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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여행기
2006, 8
Italia
일 년 전 부터 오희종 원장님께서 유럽의 병원을 견학해 보도록 권하셨다. 마침, 오희종 원장님과 김지수 교수님과 함께 Neurology에 발표한 논문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아스프렐라 (Asprella) 선생님이 질문서신을 보냈다. 아스프렐라 선생님은 마테라(Matera) 병원을 견학하도록 허락하셨다. 로마에서 마테라 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데는 창원대학의 유영성 교수님과 신개협 이창훈 회장님의 도움을 받았다. 인터넷 사이트가 이탈리아어로 되어있었고, 유영성 교수님은 음악공부를 이탈리아에서 하셨고, 이창훈 선생님은 그 곳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오셨기 때문이다. 특히, 이창훈 선생님은 마치 자신이 직접 여행하시는 것처럼 기뻐하시면서 여러 번 전화를 통하여 세부사항을 일러주셨다. Italia (이딸리아)는 이태리어이고, Italy는 영어이고, 利太里(이태리)는 중국어이다.
Matera
마테라(Matera) 市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비행기에서 바리(Bari)공항에 착륙할 때 내려다 보니, 산도 없이 넓게 펼쳐진 평야에 나무는 거의 없고, 반 이상이 경작지의 흔적이 있으나 버려진 땅이었고, 일부분만 밭과 과수원이 보였다. 유럽은 일찍 문명화 되었기 때문에 경작되지 않고 남아있는 땅이 거의 없는 듯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린과 코풀소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까지도 아프리카와 같이 많은 동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작지가 확장됨에 따라 서식지를 잃으면서 대형 포유류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스프렐라 선생님 부부가 공항으로 타고온 작은 경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서 마테라에 도착했다. 부인인 패트리샤(Patricia)는 40대 초반의 아주 쾌활한 사람으로 우리가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의 일정을 관리하였고, 우리가족이 묵을 호텔과 식사를 할 장소를 미리 예약해 놓았었다. 부부는 호텔에 우리를 데려다 준 뒤, 점심식사를 하러 다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좁은 골목을 지나 간판도 없는 작은 입구의 Ristorante에 들어가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앉을 자리가 남아 있었다. 골짜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기와집들은 우리나라 시골집의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내가 그리이스 해변이라고 상상하던 풍경이기도 했고, 패트리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도시풍경과 똑같다고도 했다. 아내는 한국전통과자를 패트리샤에서 선물하였고, 나는 그 자리에서 아스프렐라 선생님의 초상화를 그려 드리고, 합기도 호신술을 몇 가지 보여 주었다.
마테라의 어원이 Mother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유럽 각지에서 박해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이 만든 성당들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평범한 성당이 아니라, 절벽을 파내어 만든 동굴 안에 지어진 성당들이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자유롭게 되면서 큰 도시에 대규모 성당들이 지어지자, 이곳에는 버려진 성당들이 생기게 되었고, 농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조개껍질이랑, 종류를 알 수 없는 조류들의 골격이 섞여 있는, 석회질이 많은 퇴적암인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돌조각들이 부스러져 나오기도 했다. 거주형태는 지극히 공간과 물을 절약하는 구조였다. 높은 곳에 눈을 모으는 구덩이가 있고, 바닥에는 철근으로 망을 쳐 놓고, 볏짚을 같이 넣어두어 물이 천천히 아래로 흐르도록 되어있다. 침대는 높게 만들어 침대아래는 서랍으로 사용하였다. 가장 중요한 재산인 노새도 집안에서 같이 살았다. 평생동안 한 개의 신발만으로 살았기 때문에, 신발 밑창에는 쇠를 붙여서 사용하였다. 무덤은 성당의 지붕이자 절벽 꼭대기의 바위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흙으로 덮은 것이 무덤이었다. 묻혔던 유골들은 옮겨지고, 사람 크기 만한 구덩이들은 콘크리트로 채워져서 평지로 변하여 사람들이 밟고 다닌다. 이런 특이한 구조들은 Sassi(이탈리아어로 "돌"이란 뜻)라고 불려지면서, 유니세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이 지역에도 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뭇솔리니 정권때 몽땅 베어버려서 나무가 없는 벌판으로 변했다고 한다. 숲은 없어지면 다시 생기지 않는다. 아마존 유역의 마야문명,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발견된 아나사지 문명, 그린란드에 정착했던 바이킹의 폐허, 양의 방목때문에 사막으로 변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등은 사람에 의해서 숲이 사라진 곳들이다. 외부세계와 교역을 통하여 물자를 조달하면서 살아남은 오스트레일리아 이외에는 전쟁과 서로 잡아먹는 투쟁으로 인하여 모두 멸망하였다. 현재의 마테라 주민들은 농업과 도자기공예와 관광이 주 수입원이다.
패트리샤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이기 때문에 가는 곳 마다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바빴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들 오랫동안 수다떠는 데 익숙한 듯 했다. 여기서 어릴 때 부터 자랐던 아스프렐라 선생님도 지역 유지로써 대접받는 것 같았다. 우리가 머물렀던 8월 15일은 성모 승천일로 거의 자정까지, 절벽의 성당 광장에서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곳은 차량통제를 하였으나, 담당 경찰관이 패트리샤의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가 탄 승용차는 들어가게 해 주었다. 저녁에 마테라의 언덕을 달리면서 마주친 경차들의 행렬들이 인상적이었다. 아스프렐라 선생님이 Sassi가 잘 보이는 호텔방을 예약해 주셔서, 우리 가족은 밤에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밤 11시에도 전화하라고 한 걸로 보아, 여기 사람들은 밤늦게 까지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마테라 지역에는 단체버스로 가끔 방문하는 일본인들 외에는 아시아인을 거의 볼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명소관광의 시대가 끝나고, 오지나 시골로 관광하는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이 떠나는 날 아침에, 마테라 병원의 이비인후과 과장님이 호텔로 오셨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음). 키가 크고 뚱뚱한 체격에 콧수염을 기른 과장님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또 아스프렐라 선생님과 한참 유쾌하게 이야기 하더니, 호텔 앞에 세워둔 티코 크기의 승용차에 큰 덩치를 매끄럽게 넣고는 병원으로 떠났다.
Matera hospital
8월 15일 오전에 아스프렐라 선생님은 마테라 병원의 Vertigo laboratory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동안, 패트리샤는 나의 가족을 데리고 유적지 관광을 하였다. 아스프렐라 선생님은 어지럼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하는 방법인 "Vanucci-Asprella maneuver"를 내게 직접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것을 minimal stimulating technique으로 부르면서, 최소한의 체위변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지럼과 구역을 덜 유발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하였다. 그는 내게 vestibule의 도자기 모형을 주었다. 동네의 도자기 제조공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이다. 그는 편지를 통하여 내가 만든 초음파뇌혈류검사 책을 갖고 싶어 했다. 나는, 이창훈 선생님이 미리 일러주신 대로, 뇌혈관 모형 3개와 영문판 욕창 매뉴얼 3개도 함께 선물하고, 의협신문에 나왔던 "욕창 지존"만화도 보여 드렸다. 각자 선물로 받은 전정모형과 혈관모형을 들고서 병동의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사진촬영을 부탁하였다. Vertigo lab에는 Videonystagmography (VNG), Audiometer, Caloric test 를 위한 장비들이 있었다. Rotating chair나 posturogram을 위한 기계는 없었으나, 그가 직접 제작한 간단한 측정도구들이 있었다. 그는 주로 lateral canal에 관심이 있었는데, 다른 동물보다 직립보행하는 인간에게 더 발달한 것이 lateral canal이라고 하였다. 또한, lateral canal 이 가장 크기가 작기 때문에, otolith 가 저절로 repositioning 되는 확률이 많다고 하였다. 이탈이아의 유명한 어지럼 전문가인 Gufoni 선생이 "전정기관의 진화"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영어를 못하기에 이탈리아어로 쓰여졌다고 하였다. 마테라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진료비를 내지 않는 대신에 많이 기다려야 한다. 아스프렐라 선생님은 자신의 개인 외래사무실을 보여주었다. 주상복합 건물의 1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니, 거실에서 보이는 방문이 4개 있었다. 하나는 화장실이고, 나머지 3개는 Rheumatology와 pulmonoloy의사, 그리고 그의 진료실이었다. 직원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자신의 개인외래와 병원을 번갈아 가면서 진료하는 제도인 모양이다. 토요일에도 병원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 아스프렐라 선생님은 이탈리아에서의 어지럼증의 권위자인 Vanucchi 와 Gufoni 와 자주 만나면서, 2004년에는 Matera에서 Barany Meeting을 주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날 Bari 공항으로 전송나오면서 오희종 원장님께 안부를 전하라는 말을 하였다.
Roman Posture
관광안내 책자의 표지로 보건대, 로마는 Roma, Rome, Rom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는 모양이다. 외국의 낮선 땅에 온 나의 몸은 " Hunger mode"로 들어갔다. 음식만 보면 잔뜩 먹고, 화장실만 보면 변의를 느꼈다. Hot breakfast 포함이라는 인터넷 선전으로 우리를 궁금하게 했던 호텔에서 주는 아침밥은 양을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일단 과거 외국생활에서 생겼던 버릇대로, 먹을 수 있을 만큼 한 껏 먹었다. 삶은 계란 2개, 빵 2개, 요플레 하나, 우유 콘 브레이크 한 공기, 쥬스 한 잔, 베이컨과 치즈 한 조각씩. 아들이 먹다 남은 것들.... 10년 전에 하루만에 로마 시내를 걸어서 다 구경했다는 아내의 안내에 따라 하루종일 걸었다. 40세면 불혹(不惑)이라더니, 시내 지천에 널린 대리석조각상들과 돌조각들, 또는 폐허들은 몇 시간 지나자 더이상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위장관과, 그 무게로 인하여 앞으로 쏠리는 요추에 느껴지는 통증 또는 피로감 때문에, 앉을 수 있는 계단이나 분수대 담장이 더 나를 유혹했다. 여섯살바기 아들은 예상보다 잘 걸었지만, 시차때문에 오후에 일찍 잠들고 새벽에 깨서 놀자고 졸랐다. 로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조각상들이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모습으로, 내가 Roman Posture라고 부를 정도로 매혹적으로 편한 모습이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의 식민지에서 실려온 산해진미를 그런 자세로 느그하게 먹었다고 한다. 식탁보다 앉은뱅이 밥상을 좋아하는 나에게, 누워서 밥 먹는 것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아마 내게 로마제국 시민의 기(氣) 또는 끼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박물관이나 궁전에서 본 작은 석상들은 하나의 돌덩이리로 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돌조각을 붙여서 만든 것도 있었고, 성당벽의 인물상들은 점토로 만든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기원전 100년 경에 그렇게 큰 석상이나 기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아마 그 당시의 하이 테크놀로지는 크기로 표현되었으리라.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서, 로마통치가 더 좋다는 이미지를 심으려고 했다고 한다.
Roman army
로마군의 편성이 현대 군대조직의 표본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림이나 조각상에서 겨울 옷을 입은 로마군이 없다는 것이 항상 궁금했다. 아마, 가을에는 추수하고 겨울에는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이스 군에게 패한 트로이 시민들이 이주하여 로마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트로이는 현재의 터키라고 한다. 로마는 주위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였다.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현재의 알제리로, 당시에 로마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출신의 장군인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한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3 번의 전쟁에서 결국 로마가 승리하였다. 현대의 프랑스인 가울(Gaul)은 제법 강력하였으나, 로마군의 장기인 포위작전으로써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 시대를 그린 영화가 프랑스에서 만든 "아스테릭스"이다. 이때 영국은 변변한 군인이 없었고, 독일은 통일국가가 없던 시기여서 1000여명의 게르만 주민들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었다.
Roman life
로마제국의 문화는 현대 유럽문화의 모태이고, 로마제국의 생활방식은 유럽인은 물론 비유럽인들도 맹렬히 추구하고 있는 생활방식이다. 로마제국 때에는 분수가 현재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도시 밖에서부터 연결되는 aquaduct는 산속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냉각되기 때문에, 시내의 모든 사람들이 시원한 물을 마셨다고 한다. 현재의 관광객들도 도시 곳곳에 설치된 식수대 앞에 PET 물병을 들고 줄을 서서 물을 담아간다. 최근까지도 물은 나그네에게 공짜로 주는 것이었으며, 물맛으로써 그 고장의 인심이나 우물 주인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생수 회사가 등장하면서 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풍 때 들고다니던 여러가지 색깔의 물통은 사라지고, 생수를 담는 PET병만이 길거리의 관광객 손에 들려있다. 버려진 PET병들은 길모퉁이 쓰레기통, 화단, 우체통 등, 사람이 많이 다니고 물건을 얹을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한 두개 놓여져 있다. 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하루에 음식 외에 마시는 물의 양은 작은 PET병으로 두 개 내지 세 개이다. 그런데, 식사, 간식, 음류수를 사서 먹는다면 (음식점이나 식품가공업자는 당연히 생수가 아닌 수도물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생수를 사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수도물을 더 많이 먹는 셈이 된다. 생수회사의 마케팅으로 인하여 물은 점차 사 먹어야 하는 상품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간 정수용 돌을 사용하여 처리한 수도물이나, 길거리의 식수대에서 담아온 물을 마셨다.
현대 식사습관의 또다른 특징은 휴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과거에 사용하지 않거나 손수건으로 사용하던 습관이, 현재는 휴지를 거의 꼭 사용해야만 하는 것으로 변했다. 로마제국 시대에 식탁에 천을 깔던 습관이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닐까? 식탁에 놓여 있는 큰 휴지는 손님이 앉을 자리라고 표시하는 역할 외에는 큰 쓸모가 없다. 무릎을 덮어 주기도 하지만, 사용되지도 못하고 티끌만한 물이나 케찹을 묻힌채 식사 후에 쓰레기통으로 곧장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비행기 기내식사에 포함된 수저 세트에는 큰 휴지가 들어있고, 음료수 컵을 건네줄 때에도 꼭 휴지 한장에 싸서 준다. 스넥을 줄 때에는 물휴지가 추가된다. 과거에 천으로 사용하던 식사용 수건이 휴지로 바뀜으로써, 휴지를 생산하는 대기업의 이익이 커지고, 수건을 만들던 소규모 상인들이 몰락했다. 로마제국의 생활방식은 여러모로 변모하여 점차 대기업의 판매 마케팅 대상으로 변한 것 같다.
로마 제국의 훌륭한 것 들 중에 화장실은 후세에 전수되지 않은 듯 하다. 로마 시내의 화장실 기반은 열악하다. 아마 한국보다 훌륭한 화장실 기반을 갖춘 나라는 없을 것이다. 로마시내에서 관광객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유료화장실이나 레스토랑의 것들 뿐이다. 국립박물관에 있는 유일한 공중화장실은 공식적으로 무료이지만, 입구에 있는 아리따운 처녀가 사람들이 나올 때 마다 화장실 청소를 해 준다. 그 옆에는 동전 바구니가 있다. 돈을 안 내고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가씨의 따가운 눈총을 등 뒤에서 맞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공항이나 호텔의 화장실, 또는 공중화장실의 변기 옆에는 꼭 청소용 솔이 놓여있다. 그리고 휴지통은 아주 크다. 아이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대변용과 소변용의 물내리는 스위치가 있다. 변기안에 고여있는 물의 양이 작아서, 물 밖에 드러난 변기 면에 대변 덩어리가 들러붙는다. 스위치를 내린 후에 나오는 물의 양은 대변을 씻어내리기에 충분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사용자가 알아서 씻으라고 호소하는 듯이 청소용 솔이 놓여 있는 것 같다.
자동차 문화
로마시내의 자동차들은 경찰차와 청소차를 포함하여 모두 작다. 6개의 좌석만 있는 버스도 있다. 가끔 Kia, Hyundai, Mercedes 회사의 SUV들이 눈에 띈다. 자동차 대수도 적고 매연도 심하지 않다. 골목마다 길거리 이름이 적힌 팻말이 있어서 길 찾기가 쉽다. 큰 길가에도 주차 차선이 있어서 주차공간도 넉넉하다. 귀퉁이에 있는 하나의 기계에 주차요금을 동전으로 넣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큰 승용차들과 경유자동차들이 많고 공회전이 많기 때문에 매연이 심한 편이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특히 공회전을 많이 하는 편이다. 자신 보다 자동차의 건강을 귀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는 길찾기가 어려운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의원으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이 장소를 묻는 내용이고, 한 번 설명하는데 10 여분이 걸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자명하다. 거리 상점의 입구에 붙어있는 길거리 주소는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길을 찾기 위해 더 많이 운전하고 더 많이 휴대폰을 사용한다. 결국 정유회사와 통신사들에게 유리할 뿐이다. 길거리 주소를 사용하는 것이 대기업의 폭리를 막는 길이다. 우리나라 큰 길가에는 대부분 주차 금지 차선이 그어져 있다. 특히, 주차위반시 견인이라는 팻말아래에는 어김없이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다. 차라리, 모든 길 가에 주차를 허용하고 주차비를 받는 것이, 주차위반 운전자를 덜 양산하고, 주차법을 위반한다는 죄책감을 없애고, 쉽게 어겨지는 법을 줄이고, 불법주차자가 죄책감 때문에 공회전을 하고 있는 것도 줄이고, 교통경찰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身土不異
이태리 피자에 토마토 케첩이 들어간 것은 신대륙인 남아메리카에서 토마토가 수입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나는 이태리에 체류하는 동안에 피짜, 파스타, 리조토에 질려버렸다. 김치와 소고기국이 그리웠다. 된장국, 마른 오징어, 젓갈, 누워서 체조할 수 있는 방바닥, 희로애락을 느끼는 일터...... 모든 것이 그리웠다. 한국에 오자마자 기차식당에서 비빔밥을 사 먹었다. 귀국한 지 이틀째 밤에 로마 기행문을 쓴다고 엎드려 있는데, 이태리에서 먹던 빵이 먹고싶어졌다. 아내와 나는 허겁지겁 냉장고에서 빵을 꺼내 먹었다. 새우깡도 먹었다. 서로 많이 먹으려고 뺏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