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보통 잔디밭에 보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붙여놓지요. 그것처럼 ‘너희는 주안에서 빛이라.’(엡 5:8)고 써놓았습니다. 그 때 그 앞의 전제가 뭐냐하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다’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든지 놀러 가든지 노래방을 가든지 판사가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관계없이 너희는 통째로 어두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빛이라’ 라고 할 때 이것을 어두움에 속한 사람은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주안에서 빛이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어이, 어둠아! 빛이 되어야 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에게는 그런 것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알아서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빛이라’ 하는 이 창조가 어두움에 대해서 가능한 것은 십자가에서 나와야 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십자가가 복음이거든요. 그는 빛이셨는데 어두움을 위하여 빛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 첫 번째, 빛으로 오신 분 때문에 이 ‘세상은 처음으로 세상은 정말 어둡구나’ 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두 번째, 빛을 창조하는 겁니다. 이것이 이사야 45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과 빛에 속한 사람, 이렇게 나누는데 이 세상을 그냥 둘로 쪼개서 한쪽은 빛이고 한쪽은 어둠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빛이 이 세상에 오니까 이 세상은 그 자체가 어두움이었고 이 어둠속에 빛이 내려앉은 거예요. ‘너희는 주안에서 빛이라’라고 팻말을 붙인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의 표시인데 ‘지금 이 지역은 빛입니다’ 라고 선언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계속해서 여기에서 창조를 하는 거예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라는 팻말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가는 것이 용납 안 되듯이 ‘너희는 주 안에서 빛이다.’라고 해 버리면 그 순간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주안에서 빛이 되는 겁니다. ‘빛이 좀 되어 달라’는 명령이나 부탁이 아니고 하나의 표시입니다.
잠자고 있는데 뭔가 하나를 붙여놓고 가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이 학생이라면 잠을 자고 있는데 ‘2학년 1반,’ ‘2학년 2반.’ 이런 식으로 하나의 표시를 전부 다 달아서 자기 표시가 이렇게 정해져 버리면 끝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남는 문제는 ‘2학년 2반’ 같으면 실제로 ‘나는 2학년 2반이다’ 라고 이것을 돌아다니면서 자랑하라 이 말이죠.
이게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그 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자랑하라.’ 그 말입니다. ‘나, 빛이거든. 신난다. 전에는 어두움이었어. 그런데 빛이 와서 빛이 된거야.’ 이렇게 자기의 소속, 자기의 신분, 표시 그것을 자랑하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쉽습니까? 신앙생활. 자랑도 못합니까? 자랑도 못해요? 자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하신 분, 구원자 자랑이 있고 두 번째는 자기자랑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이 있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는 어디에 속했다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나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고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분명히 이야기를 하셨건만 이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잘나서 그 잘난 나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자기자랑,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일한 것도 없이 경건하지도 않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사함을 받는 행복이 얼마나 크냐.’ 고 합니다. 일한 것도 없이 경건치도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우리한테 기대를 안해요. 워낙 잘 아시기에. 주님은 저한테 기대를 안 합니다. 얼마나 제가 맘이 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 기대를 안 하는데 왜 자기한테 미련을 가지고 자기 의로움과 자기착함에…, 이게 선악 아닙니까? 악보다 선을 많이 행해서 악을 상쇄시킨다는 사고방식, 이게 악마가 심어준 사고방식 아닙니까? 그런 사고방식가지고 쫒겨나 놓고 또 그 사고방식을 주장한다고요. 그야말로 이 순재처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누가 이야기하거든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해라.’ 그 소리도 못합니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그 소리도 못해요. 목사가 욕을 하면서 나가라고 소리쳐도 ‘너나 나가라. 이게 어디서 누굴 보고 명령하나? 주님도 나에게 명령을 안 하는데.’ 한번 적어 볼게요. 주님도 나를 명령을 안 해요. 뭐만 합니까? 표시만 하지.
저를 붙들고 ‘너 2-2반 되어라. 부탁이다. 2학년 2반 되어라.’ 아닙니다. 자고 있는데 뭐가 스쳐갔는데 보니까 2학년 2반이라. ‘잠자는 자여 깨어라’ 해서 깨어보니까 뭐가 붙었어요. ‘너는 2-2반이라’ 그러니까 이것을 어떤 누가 말려도 너무 좋아서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멱살 쥐고 ‘너 할래, 안 할래’ 이런 식의 주님이 아니다 이 말이죠.
만약 그런 식으로 나가면 아침에 주님 자랑하다가 그 다음 오후에 자랑 안하면 구원 못받습니다. 사람의 두뇌에는 두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장기기억이 있고 단기기억이 있어요. 단기기억은 해마에서 하고 장기기억은 두뇌 전체에 퍼지는데 두뇌에서 장기기억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직도 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공명한다.’ 공명이 뭐냐 하면 거대한 창고에 종을 땡, 울리면 그 종소리가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온 사방에 그 벨소리가 퍼지지요. 왕왕왕와왕! 들리지요? 그처럼 오래가는 장기기억은 이처럼 온천지에 퍼지듯이 자리잡는다는 거예요. 마치 기억이 어느 한 부분에 있다면 좋지요. 아인쉬타인 뇌에서 뭐만 잘라내면 돼요? 그것만 잘라내서 집어넣으면 아인쉬타인이 공부했던 것 그대로 다 들어오잖아요.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목사님의 두뇌하고 바꿔치기 했으면 좋겠다.’ 안 바꿔도 구원받습니다. 안 바꿔도, 멍텅구리라도 구원받아요. 왜? 아예 멍텅구리니까. 모든 인간 다. 주께서는 아예 기대를 안 해요. 기대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실은. 어떤 사람의 수입이 한 달에 50만원 같으면 270만원의 수입을 기대하게 되면 그 이전에 50만원 받은 그 감사는 날아가 버려요.
오늘 비 왔지요? 비오고 난 뒤에 뉴스에 이런 게 나왔어요.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가뭄지역에 감질나게 왔다.’ 가뭄지역에 감질나게 비를 주신 하나님은 너무하시다는 거예요. 감질나게 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한테 세금 낸 적 있습니까? 교회 오지도 않잖아요. 공산주의에 내리는 빗방울하고 자본주의세계에 내리는 빗방울하고 맛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지요.
선인과 악인을 따지지 않고 내려주시니까. 왜? 둘 다 똑같은 인간이니까. 둘다 똑같은 인간을 뭘 기대해요? 뭘 기대하냐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무차별 주는 것은 구원받는 것도 ‘내가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준다’는 거예요. ‘악인에게 비를 주듯이 악인에게 햇빛을 주듯이 너도 악인이지만 너에게 생명나무를 그냥 공짜로 줘’가지고, 받은 사람은 알지요.
표시라니까, 표시. 명령이 아니고 뭐라고요? 표시라니까요. 너희는 뭐다? ‘주안에서 빛이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명령이 아닙니다. 잔디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뭘 장기기억하게 하느냐 하면 ‘너는 빛이야’ 이걸 기억하니까 우리가 행동할 때 ‘아, 저건 어둠이구나’ 하고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너희는 어둠이 뭔지 알고 빛이 뭔지 알아서 그 어둠에 속한 그런 것은 버려라’ 그 말입니다.
왜? ‘너는 신분이 이미 빛의 신분이기에.’ ‘목사님, 버리라고 하시는데 만약에 안버리면 구원이 취소됩니까?’ 이게 내 능력 같으면 못하는데 2학년 2반의 능력이 있는한…, 아까도 이야기 했잖아요. 주님이 2천만원이든 1억이든 계속 대주는 주님이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이것이 유지되도록 빛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 줄 때 ‘아,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또다시 느끼죠. 이점을 알았지요? ‘너희는 주안에서 빛이라’ 하는 것은 표식이고 이 표식은 새삼스럽게 우리보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신약에는 사람이 없어요. 신약에는 주님만 설쳐대지 사람은 안 설칩니다. 왜? 설쳐봐야 죄인이니까.
주님 혼자 설쳐서 하는데 여기서 ‘빛이라’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졸지에 뭐가 되었습니까? 어둠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의할 것은 세상을 스스로 연구해서 인간을 연구해서 죄나 어둠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기가 반성을 해서 ‘아, 이것은 죄구나’ 라고 알아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왜 죄인입니까? 이유도 묻지 마세요. 그냥 죄인입니다. 얼마나 쉬워요. ‘나는 이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다.’ 이러면 그 나쁜 짓을 안 한 순간에는 의인되겠네요.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완전히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나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말로 하면 선악적 사고방식입니다.
선악적 사고방식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게 죄니까, 선악적 사고방식이. 천사하고 인간하고 차이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인간은 모르고 천사만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선악과의 지식은 인간은 몰랐어요. 천사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선악의 지식에 의하면 인간은 멸망한다는 것을 천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신처럼 생겨서 신이 못되어서 멸망한 자가 마귀입니다. 신의 내막을 알면서도 신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은 대들다가 멸망당하는 자가 누구라고요? 마귀죠. 그런데 방금 제가 마귀라고 했잖아요. 제가 마귀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게 결국 누구의 품성입니까? 우리 인간의 품성이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롬 1:21) 이유가 뭡니까?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 하고 싶지도 않은 이유가 뭐냐 하면, 정작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싶은 대상은 누구입니까? 신이 있는 줄 알면서 주인공은 누굽니까? 나는 나에게 봉사하고 나에게 찬미하고 싶은 겁니다. 만약에 지옥에 가도 여러분을 위로할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누구입니까? 바로 지옥에 가는 본인이 본인을 위로 합니다.
스스로 어깨를 두드려 가면서, ‘친구야, 괜찮아. 지옥에 너 혼자 가는 거 아니야. 같이 가는 거야. 하나님은 너를 버려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거야.’ 이렇게 위로 하는 겁니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믿는 그것도 자기 자랑거리로 훈장처럼 달고 다닐 것인데. 하여튼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이유 없이 죄인이고 나는 이유 없이 죽은 놈입니다’라고 고백 나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은 없다 이말입니다.
성령을 안받고 그것을 목사가 강요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열 번 반복,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 이런 것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주여, 나는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의인입니다’라는 것을 포기를 안 하게 되어 있어요. ‘목사님, 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만 만났어요.
예를 들어서 신학자나 목사 가운데서 ‘맞아. 당신 말대로 십자가로 구원받고 우리는 죄인 맞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주셨잖아.’ 부활을 주신 것은 자기 좋으라고 부활을 주신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죽은 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부활을 준 겁니다. 머리빠진 사람이 적절한 예가 좋아서 이야기하는데 머리빠진 분들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대머리가 있는데 이 머리에다가, 여기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데, 여기에 ‘너는 죽은자야’ 하고 십자가 도장을 꽉 찍어 준 것은, 이 찍어주는 힘이 바로 뭐다? 이게 바로 무슨 힘입니까? 부활의 힘, 다른 말로 하면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힘이 왔다는 것은 ‘나 죽은 자 맞구나’라고 깨닫게 해주는 그 힘이 바로 부활의 힘이에요. ‘나는 이제 살았다’ 하고 촐랑대고 까불라고 부활을 준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우리는 죽은자고 어둠이고 죄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어둠을 구원한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춰줌으로 말미암아 그게 어둠인줄 알았다.’ 이제부터 주님과 빛은 모두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어둠이었는데 이 빛으로 인하여 빛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표식이 빛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선악과에 의해서 선악과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인간이 뭐든지 선과 악에 의해서 죄가 나오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나무에 의해서 죄가 따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에서 죄가 나오는 이것은 폐기처분 되어야 하죠.
이 폐기처분에 관한 이야기가 잘 나온 것이 욥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난할 때 뭐라 하느냐 하면 ‘네가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다.’ 이게 무슨 사고입니까?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다.’ 이게 맞아요, 아니면 틀렸습니까? 옛날 창조에서는 이게 맞아요. 그런데 새창조에서는 이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이것은 안 맞지요.
기존의 선악적인 죄에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새 창조에서는 생명나무가 예수님인 것을 안 믿는 것으로 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노선이 달라요. 한쪽은 아래층이고 한쪽은 위층이라니까. 노는 동네가 달라요. 아래층에서는 ‘내가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위층에서는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안 믿는 그것으로 벌 받는다.’
아래층에서는 벌의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벌을 받는다.’ 위에서는 뭡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을 축복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예수님께 대들면 벌 받는다. 예수 믿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렇게 돼요. 위쪽에서는 복음이고 아래쪽에서는 뭐냐? 선악과에요. 지금도 선악과, 생명나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보다 더 쉽게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래층에 자꾸 놓이게 만든다는 말이죠. 욥의 친구들이 ‘욥아,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벌 받아서 그렇다. 네가 행동 똑바로 하면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고 하잖아요. ‘네가 행동을 똑바로 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위층에서는 뭡니까? ‘이미 창대했어. 따로 창대할 것 없어.’ 창대하고 말 것은 주님 소관이고 내 소관 아닙니다. 이미 빛의 자녀라는 표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끝났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할 게 없다니까. 할게. 주님 자랑하면서 살면 돼요. 노는 동네가 달라요. 노는 동네가.
아래층에서는 한국말, 위층에서는 영어, 그러니까 이게 소통이 안 돼지요. 한국말로 했지만 위층에서는 알아듣는데 아래층에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저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조입니다. 생명나무에서 나온 창조가 바로 신약성경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뭐냐? 선과 악의 사고방식이 있더라도 그것을 불문에 붙이고, 선과악에서 나오는 모든 심리적인 갈등과 불안과 이런 것은 일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은 뭐냐? 율법적인 것, 여기서 ‘율’자를 빼버리면 뭐가 남지요? 법이죠. 법 자체에 대해서 선과 악을 따지는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법에 속한 사람이고, 이것은 저주만 주어지지만 위에서는 생명나무, 이것은 사랑이고 사랑은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 예를 들어 이 앞에 있는 학생이 거지라면 ‘아이고 불쌍해라. 떡 먹을래요?’ 이래 되지요?
떡을 먹는데 앞에 컵을 주면서 ‘차렷! 열중쉬어! 똑바로 해. 떡 받을거야, 말거야.’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똑바로 해! 내가 구원해 줄게. 십일조 할 야, 안 거야’ 이런 것 안 물어요. ‘교회 나올거야, 말거야.’ 이래 안 묻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바빠서 못나와쪄? 못 나와도 할 수 없지 뭐. 바빠서 석 달 동안 안 나왔어? 안 나와도 할수 없지 뭐. 돈 없어서 헌금 못했쪄? 돈, 바빠서 전도 못했어요? 십이년 동안. 하지 마세요. 13년 채워보지 뭐. 구원 되나 안 되나. 13년 동안 전도 한명 안 해도 구원돼요.’
법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 속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다시 뭐로 돌아옵니까? 2층에서 놀다가 다시 어디로 가냐, 2층에서 영어 하다가 다시 1층으로 내려가요. ‘세상에, 우리 애가 성적이 내려간 것은 내가 성경을 석장 읽을 것을 두장 반 밖에 안읽어서 그렇다. 세상에 에미가 신앙이 좋아야 애 성적이 올라가지 에미 신앙이 이래서 무슨 애 성적이 올라가나. 이건 하나님이 징계한 것이다.’ 혼자서 선악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낮아지지를 않았어요. 자식이 살아 있으니까 자식걱정을 하지요. 그 걱정되는 자식마저 없어보세요. 나중에 비참하게 되면 ‘주여, 그때 자식 있을 때, 공부 공부 하지 말고 그저 꼴찌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런 소리를 왜 못했던고? 이 자리에서 한 번 해 보시렵니까? 애들 많이 있는데.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그러면 다친다. 나는 그냥 네가 맘 놓고 뛰어놀고, (자기 먹을 것은 갖고 나온다고 했으니) 그저 예수 잘 믿어라’ 라고 말이 나오고 싶어도 성적 꼬라지 보니 그저 쥐어 패고 싶지요. ‘이래가지고 네가 사람 구실하겠나? 밥이나 먹고 살겠어?’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하고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가 돌아서면 또 선악과, 백날 하나님께서 ‘너는 2-2반, 너는 빛의 자녀다’ 하고 돌아서면 또 내가 내 법을 만들어요. ‘내가 꼭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해야지.’ 그런데 늦잠을 자서 기도를 못했어요. ‘야, 오늘은 불길한 날이다. 조심해야지.’ 자기가 자기 스스로 법을 만들어요. 세상에, 기도한번 빠졌다고 지옥에 보낼 것 같으면 성경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이랬어요. 주님이 약이 올라서 ‘일흔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줘라’ 하니까 기겁을 한 겁니다. 일흔번 곱하기 칠이면 얼마입니까? 490번을 용서하라고. 이거 숫자 헤아리다가 헷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490번 다 용서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대충 한 겁니다. 중간에 용서할까, 말까를 자기가 골라서 한 거예요.
아래층 선악과는 결국 뭐냐, 산상수훈 말씀대로 뭐하지 마라? ‘판단하지 말라.’ 누구를 포함해서? 자기자신도 포함해서. 자기자신도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저 숨쉬고 살아 있거든 아직 안죽은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살려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열심히 노동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니까 숨쉬고 사는줄 아세요.
여러분, 자면서 자기 심장보고 ‘심장아, 부탁한다. 좀 뛰어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에게 명령을 내려서 뜁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열 댓마리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자잖아요. 나머지는 누가 백 마리 넘어갑니까? 주께서 알아서 백 마리 넘어가고 눈뜨면 아침입니다. 주님께서 발걸음을 세어준 덕분에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 무한한 사랑을 접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기회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 그러니까 성경말씀대로 감사 안할것이 없습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어릴 때부터 살아온 것을 소급해서, 예수 믿지 않던 그 시절까지 소급해서 전부 다 감사해요. 태어난 것도 감사하고 도중에 동생하나 죽은 것도 감사하고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전부 다 ‘나는 그냥 허사일뿐이구나. 나는 그냥 안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시편 28편 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시편 28: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라 하니까 자꾸 뭘 주시는 것만 창조라고 아는데 하나님의 창조가운데는 뭐가 있느냐 하면 껍데기를 부수는 것, 벗겨내는 그것도 창조작업입니다. 자꾸 우리는 선악으로 완벽을 기하고 ‘지난해는 그랬지만 올해는 제가 착실하겠습니다’라는 껍데기, 그 껍데기를 다 깨부수고 벗기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창조작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거저 주시는 은혜 말고, ‘내가 법적으로 완전하고 하자 없는 인간이다’ 라는 자기의가 있을 때는 그것을 아끼지 않고 남김없이 다 부수십니다. 몫가 같은 경우에 ‘참, 이번 설교는 끝내주는 설교다. 아마 다음 주에는 이 설교 듣기 위해서 교인들이 더 늘어날걸.’ 그 다음 주에 보면 전주에 온 사람들마저 다 떨어졌어요.
자기가 기대하는 거예요. ‘내가 행동을 바르게 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여기는 그것, 그것은 스스로 법을 만들어 버렸어요. 그 순간 ‘잘하면 복준다’는 법, 법이 없는데 자기가 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그 법을 아주 야무지게 부숴 버립니다.
‘법을 내가 만들지 말라고 했지? 네가 너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주는 은혜로 살아놓고는 네가 네 노동으로 살았다고? 이런 못된 것’ 하고 부숴버려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 남편과 아내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는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여기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뭐하게 하라? 주께 하듯 하라. 그러니까 남편이 뭐로 보여야 된다? 주로 보여야 된다는 거죠. 미쳤습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남편을 주님 보듯 하는 사람만이 남편하고 주님하고 닮은 것을 알지 남편을 주님 보듯 안보는 사람은 주님 따로 상상하고 남편 따로 상상해요.
오늘 참 말 어렵다 정말. 진짜 어렵습니다. 표식입니다. 잔디밭 다시 그립니다. 여기 보면 아내된 자여 남편은 무엇과 같다? ‘남편은 주님과 동일하다.’ 라고 지시한거죠. 그런데 이 지시한 것은 어디서? 생명나무에서 온 거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우리는 어두움이죠. 어두움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을 뭐로 받아들입니까?
이것이 법으로 오죠. 위에서는 은혜로 오는데 밑에서 우리는 법으로 갖고 있죠. 법으로 갖고 있으면 법의 주체가 누굽니까? 지금 어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둠에 있으니까 어둠의 주체는 누구에요? ‘나’지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주의 이미지가 누구에요? 주의 이미지가 있을 것 아닙니까? 주의 이미지 어디서 나옵니까? 영화나 고대서양 그림에 나오지요.
허연 수염달린 아저씨, 천주교에 가면 벽화에 아우라, 후광 쫙 비추이는 사람, 그 주님 이미지 따로 있고 누구 이미지 따로 있어요? 남편 이미지 따로 있지요. 그러면 이 이미지를 누가 만들어냈어요? 나, 아내된 나가 만들어내잖아요. 내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어낸 주님 이미지와 남편의 이미지가 같을 경우에만 뭐하겠다? 복종하겠다, 그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구조 자체가 이게 엉터리에요, 엉터리가 아니에요? 엉터리죠. 지금 아내된 자의 짐을 덜어드리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짐을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 남편은 자랑 안하려고 했는데, 내 남편은 너무 나한테 잘해줘. 한달에 용돈 얼마 안되는데 한 1000만원씩 주는데 골프도 치고 쇼핑도 맘껏 하라고 주는데 나는 남편 보면 우리 주님께 하듯이 복종하고 싶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이것은 자기 내부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주님 이미지 하고 남편 이미지 하고 자기한테는 맞다 이말 아닙니까? 그럴 경우에만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그 남편이 갑자기 사업이 망했다, 복종하겠어요? 안하지요. 그러니까 여자들은 자기가 ‘남편은 이래야 돼’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남편보고 뭘 강요하느냐 하면 ‘내 이미지의 경계선안에 자꾸 들어오라’ 는 거예요.
이렇게 사진을 만들어 놓고 ‘닮았나? 닮았나? 내 남편은 일곱시 땡, 치면 퇴근하는 사람인데 어? 여덟시, 당신 뭐해? 여보 빨리 들어와. 내 이미지의 남편은 일곱시까지 들어와야 돼. 그게 내 수준에 맞는 내 남편이야. 나라는 여자를 갖고 놀려면 당신이 그정도 수준은 되어야 해.’ 갑자기 여기서 다 은혜를 받는 듯한데.
사람은 상대방을 볼 때 자기 위신과 체면을 제일 먼저 고려하고 ‘내 위신과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놀아라’ 그 말이거든요. 부모가 자식 때리는 이유가 뭡니까? 부모는 괜찮은데 자식이 부모의 괜찮은 수준만큼 못 따라오니까 성질나서 때리잖아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이런 짓을 하나? 네가 우리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야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죠. ‘이게 다 엄마가 너 사랑해서 하는 거다.’
엄마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자기 이미지를 사랑하죠. 나의 품위를 유지하려면 내 남편은 이래야 되고 내 자식은 이래야 되고 내 한 달 수입은 이래야 되고 그래야 동창생들 앞에서나 남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만약에 여자가 미장원에 가서 한 머리모양이 잘 못나왔다고 해보세요. 그 미장원 불 질러 버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내 이미지는 오드리햄번 인데 이것은 완전히 오드리햄번이 아니고 무슨 개그맨 만들어 놓았어요. 이럴 때는 미칩니다. ‘아내된 자여’ 남편에게 뭐하라? ‘주께 하듯이 복종하라’ 했잖아요. 이 말, 이 표식의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배운 것을 답변해 보세요. 누굽니까? 다 잊어버렸네. 처음에 누구라고 했습니까? 누가 이것을 이루게 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잖아요.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데, 이 밑에서는 이것을 잡아가지고 누가 해요.
아내된 내가 이것을 하려 하는데 내가 할 때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을 때는 ‘남편이 남편 값을 하고 당신도 내가 사모하는 주님처럼 좀 되어 달란 말이야.’ 그러면 남편이 묻지요. ‘당신의 주님은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 나를 좋아하는 것 모르나?’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 무조건 나를 좋아하고…’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주님이 그런 분인가?’ ‘그래. 그런 분이야. 그러니까 무조건 나에게 맞춰달란 말이야.’
삼성그룹의 이 재용이도 마찬가지지만 여자가 아무 일 없는데 살다가 이혼을 청구했다. 미도파 사장하고 살던 고현정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살다가 이혼을 청구했다. 왜 여자가 애 놓고 살다가 헤어지자고 하느냐? 옛날에는 가문의 귀신이 된다는 식으로 가문에 속했지만 지금 결혼은 가문이라는 것이 없고 나를 좋으라고 결혼했는데 나를 불편하게 했으니까 나를 불편하게 한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남편 때문이라면 남편을 잘라내면 내가 원하는 내 이미지의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내가 원하는 이미지가 살아 있는 한 더욱더 나는 그 이미지를 포기할 맘은 없고 남편과 자식이 안따라주면 결국 괴로운 것은 누가 괴로우냐 하면 내가 괴로운 거예요. 내가 괴로우니까 이것은 체면이고 위신이고 간에 ‘이혼하자. 천억 줘.’
천억을 달래요. 천억을. 하이고! 그래놓고 결혼할 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했잖아요. 제가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왜 이혼이 성립되지 못하느냐 하면 어느 결혼도 하나님이 짝 지워준 적이 없어요. 오늘 참 돌출발언 많이 한다. 어떤 결혼도 하나님이 짝지운 적이 없습니다. 뭐냐? 저희들끼리 짝지운 거예요.
왜 자꾸 거짓말 하는지 몰라. 저희들끼리 짝지었단 말이죠. 주님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은 헤어지지 못합니다. ‘아내된 자가 남편을 주님께 하듯 섬기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통해서 남편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아내의 원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남편을 통해서 아내가 아내로 하여금 잘못된 이미지의 주님을 바꾸는 작업을 누가 하신다?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런 남편도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성령 받아서 ‘야, 이 남편도 감사하구나’ 라고 한다면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에게 하듯이 주님이 붙여준 남편이기 때문에 그 남편에게 감사하면 남편이 깜짝 놀라지요. ‘이게 안하는 짓을 왜 하지? 미쳤나? 평소에 짹짹 거리더니만 오늘따라 왜 이러지?’ ‘여보, 난 당신이 주님으로 보인다.’ 그 소리 듣고 남편이 얼마나 부담되겠습니까?
남편이 또 오해한다고요. 아내가 은혜 받아서 남편이 주님으로 보이는데 남편은 그것을 법으로 해석해서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고 또 착각하는거예요. 그러니까 그 밑에 보세요.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고’ 이 법조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뒤에 보세요. 남편된 자들은 아내를 위해서 뭘 바쳐라? ‘남편된 자들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뭐해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 같이 하라’ 고 되어 있지요. 미쳤습니까? 이미 고물인데. 신혼같으면 몰라도 이미 고물이 되었는데. 애 둘 낳고 펑퍼짐한데 뭐가 예쁘다고 목숨을 바칩니까? 얼씨구, 어지간히 목숨 바칠데가 없어서 늙은 마누라한테 목숨 바치겠다. 미쳤나? 목숨을 바치게. 남녀가 부부로 같이 사는 것은 좋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헤어져도 별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사는 거죠. 대안이 있다면 언제든지 헤어집니다. 그런 껍데기 그런 위선적인 껍데기가 이 말씀에 의해서, ‘아하, 나는 한번도 남편을 주님처럼 섬긴적이 없는…’ 뭐다? ‘…죄인이구나.’ ‘나는 한번도 내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지언정 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런 생각은 한번도 없었다는 거.’
우리 힘으로 못하죠. 못하는데 표식,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표식은 뭡니까? 사람이 못하는 것을 누가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죠. 그럴 때 모든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죠.
‘나는 역시 남편을 하늘같이 주같이 섬겨’ 라고 자기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안되는 것을 어느 순간에, 단기기억, 한 2초정도, 어느 한 짧은 순간이지만 남편을 ‘아이고, 남편이 참 감사하다. 주께서 보내 주셨지만 참 감사하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그 때 갑자기 남편이 ‘여보, 목마른데 물한컵 가져다 줘.’ ‘그럼 갖다주지. 주님에게 하듯이’ 하고 주님 섬기는 것처럼 갖다 줍니다.
‘왜 또 오버하고 있나? 그냥 갖다 주면 되지 주님,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가족들도 있는데 부담된다. 나 주님 아닌데.’ ‘아니야. 나 이제부터 당신을 주님으로 섬기기로 했어.’ 한 5초간만. 5초지나면 없어져요. 사람의 기억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없어져요.
에베소서 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주께서 아내와 남편을 아내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둘이 붙여준 것은 그 속에서 나의 죄 때문에 가리워졌던 주님의 은혜를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자 여기 보세요. 오늘 참 내용이 많다. 하나의 예를 듭시다.
아내가 여기 있고 남편이 여기 있는데 ‘내가 생각했던 주님 이미지가 틀렸고 주님께서 현재 저런 남편모습으로 왔다면 내가 주님을 사랑했겠는가? 내가 자꾸 상상하니까 주여, 주여, 하지만 만약에 저런 남편으로 모습으로 주님이 왔다면 내가 사랑했겠는가’ 라고 의심이 들었는데 막상 주님의 성령이 오고 나니까 ‘아, 저런 남편도, 저런 주님도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여기서 생기는 것이 뭐냐하면 ‘그동안 나는 남편을 볼 때 내 이미지 위주로 봤던, 그래서 남편을 힘들게 했던 가해자였다’ 는 겁니다.
남편, 본인이 힘들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남편을 힘들게 한 사람이죠. 오늘 삼성전무 이재용의 이혼 기사가 신문에 나오고 했지만 이혼을 한다는 그자체는 결과고요. 그 전에…. 제가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혼이라는 것은 법적으로 깨지는 거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한 시간 반 넘도록 강의를 했지만 성도는 뭐로 살지 말라 했습니까?
법으로 살지 않는 방법이 뭡니까? 모든 것이 그저 은혜고 감사하죠. 그러면 이혼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는 갑자기 법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집어넣는다? 법을 본인이 집어넣은 거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본인이 감사해야할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갔다? ‘저남자하고살까, 말까?’ 이혼법을 생각하죠. 법을 생각하는 그 순간, 함께 있는 주님에 대한 은혜를 가해,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법의 마음상태를 이혼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또는 이혼을 하기 전까지라도, 이혼하기 전 한 5 년동안 ‘살까, 말까? 사나, 마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꾸 법적으로, 법에 의해서 ‘내가 이혼해도 괜찮을까? 목사님, 이혼해도 괜찮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목사님, 이혼해도 괜찮습니까?’ 그런 질문 한 두 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속으로 생각하죠.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소리 하겠나. 그런데 ‘이혼해도 괜찮습니까?’ 라고 물으면 ‘이혼하고 싶어요?’ ‘이혼하고 싶어요.’ ‘그러면 해버리세요.’ 하시되 상대방을 법적으로 봤다는 자기 자신이 죄인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질문을 ‘이혼할까요?’ 라고 질문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목사님, 저 남자에게 계속 사랑 받아도 됩니까?’
‘나는 저 남자에게 계속 사랑받을 자격도 못되는데 계속 사랑받아도 됩니까?’ ‘남편이 사랑해 주던가요?’ ‘아니요.’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법적으로 생각을 안하니까 주위의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제가 이래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표식이 뭐다? 여러분은 2-2반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법으로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법으로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유대인처럼 ‘이혼 하지마. 이혼하면 벌 받아’ 이렇게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따질 때에 우리의 신분을 따질 때 법으로 안따졌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볼 때 뭐로 봅니까? 우리는 왜 법으로 보느냐 이말이죠.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저는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혼하든 안하든 간에 남편이 괴롭게 한다, 안한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볼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보면 그것이 본인한테 힘들어요. 본인한테 힘드니까 힘든 것을 치워버리는 방법이 뭐냐? ‘이럴 것 같으면 목사님, 내 남편하고 헤어지렵니다’ 라는 말로 자기가 법적으로 따지는 것을 감추는 방법이 그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냉각기간, 조정기간을 4주 주잖아요. 4주 헤어져 보고 그래도 잘 헤어진다 싶거든 그냥 갈라 서 버리세요. 그런데 갈라서도 그 다음에 또 뭐가 남는지 압니까? ‘하나님이여, 저 너무 벌주지 마세요. 어쩔수 없이 제가 이혼한 것 주께서 아시지요.’ 주께서 누가 뭐라고 했어요? 이혼했다고 해서 지옥 보내는분 아니거든요.
‘이혼을 했니?’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마돈나처럼 여섯 번 이혼하고 또 연하남하고 놀고 그런 것은 하등 관계없이 묻지도 않고 구원하시는데, 자기가 자꾸 뭔가 캥겨있어가지고 ‘주님, 이혼해도 지옥 안가지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또 어떤 남편을 봐도 또 불안과 알수 없는 공포가 또 밀려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아예 여러분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마시고, 바퀴벌레, 또는 짐승, 개돼지로 보세요. 그리고 그냥 개돼지로 보지 마시고 구원받은 개돼지, 구원받은 바퀴벌레로 보시면 그렇게 마음이 편합니다. 남편이 패는데 이혼 안하고 어떻게 합니까? 자꾸 패겠다는데 그것은 이혼해야지요. 그런 폭력이 무슨 사랑이겠어요? 교회 간다고 때리고 머리 쥐어뜯는다면 갈라서야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나는 당했습니다’ 하지 말고, 그것으로 법적으로 ‘나는 정당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아예 이혼을 몇 번 했는지 아예 묻지도 않고 그냥 생명나무니까 …. 현재 우리가 무엇을 맛 못 봐서 문제가 되는 겁니까? 생명나무의 맛을 못 봐서 지옥 가는 겁니다.
우리가 법적으로 나쁜 짓을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못 따먹어서 지옥가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문제를, 원칙을 호도하지 마세요. 흐리지 마세요.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선악과 따먹어서 지옥이고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지옥가고 따먹으면 천국가요. 너무나 간단한 문제에요. 이 문제. 이것은 사랑으로 줬기 때문에 우리가 법적으로 따지지 말라는 말이죠.
법으로 따지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나는 너를 볼 때 2천억을 탕감해줬는데 너는 남편에게 20억 빼앗기는 것이 억울해서 밤잠을 못자니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나?’ 그 말이죠.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탕감해줬는데 우리는 남편의 20원짜리 죄를 용서 못해서 그것을 벌벌 떨면서 ‘죽여 버릴까’ 이러고 있다고요.
참, 오늘 강의 끝이 좋네.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한 육체로 해 놓으면 남자 여자 이질적인 것이 있어요. 자기는 타인한테 최대로 잘해줬다고 하고 남도 나에게 잘해줬다고 하고 둘이 한 몸 되어도 여전히 그 안에 두인간이 살아 있어요. 이 두인간은 둘 다 법적으로 자기를 유지 하는 한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성령을 주시면 이 사람도 법을 안 따지고 은혜로 따지고 남편도 법으로 안하고 은혜로 따져버리면 둘 사이는 뭐냐? 법으로 안하고 은혜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래서 나온 노래가 뭐냐? ‘잘했군, 잘했어’ 에요. ‘여보, 적금 풀어서 닭한마리 잡았네.’ ‘잘했군! 잘했어!’ 이것은 내용을 묻지도 않아요. ‘여보, ….’ ‘잘했군! 잘했어!’ 무조건 되는 겁니다.
‘여보, 소 팔아서 썩은 사과 사왔는데.’ ‘아이고, 잘했군! 잘했어!’ ‘예수님이 죄많은 너를 용서했단다.’ ‘아이고, 주님께서 잘했군! 잘했어!’ 그 주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도 빛의 자녀가 되어서 나한테 누가 뭐래도 내 이미지에 안 맞더라도 ‘잘했군! 잘했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용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생명나무 주시고 영생 주시고 죄용서까지 다 해줬는데 입술로는 안다고 하고 머리로는 안다고 하면서 우리가 남들을 바라 볼때는 법적으로 따졌고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고를 따졌습니다. 이점을 미리 아시고 계시오니 그때마다 주께서 우리의 잘못된 이미지를 부수어버리고 벗겨 버려서 우리 안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 가득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