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천성이 소박한 진짜배기 농꾼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을 마음 판에 새긴 채 오늘도 하늘을 두려워하며 감나무를 자식새끼 다루듯 돌보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자연을 알고 땅을 사랑하면 하늘이 감동해 풍년을 약속한다는 제법 그럴듯한 철학을 가진 우리 아버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무학(無學)의 경력을 가진 채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개척한 초인적인 아버지의 이면에 자리잡은 농촌의 어려움에 대한 연민도 함께 공감해보고자 글을 쓴다. 아버지와 함께 경작하던 나의 유년시절과 중·고등학교 시절 과수원을 회상하며 글을 시작한다.
내가 새 학기를 분비하느라 바쁠 때 아버지는 1년 농사를 계획하시느라 분주하다. 싸늘한 시베리아의 냉기가 감도는 2월초에 아버지는 색이 바랜 두꺼운 점퍼를 입고 턱이 굵은 전정가위를 챙겨 어디론가 바삐 가신다. 아버지는 5m짜리 A자형 사다리를 대시고 전정을 시작하신다. 대개 댓가지 하나에 세 개 이상의 곁가지가 뭉쳐 있는 경우 그 중 가장 부실해 보이는 가지가 잘려나간다. 쉬워 보인다고 겁 없이 덤볐던 나는 감나무 병신 만들 작정이냐는 아버지의 핀잔만 들었다. 도무지 나로선 감을 잡을 수 없는 전정작업이다. 하긴 어떻게 30년 경력과 나의 풋내기 실력을 비교하랴. 아버지의 전정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화 「가위손」의 한 장면이다. 속도도 속도거니와 그 변화 없는 덤덤한 표정이 압권이다. 나무 한 그루 당 전정시간이 채 6-7분을 넘기지 않는다. 새로 이발한 나무들은 부스스한 모습을 벗고 깔끔하게 이발한 채 봄을 기다린다.
약 300그루의 나무들이 새 단장을 끝내면 아버지는 감나무를 원점으로 곡괭이를 이용해 1m이내의 써클을 동그랗게 파낸다. 아버지는 내가 이 작업을 도울 때 꼭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다. "아이 영식아, 감나무 뿌리 안 상하게 잘혀라."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혹이나 서툰 아들이 감나무 뿌리나 상하게 하지 않을까 조심하라는 당부이지만 나로서는 그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뿌리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도록 절단시키는 일이 다반사이다.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재빨리 흙으로 가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아버지야 능숙한 솜씨로 감나무 주위를 파 내려간다. 이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짓을 왜 나느냐 하면 다름 아닌 거름을 주기 위함이다. "그냥 퇴비를 뿌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고 싶겠지만 아버지 가라사대 한창 영양이 급한 싹 트는 봄에 이런 식의 퇴비가 양분공급 속도가 더 빠르다는 이유에서이다. 또 "이 정도의 정성을 보여야 감나무도 감사히 많은 열매를 맺지 않겠느냐"는 제법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실 때 꼭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선인 같았다.
퇴비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날씨가 풀리는 봄이 시작되면 또 할 일이 있다. 아버지는 지하수에 호스를 끼워 건조한 토양을 물로 적셔준다. 비가 좀 와주면 좋으련만 봄비는 해마다 인색하고 아버지는 이 일을 우선은 나에게 위임하신다. 지하수와 가까운 나무들은 그래도 쉽다. 지하수 동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호스의 무게감은 더해가고 나는 세 줄도 못 나가고 이내 숨을 헐떡거린다. 호스는 항상 어딘가 꼬여있다. 아버지는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첫 번째 줄 감나무부터 다시 물을 주신다.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도무지 지치질 않는다. 그 넓은 과수원을 마지막 열까지 다 마치시고 땀을 닦으시며 나에겐 호스 속의 물을 빼고, 엉키지 않게 잘 감아라 하신다. 농사일로 다져진 아버지의 근육에 지렁이 만한 힘줄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며 허약해 빠진 나는 완전히 위압당한 채 말없이 호스를 감았다.
여름이 시작되고 잎사귀가 제법 무성해지면 드디어 대망의 농약 살포가 시작된다. 대개 5월말에서 6월초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 바람도 잔잔하고 햇살도 적당하며 습도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이 때 내가 할 일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1500리터 짜리 농약 통을 기다란 각목으로 가끔 휘젓는 것과 농약이 거의 다 바닥났을 경우 비스듬하게 돌을 괴어 남은 농약을 남김없이 비우는 것 따위다. 그리고 동력을 켜고 끄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 아버지가 몇 번이나 반복하여 주의를 주시기를 "영식아 모다(모터)주위에선 손가락 조심혀라. 병신 되믄 니만 손핸께." 하며 단단히 말씀하신다. 나도 동력의 굉음과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로프를 보면 일종의 공포감마저 들어 웬만하면 그 주위에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바람을 등진 채 깍지벌레와 탄저병으로부터 감나무를 구원할 살균제를 날리신다. 그 모습을 모면 떠오르는 영상이 또 있다. 아름 아닌 119소방수. <평촌리>라는 문구가 박힌 동네 이장 캡만 빼면 장화와 마스크는 얼추 비슷하다.
장마가 끝나는 8월말에 과수원에 가보면 한마디로 가관이다. 명아주, 쇠비름, 왕고들빼기 등 풀들이 무릎만큼 자라나 있다. 아버지는 그런 거대한 풀들을 손으로 뽑아낸다. 어떤 풀(특히 왕고들빼기)은 얼마나 뿌리가 깊이 박혔는지 뽑아놓고 보면 뿌리가 줄기보다 더 길다. 이런 식으로 잡초를 제거해 나가다 보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바로 뱀이다. 나는 뱀을 발견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장화 밑창으로 머리를 강하게 짓이겨 버린다. 뱀은 장화에 몸을 꼬며 발악을 하다가 즉사한다. 아버지는 즉시 뱀을 땅에 묻어버린다.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뱀의 목격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리라.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다. 아직 크기도 작고 색깔도 푸른 어린 과실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아버지는 그런 광경을 흐뭇하게 생각하신다. 이유인즉 떨어져버린 저런 허약한 과실로 영양이 분산될 바에야 튼튼한 과실로 영양이 집중 되 더 크고 당도 높은 단감을 탄생시키는 것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벼농사하시는 분들에겐 유감스런 말이지만 우리에게 태풍은 허약한 과실들을 선별해내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그렇게 태풍까지 이겨낸 튼튼한 단감들의 수확이 시작되는 것은 10월 중순부터다. 붉은 빛을 띄는 단감들을 따서 한곳에 모아 선별작업을 해야 한다. 60단위부터 100단위까지 나오는 크기선별은 아버지가 하시고 나는 15kg 상자에 감을 담아 중량을 측정하는 임무를 맡는다. 수확된 과실 중에 가장 큰 것은 두루마리화장지 만한 지름에 사과 만한 부피를 가진다. 그런 과실을 상습적으로 맺는 나무가 있다. 출입구쪽 맨 마지막 열의 두 번째 나무이다. 아버지와 나는 이 나무를 꼬맹이 나무라 부른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는 이 나무는 3m도 채 안 되는 어린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실을 매년 30개씩 꼬박꼬박 생산해낸다. 10m가 넘는 멀대같은 나무들은 사다리도 소용없는 높이로 위험한 나무타기를 요구하고 과실의 질과 크기도 썩 내키지 않는다. 그 나무의 감을 따러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건물 옥상에 올라온 듯 마을 지붕들이 비스듬하게 보인다. 물론 위험하다. 발을 헛디뎠다간 여지없이 부상이고 얼굴은 또 험하게 긁히기 일쑤다. 그런 일들은 체중이 아버지보다 가벼운 내가 도맡아 한다. (아버지는 이런 나의 노고를 알까?)
이런 수고로 수확된 단감은 여수, 순천, 광주 등의 경매시장으로 운송된다. 물량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잘 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잘못 갔다가 껌 값을 받아오면 그런 낭패가 없다. 단감의 당도, 질량의 오차, 제품상태 등을 고려해 값이 매겨지는데 60개들이 큰 과실은 한 상자에 3~4만원 정도이고 100개들이 작은 과실은 한 상자에 만원도 채 못나갈 때가 많다. 물론 그날의 시세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아버지가 왜 태풍과 꼬맹이 감나무를 좋아하시는지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100개 짜리 세 상자보다 60개 짜리 한 상자가 더 상품가치가 높다는 사실이 눈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수확이 끝났다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다음부터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일이다. 홍시와 곶감을 만드는 일이 그것인데 홍시와 곶감나무는 따로 있다. 단감은 홍시로 만들면 물만 생기고 홍시나 곶감을 단감처럼 베어먹으면 입맛을 잃을 정도로 떫다. 우리 과수원엔 십자단감이라 불리는 부유종이 가장 많고 붉은 속살을 가진 차랑종과 크기는 크지만 당도가 낮은 일본이 원산지인 니카도종도 몇 그루 있다. 홍시종과 곶감종까지 합쳐서 대략 다섯 종류의 감나무가 존재하는데 가장 구별이 힘든 것은 곶감종과 차랑종이다. 외관상으로 너무 비슷하게 생긴 이 두 종은 돌멩이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게 붉은 빛깔이 유난히 짙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할머니는 이들 중 곶감종을 귀신같이 구별해서 곶감을 만드신다. 어머니는 물방울 마크처럼 생긴 홍시종을 붉게 익혀 장사치들에게 판다. 아버지는 또 1년 농사를 계획하신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1년 동안 아파트 경비와 과수원 경작을 병행 하시면서도 피곤한 기색을 안 하셨다. 그 흔한 감기 한번 안 걸리신다. 실제 이렇게 수고해서 번 돈으로 자식들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다. 곧 환갑을 맞이하실 아버지는 이젠 과수원 일도 힘에 부친다는 명목으로 평당 15만원에서 20만원정도에 살 사람 있으면 팔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도합 2억 오천에서 3억 정도 받으면 세금 떼고 십일조 떼어 남은 돈으로 경비로 계신 호반하이빌로 이사를 가자고 하신다. "칠레인지 팔레인지와의 농산물 협정으로 농사짓기가 더 개떡같아 지긋어!" 라며 한숨을 내쉬던 그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우리 아버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하셨다. 우리 가족과 함께 한 울창한 과수원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떠나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순천시에서 낙안읍성을 관광명소로 더 발전시키고자 면사무소 주위의 땅(우리 과수원도 포함)을 생산지에서 공공지로 풀 계획에 있단다. 감나무들은 잘려나가고 그 땅은 주차장이나 공원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꼬맹이 감나무도 전기톱에 잘려나가거나 뿌리 채 뽑힐 것이다. 땅값은 오른다지만 아버지는 고향에서 계속 과수원을 돌보고 싶으신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그럴 분이시다. 칠레에서 과실과 곡물을 들여오고 대신 컴퓨터기기와 휴대폰을 수출하자는 국가적 대세와 낙안읍성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순천시의 계획에 농민은 안중에도 없다. 마을 어른들은 "언제 정치하는 놈들이 땅꾼들 생각헌당가. 이젠 또 어떻게 농사를 지을 것이여" 하며 하나같이 어두운 이래를 예감했다.
감나무 이야기는 종반부를 향해 가고 있다. 감나무들은 여전히 신록을 뽐내고 있지만 아버지는 점차 늙어가고 아들은 대도시로 문학을 공부하러 갔으며 국가는 농민들에게 더 이상 농사를 권장하지 않는다. 농촌은 더 이상 농촌이 아니고 낙안도 더 이상 농경지가 아니다. 경운기 소리보다는 포크레인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농민들 보단 외국인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나는 실향민처럼 울적한 마음으로 꼬맹이 감나무의 감을 언제까지 맛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첫댓글 님의 글을 읽으니 제 마음에도 휑한 바람이 부네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나도 시골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님의 글을 읽으니 그 바램마저도 부끄러워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