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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오늘날 인상파 만큼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미술 사조도 아마 없을 겁니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전시회도 인상파 전시회일테고 미술상의 복제품이나 포스터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역시 인상파 그림일 겁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걸작들이 소장돼 있는 오르세 미술관 Musee d'Orsay 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년 열두달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람객들의 줄이
끝없이 늘어섭니다.
오르세 미술관보다는 덜 알려져있지만 인상파의 거두인 모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파리 서쪽 16구의 주택가에
있는 마르모탕 미술관 Musee Marmottan이죠.
마네와 모네,르노아르,세잔느,고갱등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있는
화가들을 아우러 '인상파' 또는 '인상주의'라고 이름붙인 계기가 된 클로드 모네의 유명한 '인상,해돋이'(1873)도 그곳에
있습니다.
Impression,Soleil levant
1873
1874년 열린 제 1회 인상파 전시회는 비평가들의 야유와 멸시,일반인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실패로 끝납니다.
풍경과 인물들을 정밀하게 묘사했던 과거의 그림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모네가 해뜰 무렵의 르아브르 항구의
느낌을 포착한 이 그림이 물감 범벅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겠죠.
당시 르샤리바르 Le Charivare 라는 일간지의
미술담당 기자인 루이 르르와 Louis Leroy 는 '인상파들의 전시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그림을 "벽지로도 쓸 수 없다"고
혹평합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은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요.
오늘날 그토록 사랑받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도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 이처럼 오랜 힘든 시절을 거쳐야 했습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을 비꼰 신문
삽화입니다.
터키 병사들이 공격하는 적군들에게 방패 대신 인상파 그림들을 내밀고 있습니다.
기겁해서 달아나는 적군들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죠?
아래 그림은 역시 마르모탕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작품으로 안개에 쌓여있는 런던의 테임즈강과 그 위에 비친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모습입니다.
인상파가 이미 인정을 받기 시작한 뒤에 나온 작품이어서 망정이지 1회 전시회 당시 르르와가 봤다면 아마도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게 분명합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처음 만남은 파리의 센 강변에 있던 샤를르 쉬스 미술학교 Academie de Charles
Suisse에서 이뤄집니다.
1859~1861년 사이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와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o, 폴 세잔느 Paul Cezanne, 아르망 기요망 Armand Guillaumin등이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가기위해 모여들지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느
여기서 이들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누드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합니다.
1861~1862년 사이 모네는 다시 스위스 출신 화가인 샤를르 글레르 Charles Gleyre가 설립한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국립미술학교보다 자유스러운 학풍으로 젊은 화가들의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좋은 조건이었지요.
여기서 그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 Pierre-Auguste Renoir, 프레데릭 바지으 Frederic
Bazille, 알프레드 시슬리 Alfred Sisley 등을 만납니다.인상파의 핵심 그룹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
프레데릭 바지으
당시에는 이처럼 할아버지,아저씨의 모습은 아니었겠죠.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름다운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왜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리기 좋아하면서 젊은 날의 초상은 별로 남기질 않는지 몰라요.
어쩌면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인상파의 맏형은 이들보다 연배가 열살 정도 앞서는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입니다.
에두아르 마네
전문가들은 마네를 인상파의 선구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작품의 주제나 의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오로지 사물과 사람의
형체,움직임,색깔만을 추구한 최초의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인상파의 탄생을 알리는 마네의 그 유명한 ‘풀밭위의
점심식사’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죠.
인상파 인상짓기
인상파가 태동하는 19세기 중엽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고 모든 화가들의 꿈은 관전인 살롱전(le Salon de Paris)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2년에 한번씩 열리다 나중에는 매년 열리게됐던 살롱전은 화가들이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다보니 출품을 위해서는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지요.
국립 미술 아카데미와 과거의 수상자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들은 워낙 보수적이어서 전통을 벗어난 모든 새로운 시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성향은 곧 일반 대중들의 기호를 결정짓는 요인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우리의 주인공들인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살롱전에 출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마네 역시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내놨다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맙니다. 당시 그는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않는 작품들로 이미 상당한 악명을 얻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 낙선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그들에게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1863년에 열린 낙선자 전시회(le Salon des refuses)가 그것이지요.
세잔느와 피사로를 비롯한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이 낙선자 전시회에 참가합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낙선자 전시회를 통해서입니다.
자,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다시 한번 보시죠.
Le dejeuner sur l'herbe, 1863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파의 화풍에 비한다면 훨씬 전통적 기법을 따르고 있는 이 그림이 전문가와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우선 여인의 누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누드는 많은 그림들의 소재가 되어왔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네의 누드는 인체를 이상화시키는 그리스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있습니다.
마네의 친척들인 두 신사와 마찬가지로 누드의 여인 역시 비너스나 아프로디테가 아닌 현실 속의 인물입니다.
관람객들은 그림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겠지요. 결코 익숙하지않은 일이었죠. 그런데 숙녀가 남자들 앞에서 그것도 파리 시민들이 자주 애용하는 휴식처인 블론뉴 숲에서 알몸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이와 함께 명암 대비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처리하지않고 흑과 백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것도 당시의 화풍으로는 방정맞은 짓이었겠지요.
Olympia, 1863
마네가 1865년 살롱전에 올랭피아(Olympia)를 출품했을때 비평가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역시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싯누런 배때기의 오달리스크'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비너스' '암컷 고릴라'등 오만가지 독설이 퍼부어졌지요.
마네도 마네지만 이 그림의 모델이었던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and)이라는 아가씨가 너무 가엽습니다. 예쁘장한 얼굴과 가냘픈 몸매에 고릴라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이 그림은 마네가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피렌체의 우피찌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에서 본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입니다.
지금도 우피찌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비교해볼까요.
La Venus d'Urbino, 1538
우아, 그 자체 아닙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니 화가 안나겠어요.
마네는 이 사랑의 여신을 현실의 인물,그것도 창녀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올랭피아라고 지어줍니다. 올랭피아가 그리스 신들이 살고 있던 올림푸스산을 빗댄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검은 뒷 배경과 구별도 잘 안되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통적 그림에 대한 통렬한 조롱입니다.
'올랭피아'가 살롱전에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시인 보들레르의 강력한 주장 덕분이었습니다.
역시 위대한 인물은 공연히 위대한게 아닙니다. 시대를 앞서는 혜안이 그들에게는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살롱전 관계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올랭피아'를 사람들의 눈길이 거의 닿지않는 천장 가까이 높게 걸었지요.
그래서 관람객들의 분노는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올랭피아가 자신의 최대 걸작이라고 평가하던 마네가 얼마나 열받았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40년뒤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리라고 보들레르 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현재는 다른 인상파 그림들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졌지요.
Le Fifre, 1866
이듬해 마네는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이 유명한 피리부는 소년(Le fifre)을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떨어지고 맙니다. 전해에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또 걸어주고 싶었겠어요?
거절 이유는 인물의 검은색,빨간색등의 원색이 배경의 중간색과 지나치게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죠.한마디로 "제발 좀 튀지말아라"는 뜻이지요.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맞습니다. 누런 배때기의 오달리스크, 가엾은 우리의 빅토린느 뫼랑 아가씨 입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의 누드 여인도 같은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믿지못하겠네요.3년 전에 그렇게 풍만하던 아줌마가 그동안 다이어트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19세기에 빈번했던 제국주의 전쟁은 수많은 고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원인 제공자인 군대가 고아들을 책임져야 했죠. 많은 소년들이 군대에 들어가 전령,군악대원등으로 활약했습니다.
우리가 즐겁게 부르는 캐롤의 '북치는 소년'도 알고 보면 그런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도 이처럼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신화적 요소도 없습니다.
화가는 현실을 나타내는데 불필요한 장식들을 과감히 삭제할 줄 알았지만 동시대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밋밋한 배경의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만이 그들과 달랐죠. 아직은 젊은 작가에 불과했던 에밀 졸라(Emile Zola)가 그입니다. 역시 위대한 인물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 또 한번 입증됩니다.
졸라는 당시 그가 기자로 일하던 일간지 레벤느망(l'Evenement)에 마네를 변호하는 기사를 씁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인정해야 한다.그는 미래의 대가다. 내가 만약 부자라면 그의 그림을 몽땅 사겠다."
그러나 불쌍한 우리의 졸라는 이 기사를 쓴뒤 신문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 그림을 사지도 못했지요.
인상파,그들만의 전시회
Expositions(1874-1886)
살롱전에 출품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던 우리의
인상파 화가들은 드디어 스스로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를 위해 드가와 피사로,르노아르가 주축이 돼 1873?'예술가들의 익명회사'를 차리지요.
인상파 전시회는 이듬해부터
1886년까지 모두 8번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마음이 같은 것은 아니었죠.
오직 피사로 만이 8번 모두 참가합니다. 드가와 모리소는 7번,기요맹이 6번,모네와 카이으보트가 5번,르노아르,시슬리,고갱이 4번에 걸쳐
참여합니다. 세잔느는 단지 두번만 작품을 냅니다.
그러면 큰형님 마네는? 그의 목적은 여전히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동료들의 전시회에 한번도 참여를 하지않았습니다.
La premiere exposition/ 첫번째
전시회
첫번째 인상파 전시회는 1874년 4월15일부터 한달동안 마들렌느 성당 근처에 있던 사진작가(나다르
Nadar)의 아틀리에에서 열립니다.
그들의 야심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30명의 작가들이 1백67점의 작품을 출품하는 큰잔치가 됐지요.
르노아르는 여기서 유명한 '라
로쥬(La loge,연극등의 칸막이 관람석)'를 선보입니다. 모네가 출품한 '인상.해돋이(Impression,soleil levant)'에서
인상파라는 이름이 탄생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La loge, 1874
하지만 이들의 야심찬 시도는 가슴아픈 실패로 끝납니다.
살롱전이 매일 평균 1만명 정도의 관람객을 끌어모은 반면 인상파 전시회를 보러 온 사람은 첫날 1백75명, 마지막날 54명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회사도 문을 닫고 말았죠.
La deuxieme exposition/ 두번째
전시회
우리의 인상파 화가들이 와신상담하긴 2년, 두번째 전시회를 1876년 엽니다. 참가자 수는 19명으로
줄었지만 귀스타브 카이으보트(Gustave Caillebotte)라는 새로운 동지가 생기죠.
이 전시회에서는 모네의 작품 '일본 여인(La japonaise)'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합니다.
La
japonaise, 1875
기모노를 입었지만 일본 여인의 얼굴은 아니죠? 바로 모네의
아내 카미유(Camille)의 초상입니다. 미인입니다. 그녀는 어려웠던 시절 모네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줍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일본 여인으로 분장시킨 것, 그리고 그 작품이 대중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시 신흥 공업국으로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들 준비를 하던 일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보여줍니다.
모네를 비롯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문화에 깊은 호기심을 나타내며 실제로 자신들의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죠.
어쨌든
제 2회 인상파 전시회는 상업적으로도 그럭저럭 본전은 뽑아 보다 인상파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La troisieme exposition/ 세번째 전시회
이듬해인 1877년
열린 제 3회 인상파 전시회는 인상주의의 가장 절정기로 평가됩니다.
카이으보트는 자신이 주도한 이 전시회에 모네와 함께 '생라자르역(Gare St.Lazare-Le pont de
l'Europe)'이라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출품합니다.
Gare
St.Lazare, Caillebotte, 1876
Gare St.Lazare, Monet, 1876
모네의 '생라자르역'은 마르모탕
미술관에 소장돼있으며 카이으보트 작품은 스위스 제네바의 프티 팔레(Petit Palais)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세잔느는 동료들을 떠납니다. 갈수록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그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대중들의 외면을 벗어나지
못하지요.
La septieme exposition/ 일곱번째 전시회
이 전시회는 인상파
화가들의 가능성을 알아차린 미술상 뒤랑-뤼엘(Durand-Ruel)의 주도로 1882년 이뤄집니다. 르노아르의 그
유명한 '밀짚모자들의 점심'Le dejeuner des canotiers'이 출품되지요.
Le
dejeuner des Canotiers, 1881
영화 아멜리에서 아멜리 집 아래층에 사는 노인이 1년에 하나씩 카피한다는 그림입니다.뒤쪽에 물을 마시는 소녀의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있어 가장 그리기 어렵다고 고백하지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그림입니다.르노아르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냥 즐거워집니다.
아무튼 이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상파들은 'My way'를 부릅니다.각자의 길을 걷기위해 흩어지는거죠.
1886년 마지막 여덟번째 전시회가 열리지만 여기에는 르노아르와 모네,시슬리,카이으보트등이 빠집니다.
하지만 이들 전시회를
통해 인상파 화가들은 드디어 대중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같은 성공은 프랑스 내에서만 그치지 않지요.
뒤랑-뤼엘이 1886년 기획한 미국 전시회는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인상파의 그림이 프랑스보다 미국의 미술관에 많이 소장돼 있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이때부터 벌써 사람들은 신 인상파, 후기 인상파등을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인상파의 영향을 깊게
받은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툴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등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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