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1925~1995)
국적: 프랑스
직업: 철학자,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
펠릭스 가타리(1930~1992)
국적: 프랑스
직업: 정신분석가, 정치운동가, 철학자
들뢰즈–가타리 공저
주요 저작: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Ⅴ. 디카시와 들뢰즈-가타리
1. 새로운 가능성 생산의 들뢰즈 가타리 철학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도 20세기 사유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사유는 전통적 철학이 지니고 있던 결핍과 재현의 논리를 넘어, 생성과 욕망, 접속과 흐름을 새로운 철학적 원리로 내세웠다. 철학이 더 이상 주어진 실재를 재현하거나 결여를 메우는 작업이 아니라, 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내는 실험적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의는 크다.
무엇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오랜 서양 사유의 전통을 단호히 거부했다. 프로이트 이후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무언가를 향한 갈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욕망은 이미 넘쳐흐르는 힘이며, 세계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변형시키는 기계적 생산이었다. 이때 주체란 욕망의 소유자가 아니라, 욕망의 흐름을 따라 생성되는 임시적 접속의 지점이다. 이 새로운 이해는 인간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그들은 철학의 형식을 리좀적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뿌리나 줄기처럼 중심이 있고 기원이 분명한 나무의 사유가 아니라, 흙 속에서 무수한 뻗음을 만들어내는 리좀의 사유를 강조했다. 이 비위계적이고 다원적인 연결망은 철학이 하나의 체계로 닫히지 않고, 끝없이 확장되는 가능성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사유란 고정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접속의 길을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철학은 또한 정치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와 제도의 기계가 욕망을 포획하려는 순간, 욕망은 언제나 탈영토화의 경로를 찾아 도주한다. 여기서 정치란 거대한 주체의 이름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흐름과 소수적 목소리, 주변적 존재들이 얽히고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장이다. 이러한 정치학은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와 다중의 저항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틀을 제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의 본령을 새롭게 정의했다. 철학은 더 이상 고전적 의미에서 ‘진리의 탐구’나 ‘인식의 조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철학은 개념을 발명하고, 세계와 예술, 과학, 정치의 흐름과 접속하며, 삶을 더 강렬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창조적 활동이었다. 이로써 철학은 단순한 학문의 범주를 넘어, 삶을 새롭게 조직하고 감각을 확장하는 실험의 장으로 거듭났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가 철학사에서 갖는 의의는 분명하다. 그들은 철학을 결핍에서 생성으로, 재현에서 차이와 반복으로, 기원에서 접속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이론적 혁신을 넘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지적 사건이었다. 그들의 철학은 닫힌 질서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무수한 경로를 제시하는 지적 지도와도 같다.
2. 탈영토화와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디카시
전통적 시는 인쇄 매체, 문단 제도, 고정된 서정 언어와 규범을 통해 ‘영토화된 시’로 기능했다. 시는 문학 잡지, 출판 제도, 평론가와 수용자 집단에 의해 정체성과 위계를 부여받았다. 이는 ‘문자기호 중심’의 체계였다.
디카시는 이로부터 이탈한다. 디카시는 사진기호+문자기호의 멀티언어로 구성되어 문자 중심의 기호 체계를 해체한다. 시인은 더 이상 ‘문학적 수련’을 거친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프로슈머가 일상에서 감각적 사건을 포착한 몸으로도 볼 수도 있다.
디카시는 포맷(형식), 생산자, 수용자, 유통 경로 모두에서 기존의 문자시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호적 공간을 연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의 구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는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목적론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름을 생산하고 접속하는 기계적 주체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적 디카시 창작자는 시를 쓰는 주체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회로로 구성된 기계로 이해할 수 있다.
감각-기계: 몸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감응하는 회로
촬영-기계: 디지털카메라로 시각적 인상을 압축하는 회로
언술-기계: 감각을 간결한 문자기호로 전환하는 회로
송출-기계: SNS 플랫폼으로 욕망의 산물을 배출하는 회로
이러한 기계적 흐름은 선형적 내러티브가 아닌, 다층적 접속과 분산을 지향하는 시스템이다. 들뢰즈-가타리적 디카시는 생산과 소비, 창작과 향유,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욕망의 생산 그 자체로 존재한다. 들뢰즈-가타리적 디카시는 ‘날시’라는 욕망의 접속점에서 발생한다. 디카시 창작의 출발점은 시적 충동 대상인 날시이다. 날시는 시인이 세계와의 감각적 만남의 장이며 욕망의 기계적 접속점이다. 이 날시는 디지털카메라(기계)로 접속하여 사진기호를 생성하고, 그 감각을 문자기호로 응축한다. 이 창작과정 자체가 욕망-기계-세계의 접속 기제다.
대리석 인도에 내려놓고 간 비둘기 깃털 위에
은행나무는 잘 익은 열매 한 알 떨어뜨려
고향 미루나무 위에 보름달을 띄워놓았습니다
-공광규 디카시 「비둘기와 은행나무의 마음」
이 작품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으로 읽어낼 때 더욱 풍성한 의미망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결핍을 채우려는 의식적 표현이 아니라, 시인이 세계와 접속하면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의 기록이다. 시인은 대리석 인도 위에 놓인 비둘기 깃털과 은행나무 열매를 동시에 목격하는 순간, 그 사물들이 단순한 사물성을 넘어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는 장면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때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시적 감각이 작동하며,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라는 두 장치를 통해 의미가 생산된다.
사진기호는 깃털과 열매라는 이질적 사물이 나란히 병치된 장면을 제시한다. 이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흐름들이 하나의 장에서 접속하는 사건을 드러낸다. 문자기호는 이를 해석하면서 단순한 병치를 넘어 은행나무가 깃털 위에 열매를 선물한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변환한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진과 문자는 각각 독립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욕망의 기계이며, 이들이 서로 접속할 때 전혀 다른 차원의 흐름이 발생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깃털과 열매의 만남을 고향의 미루나무와 보름달이라는 또 다른 층위로 확장한다. 하늘과 땅, 새와 나무, 그리고 인간의 기억과 공동체적 정서가 서로 얽히며 끝없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는 나무의 뿌리처럼 위계적 질서를 전제하는 사유가 아니라,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고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는 리좀적 연결망의 형식이다. 깃털은 하늘을, 열매는 땅을, 보름달은 시간과 공동체를 상징하며, 각각의 기호가 서로를 가로질러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이 작품은 하나의 닫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적 충동으로 포착한 날시의 장면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접속을 통해 끊임없이 변주되며, 리좀적 확산 속에서 독자에게 끝없이 열려 있는 해석의 장을 제공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욕망하는 기계로서 어떻게 세계와 접속하며 생성의 운동을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결핍을 메우려는 재현의 시학이 아니라, 생성과 접속의 시학을 구현하는 현장인 것이다.
이제 언제 당신을 볼 수 있으려나
괄호를 열며 괄호를 열며 가는 당신
-성윤석 디카시 「그뭄달」
이 작품은 황혼빛 하늘에 걸린 그믐달의 미묘한 잔광을 포착한 순간에서 출발한다. 이때 창작의 기원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마주하는 시적 충동으로 포착한 날시이다. 날시는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욕망하는 기계로서 세계와 접속하는 하나의 운동의 단초다. 즉 시인의 눈은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속 사물과 빛의 흐름과 기계적으로 맞물려 작동한다.
사진기호는 시인이 이 날시와의 접속점에서 가장 먼저 생성된다. 어둠 속에 빛나는 달과 산맥의 윤곽, 그리고 그 아래 고요한 수면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욕망 기계가 세계와 맞물려 낳은 첫 산물이다. 이는 사진이라 불리는 기술적 매개를 거치지만, 사실상 세계가 시적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말 걸어온 흔적에 가깝다. 사진기호는 세계의 한 순간이 욕망 기계와 접속한 흔적이며, 그 자체가 생성의 장치로 기능한다.
이후 문자기호가 덧붙여진다. “이제 언제 당신을 볼 수 있으려나/ 관호를 열며 괄호를 열며 가는 당신”이라는 언술은 달의 미묘한 빛과 어둠의 세계 속에서 부재와 기다림, 그리고 열림과 닫힘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시인이 이미 완성된 시적 언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호와 접속하여 흘러나온 발화이다. 문자기호는 세계를 재현하는 2차 매개가 아니라, 욕망 기계가 또 다른 장치와 맞물려 흐름을 연장하는 접속의 효과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욕망 기계의 흐름을 드러낸다. 날시에서 유발된 충동이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점이라면, 사진기호는 그 접속에서 발생한 1차 생성, 문자기호는 그 생성이 언어로 변환되며 또 다른 접속을 만들어내는 흐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주체의 내적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연결망 속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적 장치이다.
이 작품은 그믐달이라는 존재론적 잔광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주체의 욕망하는 기계와 접속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순간의 기호체계로 이해된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는 독립된 결과물이 아니라, 서로를 밀고 당기며 세계와 주체를 잇는 접속 기제다. 디카시는 바로 이 욕망 기계의 흐름 속에서, 시적 충동의 대상인 날시가 멀티 텍스트화되는 창작의 장을 펼쳐 보인다.
3. 비위계적, 다중적, 탈영토화된 연결망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지점이 다른 지점과 연결될 수 있는 비위계적, 다중적, 탈영토화된 연결망이다. 들뢰즈-가타리적 디카시도 SNS를 통해 작동하는 방식도 바로 이러한 리좀의 구조를 따른다.
비중심성으로 누구나 창작자이며 동시에 독자이다. 접속 가능성으로서 어느 지역, 어느 시점에서든 실시간으로 텍스트에 접근 가능하다. 전이 가능성으로 고정된 의미보다 감각적 여운과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피드백으로 댓글, 공유 등을 통해 새로운 접속과 의미의 층위가 열린다.
들뢰즈-가타리적 디카시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주체가 세계와 접속하여 생산한 신체적 감각, 기술적 매체, 기호적 언술이 연결된 사건으로 시 장르의 탈영토화이자 디지털 시대의 서정적 유목이다.
참고문헌
정형철, 『들뢰즈와 가타리』, 세종출판사, 2004.
첫댓글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받아
들일수 있는 디카시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적충동~~날시~~!
감사합니다
탈영토화
디지털 시대의 서정적 유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