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는 우리 역사를 보는 자주적 시각을 열어
8월 31일, 포충사에서 <우리 역사 오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글의 향기, 책의 기운)를 나누고자 하는 연구공간 파랗게날의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우리 곁의 명승고택을 찾아 문학, 역사, 예술, 철학, 말과 글 등 다양한 인문학적 교감을 나눈다.
지난 8월, 우리 시대의 대화와 소통을 역사적 교훈에서 찾고자 학술토론회로 성리학의 양대 유현 남명과 퇴계의 만남을 읽은 데 이어, 여름 막바지 8월 31일(토) 포충사(경남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원촌마을 187)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의 <우리 역사 오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로 스무 번째 인문학 강좌를 만난다.
이 교수는 “사대주의자와 식민주의자에 의해 축소되고 왜곡되었던 우리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본인의 저서명이자 이번 강좌의 주제어인 <우리 역사 오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21세기 새로운 역사인식을 위해, 단군에서 구한말까지 우리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자주적 시각에서 재조명한다.”
이 교수는 1938년 경남 함안에서 나, 마산고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로 있던 1980년 군부세력에 의해 4년간 해직되었다 복직한 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정신대대책협의회 진상조사연구위원,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지냈다. 단재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근대역사학의 이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역사의 중심은 나다 – 우리 역사를 말하는 푸른 화법≫,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등이 있다.
이달의 명승고택인 포충사는 어지러운 진무塵霧 속에서도 명확한 사관으로 목숨에 초연한 이술원李述原(1679∼1728)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자 서원이다. 영조 13년(1737)에 ‘포충사褒忠祠’라는 사액을 받아 이듬해 후손들이 거창읍 대동리에 건립하였으나, 1752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문화재자료 57호.
이술원은 거창 웅양 출신으로 본관이 연안延安,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이다. 김해도호부사 이중길李重吉의 손자.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청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북상할 때 정희량鄭希亮도 이에 호응하여 안의에서 난을 일으키니, 현감과 현병縣兵은 모두 도망가고 오히려 정희량 반군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다. 이때 그는 거창의 좌수座首로서, 현감 신정모申正模에게 군사를 내어 정희량을 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정희량의 격서檄書가 오자 신정모는 도망쳤다. 그만이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되어, 강직한 그의 성품을 탐낸 정희량의 갖은 회유와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처참한 죽음을 택했다. 이조판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충강공忠剛公의 시호를 받았다.
포충사로 찾아가는 길은, 서울에서 거창까지 서울남부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하루 각 10여 회의 고속버스가, 거창읍에서 원촌마을까지 하루 29회의 완행버스(055-944-3720, 서흥여객) 및 직행버스(055-942-3601, 거창터미널)가 운행된다. 자가용으로는 올림픽고속도로 거창나들목으로 나와 3번국도를 따라 북향으로 16km를 달리면 웅양면에 닿고, 웅양면사무소 바로 뒤에 포충사가 있다.
연구공간 파랗게날의 인문학 강좌는 인문학을 아끼는 누구에게나 열린 무료 시민강좌로 진행하며, 인문학 연구 및 강좌의 지속성을 위해 연구회원과 후원회원을 모시고 있다. (강좌문의 : 다음카페 ‘파랗게날’, 011-9257-1157)
첫댓글 이화님 건강하시지요? 벌써 계절이 바뀌어 추억이 되었나 싶네요..^^ 함께 들었던 강좌의 내용보다 느낌이 더 좋아서 오래 남을듯 싶습니다. 광주에서 처음 참석해서 야영하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여건이 도와주지 않아 아쉬움에 더 가까이 하고픈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