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르던 저녁놀이 사라지고 조용한 사위에는 어둠이 잔설처럼 내리고 있다. 아직 남은 한 여름의 늦은 빛을 등지고 어슴푸레 어둠이 가라앉는 이 순간은 내게 가장 편안한 늦은 오후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희미한 빛은 잔영처럼 남아 단발머리 촐랑이며 뛰어가는 쪼그만 꼬마 계집아이의 등 뒤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
카바이드를 파는 곳은 대낮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공동화장실 모퉁이를 돌아 좁은 골목길 사이에 한낮에도 불구하고 낮고 음침한 어둠이 내려앉은 퀴퀴한 냄새나는 창고였다. 빛을 파는 곳에 어둠이 존재하는 사실이 의문스러웠지만 누런 종이봉투 가득 카바이드를 담아 달려오면 그새 어둠은 깊이 내려 포장마차를 집어 삼키듯 음흉하게 어린 나를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포장마차에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빈 깡통에 물을 반쯤 채우고 속에 든 작은 깡통 안에 조심스레 카바이드를 담고 불을 댕기는 일이었다. 그러면 바로 눈앞에서 기적처럼 흰색의 작은 불빛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가스등이 화려하게 켜졌다. 은은한 불빛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던지 손끝에도 흔들리는 불빛을 보며 어린 나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치 옛날 극장에서 사용된 무대조명으로 주요인물의 집중적인 조사에 스포트라이트로 쓰인 강한 백색광인 라임라이트처럼 카바이드 불빛은 내게 은근히 매혹적이고 신비한 체험이기도 해서 심부름 가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카바이드 불빛은 어린 나를 현실이 아닌 라임라이트 조명처럼 영화 속 상상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어머니는 어둠이 주위를 포근히 감싸면 그때부터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구석진 연탄화덕의 매캐한 일산화탄소 냄새를 쪼그리고 맡아가며 누린내 나는 꼼장어를 익히고 석쇠위의 고등어를 돌려 굽고 따스한 오뎅 국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항상 어린 내게 국자로 국물 맛을 보게 하시고는 불빛만큼이나 엷은 미소를 희미하게 보이셨다.
그리고 흔들리는 당신의 삶처럼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아버지의 늦은 저녁 상차림을 위해 집으로 달려가시면 포장마차에 혼자 오도카니 남겨진 나는 구석진 의자에 다리를 흔들며 까불거리는 내 발끝처럼 흔들리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늦은 숙제를 했다. 가끔은 매서운 추위로 손끝이 굽어 연필을 쥘 수 없을 때는 카바이드 깡통위로 애써 손을 녹이는 재미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포장마차 가게 손님들은 대개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었고 힘없고 서러운 고개 숙인 가장들이었다. 하지만 카바이드 불빛을 통해 비춰진 세상은 볼품없이 작아도 소박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들은 카바이드 불빛처럼 희미했지만 쉽게 세상에 흔들리지 않았다. 얄팍한 지갑에도 거나하게 술 한 잔 에 취하면 또다시 곤궁하고 궁핍한 삶을 마주하고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로 가슴 가득 채우고 살았다.
아무리 구차하고 힘든 세상을 등지고 싶다고, 버리고 싶다고 해서 요즘처럼 너무 쉽게 세상을 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없는 가장이었지만 뜨거운 꿈과 이상을 누구나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아래서만은 드러나지 않는 치부에 안식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세상은 갈수록 물질로 충만하게 되었지만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빈 가슴은 늘어가니 아이러니하다.
시간이 깊을수록 어둠이 짙어 가면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흔들리던 하얀 불빛마저 더 이상 빛을 잃으면 그제야 하얀 주검으로 자신의 할일을 마쳤다. 비록 검은 물체는 하얀 불빛으로 외진 포장마차를 환하게 밝히고 결국 처음의 불꽃처럼 하얀색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어둠을 등진 밝은 빛처럼 삶의 양지와 음지처럼 언젠가는 환하게 밝아 올 미래 같아서 애써 위안을 삼고는 했다.
하지만 최근처럼 너무나 밝고 환하게 파헤쳐진 세상은 포장마차 일지라도 기업화가 되었고 서민의 애환이 담기기보다 그곳에 상주하는 기생처럼 근처는 이미 득실거리는 벌 떼처럼 낮보다 환한 밤의 불야성을 이룬다. 이제는 밤길이 조금 어둑할지라도 사람들의 한발 늦은 여유가, 희미하지만 치부를 감추고 덮을 줄 아는 부드러운 아량이 그리워지는 건 비단 잃어버린 과거의 카바이드의 은은하고 향기로운 불빛만은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