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방> 배우, <파아란> 시나리오 작가 김해곤의 픽션 같은 인생, 논픽션 같은 영화이야기
김해곤. 이 남자를 알고 계신지. 올해로 충무로 경력 12년째를 맞는 어엿한 ‘중견 영화인’ 김해곤의 얼굴과 이름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 아닌 듯 가물가물하다.
그렇다면 잠깐, 이건 어떤가. “야이 시발년아! 네가 정신이 머리에 박힌 년이냐, 젖통에 박힌 년이냐?”, “아 시발, 안 그래도 대가리 쥐나는데 어떤 년은 말이야, 내내 숨어있다가 송장으로 나타나서 나를 또 박터지게 해요”. 올해 초 개봉한 <파이란>에 수시로 등장하는 이들 ‘상스런’ 대사는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
최근 개봉한 <라이방>에서도 그의 흔적은 수시로 살펴볼 수 있다. 극중에서도 해곤 역을 맡은 그가 송옥숙과 함께 닭백숙을 뜯어먹으며 나눴던 살색 짙은 농지거리나, 동료 학락과 준형을 살살 ‘골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 그의 ‘출신성분’을 의심케 된다.
퉁퉁한 얼굴윤곽에 반듯함과는 별 관계없는 듯한 인상, 볼록한 배를 정점으로 한 넉넉한 살집 등을 갖췄고, 세상에 큰 원수를 진 것이라도 있는 듯 험하게 입을 놀려대는 그와 대면하면 그 의심은 더욱 커진다. 혹시 이런 종류의 연기와 대사를 채우기 위해 충무로에서 스카우트한 ‘어둠의 자식’이 아닐까 하는.
제작자들이 앞다퉈 작품을 맡기려 하는 일급 시나리오 작가이자, 뛰어난 조연급 연기자이기도 한 김해곤을 보고 있자면 사실 황당함이 앞선다. 그 황당함은 우선 그가 충무로에선 전례가 없는 배우 출신 시나리오 작가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국영화계 풍토에서 배우가 무언가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연기와 시나리오라는 판이한 분야에 양다리를 걸쳤으면서도, 양쪽에서 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묻혀낼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를 범상치 않게 여기게 하는 이유다. <파이란>의 시나리오와 <라이방>의 연기에서 김해곤은 싱싱하기 그지없는 ‘밑바닥 정서’를 우리 앞에 당겨올려 비릿한 삶의 땀내를 맡게 해줬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출현은 우리 영화계에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충무로의 ‘외계인’, 혹은 ‘천연기념물’ 김해곤, 이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편집자
▶ 김해곤의 픽션 같은 인생, 논픽션 같은 영화이야기 (1)
▶ 김해곤의 픽션 같은 인생, 논픽션 같은 영화이야기 (2)
▶ 배우 김승우, 김해곤을 말하다
“쌈마이 인생 실감나지? 내가 그렇게 살았어”
<라이방> 배우, <파아란> 시나리오 작가 김해곤의 픽션 같은 인생, 논픽션 같은 영화이야기
“놀러”학교 다니다가 연극 시작
“어릴 적부터 가출을 취미로 삼아 살았죠. 그러니까 학교 이야기는 할말이 없는 거야. 집안 얘기는 한번도 들어준 적이 없어. 아, 불량배였다기보다는 돌아이라고. 학교 앞까진 딱 가요. 그 앞에서 친구들하고 만나 같이 목욕탕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그랬지.”
1964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여기저기 옮겨다녔던 김해곤은 고등학생 시절 이를테면 문제아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집안사정”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자주 이사를 다닌 데다 집 밖에서 보낸 나날이 숱하게 많았던 탓에 그는 학교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만사에 게으르고,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려 하지 않으며, 어려운 일이 닥쳐도 뭔가 뚫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의 ‘낙천성’도 그때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는 “놀러다닌”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학교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다리를 만들어줄 줄은 그도 알지 못했다. 교내에서 사고나 치지 말라는 의미였는지, 학교는 그에게 기성극단을 소개해줬다. 그때가 18살 때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한 연극제에서 희곡상과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전문대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즐긴 뒤, 바로 군대로 향했던 그는 제대한 뒤 다시 대학로로 돌아와 연극계에 몸담는다.
대학로 생활은 그에게 “할인권 뿌리러 카페에 가서 일하는 아가씨 꼬시는 재미”만 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민중극단의 윤주상씨는 그에게 연기를 권했다. 그리고선 <사랑의 전화>라는 작품의 주인공을 떡 하니 맡겨버렸다. 연기로 승부를 보라는 그의 권유에 따라 그는 이후 10여편의 작품에서 연기를 했다. 하지만 한곳에 진득이 들러붙지 못하는 기질도 슬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장군의 아들>로 충무로 입문
“뭐 영화야 별로 나온 게 없고, 그저 한 일이라면 기자들을 접대하는 호스트 하면서 술만 마셨지. 그런데 지나고나서 생각하니깐 그때 소양을 닦은 것 같아요. 태흥영화사 나온 지 10년이 다 됐는데, 이 사장님이랑 임 감독님을 아직 한번도 뵌 적 없네. 워낙 무서우셔서들….”
연극에 싫증을 느낀 김해곤의 발걸음은 1989년 태흥영화사가 <장군의 아들>을 준비하면서 실시한 신인배우 공모로 향했다. 박상민, 신현준, 김승우 등과 함께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장군의 아들>에서 왕십리 남산 역을 맡아 충무로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태흥영화사의 전속배우로 있었지만 작품 출연은 별로 해보진 못했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간혹 “저 새끼 없으니까 심심한데, 어디다 좀 집어넣어” 하는 통에 <장군의 아들> 속편의 단역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의 자리가 큰 것은 아니었다. 대신 태흥에서 보낸 3년여의 세월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다. “영화계 전반에 관한 것을 이태원 사장, 임권택 감독, 송혜선 실장 등 태흥에서 다 배웠”고, 지금 가장 가까운 벗이 된 김승우와 신현준을 만났으며 장현수 감독도 알게 됐다. 하지만 태흥을 나온 뒤의 생활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스물아홉의 나이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김해곤은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은 형 같은” 김승우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쓸쓸한 나날을 지내게 됐다. 하지만 그의 뇌리를 맴돌았던 것은 이를 악물어야 한다는 각오라기보다는 “뭔가 길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빚에 쫓겨 노가다판으로
“일산에 가면 거 공원 있잖아요, 호수공원. 그것도 만들고, 수원에 짓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콘테이너에 매달려 구멍도 뚫고, 정동극장에 가면 큰 돌 쌓여 있잖아요. 그거 나르는 일도 하고. 그거 다 내가 한 거라구. 그런데 그것도 일을 못하다보니 안 시키더라구. 결국 거기서도 놀고 먹게 되더라구.”
그놈의 신용카드가 문제였다. 그놈을 만들어놓고 나니 “그 좋아하는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에도 갈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카드로 술 마시는 재미에 빠졌다. 카드 다섯장을 돌려가며 술값을 대는 짜릿한 나날을 보냈다. 무한궤도처럼 보였던 카드 돌리기에도 결국 한계가 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폴로 옷을 하나 사 입고” 악순환의 고리로부터 탈출을 선언했다. 곧 ‘살벌한 빚’이 그를 쫓아왔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노가다판’이었다. 이곳에서 받은 일당 5만원 중 2만원은 모으고 매일 3만원씩은 현장의 동료 인부들과 술 마시는 데 썼다. 나이 쉰이 넘는 인부들과 노가다 말씨를 쓰며 거의 매일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니 그 정서와 말투가 몸에 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이때 익힌 모든 것은 훗날 그가 영화계에 돌아갔을 때 고스란히 자산이 됐다.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밑바닥 사람들의 연기를 할 때도 낯설지 않게 됐으며 시나리오를 쓸 때도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살아 있는 말과 느낌을 건질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생활에 젖다 보니 그동안 2만원씩 모았던 돈까지 까먹게 됐고, 정작 그의 빚은 충무로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나서서 막아줬다. 한동안은 <장군의 아들> 연출부 생활을 했던 신철승씨가 그를 먹여살렸고 김승우도 큰 도움을 줬다. 김승우의 집에서 자고 나올라치면 뒷주머니에 수표 몇장이 꽂혀 있기도 했다.
사방이 막혔을 때, 시나리오에 매달리다
“집에서 바라는 일 중 하나 한 게 없는데, 책 읽는 것만큼은 달랐던 것 같아. 아버지의 영향도 있고, 엄마가 늘 내게 가져다준 것도 책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책 읽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 이제는 읽을거리가 있어야 잠도 잘 수 있네. <말> 같은 건 덮고라도 자요.”
그의 공사장 생활은 3년 넘게 지속됐다. 그의 나이 서른두살 되던 1995년 어느날 김해곤은 순간적인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햇수로 4년째 노가다판을 전전하는데, 공구 이름조차 잘 모르는 신세를 생각하니 한심해졌고, 나아가서 여기서 밀려나면 정말로 갈 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곤 그 밑바닥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영화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장으로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노가다 시절 의욕적으로 출연했던 <게임의 법칙>에서 기껏 찍었다가 대부분의 장면이 편집됐던 경험도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워낙 사람이 게을러서 그런지”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와 가까웠던 지인들은 그에게 감독이나 제작자를 찾아다니며 출연할 만한 작품을 알아보라는 권유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거야 그렇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평소엔 가끔 연락하고 만나곤 하던 장현수 감독이 작품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일부러 연락을 끊었다. 괜스레 나 때문에 부담감을 가질까봐 말이다.” 이 와중에 출연한 작품들이 <개 같은 날의 오후> <본투킬> <깊은 슬픔> <남자의 향기> 등이었다. 개중에는 <깊은 슬픔>처럼 꽤 비중있는 조연을 맡은 적도 있지만, 대부분이 “단역이었고 그나마 다른 배우의 땜빵”에 불과했다.
아무리 게으른 그라지만, 이 정도 상황이 되자 그 역시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 결론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다. 대본 쓰는 것이야 어차피 연극하던 시절부터 익혀왔던 것이고, 책도 그동안 꾸준히 읽어왔다고 자부했던 터라 <남자의 향기>를 끝낸 뒤엔 시나리오에만 매달렸다.
그는 그렇게 쓴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당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했고, 결국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술집 여성들의 일상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그의 생활이 반영된 것으로, 술집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내용. 한때 이창동 감독이 영화화를 검토했다고도 알려진 이 시나리오는 아직 스크린의 빛으로 변신하지 못했지만, 시나리오 작가 김해곤의 가능성을 세상에 알린 신호탄이었다.
겁없이 연기한 <라이방>
“<라이방>을 찍을 때는 장현수 감독이 내게 매일같이 삼겹살, 햄 이런 것을, 그것도 밤에 먹이더라구. 처음에는 나를 좋아해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내 몸무게를 불리려고 그런 거더라구. 그래서 8kg이 쪘잖아.”
<라이방>은 그에겐 도전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는 점도 그랬고, 30대의 팍팍한 이야기를 그린다는 면도 그랬다. 사실 영화를 찍기 전 부산대 앞에서 연극으로 공연할 때만 해도 반응이 좋았고, 감독과의 호흡도 잘 맞는 것 같았다. 한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생을 했다.
장 감독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가장 큰 부분은 ‘배우 본인의 모습을 진실되게 보여준다’는 대원칙이었다. 그가 그 원칙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라이방> 속 해곤이라는 캐릭터가 심성이 착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본디 착하지 않은데 어떻게 착한 역할을 하냔 말이다.” 어쨌든 <라이방>은 연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주위의 생각이다.
그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한 송해성 감독은 “<게임의 법칙>에서 만났을 땐 연기를 잘 못했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하더라. 그런데 <라이방>을 보면서는 깜짝 놀랐다. 정말 자연스러워지고 겁도 없어졌다. <파이란>을 찍을 때도 정말 겁없이 연기하더라. 결국 그게 다 장현수 감독의 도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한다.
밑바닥 인생에서 나온 실감나는 대사
“시나리오라는 건 철저하게 머리로 쓰는 거거든. 관객과 게임을 하듯. 그런데 내가 머리로 쓴 걸 민식이 형은 가슴으로 받아요. 나는 한눈에 반했어요. <파이란> 찍으면서 민식이 형이랑 술도 많이 먹고 그랬는데, 어느날 그러더라고. ‘내가 여자라면 너한테 한번 준다.’ 그래서 난 그랬지. ‘난 지금이라도 형 X 빨아줄 수 있다’고.”
<라이방>이 끝난 직후 참여한 <파이란>에서 그가 맡았던 임무는 거의 다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놓고 실감나는 대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특히 주인공 강재, 깡패 용식이 등 거친 남자들의 생생한 말투를 살리는 데는 김해곤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그는 공식적인 회의, 사적인 모임을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참여해 생각을 개진했다.
훗날 <파이란>이 ‘술잔치’로 기록된 데는 그가 큰 몫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안상훈 프로듀서는 “그가 캐릭터의 겉모습이나 내면에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표현한다. 또 현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에 대사에서 쓸데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진짜 살아 있는 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안 피디의 평가. 그가 이토록 자연스러운 대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밑바닥의 삶을 꿰어차고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스로 연기를 해봤기 때문에 자연스런 호흡을 알고, 배우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그에게 맞는 대사를 만들었던 덕이다.
입은 걸지만 머리는 차갑다
“난 친구가 다양해요. 하이클래스에서부터 바닥까지, 룸살롱 밴드 연주자에서 사장까지니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공평하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웨이터, 나라시 운전사 할 것 없이 여러 층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하다 보니까 캐릭터를 구축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그리는 게 어렵지 않은 것 같고. 그동안 사람에 대해 배운 것 같아요. 두려운 사람도 없고 얕잡아볼 사람도 없고. 그런 생각이 드는데, ‘같이 간다는 생각’말야.”
요즘의 그는 밤을 낮삼아 살아야 할 정도로 일을 떠안고 산다. 물론 틈틈이 지인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음주가무를 즐기긴 하지만. 얼마 전 탈고한 시나리오 <블루>는 해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해양 블록버스터 영화.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쓴 작품이기 때문에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쉴 틈도 없이 그는 김의석 감독의 역사물 <청풍명월>에 꼼짝없이 붙잡힌 신세다.
인조반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사료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아직 윤곽을 밝힐 수 없는 싸이더스의 시대극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게으르다’, ‘널널하다’, ‘어떻게 하다보면…’ 등의 문장을 달고 사는 김해곤이지만, 시나리오에 관해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원칙적인’, ‘치밀한’, ‘머리를 써서…’ 등의 문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의 시나리오론은 명확하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감동을 강요하거나 훈수를 두려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도를 추구하다 보면 뒤틀림이 나온다, 닭살은 싫다, 거짓말이 들어가면 감동이 사라진다 등이 그것이다.
그의 ‘리얼리티’에 대한 천착은 가히 강박적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을 다룬 역사책을 꾸준히 읽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역사의 파편일 뿐인 인간의 삶과 그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선 역사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가 즐겨읽는 <말>도 사회의 어둡고 가려진 면을 들춰준다는 면에서 리얼리티의 산 교과서인 셈이다. “시나리오 쓸 때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지. 지금 공부 못하면 술 먹고 여자 만나느라 시간이 없어요.”
꾸밈없이 적나라한 욕망과 냉정한 이성을 함께 가진 남자, 지독하게 게으르면서도 철저한 면이 있는 남자, 이 복잡혼란한 남자가 사는 법은 도대체 뭔가. “<보고 싶은 얼굴>을 보면 그런 대사가 나와요. 누군가 ‘왜 사냐’고 묻는데, ‘어떻게 되나 보려고 산다’라고 대답하는. 내가 딱 그런 경우라고. 음.”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탄광 들어간다는 걸 네가 뜯어말렸죠”
배우 김승우, 김해곤을 말하다
“승우가 뒷수발 다 해줬지. 그래서 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천치가 된 거라니까.”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한 조합이지만 김해곤과 김승우는 서로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통과했던 시절. 김해곤의 몸이 지금보다 날렵했고, 김승우의 몸이 지금보다 육중했던 그때. 처음 만난 순간부터 ‘형제 같은 핏줄 땡김’을 느꼈다던 두 사람은 그래서, 동료 혹은 선후배라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관계를 징하게도 오래 이어갔다.
연일 이어지는 <예스터데이>의 바쁜 촬영일정에도 불구하고 김해곤에 관련된 기사라는 말에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 김승우는 수면으로 올라온 김해곤의 성장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즐거워했고, 그 달뜬 마음은 휴대폰 넘어 들려오는 그의 격앙된 목소리를 통해 충분히 느껴졌다.
얼굴 맞대고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라면 할 리 만무한 이들이지만, 김해곤이 “승우에게 진 빚이 많다”더라 전했더니 “그거 순∼ 오바예요. 오바. 내가 해곤이 형 덕에 살았죠”라며 두 사람은 한 다리 건너의 기자 앞에선 서로에 대한 칭찬의 수사를 찾는 데 분주했다.
해곤이 형은 처음 볼 때부터 왠지 친형 같은 느낌을 받아선지 제가 많이 따랐어요. 형도 나를 친동생처럼 아꼈구요. <장군의 아들> 끝나고 박상면, 신현준은 다 떴지만 우리 둘에겐 여전히 추운 시절의 연속이었어요. 참, 이런 일도 있었다. 어렸을 때 얘긴데요. 내가 스물세넷 정도 되었고 형은 스물다섯, 여섯살 되던 때였던 것 같아요.
우리 같은 동네 살았는데 나도 뭐 별볼일 없고, 형은 형대로 막막했던 시절이라 같이 포장마차에서 술도 참 많이 먹었죠. 그러던 하루는 해곤이 형이 새벽에 갑자기 찾아와서 “승우야, 술 먹자” 그래서 ‘왜 그런가? 뭔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말 물어보지도 않고 술만 먹었죠.
좀 취한 상태에서 형이 대뜸 “승우야, 나 탄광 들어갈란다”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 가장 의지하고 따랐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소리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죠. 울고불고 뜯어말려서 결국엔 탄광에 안 갔어요. (웃음) 그것말고도, 고비고비마다 형 앞에서 참 많이 울었어요. 다 어릴 때 이야기죠.
배우로서 해곤이 형은 단순히 영화의 감초 역할 이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이방>에서 그런 게 보인 거고…. 우리랑 자주 어울리는 박중훈 선배도 “김해곤은 연기나 발성이 특이해서 발전 가능성이 있는 배우”라고 늘 말하곤 하니까요. 요즘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해곤이 형을 제일 많이 찾는다면서요? 늘 시나리오를 쓰면 제일 먼저 저에게 들고 와서 봐달라곤 했는데….
‘김해곤표’ 시나리오의 장점이라면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대사가 감칠맛이 나고 입에 착착 달라붙어요. 그리고 살아 있죠. 영진공 시나리오 당선작인 <보고싶은 얼굴>은 정말 ‘대삿발’이 죽여요. 그 시나리오 처음 보고 ‘이 사람 드디어 뭔 일을 저지르나’ 했는데 이렇게 급속도로 일이 진행될지는 저도 몰랐어요.
열 마디 중에 아홉 마디는 욕이고, 물론 우리 둘 다 순진한 나이가 지나긴 했지만, 해곤이 형은 언제 봐도 참 순수한 사람이에요. 너무 극단적인 예일는지 몰라도, 해곤이 형이 살인을 했다 해도, 적어도 저는 ‘저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고 형 편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믿음을 주는 사람이에요.
다만 이치에 밝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 그게 걱정이죠. 이제 나이도 마흔이 가까워 가는데 돈도 좀 모으고 술도 줄이고 여유로운 생활 좀 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요? 좋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너무 좋아요. 옛날에는 돈 낸다고 하면 뭔 돈이 있냐고 말렸는데 요즘은 식당 가서 밥값 낸다 그래도 가만 놔둔다니까요. 얼마나 대견한데요. (웃음)
백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