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에 대하여 배우고 있는데요.. 중세의 경제활동은 장원.. 자급자족의 생활을 기반으로 하고있죠... 중세시대때는 장원이라는 것 때문에 자급자족적인 생활이 형성되고 그결과 상업이 침체되었어요.. 뭐 나중에는 상업과 화페의 발전으로 장원이 해체되는 결과가 생겼지만..역시 영주의 권한도 따운되쪄.. 장원은 영주가 사는곳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안에는 많은 건물들과 토지를 일컫는것 이라고 전 생각하고있어요.. 처음 장원을 중2땐가 배운 것 같은데요 가장 기억에나오는게(시험에서 가장 중요했떤..ㅋㅋ) 토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위해서 사용한 삼포제란 게 기억이나네요.. ㅎㅎ 그떈 비료의 활용성을 몰랐따나.. 장원안에는 영주의 성을 포함해서 농노들이 살집들.. 토지들... 교회나 대장간.. 등등 이 있었대요.. 체계적으로 나누면 영주 직영지, 농노 보유지, 공동지로 나눌수 있어요. 장원은 영주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장원의 해체는 결국 영주들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그럼 그 장원에 대해서 조사해봤어요.. 아래 글의 출처는 네이버백과사전이구욤.. 바로 아래는 중학교때 책에 나왔떤 장원의 형태가 그려진 그림.. ^^;;
장원은 유럽 역사상 시장경제의 요소가 가장 희박하고 자급자족적 농업경제의 요소가 강했던 8~12세기경까지 거의 전유럽에 파급되어 있던 농촌 사회조직인 동시에 영주의 지배조직이다. 최근 장원구조의 지역차를 세밀히 조사 연구한 결과, 장원이 모든 농촌사회를 망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장원을 지배적인 농촌조직으로 보고 있다. 장원의 성립사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다.
구(舊)로마령 갈리아(프랑스)의 교회령 ·왕령에서 7세기경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며, 9세기에는 이탈리아, 라인강 유역의 독일, 지중해안 에스파냐 등에도 거의 완성된 형태의 장원이 있었다. 영국은 그보다 늦었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장원조직의 한 전형이 만들어졌다. 장원의 조직적 조형(祖型)은 로마의 비라제(制)인데, 비라에서는 주로 노예의 노동을 사용한 데 대하여 장원에서는 토지를 점유하는 농민가족의 노동이 사용된 점에 차이가 있다.
장원의 중심에는 장관(莊館)이 있고, 거기에는 영주 자신 또는 관리인이 살고 있으며, 하인과 직인(職人)의 오두막집 ·창고 ·작업장 등이 부속되어 있다. 농민의 가옥은 보통 취락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 조그만 채마밭과 창고 등을 가지고 독립해 있었다. 장원의 토지는 일괄적으로 2~3개의 큰 밭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여러 개의 가늘고 긴 지목(地目)으로 분할, 그 지목이 영주 직영지, 농민 보유지로 혼재되어 있었다. 큰 밭은 당시 농법이 윤작(輪作)이었으므로 필요했던 것이다.
농민은 라틴계 제국의 만수스(mansus), 독일의 후페(Hufe), 영국의 하이드(hide)라고 불리는 표준 규모의 토지를 점유하였으며, 그것을 경작하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함과 아울러 영주 직영지에서 부역(賦役)을 행하여 영주경제를 지탱하였다. 영주경제의 지주(支柱)는 그와 같은 직영지로부터의 수입이었으며, 성계영주(聖界領主)나 국왕의 대장원에서는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의 비율이 반반에 가까운 곳이 많았다.
그러나 직영지를 거의 또는 전혀 가지지 않은 장원도 많았는데, 그곳에서는 곡물 ·양모 ·마(麻) ·유산물(乳産物) ·포도주 ·가축 등 온갖 종류의 현물 공조(貢租) 이외에도, 성제일(聖祭日)의 음식물, 결혼할 때 부과되는 결혼세, 가장이 사망하여 보유 명의인을 변경할 때 납부되는 사망세, 영주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부과되는 제세(諸稅)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장원은 농업생활의 사회조직이기도 하여 흉작이나 기타 이유로 농민경제가 궁핍해졌을 때는 영주측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구제책이 강구되었다.
장원과 촌락과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이 많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1촌(村) 1장원이라는 관계보다는 1촌이 몇 명의 영주에게 분유(分有)되는 상태의 것이 원칙적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한 마을에 많은 토지를 가진 영주는 그곳에 장관을 세우고, 직영지를 설정하여 동촌 내뿐만 아니라 주변 농촌의 장원 예속민으로부터도 부역과 공조를 받아들여 단위장원을 운영하였다. 수도원 등의 대장원에서는 단위장원이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20∼30개씩 산재하고 있어, 빌리카치온제(制)에 의하여 통관(統管)되고 있었다.
또한 도시의 발달, 상업의 발전에 따라 자급자족을 명분으로 하는 장원도 화폐경제에 휩쓸려서 영주는 직영지를 감소시키고, 생산물 지대 또는 화폐지대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 말, 영국 ·독일에서는 13세기경부터 직영지와 부역이 없는 토지소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영주와 농민의 관계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로 변화하였으며, 장원은 해체되어 갔다.
첫댓글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었던 것이 장원해체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정리하면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화폐사용증가->농민들의 시장확대->자급자족적 장원 붕괴 ->영주들이 부역을 화폐로 면해줌-> 농민이 부역에서 해방 14세기 중엽 흑사병 유행->인구격감->
노동력 감소->영주의 농민에 대한 처우 개선->농노의 해방... 이런 이유로 장원이 해체 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을텐데요?
부역의 소멸하구, 직영지의 소멸 또는 경영형태의 변화, 농노의 해방등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