諱(휘) : 重遠(중원)
- 당-집-지직-인손-극돈-세정-수관-유창-태남-민신-중원
- 承旨公(승지공)
- 증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敏臣(민신)의 三子이고 字는 士任(사임)이다.
인조11년 癸酉(계유:1633)에 출생하여 숙종15년 乙巳(을사:1689)에 별세하였다.
순조7년(1807)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으로 증직되었다.
조양현(현 보성 조성면) 대곡에서 복성현(현 보성 복내) 당촌으로 이거해와 후손들이 크게
번창 일가를 이루며 지금까지도 전국 제일의 광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묘소는 초장지가 보성 복내 당촌 비봉산하 당뫼였으나 조선 후기 정조대에 순천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촌후 우강 사좌로 이장 하였다.
후손들이 당초 예장지터인 당뫼에 천인정을 세워 경관의 훼손을 막고 후학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했으며 그때 산소 주변 소나무들의 빼어난 자태는 천인정과 더불어 오랜
세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전주이씨 증 숙부인 문화유씨 증 숙부인 하동정씨이며 합부로 있다.
贈 通政大夫 左承旨 廣州李公 重遠 遺墟碑文
山陽治之北 四十里 福內面 堂村마을은 앞으로 程子川이 浩浩湯湯히 흐르고 뒤로는 飛鳳山이 嵯峨聳立하였으니 鳳飛千仞之像의 勝地로서 山陽의 一堂村이요 道內 屈指의 名村으로 名人達士의 棲遲處로 名聲이 있는 곳이며 福城古縣의 治所로 社稷神을 모시는 神堂이 있어 堂村이라 由來하였다.
元來 文氏 宋氏가 世居하였으나 廣州李公 重遠께서 移居 定着하신 곳이다. 公의 始祖는 判典校寺事 贈左贊成 遁村 集이요. 寶城 入鄕祖 內贍寺判官 養眞齋 秀莞의 玄孫이며 考 成均進士 敏臣은 丙子亂에 擧義하여 贈司僕寺正이고 妣는 贈淑人 星州李氏 贈參判 珹의 女이시다.
仁祖 癸酉 一六三三年에 顯官 碩學의 家門에서 誕生 天性이 寬厚仁慈하시고 操履가 堅確方正하시었으며 學問이 精博하여 處事에 詳明하시었고 待人接物에 謙恭愷悌하시고 容貌와 氣像이 端雅하여 和氣가 油然하되 그 凜凜함이 可히 侵犯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黨爭과 禮訟 등 內憂外患의 亂世를 慷慨하여 仕宦進出을 辭하시고 顯宗 甲辰 一六六四年 而立에 大谷 舊第에서 堂村으로 移寓하여 蓬廬에 隱居, 經傳과 家禮를 講磨하시면서 治家에 費의 有無를 不問하고 雖至屢空이라도 不動心하시었다. 家人僕隸가 或有失이라도 理로 譬說하고 不加怒言하였으며 子女姪의 訓育에 嚴正하시고 崇祖睦族으로 家業의 中興에 專念하시었다.
肅宗 己巳 一六八九年에 下世하시니 享年 五十七歲이며 堂村 堂嶝에 安葬하였다가 昇州郡 黃田面 水坪村 右岡巳坐之原에 遷葬하였다.
純祖 丁卯 一八O七年 孫 以栻의 貴로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에 追贈되었으며 配 贈淑夫人 全州柳氏 文化柳氏 河東鄭氏 三夫人에게서 生 五男하셨으니 長子 漢鼎은 忠義尉 秉節校尉요 二子 漢封 三子 漢範이요 四子 漢彦은 成均進士며 文學으로 著名하고 五子 漢望은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이다. 孫 以栻은 學行으로 入道薦首望으로 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曾孫 廷璞은 登大科하여 司憲府執義를 行하였으며 後孫中에 鴻儒 碩學과 顯官 名士가 多數 輩出되어 昌運이 連綿하였다.
또한 後孫들이 公의 遺訓을 遵守하여 堂嶝에 樂育齋와 千仞亭을 建立하여 學德을 崇慕하고 英材敎育에 置重하여 先祖의 茂績을 後世에 繼承하였으니 堂村이야말로 一水石 一草木에도 公의 精采를 不被한 것이 없으니 어찌 그 遺墟를 泯滅하게 할 수 있겠는가.
嗚呼라 公께서는 坎壈하여 草茅에 居하면서 宦路를 멀리 하였으나 天報以弘福으로 子孫이 克昌하여 塔洞 柳洞 坪村 板橋 新基 兼於 江山 등 大集姓村을 이루고 其數는 七百戶 三千名에 達하였으나 世態風潮의 變遷으로 離鄕者 漸增하고 住岩댐 建設에 따른 水沒로 因하여 大多數 宗族이 離散하여 將來 遺墟를 留守할 者 全無할까 憂慮하여 후대까지 永久不滅로 紀蹟하기 爲하여 이 碑를 建竪하노라.
西紀 一九九三年 四月 十八日
八代孫 永 輝 撰
永 壎 書
좌승지공 중원(重遠) 유허비 건립
당촌(堂村) 마을 입구에 좌승지공(左承旨公) 유허비(遺墟碑)가 지난 1993년 2월 25일 건립되었다. 당촌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이 좌승지공(左承旨公)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永壎)를 구성하여 건립기금을 모아 이뤄진 것이다.
특히 유허비 건립에 있어 필자의 백형(伯兄)과 중형(仲兄)께서 중추적인 소임을 맡아 이뤄진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한다. 백형은 유허비문을 찬(撰)하셨고 중형은 비문을 서(書)하셨기 때문이다. 여기 유허비 건립 취지문 일부와 유허비문 전문(全文)을 게재한 것은 두 형님의 업적도 함께 기리기 위해서이다.
<유허비 건립 발기 취지문> 전약(前約) “공(公)께서는 이립(而立;30세)에 대곡(大谷)에서 당촌(堂村)으로 이거(移居)하여 봉려(蓬廬)에 은거(隱居)하시면서 경전(經傳)과 가례(家禮)를 강마(講磨)하여 자녀질(子女姪)을 훈육(訓育)함에 엄정(嚴正)하고 처인온화(處人溫和)와 숭조(崇祖) 목족(睦族)으로 가업(家業)의 중흥(中興)에 전념하셨다. 공께서 1689년 하세(下世)하신 후로 그 자손들이 위로 명현(名賢) 선조(先祖)의 학덕(學德)을 숭모(崇慕)하고 영재(英才) 교육(敎育)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당등(堂嶝)에 낙육재(樂育齋)와 천인정(千仞亭)을 건립하여 풍속(風俗) 영귀지소(詠歸之所)로 효우돈목지풍(孝友敦睦之風)을 현양(顯揚)하여 선조(先祖)의 무적(茂績)을 후세에 계승(繼承)하고자 하였으니 당촌(堂村)이야 말로 일수석(一水石) 일초목(一草木)에도 좌승지공의 장채(精采)를 입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그 유허(遺墟)를 민멸(泯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호(嗚呼)라! 근심원달(根深源達)이라야 지무유장(枝茂流長)함은 불변의 진리(眞理)인지라 공의 적덕여음(積德餘蔭)이 영수내예(永垂來裔)하고 천보이 홍복(天報以弘福)으로 홍유석학(弘儒碩學)과 현관명사(顯官名士)가 다수 배출되고 창운(昌運)이 연면(連綿) 번성(繁盛)하여 그 수가 당촌에서 탑동 유동 평촌 판교 신기와 겸어(兼於) 강산(江山) 등 마을에 대 집성촌을 이루고 7백여호 3천여명에 달하였으나 세태 풍조와 산업 구조의 변천으로 이향(離鄕)하는 수가 점증하고 주암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인하여 대다수 종족(宗族)이 이산(離散)하여 장래 유허를 유수(留守)할 자 전무(全無)할까 우려하여 후대까지 영구불멸(永久不滅)로 기적(紀蹟)하기 위하여 촌전(村前)에 유허비를 건수(建竪)하기로 하였다.“ 1993년 2월 25일
10대조 승지공 휘 중원(重遠)<1633~1689년(인조11년~숙종15년);56세>
10대조이신 좌승지공 휘 중원(重遠)은 휘 민신(敏臣)의 3자이고 자(字)는 사임(士任)이며 인조(仁祖) 11년(1633년)에 탄생하셨다 공(公)은 용모가 준걸(俊傑)하고 천성이 관후(寬厚) 인자(仁慈)했으며 소년시절부터 지략(智略)이 비범했다. 학문이 정박(精博)했으나 조정(朝廷)의 당쟁과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난세를 개탄(慨嘆)하여 사환(仕宦) 진출을 사양하고 가업의 중흥(中興)과 자녀 훈육에 전념하셨다.
현종(顯宗) 5년(1664년)에 조성면 대곡(大谷)에서 당촌으로 독립 분가 이거(移居)하여 가업을 닦고 경전(經傳)과 가례(家禮)에 전념하던 중 숙종(肅宗) 15년(1689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57세였다. 배위(配位)는 전주유씨 문화유씨 하동정씨 세분이며 5남 1녀를 두셨는데 장자 한정(漢鼎;忠義尉 秉節校尉), 2자 한봉(漢封), 3자 한범(漢範), 4자 한언(漢彦;進士), 5자 한망(漢望;증가선대부 戶曹參判 겸同知義禁府事)이다. 묘소는 처음에 당촌 당뫼에 안장하였다가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뒷산 우강사좌(右岡巳座)로 천장(遷葬)하였다.
공은 순조(純祖) 7년(1807년)에 손자(孫子)인 이식(以栻;漢望子)의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同知) 중추부사(中樞府使) 벼슬로 인해 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承旨)겸 경연(經筵)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수찬관(修撰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상기(上記)한 바 좌승지공께서 1664년에 조성 대곡(한실)에서 처음 당촌으로 이거(移居)해 그 후손들이 살아온 지 어언 330여년이 되었다. 공의 5자중 장자인 한정(漢鼎)을 제외하고 휘 한봉(漢封), 한범(漢範), 한언(漢彦), 한망(漢望) 네 분의 후손 대부분이 당촌에서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물론 판교(너덜이) 신기(새터) 겸어 강산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時代)의 발전 변화에 따라 주민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해 감으로써 일가들이 번성했던 당촌이란 정서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당촌 등 내접산 인근 마을은 주암댐 건설로 대부분의 농토가 수몰 지역으로 들어감에 따라 타처로 이주해버린 것이다. 수백년 동안 광이(廣李) 양반촌으로 이어온 제일 당촌(堂村)의 일가들은 광주로 서울로 뿔뿔이 떠나가고 명승(名勝)을 자랑하던 마을은 폐허(廢墟)가 되어버렸으니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당촌을 지키고 있는 일가들이 남아 있고 비록 당촌을 떠나갔더라도 고향으로서 마음만은 항상 함께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승지공의 유허비가 있고 당뫼 천인정이 있는 한 당촌은 영원한 우리 광주이씨의 터전이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