스쿨이 증가하고 있다(이하 국민일보 2007년 2월 23일자보도). 미국에서는 홈스쿨러들이 학업 성취도가 높으며 창의성과 직장에서 적응력이 높다는 통계가 있으며, 매년 15%씩 홈스쿨러들이 늘어나고 있다. 2006년 통계로 미국에서 홈스쿨을 하는 학생들은 110만 명에 이르고 있다(어떤 통계는 2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안교육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영연방에 속한 나라들도 홈스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영국에서 홈스쿨을 하는 학생들은 10만에 이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홈스쿨을 하면 정부에서 743 뉴질랜드 달러(한화 47만 원 정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3. 능력이 아니라 자각이 홈스쿨을 시작하게 한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유학할 때의 이야기다. 내가 석사과정을 하던 학교는 버지니아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 학교는 보수적인 기독교 학교였다. 학교의 교칙 중에 남학생은 넥타이를, 여학생은 치마를 입어야 하는 교칙도 있었다. 우리가 살던 옆집에는 그 학교에 유학 온 학생들이 살고 있어서 미국의 젊은이의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그들과 담소도 나누고 식사도 같이 하곤 했다.
데니는 12학년 전 과정을 홈스쿨로 마친 리치몬드에서 온 학부생이었다. 데니는 자신 뿐 아니라 두 동생들도 홈스쿨을 했다고 하며 자신이 홈스쿨을 한 것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데니의 이야기를 통해 데니보다는 데니의 어머니에 대해 관심이 갔다. 나는 데니에게 어머니가 참 훌륭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데니는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나는 데니에게 어머니가 무엇을 전공했는지 물었다.
“나의 어머니는 고등학교만 나왔습니다.”
당시는 미국에 정착하던 단계였으며 아이들이 어릴 때라서 교육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어서 ‘데니의 어머니가 놀랍다.’ 라는 생각만으로 흘러 보냈다.
그동안 아이 넷을 키우면서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돌아온 후 아이들을 한국 학교에 보내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학교교육은 교육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왜 학교에 보내는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학위 같은 명예를 갖기 위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과연 그런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서 학교교육이 많은 도움이 되는가? 이런 회의들이 새로운 대안교육을 생각하도록 한다.
위에서 열거한 물음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교교육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연 학교는 좋은 성품의 사람을 만들어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사회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고 있는가. 오히려 학교는 역행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현상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인간존재를 생각하기 보다는 과다한 경쟁을 유발시킨다. 숭고한 교육정신에 맞는 인재양성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학교교육의 이러한 불만으로만 홈스쿨을 시작할 수는 없다. 현실 부정은 단지 부정일뿐이지 어떤 교육 대안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 비판은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게 한다. 그 대안 중에 홈스쿨이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쉽게 시작할 수 있으며, 잘만 활용하면 비용면에서도 많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내가 홈스쿨을 시작하게 된 것은 비판적인 생각만은 아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지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데니의 어머니가 세 명의 자녀를 홈스쿨로 길러낸 이유와 같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데니의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확신에 차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의 당찬 가치관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다.
홈스쿨은 교육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에 눈을 뜰 때에 모색해 볼 수 있다. 그 가치관은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 가치관으로 시작한 홈스쿨은 신대륙 정복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그 시작으로 발견한 미지의 대륙은 결코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대륙에 대해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말이다.
4. 내가 본 학교
아이 넷을 키우면서 처음에는 학교에 보냈다. 부족한 인성교육은 집에서 담당한다는 생각으로 저녁마다 가족 디보우션 시간을 갖곤 했다. 텔레비전은 아예 없애버리고 절제의 훈련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영향력이 문제였다. 옳고 그름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가 욕하는 교실에서 자신은 욕을 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비교 우위에 두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윤리적으로는 배울 필요가 없는 착한 아이라고 우겼다.
주변에 몇몇 교사들에게 학교교육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들도 교육의 현실에 한탄만 하고 있었다. 대도시 중심가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한 교사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과목들은 학원에서 공부해 오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런 교육 환경에서 인성교육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라고 했다. 과도한 체벌문제가 신문 지상을 도배하던 때라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이니 윤리교육이니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영악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어느 날 큰 아이 은비가 학교에서 깨어진 안경을 들고 왔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얼굴에 약간의 상처까지 있었다. 그동안 은비는 학교에서 친구의 따돌림이 있어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왔지만 싸움이 일어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생님의 반응이었다. 학교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뿐 아니라 생활담당 선생님, 교장 선생님 등 많은 교사들을 만났다. 그 일로 나는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적과 교실현장의 차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교과 과목에 대해서 깊이 배울 수 없으며 인성교육은 생각지도 않는다면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으로 힘들어 하며, 욕을 입에 담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조차도 되지 않는데 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학교교육의 부실함을 넘어, 공교육이 참교육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5. 학교 영향력
그 무렵 나는 영향력과 자녀교육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하였다. 배움이란 영향력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는 영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교사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 가르친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모자라는 공부는 학원에서 하면 되고, 더 필요한 것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님들에 대해서 물으니 개념 없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하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평균 이상의 윤리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교사상 치고는 너무 낮았다. 아이들이 그런 선생님들로부터 어떤 거룩한(?) 영향력을 받을까.
사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영향력은 선생님으로부터 보다는 또래로부터 받는 영향력이 더 크다. 또래 속에 속하기 위해서 또래가 사용하는 유행어를 사용해야 하며 또래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따돌림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또래와 어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람이란 좋은 영향력을 골라서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근묵자흑이란 말이 있듯이 가장 많이 접하는 것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받는다. 가장 많이 보았던 광고화면을 연상하며 제품을 고르듯이 아이들도 학교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환경인 또래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가족 간에 대화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와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들은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여 잊고 싶어 한다.
아이들이 받은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습관이 되며 그것이 굳어서 성품으로 형성되어간다. 문제는 그것뿐 아니다. 학교에서 받은 영향력의 포만감으로 가정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정의 좋은 영향력을 무시하며 부모를 공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것은 어른들이 보기엔 심각하지만, 아이들은 또래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너무도 태연하다.
5. 홈스쿨 영향력
홈스쿨이란 이름 자체가 좋은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하는 홈스쿨은 학교를 세우는데 비교한다면 공터에 불과하다. 어떤 홈스쿨은 그 공터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홈스쿨을 세우려고 작정했으면 터를 닦아야 하고 건축물 설계를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건학 이념과 교과 과정도 정하여야 한다.
사실 모든 가정은 각 가정마다 좋든 싫든 홈스쿨을 실시하고 있다. 그 학교는 어떤 학교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학교다. 단지 조직화 되지 않아 그 영향력의 진가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시골의 초가집에서 받은 부모 영향력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부모님이 하신 말씀과 행한 일들을 떠올리며 참고한다. 나의 부모님은 시골의 농사꾼이었지만 어떤 스승이 준 가르침이나 어떤 책의 가르침보다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이것을 홈스쿨을 할 때까지 깊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가정은 굳건한 홈스쿨의 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터는 사람이 만든 터가 아니라 하늘이 각 부모에게 내려준 천륜의 터이므로 누구도 흔들 수 없다. 그런데 그 터를 묵혀 두었으니 아무 씨앗들이 날아와서 싹을 틔워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 터를 정리하여 화단을 만들어 좋은 영향력이란 물을 주어 아름답게 가구는 것이 홈스쿨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와 함께 지낸다면 학교나 나쁜 또래로부터 받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우리 집 아이들도 홈스쿨을 하고 난 이후 점차로 유순한 아이들로 변해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자신의 잘못을 학교의 못된 친구들과 비교하며 변명했는데 홈스쿨을 하니까 좋은 비교 대상을 찾았다.
홈스쿨의 장점은 나쁜 영향력을 차단하고 좋은 영향력을 배가할 수 있다. 이것이 홈스쿨의 가장 큰 장점이다. 홈스쿨의 성공여부는 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홈스쿨 교장(부모)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러나 모든 홈스쿨러들이 이것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 홈스쿨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배우며 가족 구성원이 모두 학생이다
홈스쿨을 시작하려는데 가장 걸림돌은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홈스쿨을 하고 있는 가정을 들여다보아도 그렇게 많이 참고 될 만한 것이 없다. 용기를 내어 시작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홈스쿨이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지도(Coaching)라고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그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완성된 것을 주려는 태도 때문이다. 부모들의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지혜롭게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못된다. 아이들은 안락한 집에서 인스턴트 푸드를 먹으면서 과정을 배우지 못한 절름발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과정을 배우는 수고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좋은 교육은 어릴 때에 부모님과 같이 농사를 지은 경험이다. 초봄에 볍씨를 소독해서 못자리를 만들어 뿌리는 수고를 눈으로 보았다. 모가 자라는 과정도 보았다. 때로는 볍씨가 못자리에 달라붙지 않은 현상 때문에 다시 못자리를 하는 경우도 보았으며 나도 그 어려움에 한 몫 거들었다. 어린모를 논에 심어 놓으니 죽어버리는 것처럼 노랗게 몸살 하는 것도 보았다. 벼가 여름 더위와 소낙비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보았다. 태풍의 질투에 황금 들녘이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도 견디는 벼들을 보았다. 나는 평생에 그 보다 좋은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교과서도 시간표도 없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어떤 교사에게서도 배울 수 없었던 보배 같은 과목이었다.
부모님은 매년 농사에서 성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난에 허덕이며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했다. 당시의 나의 홈스쿨은 힘들고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나의 맷집이 지금도 도전하는 인생을 사는 밑거름이 되었다.
홈스쿨로 완전한 학교를 만들 수는 없다. 홈스쿨은 거친 돌밭과 황무지를 개간하는 과정이다. 하늘이 준 밭을 부모 혼자가 아닌 아이들과 함께 개간하며 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기본적인 과목을 깊이 배울 수 있다.
나는 홈스쿨의 교장으로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아이들 앞에서 하는 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주 ‘아빠는 많이 모른다’, ‘아빠는 부족하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것은 교사로서 부족한 자질을 모면해 보고자하는 방편이 아니다. 그 말은 진실이며 나도 노력하며 배우고 있다는 고백이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내가 물어오는 벌레가 부족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물어 오는 벌레가 입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나의 입을 주목하는 처마 밑의 새끼제비들이다. 나는 새끼제비들을 위하여 지금도 열심히 벌레를 잡으려고 한다. 40중반의 나이에 아이들과 함께 중국에 온 것도 또 다른 것을 배우고자 함이다. 만들어가는 학교니까 모르는 것은 배우고, 부족한 것은 채우면 된다. 나는 너무도 심플한 이 학교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
7. 창의력을 증진할 수 있는 홈스쿨
인류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창의력으로 시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어린 시절의 교육 환경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그들은 자율적인 환경에서 고독하게 지낸 인물들로 하늘과 대지의 위대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랐다는 점이다.
링컨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책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지만 자신만이 다닐 수 있었던 위대한 개인학교가 있었다. 그는 그 학교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했다.
에디슨은 관습화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였다. 그는 공교육에서 내쳐진 후 자신만의 학교에서 여러 실험과정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지금까지 입시를 위한 지식교육에만 총력을 다해왔다. 지식교육 중에서도 암기중심의 교육에만 열중했으므로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을 짚어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창의성이 인간의 지적 자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 입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창의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창의력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창의력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창의력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다. 창의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로 인간성을 회복할 때에 가장 효과를 발휘하는 능력이다. 창의력은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찾아가는 각 개인의 고독한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은사이다. 이는 누구도 대신해서 찾아 줄 수 없는 개성이다. 창의력은 과정이나 시스템으로 만들어지는 수고의 산물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보이지 않으나 살아있는 스피릿을 통해 생기는 것이다.
창의력이 있는 인물들은 창의적인 사고를 통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의 질을 개선한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미래에 직면하게 될 각종 문제를 해결하여 삶의 질을 높인다.
홈스쿨은 창의적인 인물들을 만들기에 적합하며 홈스쿨 정신을 이해하게 된다면 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창의적인 학교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창의성 계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열정이 아니라 창의력을 싹 띠우기 위한 창의적인 게으름, 나아가 창의적인 고독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8.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쉬운 홈스쿨
한 친구의 아들인 기혁이가 홈스쿨을 했다. 학교에 적응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 기혁이가 홈스쿨을 하는 것은 의외였다. 기혁이를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은 나로서도 모험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기혁이 어머니는 홈스쿨에 대한 사전 준비가 없었고, 분명한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히 말리려고 했지만 기혁이 어머니의 분명한 소신이 있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혁이 어머니는 소신은 간단한 원리였다. 고등학교에 가면 과도한 경쟁으로 힘을 낭비하고 나쁜 영향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혁이가 대학을 가거나, 대학을 졸업해도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체득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빨리 익히는 것이 좋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엄마는 아들을 믿는다고 했다.
기혁이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어머니는 간단하게 말했다.
“첫 해는 기혁이가 놀기만 했습니다. 물론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집중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놀기가 지겨울 때는 알바를 하기도 하고 심심하면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어떻게 하던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2년째는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모자라는 공부를 조금씩 하며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습니다. 부족한 과목은 스스로 하거나 EBS같은 동영상 강의로 공부를 했습니다. 2년 동안 시행착오를 하더니 3년째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더군요. 정말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공부를 통하여 도전하며 성취감을 느꼈으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그 해에 기혁이는 수능의 4%안에 들었다. 불행이도 높은 대학에 지망해서 낙방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혼자서 일 년을 더 공부해서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1등급을 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더 좋은 성적을 내려고 타율에 자신을 내던진다. 사관학교식의 기숙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교실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놓는다고 한다. 어떻게든 좋은 성적만 내면 된다는 결과 지상주의의 교육을 하고 있다.
기혁이가 자기주도 학습을 통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선택이라도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혁이가 자기주도 학습을 통해 어른의 과정을 혼자서 체득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다.
기혁이의 스스로 학습에는 그의 부모가 믿고 준 힘이 컸다. 일부 부모들은 아이들이 잠시 노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보내어 무엇이든 배우게 한다. 그런데 기혁이 어머니는 오히려 반대의 교육을 한 것이다.
기혁이의 어머니는 겉으로 보기에 기혁이를 놀게 하고 내버려 둔 것처럼 보이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을 생각하며 집에서 기혁이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며 부모의 가르침을 스스로 찾게 한 것이었다. 이에 부응하여 아들은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죽으면 살리라는 성경의 역설처럼 교육도 그러한가? 놀게 하라 지겨우면 공부할 것이다!
9. 홈스쿨 과정 이해
큰 아이 은비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홈스쿨을 시작했다. 선택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작 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은비가 힘들어 하는 부분이었다. 시험도, 숙제도 없고 놀아도 간섭하지 않는 자율학교. 이 학교는 사춘기의 은비에게는 무료하였고, 공해와 독소가 없으나 너무나 심심하고 지루한 학교였다.
사람이란 길들여진 대로 사는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홈스쿨을 시작하기 전에 은비는 학교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다. 학교에서 주어진 숙제를 했고, 시험범위에 따라 시험을 치고 성적을 받으며 성취감을 맛보았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시내를 다니며 쇼핑을 했다. 그런데 새로 입학한 학교는 온통 자유만 있으니 오히려 그것이 귀하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너무 많은 장난감을 쌓아 놓고 심심한 아이처럼.
인간 존재란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내성이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은비는 스스로 고독을 이기고 이용하는 법을 배워갔다. 은비 역시 기혁이가 배워 갔던 스스로 학습을 자기 체질에 맞추어 갔다.
은비의 가장 큰 문제는 또래 친구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교회 모임이나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는 친구가 없었다. 이런 문제는 홈스쿨 클럽이나 처지 홈스쿨 같은 데서 해결할 수 있었으나 가까이서 홈스쿨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또래 친구가 없는 은비에게 친구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 주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또래(나이)를 넘어 사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친구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친구는 아주 많으며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 은비는 이런 정의를 이해했으며 아내와 내가 은비의 친구로 나섰다.
나는 은비와 함께 등산을 하면서 체육을 대신했고, 아내는 시장을 가거나 쇼핑을 하면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주중에 날을 잡아 영화평론을 같이 하기도, 독후감 발표를 통해서 그동안 배운 것을 정리하는 시간도 가졌다. 철학자들에 대해서 연구해서 나누어 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은비는 홈스쿨을 시작하던 첫 해 8월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수능을 준비했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 수학은 포기하고 남은 과목에 전념했다. 전 과목을 동영상 강의를 통해 익혀 나갔다. 우리 부부는 그런 딸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해 가을에 은비는 수능을 치렀다. 나름대로 좋은 도전이었다. 비록 대학에 원서를 넣진 않았지만, 자신의 진로를 체감 있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가정은 지난 해 6월에 중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하던 홈스쿨을 중국에서 그대로 하니 아무 문제가 없다. 아이들은 중국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 외국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고등학생을 둔 가정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홈스쿨을 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은비는 올 가을 학기에 북경의 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언어과정을 배우는 대학에서 미리 대학 생활을 맛보았으며, 그 반에서 반장으로 리더십도 경험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아 성취감도 맛보았다. 이제 남은 반년 동안 준비하여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꿈꾸는 미국으로 전학(Transfer)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하고 있다.
10. 홈스쿨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들
홈스쿨을 하면 공교육으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순종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순종이라는 이론으로 성경을 해석하였고, 한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 책은 ‘요셉, 미라가 되다’라는 제목으로 요셉의 지혜가 순종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요셉은 아버지의 지혜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어릴 시절, 아버지께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요셉은 비록 17세까지 홈스쿨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순종의 정신은 당시 중동의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남았다.
홈스쿨은 부모의 지혜를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다. 이를 전해주기 위해서는 순종의 정신을 아이의 마음속에 넣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또래들과 어울려 불순종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익혀 순종하는 것을 어색해 한다. 홈스쿨을 하면순종의 연습을 쉽게 할 수 있다.
자연의 원리는 인과율로 엮어져 있다. 그 법칙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순종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인과율을 통해서 과학을 배운다. 순종하지 않는 아이는 깊이 배울 수 없고 자연과 사람속의 비밀을 알 수 없다. 순종하는 아이는 자라서 직장에서도 잘 적응하며, 결혼을 해도 좋은 배우자가 되며,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어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둘째, 좋은 윤리관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다. 윤리나 도덕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된 것은 도시문화가 만들어낸 공해이다. 농경문화 속에서는 윤리 도덕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가족 중심의 노동을 통해서 자녀들은 부모의 지혜와 가문의 좋은 전통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쁜 도시문화 속에서 아이들을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지만 인간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고, 윤리 도덕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좋은 윤리관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좋은 가치는 미디어나 친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교육의 유연성이다. 아이들을 수업 시간표에 맞추면 교육의 유연성을 잃어버린다. 더 중요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좋다.
우리 부부는 ‘민주화’ 라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광주 민주화 묘역을 찾았다. 아이들과 일부러 일정을 만들고 미리 조사해서 눈으로 본 민주화 공원은 자유라는 개념을 뇌리에 깊이 박히는 체험을 하게 했다. 영화 평론을 위해서 온 가족이 같이 영화 관람을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족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쉽지 않다. 우리 가족이 북경으로 훌훌 떠나 온 것도 유연성의 또 다른 선물이었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참 많지 않은가. 문제는 발견하지 못하고 좁은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홈스쿨 나름대로 창의성을 발휘하면 얼마든지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1. Home School Club
홈스쿨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첫 번째 어려움은 또래 친구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또래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으면 더 많은 층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지만 아이들이 경험해야 할 또래문화도 귀한 것이다. 둘째로 홈스쿨은 집과 학교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또한 체육 같은 교과를 통해서 아이들의 체력을 길러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홈스쿨을 하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것에 대한 대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들이 여러 곳에서 계발되고 있다. 근래에는 홈스쿨들이 모여서 함께 홈스쿨을 한다. 미국에서는 홈스쿨러의 어머니들이 요일을 정하여 맥도날드나 같은 곳에서 교제하곤 한다. 장소를 정할 때는 반드시 놀이 시설이 있는 곳을 정하여 또래끼리 놀면서 사회성을 익히고 체력훈련을 할 수 있게 한다.
좀 더 계획적으로 한다면 공부방 같은 오피스텔을 빌릴 수 있다. 그 곳에서 홈스쿨러들이 모여서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홈스쿨러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장소를 렌트할 때에 재정적인 책임을 질 사람은 누구며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 하는가 등의 예상되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장 쉬운 것은 Church Home school이다. 홈스쿨러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다. 이는 가장 모이기 쉬운 형태이다. 같은 신앙을 가진 홈스쿨러들끼리의 공통분모는 쉽게 결속을 다질 수 있다. 교회에서 모이면 영적인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홈스쿨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발전되면 창의적인 대안학교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홈스쿨러들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홈스쿨의 정신을 계속 지탱해 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같은 공동 목표를 가져야 한다.
Club을 운영하면 많은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모임을 매일 한다면 아쉬운 부분인 또래끼리의 모임을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독서 스쿨을 적당히 운영하여 독서 토론이나 영화평론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다. 어떤 Church Home school에서는 저자를 모셔서 질문하게 하고 직접 저자의 싸인을 받으며 공교육에서는 하기 어려운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클럽 홈스쿨에서도 홈스쿨의 주체는 클럽을 지도하는 학부모도 아니고 교회의 목사도 아니다. 홈스쿨의 주체는 부모이며 모든 책임은 부모가 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홈스쿨의 교장은 홈 오너(Home owner) 즉 아버지라는 것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지식이 아니라 아버지의 정신을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홈스쿨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미국영어교육 이대로는 안 된다(III) 부산에 있는 모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어느 외국인 영어교사가 국내에서 발행하는 모 영자지에다가 ‘한국의 모든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 이런 일들을 학부모들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편지형식으로 기고한 글을 읽어본 일이 있다. 내용이 너무 절절하고 영어교육을 논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 ‘전시용 수업’이 왜 필요한가 “저는 문교부가 주관하는 EPIK 프로그램 하에서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외국인 교사입니다. (중략)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지만 한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고 나갈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다는데 대해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맡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있어 교육자 된 의무감에서 몇 가지 말씀 드립니다. 2007년 3월부터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인 영어교사들은 최소 3회 학교 교장, 교감, 때로는 교육공무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의 교육현장 참관 내지 시찰을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참관이나 평가에 대해서 이견(異見)이나 반대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제도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육당국의 평가기준과 철학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어서 여기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말이 기준(Standard)또는 원칙이지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일종의 ‘쇼’를 위한 수업(Show-case-lessons)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쇼를 위한 수업’을 위해서 미리 예행 연습까지 하니깐요. 누구를 위한 ‘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요. 한번은 나도 모르게 공개 수업경쟁(ENSI Open Class Contest)속에 들어가게 되어 그 ‘쇼 수업’의 기준에 의하여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고서 기겁을 했지요.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거부했을 것입니다. 물론 저로는 그것이 ‘Contest’이던 ‘Show’이던 상관없이 정상수업을 했을 것입니다만. (저로서 한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그 콘테스트가 수영복 차림의 콘테스트가 아니었던 거지요. 저는 체중이 좀 나가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그 콘테스트에서 일등한 교사에게 2008년부터 기존 봉급에다가 월 10만원을 인상해준다고 하지 않겠어요? (중략)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제가 해당지역 교육담당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콘테스트에서는 빼달라고요. 다시 분명히 해두지만, 제가 가르치는 수업을 참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환영하겠어요. 교육공무원이든, 시 교육감이든, 정치가든, 학부모든, 언론인이든, 동료영어교사든 누구든지 언제든지 말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가르치는 방식에는 숨길 것도 없을 뿐더러 죄송하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은, 한국인 영어교사 또는 외국인 영어교사 누구와 비교해도 제일 효과적이고 월등한 수업임을 자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나의 영어교실은 절대로 전시용 수업(Show-case-lessons)목적에는 내 줄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물론 다른 동료 교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건 안 받아들이건 제가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로서는 제가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 가능한 최선, 최고의 영어수업을 해줘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애쓰는 선생과 애쓰는 학생이 있을 뿐 내 교실에서는 경쟁을 한다든지 콘테스트를 할 겨를도 여유도 없습니다. 한가지씩 배워가며 한가지씩 이루어갈 뿐이지요. 만일 참관자들이 와서 내가 수업하는 것을 참관할 때면 여러 가지를 볼 수 있게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두드러진 모습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즉 가르치려고 애쓰는 선생(The teacher struggling to teach)과 배우려고 애쓰는 학생들(The students struggling to learn)이지요. 그렇습니다. 선생인 저는 가르치려고 애쓰고 학생들은 배우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teaching 이고 learning 이 아니겠습니까? 끊임없는 노력 즉 어렵고 힘들고 시간이 걸리고 하지만 결의와, 헌신과, 근면과, 훈련과 인내를 통해서 마침내 긍정적인 결과를 거두에 되는 것이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내 수업시간이 교육 공무원에 의해서 전시 목적으로 이용(hijack)당하는 것을 허락 치 않을 것이며 내 교실이 교육 책임자나 행정 당국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곡예장(circus)화 되는 것을 결단코 허락 치 않을 것입니다. (중략) 여기서 한가지 학생의 부모님들께서 잘 모르고 계시리라 짐작되는 사항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부산의 공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영어교사 한 사람이 고용될 때 마다 매년 5,000만원에 해당하는 예산이 배당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5,000만원 중에는 교사의 봉급과 주택수당과 왕복비행기 값과 계약 만료 시 지불되는 한달 분 보너스가 포함됩니다. 세금을 물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있어서 5,000만원이란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그만한 가치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확인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른바 ‘전시용 수업’ 이나 ‘경쟁 수업’ 같은 것은 교육의 품위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중략) 일부 교육공무원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 철학 때문에 영어 교육에까지 승자 패자를 가려내기를 좋아하는 야만적인 진화론적 제도를 조성 하는 결과를 저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여기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영어 교실에서 공부하게 될 학생은 질적으로 최상급의 영어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시 목적의 수업’ 또는 ‘경쟁 수업’ 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항상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 속에서 정직한 교육, 정직한 수업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물론 힘들어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정직하게 애쓰고 참고 노력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이 가야 하는 교육의 여정의 한걸음 한걸음을 지켜보며 도와주는 선생으로써의 책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 그들 방식 믿고 맡겨라 여기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 좀 해야겠다. 1976년 주 카이로 공보관으로 발령을 받고 초등학교 5학년 다니는 큰딸과 6살짜리 둘째 딸을 데리고 임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보다 제일 큰 걱정은 영어 한마디 못하는 큰 딸이 어떻게 학교생활에 적응할까였다. 걱정이 된 나머지 곤히 자는 애를 깨워 학교 가기 전 1시간 동안 내 나름대로 교과서에 따라 (미국 학교 해당학년 교과서)매를 때려가면서 가르쳤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전력이 있는지라 물론 재래방식으로 밀어붙이기 교수법이다. 단어 외우게 하고 문법 설명하고 발음 기호에 따라 발음하고…하는, 말하자면 쑤셔 집어 넣는 방식으로 몇 주일 가르쳐봐도 통 느는 것 같지 않으니 내 고함 소리만 점점 커지고 애는 찔찔 울기만 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영어 한마디 못한 채 학교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있을 애를 생각하니 사무실 일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한 한달 즘 됐나…어느 날 딸이 다니는 학교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준 아버지 되시지요?” “그렇습니다만...” “준의 영어교습을 책임지고 있는 ○○선생인데요…” “준이 영어를 못해서, 선생님께서 얼마나 애태우시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집에서 보충수업을 시키고 있는데 도무지 발전이 없으니 죄송합니다. 그러니 잘 부탁 드립니다.” “제가 오늘 아버님께 전화 드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고 아버님께 간청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무슨 말씀인데요? 말씀하시지요.” “지금 준의 영어 능력 향상에 가장 해가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 아버님께서 집에서 하고 계시는 그 보충수업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 “제발 손 떼시고 저희들에게 맡기세요, 몇 개월만이라도 우리방식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믿고 맡겨주세요. 아시겠어요?” 그 선생의 당돌함에 솔직히 기분이 좀 나빴다. 그러나 깊은 관심과 그의 진솔함을 감지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아침에 하던 보충수업을 그 날로 그만뒀다. 한 3개월쯤 지났다 준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준이 친구아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둘이서 장난을 치면서 떠들어대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영어가 아닌가. 뭐라고 할까. 조용했던 화산이 터져서 용암을 분출해 내는 것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영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봤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영어에 관한 한 나는 준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 - 사교육 조장하는 언론 영어 교육 강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져가는 가운데서도 새 정부의 영어교육에 대한 개혁의지는 확고한 것 같다. “고교만 졸업해도 웬만한 생활영어를 거침없이 할 수 있게 하겠다” 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가 하면 1년에 15조원이라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과 중구난방의 교과과정과 영어 교사 채용 및 관리의 난맥상 등 영어 사(私)교육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이고 비현실적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앞으로의 영어 교육을 공교육 중심으로 발전시켜 나갈 목적으로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까지 준비해놓고 있는 마당에 지난 1.22 과 1.23일 양 일간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각각 12면과 16면에 걸쳐 전면광고와 함께 ‘기숙학원’에 대한 대대적 특집기사가 게재되어 그렇잖아도 자녀들의 영어 문제로 가슴을 앓고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양 일간지의 ‘기숙학원’ 에 대한 특집기사는 물론 영어 교육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새 정부의 교육이념이나 방향에 역행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특집기사여서 관심 있는 부모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다. 전(前)직장인이고 3남매(고1, 중2, 중1)를 슬하에 두고 있는 어느 어머니가 이 특집을 보고 해당신문 편집국장 앞으로 보낸 서한의 일부를 여기서 공개한다. : - 누구를 위한 특집기사인가 “수고 많으십니다. 귀지의 구독자 입니다. (중략) 안 그래도 요즘 자식들의 사교육비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어서 새 정부가 앞으로는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으로 영어 교육도 공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중앙일보 에서 “새로운 도전. 기숙학원 특집” 제하에 12면에 걸친 대대적인 특집을 낸 것을 보고 기가 막혀 말을 못할 지경입니다. 아무리 광고 받아서 쓰는 특집이라고 하지만 장장 12페이지에다가 “아이들 수능점수 올리려면 기숙 학원에 보내세요” 라는 특집을 다루다니요, 광고주 위주로 그들 장사 많이 시켜주는 기사가 가득히 실려있더군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장단점에 대한 분석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무조건 보내면 점수 오른다는 얘기만 썼더군요. 기숙 학원은 사교육 아닙니까? 제가 알기론 한달 보내는데 몇 백만 원이 든다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특집기사입니까? 돈 있는 부모들? 돈 있는 부모들은 애들을 해외유학 보내겠지요. 왜 그런 ‘기숙학원’에 보내겠습니까? 그럼 돈 없는 부모들? 돈 없는 부모들이 어떻게 그런 액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돈 대충 있는 부모들입니까? 저는 돈 대충 있는 부모 중에 속한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신문기사 믿고 내 자식을 비싼 기숙학원에 보낼 만큼 어리석은 엄마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광고주들을 위한 특집기사입니까? 특집기사에 게재된 기숙학원들 오늘 문의 전화 몇 통이나 받았다고 하던가요? 이런 기사가 객관적이고 옳은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요즘 엄마들 매우 현명하기 때문에 신문기사 하나 가지고 성급한 판단을 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교육 현실이 엉망인 까닭에 내 자식 교육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이런 기사를 읽고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라도 걸어보는 엄마들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어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바로잡아 나가려면 정부, 학교, 학부모들만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다. 언론도 매우 중요한 역할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특집기사를 내시면서 귀지의 책임 있는 분들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또 마음 아파하고 갈등하게 될 학부모들과 아이들의 형편에 대해서 잠시나마 생각을 해보았는지요? 좀더 책임 있는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수고하십시오.” - ‘글로벌 스텐다드’ 교육부터 영어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곁길로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영어 교육이든 일반교육이든 정작 따지고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에 있다. 영어교육을 포함해서 우리의 교육이 잘못돼 왔다는 것은 가치관의 혼돈에 기인한다. 우리 사회를 다원가치사회(multi-value society)라고도 한다. 우리의 가치 체계 속에 한국전통적 가치관, 일본적 가치관, 중국적 가치관, 미국적 가치관 등이 혼재(混在)해 있다 보니 교육이념도 교육철학도 혼란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선진 국가의 요건으로써 영어교육의 혁신이 불가피해졌지만 선진적인 가치관 내지 사고체계 속에서만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영어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선진적인 가치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글로벌•스텐다드(Global standard)이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교육 목표, 교사 채용 및 훈련 방침, 교육환경조성, 교과과정, 능력 평가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돈을 많이 써서 교사를 증원하고,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고, 조기 교육을 하면 영어는 잘하게 될지 모르지만 영어만 잘한다고 반드시 선진국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월간조선> 웹사이트의 ‘전문가 컬럼’난 ( http://monthly.chosun.com/ept/main.asp )에 <필자소개> 차 윤: (주)CPR 대표ㆍ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1932년생. 해군사관학교ㆍ美 플로리다대학 졸업.美 워싱턴대 地政學 석사/ 해군사관학교 사회인문과장(地政學). 해군대학 교수, 국토통일원 교육 담당관, 정치외교정책담당관, 한국홍보협회 홍보국장, 문화공보부 주카이로 공보관, 주일본 수석공보관, 美 메릴랜드 대학 교수, 미국영화수출협회(AMPEC) 한국대표 등을 역임/현재 (주)CPR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첫댓글 홈스쿨에관한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혹 경험이있으신 분의정보공유를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곤명한인도서관> 관장입니다. 이곳 곤명에도 대학진학을 앞에 둔 학생이 많은데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귀한 자료 잘 퍼갑니다. ~~~ 그리고 부탁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더 좋은 정보 가끔씩 저희 도서관 카페(daum cafe)에도 부탁드립니다.
제 카페에 오시면 중국 교육에 관한 글을 보실 수 입ㅆ습니다 퍼가시지요. 중국유학성공 14가지 열쇄 라는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