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지문 묘
○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그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월남전이
한창인 초등학교 시절에는 라디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군가중 하나인
진짜사나이, 전우, 멸공의 횃불 등을 운동회나 학교행사 뿐만아니라
그냥 유행가 같이 불렀던 노래인데 청용부대(해병대), 백마부대, 비둘기부대
- 당시 삼촌이나 큰형들이 월남전 파병은 동네에 큰 화두가 되었으며,
부모들은 입대한 자식들에게 월남을 지원해서 절대 가지 말라고 자식에게
-근심어린 눈빛으로 보이곤 했던 동네 어른이나 할머니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했다.
인천발 하노이행 비행기는 과거 냉전체제에서 월남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함 73년 사이공 함락과 함께 미국철수 로 보트피플과 난민의
대량발생 과함께 베트남은 우리 기억속에서 사라졌지만 그후 다시 경제교류와
드라마 등 문화교류와작가 박영한이 인본주의 시각에서 쓴 머나먼 송바강은 93. 11
~ 94. 1. 25일 종영된 드라마로 박중훈과 린당팡이 나오는 드라마로 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의 참사와 사랑을 다룬 인간드라마
자원봉사 지원협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이 된 것 같다.
월남전은 우리에게 6. 25 전후로 일본이 2차대전 패전후 경제발전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베트만 전쟁 덕을 많이 보았던 전쟁
78년 현역 입대한 때 까지도 월남전에서 가지고 돌아온 병사들이 사용한 구식 M16
소총있었으며 월남전에 사용한 총은 논산 입대후 가평 하사관학교에서 사격연습
할 때 총구확장이 되어 영점 조정할 때는 잘 맞지만 실거리사격장에서 표적 타겟에
총알이 잘 안맞아서 조교에게 엄청 기압을 받던 기억이 새롭고
그 당시 들었던 이야기는 미군 병사와 같은 봉급을 미국에서 한국 병사에게
지급했어도 그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보내져서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울산 비료공장을 건립하는 비용으로 들어 갔다고 했는데
그게 맞는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 당시 아시안에서도 가장 어렵게
살고 있었던 우리나라 경제효과는 대단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 당시 월남에서 장병들이 귀국할 때는 주로 가져온 물품은 C례이션 부르는
미군 야전도시락통조림, 쵸코릿, 소고기통조림, 비스켓, 땅콩잼, 담배, 껌 등이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동네 이웃 어른께 1통씩 나누어 주면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할 것 같이 환상적 휼륭한 음식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 제대 후 형들이나 삼촌에게 들은 무용담은 지금 생각하면 인권유린이 아닌가
하지만 그 당시는 세계가 냉전체제에 서 동서나 남북이 대결하던 상황이라
지금하고는 판이한 시절이라 공산당 하면 국민 모두가 두렵고 무서워 하며
어부 남북이나, 1. 21사태 등이 발생 궐기대회나 김일성 화영식이 공원이나
공설운동장에서 자주 했던 행사 었지,
○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가는 생각에 잠긴다
○ 지금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고등학교 때는 학교 수업에 교련시간도 있어 아침
조회때도 열병이나 분열행진,
소풍 때도 교련복을 입고 행군하면서도 가고 각반에 딴띠, 천으로 만든 다비같은
신발, 목에 감은 힌 마후라, 모자, 변변한 옷 하나 없던 시골이라 교련복을 입으며
등교 했지(여학교에서도 그런거 입었는지는 모르고)
76년 흑석동에 입학하고서 고3때 예비고사 전후로 학교에서 두발단속을 안할 때
머리기르고 3月초 신입생입학식 땐 밤송이 모양정도 머리가 약간 길어서 그 머리를
애지중지 하며 자라는 모습에 어른이 된것처럼 왜 그리 신기하며 좋아했지
○ 그때는 송창식, 김세환등 가수들이 장발에 통키타가 유행하여 흉내내느라고
머리가 치렁치렁할 정도로 기르고 다니는게 유행 했는데 장발머리하고 미니스커트와
함께 경찰단속이 심했고
80년 제대하고부터는 급격히 그 모습이 사라졌고 그때 사진을 지금 보고 있으면
야 그런 시절도 있었지 하는 추억과……
○흑석동에서 수유리로 가는 84번 비스 타고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내려서
걷다보면 경위나 순경이나 에게 걸리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며,
○ 지하도나 도로를 숨박꼭질 하며 피해 다니느라 정신 없었는데 장발을 왜 하고
다녔는지는 지금도 내 자신을 이해 못 할것 같다.
○ 아무튼 그 아끼고 소중하게 길렀던 머리를 얼마 길러보지도 못하고 빡빡머리로
다시 돌아간 사건은 대학 1학년때 76년도부터 처음 생겼던 문무대 입소로 3부
머리로 잘라 버렸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가슴아파 했는지 문무대에 들어가지 않는
75학번이나 군대 제대한 형들이 부럽웠던지..
○ 그해 초여름쯤 되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남한산성 교도소옆(빨간 벽돌집)
행정학교와 문무대 입소한 후 1주일 군사교육을 받았던 곳
아침에 일어나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 점호에 얼차례 정말 싫어도 그런 것을
이수해야 현역 복무기간을 1년에 2개월씩 단축시켜 주었다.
그때 2학년 마치고 군대가서 4개월 빨리 전역해서 고참하사 생활도 하나도
못해보고 나는 29개월만에 제대 했는데
그때 4개월 혜택이 대단해 전방 GOP서 철책근무를 2년 했는데 중대원중에
해당인원이 몇 명 안되 먼저 나갈 때 고참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고 질투심.
그들의 생각은 알만해서 그당시 나는 먼저 제대하는 것조차 미안해서 고참에게
전역하는 내 모습을 숨기고 싶어 했지
○ 세상은 새옹지마로 그때 4개월 빨리 전역한게 나에게는 평생업보로 작용할
줄은 정말 몰랐어
봉급 호봉에서 30년간이나 호봉 손해를 보고 지금까지 있으나 그때 잠시 일찍
전역한 것이 평생 감수하고 살고 있음
○ 그동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문무대가 내가 88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제2의
고향땅이 되었으며,
그곳은 개발제한구역 그린벨트로 개발이 억제되어 지금까지 왔다가 얼마전 위례
신도시에 편입되어 문무대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기끔 회식하러 가면 사격장이나 각개전투장이 지금도 기억에서 좁게 남아 있음
○ 문무대 행정학교 일원은 3년후면 서울, 성남, 하남의 3개 행정구역이 남한산성이
가까운 새로운 주거환경이 변한 아파트단지로 변모할 것이다.
운좋게 아파트도 당첨되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문무대 건물 사진 |
각개전투장 사진 |
○ 하노이공항을 내딛는 순간 뜨거운 습도가 얼굴에 확 올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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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번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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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번 사진 |
○ 닌번은 석회암지대로 계림이나 하롱베이와 유사하다. 천원내고 배를 빌려 타는데
발로 노젓는 솜씨가 신기하고 자외선 때문에 그런지 한참이나 나이가 적은 아낙네
들이 나이가 더들어 보인다.
베트남은 개방과 함께 평화를 이룬 나라로 3,451㎞의 해안도로와 북쪽의 산악지대
와 남쪽 구 사이공의 메콩강 삼각주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2000년 동안
외세의(중국과의 전쟁) 침입을 견디며 독립국가를 이룬 나라이다.
○ 서양인과 접촉은 로마시대부터 되었고 1516년경 포르투갈 선원들이 다낭지역에
정착 상업을 이루었고 유럽 선교사들의 천주교 전파와 포르투갈을 밀어낸 프랑스로
부터 1954년까지 지배를 받은 나라로 이때부터 반식민지운동이 있었으며
2차대전후 일본과 영국군을 호지민이 독립시켜 73년 미국이 철수할때까지 오랜전쟁
을 치르었다. 지금은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한국에서 폐차된 철도차량으로
전철이 다닌다고 하는데
그전에 갈때만 해도 4시간 이상 고물버스로 간 기억이 있는데 중간 중간 군인인지
경찰인지 차량을 세워 딱지를 떼는데 기계로 과속검사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경찰)
의 눈대중으로 속도를 측정하여 본인 마음대로 딱지를 떼어 운전자들을 애먹이는
걸 보고 (그당시 15日 치 봉급에 해당된다고 하더라고) 역시 후진국에서는(중국도
비슷하지만) 경찰이 최고 직장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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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관저 |
○ 베트남이 공산화 된 것은 호지민이 검소한 생활에 주민의 신임을 얻은 것 같다.
하륭베이 |
○ 시내 관광과 닌번을 2틀간 지낸 하롱베이로 4시간 걸려 도착했다.
그날밤 일행들과 해변에서 맥주와 쌀국수를 먹고 이튼날 배로 하롱베이 투어을
떠났는데 100명 넘게 타는 배를 우리일행 4명이 탓다.
전날 얼마나 많이 마셧는지 비몽사몽 고통속에 내 몸속의 장기들의 반란이 일고
있었다. 숙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름다운 풍경도 그져 그렇게 바라만 보고
감탄사는 나오지 않았다.
하롱베이 수천개의 섬들은 석회암으로 중국 계림부터 이곳 히롱베이까지 이어져
왔다고 섬의 갰수는 하도 많아 항공사진 으로 판단하여 셀 수 있다고 하는데
대한항공에서 하노이 취항과 세계 문화유산지정 후 대대적 홍보로 알려져서 많은
한국 관광객이 머무는 곳이다.
○ 배안에서는 승객 4명에 선장, 주방장, 기관사, 청소아줌마로 .한적한 분위기
○섬 중앙에 다금바리 횟집 판매장으로 갔는데 한국인에게 엄청 바가지 씨우더라고,
분위기에 쌓여 배안에서 가두리 양식장에서 구입한 회을 먹는데 비위생적이고
하지만 소주에 한잔을 하는데 어제 먹은 숙취로 나는.못먹고
하롱베에 백미인 섬 전망대 고지 150M정도 정상에 주위전망을 모두 할 수 있는 곳임
○ 하롱베이섬 중앙에 전망대가 있었다. 베트남 소녀들과 사자를 찍고 내려오면서
선착장 근처에 은빛 모래사장에 해수욕장이 있는데
그곳을 이용하는 간이 샤워장이 있었다.(구조상 옷을 벗고 사위하는 수영객은 잘
안보임)
하산하는 중간에 산속길에서 옷을 벗고 수영복도 갈아 입고 샤워도 하는 베트남
여인들을 보았는데
우리일행 들이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연속적 으로 모델을 바꾸면서 1.5M 높이의
간이 천막속에서 들어와 샤워하고 있었다(후면은 산이라고 생각해서 천막이 쳐져
있지 않았음). 생비디오 나체쇼를 10분정도 감상하고 더 이상 볼것이 없어 우리
일행은 돌아오는 배를 올라 탓다.
베트남인들은 자기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강하고 자기 만족에 큰 만족을 느끼고
있지만 현실에서 보면 우리나라 농촌총각의 대다수가 베트남 여인과 결혼하고
있으니 우리와 전쟁을 하던 나라에서 30년 만에 대변혁이 온 것이 너무 신기하고……
○ 저녁에 시장에 쌀국수와 열대과일을 정말 싸게 사고 오토바이 물결도 대단하고
군살이 전혀 없는 여인들 한류가 와서 그런지 어린 소녀들과 맛사지실에서 대화를
나누어 보면 영어단어로만도 대충 대화가 통하고 우리 한국과는 다른 동양인 보다
비슷한 것 같고 베트만에 산악에 있는 소수민족 중에는 우리나라와 언어와 습관이
고려 후예가 사는 곳도 있다고 책에서 보았는데 사실 인지는 잘모르고
○ 거리 모습이 프랑스 식민지를 오래 격어서 그런지 알파벳과 비슷한 문자에 도로변
으로 선 주택지가 서양모습을 조금 풍기는 느낌과 마을 복판에 공동묘지가 많이
눈에 띄었으며,
노후에 얼마간의 돈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곳 이라는데 우리가 퇴임 할땐 이곳도
발전하여 물가가 오르겠지,
아무튼 우리나라 회사 주재원 가족이 2번 울고 가는데 후진국에 왔다고 울고,
정원사, 식모 등을 싸게 하인처럼 부리고 공주생활하다 귀국시 아쉬움에 여자들이
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노후에 겨울철 건기에는 몇 달 정도는 생활할 수 있을
것 느낌이 오더라구요
하롱베이 전망대정상
하노이 시장 과일쌓고
하롱베이 떠나기 직전
다금바리 회 소주한잔
전망대서본 주변 풍광
시장구경이 최고여
생 비디오 본 해수욕장
날씨가 좋았으면 금상 첨화 인데
카페 게시글
포토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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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현이는 학교 다닐때 리포트 작성은 참 잘했을것 같다.. ㅎㅎ
와~~ 하이롱베이 다녀 오셨네. 정말 하이롱베이 기행문 잘 읽은것 같으네...
고등 학교때까지 작문 시간이 괴로웠어 지금은 직업이고 여행좋아해 책과 다큐 드라마 좋아해
글쿠만요..ㅎ. 헌데, 공무원이잖여... 글쓰는게 직업..? 어느 분야에(?) 있기에... ^^ 좋아하는 여행 자주 다녀서 다큐 드라마 같은 글 자주 올려 주시와요..ㅎㅎ.
나도 도현이 기행문 읽으면서 내내 그 생각했다. 여행기 써서 책 내도 될것 같애. 그동안 도현이 덕분에 지구촌 방방곡곡 세계여행 잘했어. 고마우이. 자주자주 글 올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