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2015년 봄호.
【김현경의 회고담 4】
김수영 시인이 좋아했던 것들
일시 : 2014년 12월 17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해방 전후의 김수영 시인 행적에 대해 귀한 말씀을 해주셨지요. 오늘은 김수영 시인이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선 김수영 시인은 어떤 옷을 좋아했는지요.
김현경 : 외출할 때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집에 있을 때는 겨울에는 솜으로 만든 바지저고리를 좋아했어요. 물론 추울 때는 솜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외투를 걸치고 외출하기도 했어요. 여름에는 베로 만든 옷을 좋아했어요. 봄가을에는 옥양목으로 만든 옷을 좋아했고요. 날씨가 좀 쌀쌀할 때는 겹으로 만든 것을 입었고 날씨가 따뜻하면 홑으로 만든 것을 입었어요. 제가 구제품을 사다가 마련했어요. 김 시인은 키가 180㎝ 정도 될 만큼 컸어요. 옷 사이즈가 48이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집에 계실 때 주로 바지저고리 등 한복을 입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네요. 그러면 좋아한 음식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김현경 : 보신탕을 좋아했어요. 나중에 집에서 한두 번 해먹은 적은 있지만 전부 외출해서 사먹었어요. 청계천6가 쪽에 나가 김 시인은 보신탕집으로 가고 나는 짜장면집이나 냉면집으로 가 각자 식사를 했어요. 식사를 하고 나서 전봇대 밑에서 만나 황학시장에 구경을 갔어요. 골동품을 사기도 했지요.
집안에서는 동태찌개를 좋아했어요. 콩나물을 넣고 끊이면 맛있게 드셨어요. 음식은 타박하지 않았어요. 나도 국이며 찌개며 김치 등 반찬을 격식을 차려 상을 마련했지 대충 한 적은 없었어요.
과일을 사먹을 여유는 없었어요. 겨울철에는 무를 깎아 드렸지요. 밭농사로 무를 심어 창고를 만들어 보관했어요. 독에 넣었다가 깎아 먹었지요. 무밥도 좋아했어요. 굴을 넣고 무밥을 하면 맛있지요.
김 시인이 보신탕을 좋아하는 것을 시어머니는 내켜하지 않았어요. 시어머니는 착실한 불교 신자였어요. 김 시인이 버스에 치여 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 오셨을 때 첫 마디로 얘가 개고기를 너무 좋아해 결국…… 그러셨어요.
맹문재 : 보신탕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새롭네요. 다음으로는 김수영 시인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노래에 대해 듣고 싶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연극을 했잖아요. 그래서 노래를 잘 불렀어요. 팝송을 원어로 불렀어요. <오 데니 보이>를 좋아했어요. 세상을 뜨기 얼마 전인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이 주최한 문학 세미나에 문인들과 함께 버스로 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다들 환장했대요. 그 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했지요. 김 시인의 18번곡은 <클레멘타인>이었어요. 아주 잘 불렀어요.
맹문재 : 슬프기도 하고 사색적인 <오 데니 보이>와 <클레멘타인>을 다시 들어보고 싶네요. 다음으로 김수영 시인이 좋아한 책은 무엇이었는지요?
김현경 : 영국의 비숍 여사가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을 좋아했어요. 홍명희의 『임꺽정』도 읽었어요. 나도 읽었는데 우리 토박이말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김 시인은 안 읽은 책이 없었어요. 보들레르, 폴 발레리, 도스토예프스키,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일본 문학전집, 나쓰메 소세키, 전위파 시인 등을 읽었어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도 읽었어요. 6살 때부터 서당에 다녀 『명심보감』을 학교 들어가기 전에 다 외웠다고 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시작품인 「거대한 뿌리」에 비숍 여사가 나오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독서 경험이 있네요. 그때까지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으니 원서로 보았겠는데, 참으로 잘 하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세계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와 「거대한 뿌리」 같은 작품을 낳게 되었으니까요. 다음으로 김수영 시인은 어떤 영화를 좋아했는지,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함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본 영화 중에서 게오르규의 소설을 프랑스의 앙리 베르누이 감독이 만든 『25시』가 기억나네요. 그리고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만든 『길』도 떠오르네요. 『길』을 보던 날 김 시인이 우산으로 날 때린 거예요.
맹문재 : 김수영의 시 「죄와 벌」의 상황을 말씀해주셨네요. 언젠가 저에게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때가 되면 공개하지요. 김수영 시인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지요?
김현경 : 원래 포스터를 그린 사람이잖아요. 그림은 내가 좋아했지요. 그림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을 모두 좋아했어요. 내가 지금 일본에 가고 싶은 것은 1940년대 나온 화집들을 보았으면 해서예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농촌의 가을」이라는 그림을 그려 특선으로 교장실에 걸렸는데, 아버지께서 외갓집까지 자랑해서 보러 오신 일이 생각나네요.
맹문재 : 그림을 좋아하셔서 지금처럼 그림을 다루는 일을 하시는군요. 김수영 시인은 운동을 좋아하셨나요? 아니면 텔레비전 시청이나 경기장에 가서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나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선린상고 다닐 때 스케이트 선수였잖아요. 그래서 경기하다가 넘어져 앞니가 부러졌어요. 일상생활에서 운동을 하는 것은 못 봤어요. 야구를 좀 좋아했어요. 셋째 동생인 김수경이 경기고등학교 야구 부장을 지냈지요. 둘째 아들인 우가 야구를 아주 좋아했어요. 경복초등학교 5학년 때 장훈 선수가 반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대표로 나가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어요. 아주 전문적인 질문을 해 신문에 나기도 했어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서도 아마추어 야구를 계속했고, 지금도 좋아해요. 동대문운동장에서 아들 우가 김영태 시인을 만난 일도 있어요. 연장전이 있는 날은 집에 늦게 들어와 걱정도 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여행은 자주 다녔는지요?
김현경 :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지요. 국내 여행도 만만하지 않았어요. 아까 말한 부산에서 펜클럽이 주최한 문학 세미나에 간 일, 소록도에 시찰하러 간 일, 논산 훈련소에 강연을 간 일, 강릉에 사는 동생 수련네 집에 간 일 등 얼마 되지 않아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요?
김수영 : 종교는 없었어요. 시어머니가 착실한 불교 신자였으니, 집안이 불교에 가까웠지요.
맹문재 : 김수영은 어떤 성격의 사람을 좋아했나요?
김현경 : 욕심이 없고 정직한 사람을 좋아했어요. 재주가 있는 사람도 좋아했어요. 유정, 김이석 등과 가깝게 지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에 관심을 많이 보였나요?
김현경 : 듣기는 했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특별히 좋아하는 술이 있었나요? 가령 조니 워커나 막걸리 등 말이에요.
김현경 : 그런 것은 없었어요. 박인환 시인이 조니 워커를 좋아한다고 해서 좋지 않게 보았어요. 김 시인은 술을 즐기지 않았어요. 집에서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술을 마신 것이에요. 계속 술을 마시는 날은 가래를 뱉고 결핵성 치질로 고생을 했어요.
맹문재 :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군요. 그러면 김수영 시인은 무슨 취미 생활을 가지고 있었나요?
김현경 : 책 읽는 것, 책 사는 것이 취미 생활의 전부였어요.
맹문재 : 그렇군요. 김수영 시인이 좋아하는 색깔을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김현경 : 그린색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올리브색을 좋아했어요. 내가 외투에 그린색을 넣어 만들어 드리면 아주 좋아했어요. 세련미가 풍겼고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이발은 자주했는지요?
김현경 :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가끔은 삭발을 하고 와요. 자기 긍지를 찾으려고 했어요. 이발은 마포 변두리에 있는 무허가 이발소에 가서 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삶의 면면을 볼 수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네요. 오늘 말씀하셨던 내용과 관계된 시작품을 소개하면서 마무리 짓도록 할게요. 한 편은 영화 <길>과 관계된 「죄와 벌」이고, 다른 한 편은 비숍 여사와 관계된 「거대한 뿌리」이에요. 내내 건강하세요.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앉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하던 민비(閔妃)는 한 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