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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조영대 커피명상연구소
 
 
 
카페 게시글
우리나라 유명 또는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 소개 스크랩 잠실 백제유적
관광호텔마린비즈계열 추천 0 조회 50 05.09.03 17: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석촌동 백제 초기 무덤들

 

석촌동 일대는 돌무지무덤, 움무덤, 돌방무덤 등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석촌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전까지만 해도 돌무지무덤을 비롯하여 89기의 무덤이 있었다. 이 고분군은 백제가 한강 하류역에 위치한 한성에 도성을 정한 후 서기 475년 중기의 도읍지인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 시기까지에 축조한 백제 전기고분군이며 백제사회 한 면을 헤아리게 하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초기 백제시대의 무덤은 움무덤(토광묘)계와 돌무지무덤(적석총)계로 크게 나뉘어 지는데, 이 중 움무덤은 토착민계통의 무덤이며, 돌무지무덤은 고구려계 유이민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적석총은 초기백제의 왕과 그일족의 무덤으로 보이며,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움무덤은 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분군에는 막돌, 포갠돌 등을 섞어 쌓아 분구를 축조한 방형단축의 적석총을 위시하여 즙석을 덮고 흙을 쌓아 분구를 축성한 봉토군과 지표에 장방형 토광을 파서 묘광을 만든 토광묘와 내원외방형을 이룬 고분 등 구조형식과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고분 8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고분중 제 1, 2호분 및 내원외방형분 등 3기는 파괴가 극심하여 하단부의 일부만 남아있고, 토광묘 2기는 원형을 보존하기 위하여 흙을 덮고 그 뒤에 모형토광묘를 만들어 놓아 백제전기고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제 3, 4호분은 학술적인 조사를 거쳐 원형에 가깝게 보수, 정비하였다.

토광묘(土壙墓;움무덤)는 제일 아래층의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여러개의 나무널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의 무덤이다. 1986년에 조사된 대형움무덤은 그 규모는 폭이 2.6~3.2m, 길이는 10m가 넘었으며, 깊이는 0.8m가량 되었다. 이 커다란 구덩이 안에는 8기의 나무널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고, 하나의 무덤 구덩이 안에 여러기의 나무널을 설치하는 이러한 무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것이다. 무덤내의 각 나무널에서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칠해진 칠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적석총인 제 3, 4호분은 방형단축의 분구라든가 큰 자연석을 비스듬이 세워놓은 지탱석 등 분구의 구조형식이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과 동일하여 고구려계 묘제라고 보게 되며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는 밀접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중 4호분은 무덤이 모두 3단으로 되어있으며 맨아래층의 한변이 약 30m되고 무덤 전체의 높이는 4.1m가량 된다. 무덤을 쌓은 방식을 보면 먼저 바닥을 고르고 잔자갈을 깔아 무덤구역을 설정한 뒤, 길이 70cm, 폭 60cm, 두께 20cm가량의 얇은 판석을 이용하여 네모나게 무덤을 쌓아올렸다. 그런데, 이 무덤과 겉모습이 비슷한 고구려의 돌무덤은 내부까지 돌로 쌓았으나, 이 무덤의 내부는 점토를 겹겹이 쌓아 다진 것이 특징이며,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이 백제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맨 윗단의 가운데에 만들어진 돌방에 안치되었는데, 이 돌방의 남벽에 널문이 달려 있다. 고분중 토광묘가 가장 이른 시기의 분묘이고 적석총은 그 다음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방이동의 백제고분

백제는 한강 하류역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 도읍지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이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가락동, 석촌동 등지에 산재 또는 군집해 있는 백제전기의 고분은 이 근방에 백제의 도읍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지역의 방이동 고분군은 백제가 한강 하류역에 도읍을 정하고 서기 475년에 중기의 도읍지인 공주로 천도하기 이전 시기까지 축조된 백제전기고분군이다. 방이동고분은 모두 석실묘로서 연도가 없는 수혈식 석곽묘와 연도가 있는 횡혈식 석실묘가 작은 동산에 흩어져 있다. 현재의 고분 영역을 확장하여 따로 떨어진 2개의 고분을 한 영역으로 연결시켰다.

 

몽촌토성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강유역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며 비옥한 평야지대와 함께 한강을 통한 서해상으로의 진출이 쉬운 까닭에 선사시대 이래로 생산과 교역,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해왔다. 삼국 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백제인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의 무리가 이곳에 정착하여 웅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500여 년간을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런 이유로 한강유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삼국시대 유적은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실제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석촌동고분군, 미사리 유적 등 많은 백제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현재는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몽촌토성은 백제가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한성백제시대(?~ 기원후 475)의 중요한 거성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적은 1926년 일제의 고적조사 때 학계에 보고된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80년대에 올림픽 체육시설 부지로 확정되자 사적공원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되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언덕 위에 쌓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으나 외형적으로는 타원형에 가깝고 네 방향의 성벽길이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하여 동북벽 650m, 서북벽 617m, 동남벽 600m, 서남벽 418m이며 전체길이는 2285m이고 동북벽쪽에는 길이 약 250m의 외성이 있다.

그리고 성의 외부면적은 성벽정상부를 기준으로 하면 216,000㎡(약 6004평)이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고 현재의 높이는 7~30m정도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 정상부의 흙이 흘러 내렸으며 또 하천에 의한 퇴적이 심해 축성 당시의 높이와는 차이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구릉을 이용하여 방벽으로 삼고, 구릉이 낮거나 안쪽으로 오므려들어 갔거나 또는 끊긴 부분에는 판축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판축법은 입자가 곱고 점성이 강한 점토를 두께 5~10m단위로 얇게 펴서 다지는 공법인데 백제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고대의 각종 건축의 기초에 사용되었다. 경사가 완만한 지점은 부분적으로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하였으며 서북벽 일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여 성벽을 보강하였다. 토성의 서쪽과 북쪽, 동북쪽 일대에는 인근의 성안의 하천과 이어지는 해자(물이 고인 주호)를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았다. 이 밖에 성의 안팎을 드나드는 문자인 동문터, 남문터. 북문터 등으로 추정되는 3개소가 발견되었다. 성내부에는 땅을 30cm가량 파고 만든 움집이 12기가 확인되었고 단면이 복주머니 모양을 한 저장 구덩이가 30개소, 돌무덤 5기, 토광묘 2기 등이 발견되었고 또 조선시대의 건물터 3개가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사적 29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성안에 위치한 몽촌 역사관에는 옛 주거지,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된 유물 - 세발토기, 긴목항아리, 목단지, 시루 등 생활 용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몽촌토성과 전시관을 답사하며 생각하기

1. 몽촌토성역사관에서 본 유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세요. 그리고 이유를 말해보세요.


2. 몽촌토성은 흙으로 만들어진 성입니다. 토성 외에 다른 성에 대해 말해보세요.


3. 옛날에는 성을 쌓아 적을 막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적을 막기 위해 어떤 장치를 이용하나요.


4. 삼국시대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왜 전쟁을 많이 했는지 말해보세요.


5. 몽촌토성의 그림을 그려보세요.


7. 백제초기의 그릇을 3개 그려보세요.


8. 백제의 생활용품과 요즈음의 생활용품을 비교해보세요. 같은 점과 다른 점을 3개씩 말해보세요.


9.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신라가 통일한 것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말해보세요.


10. 움집이란 어떤 집인지 말해보세요.

 

11. 해자란 무엇인가요.

 

* 알아보기

1) 고분이란 ?

  고분이란 단지 옛날의 무덤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체로 한정된 시대에 몇 가지 요소를 갖춘 지배층의 무덤을 고분이라고 한다. 한정된 시대란 국가의 형태를 이루기 전인 부족사회에서 국가적 통제가 확립되어 가는 삼국의 건국시기를 거쳐 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뒤 화장이 늘어나기 시작한 때까지를 말한다. 고분은 지금에서 보자면 아주 오래전의 무덤일 뿐인데 왜 중요하게 생각되는가. 그것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혹은 역사가 기록되어도 자료가 많이 없던 시절의 생활과 문화를 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당시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2) 백제의 고분의 형태는 ?

백제는 도읍지를 여러번 옮겼다. 처음 서울에서 400여 년을 지내다가, 고구려에 밀려 공주에 가서 60여 년, 그리고 마지막 수도인 부여에서 250여 년을 지냈다. 그러다 보니 백제의 고분은 각각의 도읍지에 걸맞게, 또 당시의 문화에 맞게 변화되었다. 간단하게 백제의 고분 형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돌무지무덤(적석총) :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든 무덤

- 움무덤(토광묘) : 땅밑에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거나 널, 덧널을 사용하여 만든 무덤

- 돌널넛무덤(석곽묘) :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서 판자돌이나 잔돌로 네 벽을 쌓고 그 위에 몇 개의 뚜껑을 덮은 무덤

- 돌방무덤(석실묘) : 언덕의 비탈이나 산기슭에 판자돌이나 잔돌로 돌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무덤

- 벽돌무덤(전축분) : 형태는 돌방무덤과 같으나 돌대신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

- 독무덤(옹관묘) : 큰 독에 담아 묻은 무덤이다.

- 화장묘 : 시신을 불에 태워 남은 뼈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묻는 것이 화장묘이다.

 

삼전도비(사적 제 101호)

석촌동 고분군 근처에 있으니 함께 다녀보면 되겠다.

청 태종의 강요에 못 이겨 세운 비이다. 

“본래 청 태조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와 같으므로 서로가 예우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 태종이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하고 항복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3.95m, 너비 1.4m이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이 비는 같은 내용을 몽고문, 만주문, 한문의 3개 문자로 새긴 세계에서 유일한 비이다. 청일전쟁 후 일본인이 땅에 묻었다가 다시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해방후엔 수치스럽다 해서 땅에 묻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www.o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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