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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민하고 토론하고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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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부활
(dangun76)
혹 당신은 약산 김원봉을 잊고 계시지는 않겠죠? 2005년 10월 25일 am 12:13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거의 막바지로 치달아 가고 있는데요. 제목은 '약산 김원봉'입니다.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한 대표적인 좌우합작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의 위인전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제가 몸담고 있는 오마이뉴스 '오마이북' 코너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땐 무신경하게 대충 읽어 넘어갔었답니다. 물론 리뷰 혹은 인터뷰 기사였죠. 약산 선생에 관한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실 소설가 이원규씨의 인터뷰였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약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중반부 즈음을 읽어내려갈 때. 문득 또 한 분의 사표를 만났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습니다. 제 아이디을 보시면 알겠지만, 전 대학 다닐 때부터 몽양 선생을 존경해 왔는데요, 그에 버금가는 훌륭한 스승을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어 무척 보람찼습니다.
약산 선생은 경남 밀양 태생입니다. 그리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인촌이 운영하던 중앙학교에 편입하면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게 됐다고 합니다. 호남형 외모에 말수는 적고, 문학작품에 유난히도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 불과 약관의 나이에 의열대라는 항일테러조직을 결성하게 됩니다. 그는 의열단의 의백으로 단장역을 맡았구요.
중국에 본부를 둔 의열단은 의인들의 도움을 폭탄을 사들여 국내에 잠입, 일본 고위인사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역할을 하면서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이내 자금과 국내 잠입 테러의 발각 등으로 조직이 흔들리게 되는 위기를 만나게 됐죠. 이후 그는 조선의용대, 독립군 부사령관 등 주요 군사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항일 투쟁에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부는 그를 좌익이라 평하면서 그의 모든 공적을 깎아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그의 공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몽양 선생과 비슷한 처지라고나 할까요.
이승만, 김구, 조소앙 같은 우익 독립운동가들은 교과서를 통해 수십번씩 만나게 되지만, 정작 좌우 합작 노선을 취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역사책의 귀퉁이에서조차 발견하기 힘듭니다. 아이러니하다고 해야겠죠?
공교롭게도 몽양 선생과 약산 선생은 중국 금릉대학 선후배 간이라는군요. 두분 모두 중국 고위층과 친분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합니다. 지중파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두분 모두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색깔론에 덕택(?)에 역사적으로 제대로 조명조차 받고 있지 못합니다.
심지어 약산 선생은 월북 뒤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공적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친일파에게조차 너그러운 훈장추서 기준이 유독 그들에게만은 그리도 엄격한지. 대체 언제끔이면 반공의 망령이 남한 사회에서 걷힐지.
그의 일대기를 그린 글을 보면서, 다시금 오늘 국회에서의 정체성 논쟁이 떠오르더군요. 온갖 부패를 자행하며 친일, 친미의 우산 아래 성장해 온 우익세력들이 무슨 염치로 저렇게 당당한 것인지. 그들에 의해 독립운동가의 공조차 평가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단일민족국가인지.
정말 개혁의 산은 넘고도 험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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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ttp://blog.naver.com/mizuhashi/130000343328
인간늑대가 예전에 잠깐 귀뜸해 주었지만 그동안 잊고 있다 문득 생각이 나서 읽어보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한국근현대사에는 다소간 관심이 있었고, 즐겨 있는 책 중에 하나가 박노자의 근현대사이야기니까 조금은 관심이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겠죠.(그렇다고 아는 것도 없지만^^)
사실 약산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의열단장이라는 것과 좌파였다는 사실이 전부라고 해도 다일만큼 생소하다시피했습니다(사실은 중도좌파라는 것도 이책으로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산에 생애를 통해 그가 살아왔던 치열한 인생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살아왔던 암울한 시대의 가슴아픈 과거를 간접 경험해본다는 것은 '체게바라 평전'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게 합니다.(재미도 약산 김원도 더 낫습니다.^^) 특히 한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약산 김원봉이 정작 해방된 조선땅에서 그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었다는 아이러니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과거를 돌아보도록 만들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여러 문제의식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제대로 열어보지못한, 그래서 아직도 그 영혼이 어딘가에 머물러있을 듯한 옛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진혼곡으로 하나씩 하나씩 그들의 모습을 알아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권해볼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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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약산 김원봉 | 서평과수필 2005/12/27 23:31
http://blog.naver.com/kwh6410/50000502454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관련된 이런 책은 사실 안 읽으려했다. 뜨거운 투쟁에 상반되는 그들의 인생 결과가 너무나 뻔하게 비참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파서...
서점에 갈 때마다 몇번이 잡았다 놓았던 이 책을 결국 사게 된 것은 판촉용으로 책 뒤에 붙어 있던 책상용 달력 때문이였다. 정말 그것이 이 책을 사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역시나 가슴아픈 결말...읽기 싫어 진도가 잘 나가지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꼈다.
의열단이란 이름 들어나 보았는지...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름만은 나왔던것 같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테러 단체라는 것도 한줄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약산 김원봉은 그 의열단 의 창단자이자 대장이다. 나석주, 이상옥등 우리에게 그나마 이름이 알려져 있는 열사들이 바로 이 의열단 단원들이다. 물론 그들이 의열단 단원이라는 것은 책에 나와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이 책에서 알았으니까..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테러행위보다 군사조직을 갖자는 전략으로 정식 군대조직으로 변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 사이에서, 백범의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공산당 계열의 항일무장세력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게된다. 허여튼 합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그가 이루어낸 군사조직 조선의용군은 임정산하로 들어가게 되지만 결국 그 단체는 공산계열로 넘어 가게 된다.
그리고 광복과 임정임원으로 귀국...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그들에게 붙어야만 사는 친일,지주세력과 이승만, 건국준비위원의 여윤영, 오직 민족의 독립이라는 오기 밖에 없었던 백범과의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 약산이 택한 것은 월북이였다.
북한에서의 그는 노동상까지 지내지만 58년 61세에 숙청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의 통념을 깨는 현대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임시정부는 이름뿐인 단체였다는 점.. 광복군도 편제만 있는 군사 조직이라는 점등등..
나에게 새로왔던 것은 김원봉이 밀양 출신이라는 점이다. 평소 밀양은 김용갑 등등으로 인해 나에게 별로 이미지가 안좋은 고장이였지만 이제부터 밀양은 김용갑의 고장이 아닌 김원봉의 고장으로 기억되게 될것이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대원의 활약상은 남에서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다 하여 배척받고 북에서는 종파투쟁등으로 제거된 세력으로 남과북 모두에게서 지워진 역사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영웅들이다....
오년 십이월에 읽다. 실천문학사 출판 이원규 지음 만오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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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광복60주년에 즈음하여 2005-10-15 04:14
카테고리 : 山의 터 http://blog.paran.com/deformation/5989502
광복 60 주년에 즈음하여...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헝가리의 민족시인 산도르 페퇴피의 시 한구절이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온다. 아직도 온전한 해방을 맞지 못하고 있는 조국을 끌고 가고 있는 선열들에 대한 죄스러움과 경외심 때문이리라.
조국의 자유를 위해 사랑하는 모든 인연을 뒤로 한 채 시리도록 캄캄한 독립에의 의지를 천명하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던 우국선열들에 대한 이 보잘것 없는 후학의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으로 통탄을 금 할 길이 없다.종전 이후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해방되지 못했다고 본다.
독립이란 무었인가? 홀로 독(獨), 설 립(立)! 홀로 우뚝 일어 선다는 뜻이 아닌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혼자의 힘으로 우뚝 선다는 뜻일진 대한반도의 해방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1945년 그 긴박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자.
7월 26일 독일 동부 포츠담에서 미.영.중 3국이 전쟁 종결 처리에 대해 회담을 진행하여
13개 조항에 대하여 합의하고 선언하였다. 그 중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1943년 12월에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인의 장래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 3대 동맹국은 조선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 이다.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케 한다는 뜻은 곧 연합국이 군정을 베풀거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 당시 광복군은 임시정부 소속군이 아니라 중국국민당군 소속이었다. 그러므로 대한 독립운동세력은 힘도 못 써보고 해방이 될 처지에 놓였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김 구에게 연안에 특사를 보내어 좌 우 통합이나 연합전선을 펴서 조국 땅으로 진군할 것을 강력히 요구 하였다. 김 구는 장건상을 연안으로 밀파하였다. 이때가 8월 5일이었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 8월 8일이고 연안으로 장 건상을 급파한 날이 5일이니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 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동맹(좌파)과 임정(우파), 광복군 주력과 조선의용군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믿지 않아 연합 진공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주에서 싸웠던 동북항일연군(김일성부대)도 동시베리아로 이동해 버린 뒤 였으니 독립전선은 조국 광복을 위해 아무것도 기여한 게 없는 꼴이 되어버린것이었다.
광복군도 중국국민당 소속이요 종전 前 조선땅으로 진격 한번 해보지 못한 연유로 인하여 중경의 임정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밖에 조선땅을 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일 전쟁전선에서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도 1진 2진으로 나뉘어 1진은 11월 5일에야 중국이 비행기 두대를 내줘서 상해로 이동하고 11월 23일이 되어서야 미국 비행기가 상해로 날아와 실어 갔다. 그 때도 서로 1진으로 먼저 가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내가 먼저 가야한다고 갖은 추태를 보였다고 하니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독립을 염원했던 지하의 선열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2진은 12월 2일이 되어서야 겨우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갔다고 한다. 좌 우익 쌈박질과 파벌쌈박질이 우선이었던 독립전선은 조국땅에 와서까지 그 연장선을 달렸고 노덕술 같은 일개 일제의 개가 삼십년 동안 타국에서 오직 조국의 자유만을 위해 살아 온 독립투사의 뺨을 후려치고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천인공노할 현상이 벌어 졌던 것이었다. 그러한 당리당략만 일삼고 파벌 쌈박질만 하는 형태의 정치는 오늘날 이 시간까지도 여전히 그 면면한 작태를 이어 오고 있으니 하늘이 울고 땅이 울 일이다.
아직도 우리는 해방을 맞이 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해방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남북이 통일되고 또한 우리 스스로 우뚝 나라를 일으킬 때에라야 비로소 독립이라 하겠다. 광복 60주년을 기점으로 온전한 해방을 위해 신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조국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지식인들이 깨어나기를 호소하는 바 이다. 호국 선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려 줄 것을 호소하는 바 이다. 이념 논쟁을 더 이상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기를 바라는 바 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났고 민주공화국에서 자랐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민주공화국에서 살 것이다. 당리당략 보다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 하는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는 바 이다.
대한 민국의 정치인들이여, 이 시대를 살아 가는 모든 대한인들이여, 온전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깨어나자, 깨어있자!
삼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신 선열들의 이름앞에 고개숙여 경외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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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약산 김원봉』을 읽었다. 글쓴이: 김해규 2006/7/17(월)
나는 때때로 소설가들이 존경스럽다.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을 때도,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었을 때도, 김주영의 “객주”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최근에 읽은 김정희의 “노근리 아이들”을 읽었을 때는 부끄러움의 정도가 한계에 다다른 충격을 받았다.
역사라는 것이 역사쟁이들의 독점물만은 아니지만,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와 같은 느낌은 오늘 손에서 놓은 이원규 선생의 “약산 김원봉”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지난 18년 동안 교단에서 약산의 불같은 삶을 가르쳤던 나로서는 머리 속이 멍해짐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나는 약산의 삶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의 옷자락만 매만졌을 뿐이라는 자괴감 같은 거...
약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가들의 고향 경북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명 ‘영남 알프스’라고 하는 신불산, 재악산, 천황산 자락에 둘러싸인 밀양.
밀양엔 표충사라는 사찰이 있다.
표충사는 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명당 유정의 호국성지로 가사와 장검이 모셔진 사찰이다.
사명당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밀양에서는 많은 의병장과 애국지사,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약산은 으뜸이다.
그의 삶을 보면서 ‘역사 앞에 이렇게 당당하고 솔직할 수 있는가’ 의문이 생겼다.
역사적 삶이란 김구처럼 우직하고 성실만 해서도 그렇다고 이승만처럼 교활하고 비겁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약산의 삶은 정치적인 잣대로 잴 수 없는 단순하고 명쾌함이 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지금 어떤 것이 최선인가!’
‘해방된 조국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면 무엇이 최선인가!’
그가 남경대학과 신흥무관학교를 다닌 것도,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된 것도,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좌우통합을 추진한 것도, 간부를 양성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단 없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도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해방은 민족의 운명과 그의 삶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해방 후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은 좌와 우, 중도로 뿔뿔이 분열되었고, 일제에 적당히 타협하고 기득권을 누린 자들, 적극적인 친일 부역자들까지 나서 미국을 등에 없고 조국의 분단을 획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약산은 달랐다.
그는 과거의 삶을 배경삼아 개인의 이익과 야욕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약산이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모든 정치세력을 규합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운동에 적극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불의와 폭압의 시대에 역사와 민족 앞에 솔직한 사람이 설 자리는 없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의 개 노릇을 했던 악질 고등계 형사 노덕술에게 채포되어 끌려가면서 그의 자존심도 남한사회에 대한 그의 희망과 미련도 무너져 내렸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북쪽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설 자리는 없었다.
1950년대 옛 투쟁가에 대한 예우로 감찰부장과 노동상 등 주요 직책에 올랐던 약산은 한국전쟁 후 김일성 일인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급격히 약화되었다.
더 이상 의열단의 단장이었다는 경력도, 193, 40년대의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는 사실도, 일제 말 항일투쟁의 일치를 위해 노력한 업적도 필요 없게 된 북한은 약산을 숙청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장대처럼 내리는 비에 분위기도 음울했는데 책을 읽었더니 더욱 심해진다.
눈을 지그시 감고 해방의 상황에 나를 맡겼다.
독립투사들이 발붙일 곳 없었던 남한,
악질 친일파들이 독립투사들을 핍박하고 고문하는 남한,
일제강점기 적당히 친일하거나 적극적으로 친일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했던 자들이 민족의 지도자라고 판치는 남한,
그들을 처단하여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할 가능성을 상실한 남한.
친일을 청산하고 한동안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을 우대한 북한,
일제 말 장백산맥 일대에서, 소련에서, 중국에서, 국내에서, 민족해방의 그 날을 위해 모든 걸 버렸던 투사들을 하나로 묶었던 북한,
하지만 일인지배체제를 위해 과거의 삶과 역사를 깡그리 부정해버린 북한.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없음은 양쪽이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주장처럼,
미제와 남한을 앞에 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200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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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다
2007/02/13약산(若山) 김원봉 -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 (14) | 모르겐슈테른
약산(若山) 김원봉 -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
뒷book 2007/02/13 00:58 모르겐슈테른
약산(若山) 김원봉. 내가 그의 평전에서 읽어낸 그의 삶은 아프지만 아프지 않고 슬프지만 슬프지 않았다. 아프고 슬프더라도 나 역시 그처럼 '내'가 아닌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 한 두 번쯤 결심해 본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프고 슬프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마음을 먹었었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만 생각했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한 걸음 뒤에 둔 채, 세월에 몸을 맡기고 있다시피한 나에게, 그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자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덮었다.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에 뒤엉켜 버렸다. 하지만, 그 어느 이름도 뛰쳐나와 튀고 싶어하지 않는다. 일어난 사건은 기억나고 그 누군가의 행적과 말 역시 기억난다.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그의 평전은 사실 그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그만의 평전은 아니다. 저자 이원규는 약산을 중심으로 그의 평전을 써 내려가면서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등장시켰다. 아마도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늘 자신을 낮추며 함께 하는 이들을 걱정하고 아꼈던 약산의 마음이 시대를 넘어와 저자 이원규의 붓끝과 이 책에 스며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잊혀가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여전히 수많은 누군가 였다는것은 기억이 나지만, 어느 누가 모여 수많은 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모두를 기억하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약산의 바람이 나에게도 닿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 고민할지 모른다. 약산을 닮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보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고민했던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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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1924년 장계석과 주은래가 세운 황포군관학교가 있습니다. 김원봉선생도 4기로 참여하였고 200여명의 조선인도 같이 한 곳입니다. 광주의 중산대학과 더불어 조선 독립해방의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또 '광주기의열사능원'은 1927년 아리랑의 김산, 오성륜, 김성숙 등 조선인 120여명의 피 흘린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남과북 어느 곳에서도 잊혀진 이름, 김원봉선생을 다시 한번 기억해 봅니다.
모르겐슈테른 2007/02/14 01:57
남과 북에서 잊혀진 이름... 안타까운 일이죠.
아직 중국에 가 본 일은 없지만.. 언젠가 가게 된다면 장주도라는 섬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그 전에 한 번더 깊이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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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책,책,책 책을 읽읍시당 2007.01.04 19:14
청정행http://blog.daum.net/asdf4776/1232282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지은이이원규 출판사실천문학사출간일2005.8.10
장르 평전 책 속으로
이 책은 일본강점기동안 수많은 테러등으로 일본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우리 민족에게는 자존심을 세우게 했던 의열단을 만든 약산 김원봉 열사의 평전이다. 그는 서로 반목하던 많은 독립단체들을 하나로 결집시켜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해방후 귀국하여서도 역시 남북합작을 부르짖다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자로 몰려 결국 북한에서 숙청되었다.
남한에서의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들은 그가 월북하여 중요한 요직에 있었다는 것으로 지워진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로 남겨졌지만 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긴 큰 발자국 조차 지울수는 없다. 그의 평전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 책은..나의 평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테러리스트에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있다.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들도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의 얼굴이 인쇄된 티샤츠도 종종
눈에 뜨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오래전에 체 게바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독립 투쟁을 위한 테리리스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있다.
그 이름은 약산(약산) 김원봉이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의 국경일인 천장절에 일장기를 변소에 쳐넣은 사건으로 학교를 자퇴,
사립인 동화학교로 옮기나 동화학교도 곧 폐교가 되었다.
1년 가까히 밀양의 표충사에서 수도하며 독학을 하다가 승려였던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의 중앙학교에 편입하여 수학했다. 중앙학교는 당시 계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의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했으므로 그도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다.그는 여기서 평생의 친구가 되는
이여성과 김두전(약수)를 만나게 된다.
18세때인 1915년 김원봉은 전국 각지를 유랑하게 되는데 그는이 유랑을 통하여 수많은
민중의 아픔을 느끼고 국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된다. 체코의 테러리스트
'체 게바라'도 역시 의과대학생 시절에 국토를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면서 민중의 아픔을
체득하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이점은 두사람이 무척 닮은 듯 보인다.
여행이야 말로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만드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김원봉은 중앙학교를 중퇴하고 이여성, 김두전와 더불어 중국의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김원봉은 약산(若山),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두전은 약수(若水)로 호를 만들었는데 김원봉의고모부이며 대한독립회의 주요한 인물이였던 황상규가 지어주었다. 이후 김두전(약수)는 해방후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반민특위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친일파 출신 관료들이 반격인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중 월북(혹인 납북)되었다. 이명건(여성)은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했다. 그는 학자로 한국복식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알려졌다.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 대신 인민당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월북하였다.
1919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 전원의 추대로 의백(단장)이 된다. 1920년 처음으로 국내에 공작조를 보냈으나 6월에 실패하고 모두 체포당하게 되면서 의열단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몇달뒤인 9월과 11월에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에 각각 폭탄이 투척되어 많은 피해를 입히므로써 의열단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1922년에는 중국 상해의 황포탄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를 저격하여 의열단의 활동은 전세계로 활약상을 알리게 되었고 특히 중국사람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그외에도 종로경찰서, 동양척식회사에도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김달하,
박용만 등 수많은 암살과 테러를 감행했다.
당시 악명높던 마루야마 조선총독부 경무부장은 담화문에서 의열단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단체가
조직된 것은 다이쇼(대정) 9년으로 그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驅馳)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그는 1922년 신채호 선생에게 부탁하여 의열단 활동의 지침이 될 선언서를 간청하였는데
그래서 마련된 것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 이다.
그러나 의열단의 활동만으로는 조국독립을 이루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1926년 의열단을
해체하고 강력한 군사조직을 만들기 위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미임 김원봉의
명성이 워낙 높아져 있어서 중국측에서는 교관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처음부터 입학하였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1927년에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테타를 일으켰는데그의 대원들 대부분이 공산당 지역에서 싸우게 되어 국내에는 김원봉이 공산당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조국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 누구와도 합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근거는 철저한 반공의 입장에 있었던 김구 주석이 그를 임정의
군무부장에 임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주사변후에 장개석이 적극 협조하여 1932년에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어 혁명요원을 양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용군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범민족적 단체들이 모여야 한다는 취지로 민족혁명당을 만들고의열단세력을 비롯, 한국독립당(조소앙, 양기탁), 대한독립당(김규식), 신한독립당(이청천),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5개 정당과 재미 4개 단체를 합하여 모두 9개 정당과 단체였다. 그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 김구 세력은 참가를 거부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무한전투가 한창일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돕는 비정규군이였는데 전선지구에 나가 대적 심리전에 종사하거나,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 파견되어 첩보, 유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일을 하였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책자 5만권 제작, 배포, 표어 40여만 장,
적의 통행증 1만장 위조, 일본군 122명 심문, 일본군 문건 95만자를 번역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중국군의 보조역활만이였고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중요한 인물들
윤세주와 박효삼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건너가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주력부대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으로 건너간 후 김원봉은 남은 세력들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다. 1944년 4월에는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해 지자 임시정부를 나와 좌익쪽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6년 봄 수십년 만에 찾은 밀양 고향을 찾은 김원봉은 열렬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원봉이 오는길에는 광목으로 카페트가 깔렸으며, 밀양국민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익측과 결별한 김원봉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김원봉이 연류되어 체포되었는데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이
악명높은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였다. 결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풀려 나기는 했다.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했다가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이후 1954년 노동상을 역임하였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승진하고 이듬해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
하여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김원봉은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 정부와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
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기 보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조선의 독립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등 모두 5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역시 북한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분단이 낳은 최대의 피해자중 한사람이다.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원봉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였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체게바라와 비교하여 아쉬운 것은 사진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데 있다. 그 만큼 독립운동사의 기록이 부족했다는 반증이고 역으로 생각하면 앞으로 연구하고 개척할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더 많은 독립투사들의 평전이나 기록들이 발굴되고 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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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약산 김원봉>을 읽고 2006.04.14 12:05
민달팽이http://blog.daum.net/hanjust/8382311
경남 밀양은 예로부터 선비와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떨친 이로는 유가의 김종직, 불가의 사명대사가 있다. 그 맥은 끊이지 않아서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시기와 전체주의 정권 시절에도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산 김원봉은 특출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불세출의 독립투사였지만 해방 이후에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낸 고위인사였기에 남쪽에서는 이름조차 입에 담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정지용을 빼놓고서는 시문학사를 논할 수 없듯이, 독립투쟁사에서 약산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반쪽도 못되는 역사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그래왔다.
약산의 삶은 독립운동사의 여느 인물에 비해서도 치열했다.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뒤에 십대에 망국인이 되었고, 1919년에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제에 대항하여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과 투쟁은 치열했다.
1919년 11월 11일은 약산이 21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의백(단장)이 된 날이다. 이후 10여년 가까이 진행된 의열단의 각종 암살, 폭탄투척 같은 의열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조선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밀양경찰서 폭파, 부산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일본인 대장 암살 기도 등 수많은 사건목록이 보여주듯이 의열단의 투쟁은 그 차제가 무장독립투쟁사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약산은 1920년대의 빈 라덴이었다.
약산은 의열투쟁에 머물지 않고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 꿈은 '조선 의용대'의 창설로 이어졌고, 나중에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부대로 맥을 이어갔다. 그들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견결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독립투쟁사의 마지막은 찬란할 수 있었다.
약산은 해방 전 중국땅에서나 해방 후 조선땅에서나 좌우합작에 충실했다. 이미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한 '국공합작'의 진행을 보아왔던 약산이기에 독립투쟁의 좌우합작을 위해서 일관되게 노력했다. 그 결과 민족혁명당이라는 통합정당의 건설이 가능했고, 말년의 대한임시정부를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과 약산의 이 좌우통합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같은 좌우통합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관되게 좌파를 배척하는 입장에 섰던 이승만의 노선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약산이 해방 이후에 좌파운동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하는 등 친좌파적인 경향으로 흐른 것을 원래 약산은 좌파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약산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의 고위직을 거쳤기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취급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곡해라고 본다. 약산은 해방이전이나 이후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좌우통합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보고 일관되게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결국 해방정국에서 약산(48년월북)이나 몽양 여운형(47년암살), 백범 김구(49년암살), 우사 김규식(50년 납북)같은 통합론자들의 실패는 곧 해방이후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잉태한 씨앗이 되었다. 약산의 실패는 이승만이나 김일성 같은 일방주의자들의 성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약산의 최후는 숙청과 음독자살로 나온다. 지은이 이원규가 정확히 알고 쓴 것인지, 추측인지 모를 일이다. 관련 자료를 더 읽어보아야겠다.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약산의 처지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비김일성계들이 모두 숙청된 상황에서 그가 북쪽에서 건재하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약산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 약산은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창건하고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걸었던 통합론자로서 치열한 평생을 살았다. 약산은 분단과 반목을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는 우리 시대에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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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약산 김원봉'←이 책 강력 추천합니다.
글쓴이 : Ψ천재
이 책 정말 좋은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 김구 선생님보다도 훌륭하셨던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분이 많이 계셨으면 현재 우리나라가 이 모양은 아닐텐데...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광복 후 친일세력과 손잡고 반민특위를 해체 하고....
해방 후 좌우합작(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그 배후에 이승만과 미국이 있었고...
김구 선생님 피살 배후에도 이승만과 미국이 있었고...
이승만이 미국과 손잡고, 친일세력과 손잡고.....
이것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가 이 모양 아닐까요?
친일파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패가망신 수준으로 하층민 생활 하고 있고....
우리나라 미국이 시키면 뭐든지 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나라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경상도와 전라도)로도 갈라져 있고...
친일파 청산, 과거사 정리 꼭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런데도 이걸 가지고 악법이라고 몰아붙이는 놈들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법인데 말입니다.
정말 '김원봉' 이 분 훌륭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많이 계셨음 절대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약산 김원봉' 이 책 강추합니다.
책 정보는 아래 주소로 들어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63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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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약산 김원봉 평전....
글쓴이 : 송찬호
평전을 쓸경우에는 누구나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평전을 잘못 전개할 경우 작가의 주관이나 객관적 사실들을 미화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양면성을 갖고 있기에 더더욱이 조심스러운 듯하더이다
역사서란 것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체게바라 이후 평전을 쓰는 것이 시류라고는 허나
약산의 평전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많은 이야기들을 배우는 듯합디다
석정 선생이 십자령에서 최후를 맞을 때 그것이 자의가 아닌 다른 이에게 이용당한 듯한 표현은 좀더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선생의 최후에도 좀 더 많은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한번 읽어 봄직한 책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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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약산 김원봉(이원규, 실천문학사.2005) 일독 권합니다.
글쓴이 : 박양백
약산 김원봉(이원규. 실천문학사 역사인물찾기 18권.2005.8.10) 일독을 권합니다. 목숨과 명예를 초월하여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남과 북에서 어떻게 쓰러져 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실 권력이 얼마나 냉혹하게 독립투사들의 공적을 훼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 이승만과 김일성이 어떻게 조국의 순결을 유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왔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소망이 왜, 어떻게 굴절되고 이용당해 오고 있는가를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권력욕도배들의 끝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국 민중의 장강은 허다한 장애를 넘고 넘어 흘러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고야 만다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의와 정의를 생각하는 정신은 절대로 꺾이지 않고 새풀로 돋아나 무성한 숲을 이루고야 만다는 역사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잔실의 힘은 정말로 위대합니다.
지금도 그러한 기운이 일어서고 있지만, 우리 민족사는 외세를 등에 업고 날뛰는 자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진군할 것입니다.
분파주의라는 우리 민족 습성을 안타까워하며, 특히, 대일 무장항일투쟁의 주력군이 해방공간과 625전쟁에서 오도된 선택에 의해 붕괴되고 만 것은 천추의 한입니다. 남로당과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주력이 소련과 김일성파에 의해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동족상잔의 도구화 된 것은 천추의 한입니다.
해방공간에서의 좌익노선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수많은 항일투쟁 지도자의 한 사람일 뿐인데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미화, 과장된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의 원위치화와, 625 전쟁 개전에 대한 책임, 절대세습왕조 구축에 대한 역사 비평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익이나 좌익이나, 총을 들고 직접 왜놈들과 맞서 싸운 항일전사들이 이승만과 김일성 개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남로당-빨치산-조선의용대-동북항일연군 전사들은 결코 김일성 세습왕조 구축용 벽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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