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시집이다. 그림 같은 시가 주를 이룬다고나 할까? 시적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번개 같은 의미의 확인이라는 순간적 감동보단 회화적 묘사와 인상이 주를 이루는 시가 많다. 말로 그림 그리는 것이 흔히 묘사라고 한다면, 이 시집의 시는 그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시인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고, 굴절된 사물과 현상과 사건의 인상과 표상이 나름의 텁텁하고도 낯설은 방법으로 재미를 주는 시집인 것 같다. 회화와 견준다면 추상화라고나 할까. 밑줄 그은 부분만 또 올려 본다. 시인에겐 죄송스러운 일이지만......(제발, 시집 좀 사서 봅시다. 우리에겐 좋은 시인이 참 많지만, 대개가 또 가난하더라구요. 시집은 값이 싸지만, 그 값어치는 웬만한 책보다도 몇 갑절은 더하기도 하고, 두고두고 봐도 새로움이 발견되는 묘한 마력이 있거든요. 작고 얇다고 얕보면 안 될 책이 시집인 것 같으니까요.^^)
自書
......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이 말을 걸고 싶다, 간절한 내용을 담아서.
1981년 8월
김 혜 순
납 작 납 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13)
......
그러나 허공만 퍽 퍽 떨어져 쌓일 뿐(15)
......
그는 사랑 때문에 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럼 나는 산 따위는 없고 깊은 구렁뿐인 이 세상을 몰라
보냐고 허풍을 떤다.(19)
......
단발머리 그 소녀가 무심히 달력을 넘기고 있다(22)
......
물음표 하나
누군가 물음표에서 물음을
뽑아 버리고 있다.
닭털처럼 날리던 물음
바람에 몸을 맡긴 물음
발가벗겨진 물음
온몸에 물감을 칠하던 물음
얼굴을 가린 물음
통곡하던 물음.
물음의 눈물. 눈물의 홍수. 물음의 무릎. 무릎을 당겨, 물
음. 돌아누워, 물음. 좋아, 물음. 개같이 짖어 봐, 물음. 물
음, 입 벌려. 물음의 침. 침의 홍수. 물음, 무릎을 조심하라
니까. 물음을 물어뜯는 물음. 잠자지 마, 물음. 노래해, 물
음. 바람처럼 흩날려, 물음. 쉼표, 이리 들어와. 물음을 막
아서. 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야, 쉼표. 물음, 물음, 제자리.
노래하는 물음. 마침표를 버린 물음. 물음만 남아서 외로운
물음. 꼬리로 만들어진 물음. 비 맞고 꼬리를 세우던 물음.
흩날리며 입술을 깨물던 그 불쌍한 물음.
꼬리를 잃은 마침표 하나
숨죽여 울고 있다.
이제 누군가 다가가
마침표 하나에
쓰러진 물음을 쑤셔박으려 하고 있다.(30-31)
......
세상에 소리가 쌓이기 시작하는 아침
......
뱉아진 말은 어디 가서 숨었나?(33)
......
울고 있는 실마리 옆에 기댈 곳이 없는 갈피.(34)
......
-간을 빼 주면 안 되니? 솔직히 말해서 고백이란 하고
나면 시시해지는 거 아니니?(41)
......
지워지려 하는 것들 이제 놓아 주고 잃어버려
잃어버리지 말라던 그 말을 잃어버려(46)
......
죽은 사람이 보고 싶다.
보고 싶음만으로 숨이 막힌다.(48)
......
보이지 않는 말들을 간수하기에
두 손은 늘 모자라고.(49)
......
나는 언제나 새는 중이야
그렇지 새고 말고
나만 새는 거 아냐(58)
......
이제 노을이나 먹고 싶어.
밤은 늘 무거웠고
별들은 너무 시었어.
햇빛 조금, 구름 조금, 싱싱한 하늘 조금.
이제 거짓말 같은 노을이나 먹어 둘래.(57)
......
더러운 숟가락일랑 버리고 질퍽질퍽
사는 거야.(60)
......
한 도시가 녹슨 강물 위에 정박한 밤
불빛들만 수런대며 흘러가고 있었다.(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