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의 세계제패, 선배님 제가 해냈습니다!
92년 한국시간으로 8월 10일 새벽 황영조 선수는 제25회 바로셀로나 올림픽 폐막에 앞서 벌어진 마타르드~몬주익 경기장 풀코스 남자 마라톤레이스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우승, 한국 선수단에 12번째의 감격의 금메달을 안겨 주었다. 이로써 황영조 선수는 지난 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이래 바르셀로나 몬주익에서 무려 56년만에 마라톤 금메달의 한을 깨끗이 풀어 주었다. 더욱이 황영조 선수는 56년 전 손기정 선수에게 일장기를 강요했던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삼하광일·당시24세)를 꺾어 우승보다 값진 쾌거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황영조 선수는 이날 27km 지점부터 동료 김완기(당시24세 코오롱), 모리시타 선수와 함께 선두에서 3파전을 벌이다 40km 지점을 눈앞에 두고 막판 스퍼트를 감행, 선두로 독주한 끝에 몬주익 경기장에 1위로 골인했다. 그 뒤로 2위는 2시간 13분 45초의 모리시타, 3위는 프라이강(독일)이 차지했다. 91년 동아마라톤 풀코스에 처음으로 도전해서 3위를 차지했던 황영조 선수는 73개국 1백 12명이 참가한 이날 경기에서초반부터 선두그룹에 끼어 차분하게 레이스를 펼쳐갔다. 5km구간기록을 16분2초에 통과한 황영조는 20km지점부터 김완기, 김재룡(당시26세 한전) 선수와 함께 선두로 나서 모리시타 등과 치열한 순위경쟁을 벌였다. 황영조 선수는 26km 지점에서 김재룡선수가 처지고 34km 지점에서 김완기 선수마저 떨어져 나가자 모리시타와 6km를 함께 달리며 막판 스퍼트의 기회를 엿보았다. 황영조선수는 39.8km지점의 오르막길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앞으로 치고 나간 뒤 그대로 단독 질주, 모리시타와의 거리를 100m이상으로 벌리며 몬주익 주 경기장에 골인, 영광의 결승라인에 1위로 날아들었다. 손기정 옹과 함께 100년 올림픽 사상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두 명의 아시아인 중 한 명이 된 황영조 선수는 현장에 있던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금메달의 주인공, 손기정 옹으로 하여금 한풀이의 눈물을 쏟게 했다. 페이스 메이커로 뛴 91년 3월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35초의 놀라운 기록으로 데뷔한 황영조 선수는 2번째 풀코스인 91년 스페인 쉐필드 유니버시아드 우승 (2시간 12분 40초), 3번째 92년 벳푸 오이타 마라톤에서 한국 신기록 작성 (2시간 8분 47초), 4번째 92년 바르셀로나 을림픽 우승, 5번째 94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한국 신기록 (2시간 8분 7초)등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6번째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의 마라톤 금메달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등 국민적인 영웅으로서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뛰는 족족 한국 마라톤에 큼지막한 족적을 남기며, 마라톤의 신화를 창조했던 황영조 선수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존경받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2001년 한국 마라톤의 새로운 출발!
이제는 저희가 뛰겠습니다.
한국시간으로 2001년 4월17일 새벽,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또 한번의 감격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이 봉주 선수 2시간 09분 43초로 1위로 골인하며, 보스턴 대회 우승! 51년 만에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쓰다" 서윤복(47년 보스턴대회 우승)선수와 함기용 (50년 보스턴대회 우승) 선수에 이어서 51년 만에 흘려보는 감격의 눈물,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 새 천년 들어 한국 마라톤계에 가장 큰 낭보이며, 실로 오랜만에 온 국민을 흥분과 환호 속에 하나로 뭉치게 했던 자랑스런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아깝게 2위를 하며, 황영조 선수가 은퇴한 이후 최고의 기대주로 관심을 모았던 이봉주 선수! 그러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넘어져 안타깝게 24위에 머물고, 설상가상으로 정신적인 지주이시던 아버지의 사망소식까지 겹쳐 이봉주 선수의 마라톤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하지만 이봉주 선수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연습벌레'라는 별명답게 연습에 연습을 더욱 강행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온 결과 A급 대회인 보스턴 대회에서 우승이라는 쾌거를 건져 올릴 수가 있었다. 이봉주 선수는 우승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의 달콤한 대가를 거둔 것이다.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이루고 우리 곁을 떠난 황영조 선수와는 달리 차세대 주자가 없는 한국마라톤계의 우울한 현실과 온 국민들의 기대를 안고 2002년 보스턴 마라톤 2연패를 노렸으나 5위로 골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이봉부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 만으로도 기뻐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당당히 자신하지 못했던 금메달을 손에 쥔 것이었다. 끈기와 의지로 뭉친 불국의 한국인의 영웅으로 길이 남게 되었으며, 온 국민들의 그의 달리는 모습에 열광한다.
하지만 한국 마라톤계는 그 달콤한 결과에만 심취해 있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이 봉주 선수의 대를 잇는 후배 유망주가 아직 없기 때문인데, 두터운 선수층을 보유하기 위해 초, 중, 고등학교 체육지원 및 꿈나무를 육성하고 기대주를 발굴하는 등의 체계적인 선수양성이 꾸준히 이루어졌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은 한국 마라톤계의 불찰이다. 하지만 한국마라톤의 꿈나무발굴과 기대주 양성! 아직은 늦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마라톤 인구는 수백만에 이른다. 해마다 지속적으로 마라톤 동호인이 늘어나고 있으며, 각종 체육단체들의 전국적인 생활마라톤 홍보 노력에 의해 잠재적인 마라톤 인구까지 합치면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이 마라톤을 즐기고 있다. 한국체육계는 이러한 전국적인 마라톤 활성화를 적극 활용하여, 지역별로 생활 마라톤 대회를 펼치고 이를 통해 어린 청소년들에게 마라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이미지를 부각시켜 꿈나무를 양성할 수 있는 올바른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난 1936년, 1966년 이후 두 차례나 침체기를 맞이했던 우리의 마라톤-이를 거울삼아 민족스포츠인 우리 마라톤에 두 번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도록 마라톤 인재발굴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선수 개개인에 맞는 체계적인 훈련방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마라톤왕국, 대한민국의 저력과 위용을 계속하여 지켜 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