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대혈사(大穴寺)와 도선국사(道詵國師)
금오산(金烏山)의 본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으나, 신라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一善郡) 모례(毛禮) 장자 집에서 기거할 때, 태양새 불새 삼족오가 대본산(大本山)으로 황금빛을 띠고 저녁놀에 날아드는 것을 보고 ‘금오(金烏)’라는 이름을 부처 금오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도화상이 마지막으로 창건한 970고지 산정에 약사암(藥師庵)이 있고, 신라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서기692년 신라 효소왕 1년에 창건한 갈항사(葛項寺)가 있고, 실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창건한 대혈사(大穴寺, 지금의 海雲寺)와 도선굴(道詵窟) 있고, 고려에 와서 금오산이 중국 오악(五岳)의 하나인 숭산(嵩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하여 남숭산(南嵩山)이라 부르며, 고려 속장경을 쓰고 천태종 시조인 의천(義天) 대각국사가 남숭산 선봉사(僊鳳寺)에서 수도한 숭산(嵩山)마을이 지금도 남아있다.
금오산 산정분지에 신라 때부터 있던 금오산성(金烏山城)은 서기1238년 몽고의 병란과 조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승군이 왜군과 여러번 싸워 승리한 천혜의 요세다. 이 전투에서 금오산 주위 신라-고려의 유명사찰들과 숭산 고려귀족마을이 모주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그림1) 금오산 정상
<대혈사와 도선국사>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선산 남통 대혜골의 금오산굴(도선굴) 속에서
득도하여 대혈사(大穴寺)를 창건하였다.
대혈사(大穴寺)는 서기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惟政:1544∼1610)의 승군들과 왜군들이 ‘금오산성’에서 치열한 전투 때문에 전소되어 폐사가 되었다. 이 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1925년 신축하여 절 이름을 해운암(海雲庵)이라고 바꾸었다. 지금의 해운사는 대웅전과 요사체 2동이 있다. 대웅전에는 근래에 석고로 제작된 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있고, 이외에도 후불탱화와 칠성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만들었다는 석조나한상도 전해진다. 이 나한상은 석조수행대사입상(石造修行大師立像)이라고도 한다. 한편 합장한 석불좌상이 전해지는데, 조성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림2) 도선국사가 창건한 대혈사(현 해운사).
도선(道詵)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속성은 김(金)이요,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전남 낭주(현,영암) 구림촌에서 출생했다. 어머니 강씨가 처녀시절, 겨울 우물 속에 있는 오이를 먹고 잉태하여 낳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도선을 낳은 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라 히여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 여러 마리가 날아와 젖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이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그런 연유로 하여 아기 이름을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鳩林)’이라 불렀다.
구림은 13세에 당나라 배를 숨어 타고 당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않아 돌아왔다. 15세에 월유산(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니, 승려가 된지 4년 만에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화엄사에서 신승(神僧)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이때가 서기846년 신라 문성왕8년 도선의 나이 겨우20세였다. 이 무렵 동리산(桐裡山) 혜철대사(惠徹;785∼861)를 찾아가 당나라의 서당(西堂)에 머물던 ‘지장선사(智藏;735년~814년)로부터 부처나 보살의 심오한 깨달음을 서원하는 여러 가지 손 모양 취하는 방법, 즉 밀인(密印)을 전수받고,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서기850년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태백산 금오산굴(도선굴) 속에서 참선삼매(參禪三昧)를 득도하여, 도선굴 아래에 움막처럼 대혈사(大穴寺)를 짖고 고행하였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하여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처음의 만남임에도 서로 오랜 벗처럼 친근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도선은 차원 높은 담론과 묘한 도리로써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고는 곧 대혈사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을 설파했는데, 그 내용이 심오하고 기이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풍수지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는《도선비기(道詵秘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등이 전한다.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는 도선이 송도에 이르러 전 금성태수(金城太守) 왕륭(미상~897년)의 집에 도착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의 이치를 살펴 본 다음’ 도선은 감탄하며 “내년에 반드시 훌륭한 아들을 낳아 도탄에 빠져 고통 받는 백성들을 건지리라.”고 예언하니, 왕륭은 그 말을 듣고 신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과연 왕륭은 뒷날 고려를 건국하여 태조가 되는 왕건(王建, 877~943)(재위: 918~943)을 낳았다.
(그림3) 고려 태조 왕건 초상화(개성 고려박물관 소장)
도선은 어느 날 제자들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 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 하고 홀연 열반에 들었다. 때는 서기898년 신라 효공왕2년 3월10일 이었는데 나이 72세였다. 효공왕(재위897∼912)은 도선이 죽자 슬퍼하며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라 칭했고, 고려 숙종은 왕사(王師)로 추증하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 의종은 그의 행적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는 전라도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비문에 실려 있다.
(그림4) 도선국사 영정.
대혈사 절 뒤 대혜골 400m고지에 대혜폭포(大惠瀑布)가 있다. 그 옆 바위절벽을 타고 위험스럽게 올라가면 바위굴이 있는데, 이 굴을 도선굴(道詵窟)라 한다.
대혜폭포(大惠瀑布)는 높이28m로서 물줄기가 비단(錦)을 펼친 것 같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琴)를 타는 듯 아름다워 명금(鳴錦) 또는 명금(鳴琴)폭포라고도 불렀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선여(仙女)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여탕(仙女湯)이라고 한다.
조선 제16대 인조(재위;1623~1649) 때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이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詩會)를 가졌다 한다. 그래서 폭포 옆 암벽에 ‘욕담(浴潭)’이라는 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장현광의 문도 중 한사람인 김공(金羾)이 새긴 것이라 한다.
그림5) 대혜폭포(鳴琴瀑布)
대혜폭포(명금폭포) 오른쪽으로 펼쳐진 절벽의 위태로운 벼랑을 딛고 올라가면 신라 말 고승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행했다고 알려진 천연동굴 도선굴이 있다.
이 암벽 천연 동굴을 큰 구멍이라는 뜻의 대혈(大穴)이라고도 불렀다.
『일선지(一善誌)』에 근거하면 도선굴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대혈 이라고 하였던 시기는 고려부터로 추측된다. 굴 아래 대혈사지 터는 백운재(白雲齋) 또는 경파정(景坡亭)이 있는 곳을 대혜(大惠) 또는 다혈(多穴)이라 부르니, 대혈(大穴)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다. 도선굴은 신라 말 도선국사에 이어, 고려 말 충신 길재(吉再:1353∼1419)가 은거(隱居)하며 풀뿌리로 연명하며 조선건국에 협조하지 않았고 도학(道學)을 익혀 조선시대 영남의 많은 인제들을 배출한 장소로서 후학들이 채미정(採薇亭)을 건립해 스승의 고결함과 청렴함을 기렸다.
(그림6) 채미정(採薇亭).
고려 말 야은 길재(吉再) 선생이 조선개국에 협조를 거부하기 위해 도선굴(道詵窟)에서 풀뿌리를 캐어먹으며 조선조정에 나아가지 않는 고려충신, 후학들이 야은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채미정을 지었다.
『일선지(一善誌)』에 따르면 도선굴의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 칸 있었다.” 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과 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긁은 쇠못을 박아 칡넝쿨로 줄사다리를 만들어 올라온 다음 줄사다리를 위에서 걷어 올리니 침공하여 온 왜군들은 범접도 하지 못했다고 물러났다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그림7) 도선국사가 득도한 굴, 도선굴 오르는 절벽 길.
도선굴은 깎아자른 바위 절벽 중턱 450m고지에 위치하여 처다 보기만 하고 올라가지 못했다. 1937년 당시 구미면장 김승동(金昇東) 씨가 금오산 중턱 절벽 한가운데 위치한 도선굴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고자 뜻을 내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이에 암벽의 돌을 깎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었다. 그 때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 도선굴통로기문(道詵窟通路記文)을 새겼고,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굴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 있다. 금오산도립공원 케이블카를 타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는 대혈사(大穴寺;지금의 海雲寺)에 다다른다. 절 모퉁이를 돌아 5분쯤 오르면 높이 28m의 거대한 대혜폭포(大惠瀑布;또는 鳴琴瀑布)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데, 이를 왼쪽으로 두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도선굴 통로인 절벽 밑에 이른다.
(그림8) 최근 누군가 도선굴에 불상을 모셨다.
천연동굴 도선굴은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득도할 당시에는 얼기설기 집 두간 정도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득도한 그 자리에 지금은 불상이 노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