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그는 1919년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그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상덕은 1944년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8년 제헌국회 때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구성되었고 친일파의 처단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다.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해방 직후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의 과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 문학인 이광수, 33인의 한 사람 최린의 체포 등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국무회의에서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의 관사를 방문해 직접적인 관여를 하기도 했다.
색깔 공세도 이어졌다. 친일세력은 공산당과 싸우는 투사로 변신했다. 반공투사인 자신들을 잡아넣는 반민특위는 공산당이라는 논리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의원들이 체포되는 상황도 연출된다.
친일 경찰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의 험난한 앞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앞장 섰던 친일경찰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경찰 전체의 위기로 다가왔으며 경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의 특경대원을 체포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역시 무산되고 만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계속되는 압력과 탄압에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커다란 상징이며 친일세력 청산의 커다란 후원자였던 백범 김구마저 암살되면서 친일청산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숨어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풀려나고 민족정기는 회복되지 못한다. 이들은 다시 권력과 결탁하고 이제 더 이상 친일청산을 언급 조차할 수 없게 됐다.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된 것이다.
김상덕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와 함께 그렇게 잊혀졌다. 친일경력자가 독립운동가를 국가유공자로 심사하고 때로는 스스로 독립운동가였음을 자처하던 시대. 김상덕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에서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납북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김상덕의 독립운동은 복권이 되었지만 실패와 좌절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은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이제 김상덕은 우리에게 자신이 못 다한 친일청산의 역사를 다시 복권시켜 달라 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일제시대 때는 전 국민이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지식인인 자기들에게 올 수밖에 없는 수난이었다고 변명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해 다시 한번 친일 역사 청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들이 벌어지고 있고 여전히 친일파들은 그때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실패로 끝난 반민특위와 김상덕 위원장을 통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을 되새겨 본다.
P.S. 김상덕 선생님은 6.25때 납북되어 1956년 4월 북한에서 사망하여 현재 평양의 "재북인사의 묘"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묘소 바로옆은 춘원 이광수의 묘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