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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의 공산주의 운동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분단, 대립, 갈등으로 특징되며 그 원초적 원인은 해방 전에 도입된 공산주의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 또한 독립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도입으로 야기된 좌우 진영간의 대립과 갈등은 2007년,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해결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남북대결과 갈등을 넘어서 통일추구라는 미명하에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어쩌면 통일이 오히려 요원하여졌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통일 후에도 사회주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방 전의 공산주의자들의 역할과 공산당, 공산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1919년 3·1운동 이후, 1921년까지 급진적이고 점진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1922~1923년은 민족주의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분리되면서 분파가 발생한 시기였다. 또 1924~1925년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 정비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국내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었고 1922년 2월 동우회선언(同友會宣言)을 전후로 사회주의 경향의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무산자동맹회, 북풍회(北風會),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 단체였다.
1923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高麗局]에서 밀명을 받고 잠입한 김재봉(金在鳳)과 김약수(金若水)·유진희(兪鎭熙) 등이 포함된 17명의 화요회를 모체로 하여 서울에서 코르뷰로 국내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1924년 4월 17일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항일 독립투쟁을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수행하려는 목적에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金在鳳)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박헌영(朴憲永)이 임명되었다.
화요회가 모체라서 '화요파의 당'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국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하였다. 그러다 1925년 11월 김재봉과 박헌영이 조직 확대를 목적으로 청년회원을 모스크바에 파견하는 훈련을 진행하다 일제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 이것을 제1차 공산당사건이라 한다.
당시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던 당 책임비서 김재봉이 당원 강달영(姜達永)과 함께 1926년 6월 서울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선출되었다. 이들의 정치목표는 민족진영과 연합하여 국민적 당을 만들어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을 통해 3·1운동을 재현하려던 계획이 들통나 대부분의 당원이 체포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이것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이에 과거 화요회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도쿄[東京]의 좌경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 등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체포되지 않았던 김철수(金鐵洙)와 손잡고 북풍회 계통의 ML파와 합세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속칭 ML파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을 통해 종래의 투쟁형태를 정치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관한 11개조 지령을 만들었다. 그러다 1928년 2월 당내의 내분에다 조직이 탄로나서 36명이 종로서(鐘路署)에 검거되었다.
한편, 춘경원당(春景園黨:서울 '춘경원'에서 결성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 또는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조직이 1927년 12월 결성되었는데, 정통파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4월과 6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당 간부 안광천(安光泉)·한위건(韓偉健) 등이 서울 시내에 숨어 있다가 제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 지부 및 고려공산청년회를 재건하였다. 차금봉(車今奉)이 당 책임비서, 고광수(高光洙)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과학연구회를 간판으로 내걸고 서울의 각 중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휴학·시위행진 등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4차 조선공산당도 그해 7월 당 간부들이 거의 체포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뒤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실패하고 박헌영의 서울콤그룹만이 지하에 숨어 있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아,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김원봉·한빈(韓斌)·이주하(李周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조선공산당을 부활시킨 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新民黨) 및 조선인민당(人民黨)이 합동하여 남조선노동당 [南朝鮮勞動黨, 줄여서 남로당]을 창당하였다. 이에 앞서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당시 남한에는 여러 좌익 정당들이 있었는데, 남한에서의 기습적인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신탁통치 지지 표명, 더구나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에서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좌익계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일부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 단체들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1950년 4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와 함께 19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
*참조:
북풍회 [北風會]
1923년 1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 본부로서, 이듬해 12월 25일 김약수(金若水)·송봉우(宋奉禹)·김종범(金鍾範) 등이 조직하였다.
이들은 창립 이틀 후인 12월 27일 북풍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창립 선언서를 발표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조선의 사회운동 개혁을 다짐하는 한편, 현실과 동떨어져 학문적 이상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강력하게 비판한 뒤, 대중에 의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전술과 전략을 수립하자고 선언하였다.
주요 강령은 현실과 대중적 요구에 따른 종국적인 이상 실현, 노동자·농민·청년·여성·형평 운동의 지적 교양과 계급 훈련 병행, 과학사상 보급과 도농간 협동, 불투명한 운동 노선 정리 및 조직의 면밀한 분류, 계급 관계를 무시한 단순한 민족운동 부인,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시간적 연합 등이다.
이후 이들은 민족 해방을 위한 협동전선을 구축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화요회(火曜會)·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회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해 주도권을 잡는 등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화요회 [火曜會]
1924년 신사상연구회가 개칭되어 성립된 사회주의 단체이다. 신사상연구회는 1923년 7월 7일 서울 낙원동에서 홍명희(洪命憙) ·홍증식(洪增植) ·구연흠(具然欽) ·박일병(朴一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윤덕병(尹德炳) ·김병희(金炳僖) ·이재성(李載誠) ·이승복(李昇馥) ·조규수(趙奎洙) ·이준태(李準泰) ·강상조(姜相照) ·홍덕유(洪悳裕) ·원우관(元友觀) ·박돈서(朴敦緖) ·김찬(金燦) ·김홍작(金鴻爵) ·김재봉(金在鳳) ·권오설(權五卨) ·안기성(安基成) 등이 신사상을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일종의 학술연구단체로, 강습과 토론회를 실시하고 이론서적 및 잡지를 간행할 것을 당면사업으로 내세웠다.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 간부회는 명칭을 ‘화요회’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로부터 행동단체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되었다.
회원은 60여 명으로,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회원인 김찬 ·김재봉 ·윤덕병 ·홍덕유 등은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김재봉은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김찬 ·홍증식은 화요회와 조선공산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각각 노령(露領)에서 돌아와 신사상연구회에 참여할 때부터 ‘조선공산당창립’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조봉암(曺奉岩)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 ·김태연(金泰淵) ·조동우(趙東祐) 등도 이 단체의 유력한 멤버였다.
화요회는 고려공산당의 상하이[上海]파 및 이르쿠츠크파와 일본유학생들 사이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영(李英) ·김사국(金思國) 등의 서울청년회와는 반목관계에 있었고, 북풍회와는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두고 한때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풍회는 1925년 3월 25일 임시총회에서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하였다.
이어 두 단체는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과 더불어 4단체 합동위원회를 공동 운영하였으며, 1925년 4월 17 ·18일 아서원과 박헌영의 집에서 각각 비밀리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화요회는 《조선일보》필화사건과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일명 신의주사건) 등으로 주요인물들이 검거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고, 1926년 4월 14일에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청년회
1921년 1월 27일 민족주의 계열의 이득년(李得)·장덕수(張德秀) 등과 사회주의 계열의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단체다.
새로운 청년단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조선청년회연합회 성원으로 등록하였다. 초기에는 민족주의 경향이 강해 청년연합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1922년 《동아일보》가 추진한 김윤식(金允植)의 사회장(社會葬)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장덕수·최팔용(崔八鎔) 등이 이동휘(李東輝)·김철수(金輟洙)를 통해 전달된 코민테른의 자금을 전용한,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을 계기로 분열, 사회주의 단체로 재편되었다.
이후 이영·김사국·한신교(韓愼敎) 등이 주도하면서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써 무산대중 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는 강령을 제정하였다.
1924년에는 김사국·이영이 중심이 되어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함에 따라 이 동맹의 표면단체로 활동하였다. 1925년 화요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이를 중재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오히려 일부 세력이 이탈, 화요회계 일부와 일월회계 일부가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으며, 이 세력이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28년 일제의 검거로 활동이 저조하다가 1929년 해체,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청년동맹에 합류하였다. 한국사회운동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재봉 [金在鳳, 1890~1944.3.3]
189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구의 계성학교(啓聖學校:계성고등학교의 전신), 1914년 서울의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해주일보》 경성지사 기자가 되었으나 1920년 말 《해주일보》가 폐간되자 퇴사하였다.
1921년 1월 조선독립단의 문건을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922년 11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연합대회에 참가한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1919년 4월 연해주(沿海州)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문창범(文昌範)·오하묵(吳夏默)·김하석(金河錫)·한명서(韓明瑞) 등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1920년 이동휘(李東輝)가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모체로 하여 창당하였다.
1923년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코민테른 극동국 산하 고려국(高麗局)에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7월 홍명희(洪命憙)·홍증식(洪增植)·구연흠(具然欽)·박일병(朴一秉)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사상연구회(1924년 11월 화요회로 개칭)에 가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김찬(金燦)·김낙준(金洛俊)·신철(辛鐵)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을 준비하였으며,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다.
1925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초대 책임비서에 선임되었으나 12월에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약수 [金若水, 1893~1964.1.10]
별명 두전(枓全)·두희(枓熙). 경남 동래(東萊) 출생.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를 맡다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북성회 등을 조직하고 1922년 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한국 최초의 계급투쟁선언인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24년 11월 ‘북풍회’를 조직하여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여 1926년 6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우익진영인 한국민주당·민중동맹에서 활약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관련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이 되어 평화통일사업을 하였다.
*박헌영 [朴憲永, 1900~1955.12.5]
본관 영해(寧海),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이다.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조선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기간에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가짜라는 "김일성 가짜설" 이 퍼져 각각 그에 대한 평가가 달랐으나, 백발의 김일성인 나주의 김광석과 청년 김일성인 김성주는 각각 다른 지방에서 활동한 동명이인의 항일혁명운동가로 밝혀졌다.
어린시절과 항일운동시기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양 만경대리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북조선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1925년 중국 길림으로 가, 1926년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무장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에 있었던 소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간주된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실질적으로 김일성은 중국의 만주지역 항일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40년 소비에트 연방령 하바롭스크로 떠나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의 대위가 되어 5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조직이 얼마나 독립적이었는가는 논란의 대상이다.
조국광복시기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후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공화국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시기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이 되고,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실시, 무상교육제도(북조선에서는 11년무상교육제를 뜻한다.)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실시, 자원의 공동생산과 공동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남북 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에 독립운동가 김구를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김구의 주장과 북조선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서로 달라서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못한 채 중단되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원조와 무기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다.
결국 김일성은 1950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한국전쟁를 일으켰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에 막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전후복구시기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원수가 되어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 그 때부터 박헌영의 남로당파,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시설과 교통시설, 그리고 복지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소련의 원조를 통해 계획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 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1970년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1972년 헌법개정으로 국가권력구조를 국가주석중심체제로 바꾼 다음 국가주석·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80년 남북통일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하였다.
만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추대되고, 1992년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93년에는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4년 6월 카터 전 미국대통령 면담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준비가 진행되던 중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북조선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지금 북조선 정치체제의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병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조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추모행사
김일성이 사망한 후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조선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에 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도시에 1개 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고 했다.
1997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이른바 "수령 우상화 정책"을 펼쳐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금수산의사당을 확장하여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부르도록 하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맞이하여 4월의 봄 예술축전대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의 동상을 지방에 세웠다.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격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 때 동북인민혁명군에 의해 불러진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세겨져 있다.
그는 서예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북조선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조선의 종합대학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평가
김일성에 대한 세계 각국의 언론은 다양하게 평가하고 있다. 서방 국가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많고, 소련이 포함되는 제2세계와 비동맹주의 국가가 포함되는 제3세계, 특히 미국에 적대적인 제3세계 국가들은 대부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다. 그는 이민위천의 정신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민위천의 정신은 "인민을 먼저 사랑하고 돕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북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황장엽과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김일성과 가깝게 지냈던 지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김일성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일성은 북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에 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후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조선 경제에서 공업의 비율이 70퍼센트를 차지했을 만큼 놀라운 공업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1990년대 중국과 나란한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국가가 되었다.
그의 또한 항일운동에도 이바지했다. 1937년에 보천보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시대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의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
부정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이를 유교사상과 섞어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창시했다. 이렇게 창시된 주체사상은 북조선 인민들의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무차별식으로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해서 식량생산의 자급율을 떨어트리는 등 농업의 낙후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민족에게 큰 비극을 안겨준 한국전쟁을 일으킨 그의 결정은 가장 큰 비판을 받고 있다.
- 여기저기에서 퍼와서 편집하기 끝 -
첫댓글 두었다 또 읽어야지..
덕분에 큰줄기와 맥이 정리가 됨니다.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