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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폐도화 된 옛 경부선의 밀양 상동터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으며, 이 길이 원래는 영남대로였다. 밀양강을 벗삼아 걷는 맛이 일품이다. |
- 100년 역사 아치형태 상동터널
- 짧지만 통과 뒤에는 깊은 여운
- 청도천 건너 내호리 들어서니
- 옛 극장·흙담 정미소 등 오롯이
- 1960년대 모습 재현해 놓은 듯
- 신도리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 청도읍 길목 고수리 납닥바우
- 옛 길손들 만남의 장소·쉼터로
큰 길, 새 길, 잘 닦인 길을 선호하는 요즘이지만, 옛길이 오래되고 나른한 전통 마을에 뜻밖의 생기를 불어넣는 묘약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경남 경북의 경계인 밀양 상동면의 옛 유천역 일대와 청도 유천리(현 유호, 내호리) 주변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옛길 찾기가 아니었다면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던 곳. 이를테면 옛길이 옛 마을을 불러낸 셈이다.
■옛길과 철도의 조우,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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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군 청도읍 유천마을의 거리 풍경. 옛 극장건물과 정미소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밀양 제사고개를 넘어선 영남대로는 24번, 25번 국도가 만나는 춘복마을까지 1km 정도 들판 길을 가다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긴늪유원지를 엿보며 밀양강(북천수)의 밀산교를 지나 25번 국도를 따라 청도 쪽으로 향하는 길은 주로 장꾼들과 민초들이 이용했던 영남대로다. 이 길은 외가곡~길곡~가곡~금곡원~상동나루(현 상동교)~구역마을~관마을~청도 유천으로 이어진다. 외가곡 마을에는 보두꾼과 마꾼(馬軍)들이 쉬어간 데서 유래했다는 보두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춘복마을에서 밀산교를 건너지 않고 곧장 신안리~안인리~유천 방면으로 가는 지름길도 있었다. 안인리 빈지소 유원지에서 옥산리까지 약 2㎞는 1945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폐도화한 곳. 철도가 놓이기 전엔 이 길이 영남대로였다. 옛길이 철도로, 다시 자동차 길로, 최근엔 걷기 길로 바뀌고 있다 하니, 길의 유전(流轉)이다. 걸어보니 운치 만점이다. 아래는 물길, 위로는 벼랑, '현대판 잔도'가 따로 없다. 강변엔 벚나무와 감나무가 지천이다. 100여년 전에 건설된 상동터널 2개가 온전히 남아 있고, 쓰다만 침목이 이정표인양 길가에 박혀 있다.
상동터널은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강변의 벼랑을 뚫어 견치석(옹벽용으로 사용하는 가공한 돌)을 촘촘히 놓고, 적벽돌을 아치 형태로 쌓았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터널은 각각 40m, 60m로 짧지만, 통과 뒤의 여운은 길다. 동행한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51) 운영담당은 "옛길과 철도(폐선), 자동차 도로가 완벽하게 포개진 길이어서 도로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말했다.
■흐르는 세월 품은 유천
옛길은 상동교가 놓인 상동나루와 구(舊)역마을, 관(館)마을, 옥천리를 지나 청도땅으로 넘어간다. 구역마을은 지금은 사라진 옛 경부선 유천역 때문에, 관마을은 관리들이 묵었다는 유천역의 역관인 유천관(楡川館)의 존재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다.
25번 국도를 따라 청도땅으로 들어가면 유천리(현 유호리와 내호리), 조들, 신도리, 원리, 고수리를 지나 청도읍내에 닿는다. 주렁주렁 달린 반시처럼 마을마다 사연이 다채롭다.
청도 유천(楡川·일명 느릅내)은 영남대로가 기억해야 할 마을이다.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삼각지에 위치하며 노루목고개, 동바우, 월마 등 신라 패망의 설화가 흐르고, 고려 조선시대엔 큰 역원이 자리했다. 동창천 상류에 운문댐이 막히기 전까지 은어가 많아 청도팔경 중 하나로 '유천어화(楡川漁火)'가 꼽히기도 했다.
청도천을 건너 내호리로 들어가자 입구에 오누이 공원이 길마중을 한다.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이호우, 이영도 남매를 추억한 소공원이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 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이영도의 '달무리'가 여수를 자극한다. 곁에는 오빠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이 화답하듯 시비로 서 있다.
이들 오누이가 태어난 내호리의 한옥은 건축사적 의미 때문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구석구석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든 모습이다.
진짜 볼거리는 시장통에 펼쳐져 있다. 흙담과 여닫이 나무문이 달린 정미소, 돌과 콘크리트, 판자를 덧대어 만든 극장건물, 양조장을 개조한 사료판매소, 지붕에 간판을 붙인 철공소…. 그리고 중앙소리사, 구생당약국, 수련다방, 의용소방대…. 이건 흡사 1960년대를 재현해 놓은 영화세트장이다. 그런데 실제였다.
문이 열린 영신정미소에 들어서자, 나락과 등겨, 먼지와 기름이 뒤섞인 특유의 정미소 냄새가 와락 안겨들었다. 진한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다. 정미소 주인 김말순(60) 씨는 "유천에선 거의 유일하게 돌아가는 방앗간이여. 한 80년은 됐다고 혀. 방앗간에 먼지가 돌아야 우리가 먹고 살아"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청도군민인 개그맨 전유성 씨가 오래전에 문 닫은 저 극장건물을 탐낸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귀띔했다.
유천은 이름처럼 강가에 느릅나무를 깊이 박고 흐르는 세월을 품은 채 21세기를 나고 있었다. 길로 번성한 역마을 위로 하늘처럼 높다란 교각을 받힌 신대구부산 고속도로가 휑하니 지나간다. 해석하기 난감하지만, 어쨌거나 유천 시장통만은 그 자체로 향수가 숨쉬는 근대문화의 거리로 살려야 할 것 같았다.
■새마을 정신의 발상지
신도리는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 새마을 정신이 발아한 곳이 영남대로를 끼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때는 1969년 8월 어느 날. 전용열차에 몸을 실은 박정희 대통령은 수해 복구 현장 시찰을 위해 부산으로 가던 중 청도 신도리 부근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님자, 기차 세워!" 당황한 비서진은 기차를 세웠고, 기차는 몇 백m를 후진하여 신도리에 닿는다. 당시 신도리 주민들은 수해를 겪은 후 협동 단결로 마을길을 새로 닦고 스스로 환경 개선사업을 하고 있었다. 순간 박 대통령의 뇌리에 '그래, 이거다!'는 영감이 스쳤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으로 승화한다.
청도군은 지난해부터 신도마을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옛 '신거역'(신도리, 거연리를 합친 역명)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신도리 정수붕(65) 이장은 "새마을 발상지라 하여 우리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내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찾고 있으며 2014년 농촌테마파크 사업이 끝나면 새마을 정신의 성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인의 쉼터, 납닥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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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를 오가던 길손들이 쉬어갔던 경북 청도군 고수리의 납닥바우. 박창희 선임기자 |
철도와 국도를 벗하며 원리를 지나 청도읍으로 향하다 보면 고수리의 납닥바위를 지난다. 청도역 바로 옆이다. 걸어서 대구에서 반나절, 밀양에서 반나절 되는 곳이다. 물맛 좋은 찬물샘(冷井)이 있고, 50~60명이 함께 앉을 수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헤어지는 길손들은 "납닥바우에서 또 만나세"하고 떠났고, 뜻하지 않게 만난 길손들은 얼싸안고 상봉을 기쁨을 나누던 자리였다. 한양의 과거 소식이나 장꾼들의 물건 정보도 이곳에서 모이거나 흩어졌다. 역로의 이런 쉼터가 있어 전국의 길들은 따로 나 있었지만 모두 통할 수 있었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가 이곳의 찬물샘을 마시고 가면 운이 따른다는 말도 전해진다. '청도군지'에는 '납닥바위가 청·일 전쟁 때 일본군을 한양길로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납닥바우는 1900년 초 경부선 철도공사 때 훼손됐고, 지금은 세평 남짓 바위 일부만 남아 있다. 고수리 주민 김상철(65) 씨는 "이 납닥바우는 원래의 바우가 아닐 거라. 위치만 대략 잡은 거지. 찬물샘이 있지만 철도 때문에 다가가기가 힘들어"라며 지형 변화를 아쉬워 했다.
납닥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니 객수(客愁)가 솟구친다. 영남대로를 오간 관원과 역리, 선비, 장꾼들의 얘기소리와 한숨소리가 열차의 굉음에 실려 수런수런 귓전을 파고 든다.
# 기생 운심이를 아시나요
- 빼어난 검무에 재색까지 겸비…황진이 명성 버금가
- 정조 때 관기로 한양서 명성 자자
- 나이 들자 고향 밀양 내려와 여생
- 지금도 음력 9월9일이면 추모제례
- "밀양검무는 진주 보다 오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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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운심이의 검무 전통을 잇고 있는 밀양검무보존회의 공연 모습. 밀양검무보존회 제공 |
밀양땅에 운심(雲心)이란 기생이 있었다. 조선 정조 때의 관기로서 검무에 능해 한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18세기 말에 검무를 춘 기생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 황진이 버금가는 재색까지 겸비해 그가 춤을 추면 뭇 사내들의 가슴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운심은 고향인 밀양시 상동면 신안리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마음 깊이 사모했던 한 관원과의 만남을 그리다가 혹시 무덤에서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관원들의 왕래가 잦은 역로(驛路·영남대로) 언덕에 묻히길 유언했다. 그렇게 해서 묻힌 자리가 신안리 꿀벵이(蜜岩·일명 굴바위)라고 한다.
그후 운심이 묘를 벌초하면 한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실제로 시집 장가 못간 노처녀 노총각들이 앞다퉈 운심의 묘를 찾아 참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것이, 5년전 쯤 운심의 묘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이는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하고, 누구는 운심이가 꿈에 나타난다 하여 훼손했다고 얘기한다.
이런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심이 전설의 끈을 끝까지 챙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밀양검무보존회 김은희(60) 회장이다. 김 회장은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어김없이 운심이 묘터를 찾아가 벌초를 하고 제를 올리고 있다. '왜 음력 9월 9일이냐'고 묻자, 김 회장은 "제사 날짜 모르는 날에 제사지내는 날이 그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직이 말했다.
"운심이는 춤추는 기생이라 하여 당시에는 천시됐던가 봐요. 하지만 지금은 달리 봐야죠. 운심이가 전수한 밀양 검무는 문화재 대우를 받는 진주검무보다 역사가 오래 됐어요. 박제가의 '정유각집'에 춤사위와 형식이 소개될 정도로 기록도 풍성하고요. 우리나라 검무의 효시는 바로 밀양검무예요. 제가 운심이를 챙기는 이유지요."
역로에 흐르는 사연이 신통방통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