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자씨의 당선수기>
내나이이제서른세 살... 양 현 자 (강원도협회 평창군지회)
나는 중학생이다. 거울 앞에서 주름진 얼굴에 화장을 마친 뒤 체크무늬 교복을 입고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미소를 지어본다. 대학생 딸을 둔 53세 중학교 1학년 학생이 등교 채비를 차리는 것이다.
장애인 스티커가 앞 유리창에 부착된 승용차에 시동을 건다. 평창중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나를 반길 환한 학생들과 정다운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의식했을 때가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사람이기는 하나 이름만 사람이지 짐승이나 다름없는 두 팔과 두 다리 무릎을 꺾어 기어 다니고, 세상 물정 그 어느 것 하나도 모르던 문맹자인 자신을 발견하고 너무도 부끄러워 어디든 숨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외롭고 고독한 슬픔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라는 촌락으로 찢어지도록 가난한 가정에 양친 부모님은 역시도 일 밖에 모르는 문맹자셨다.
부모님의 슬하에 자식은 7남매, 그 자식들 먹이고 기르기 위해서 비 오고 눈 내리지 않으면 날마다 날품팔이를 나가시는 일에 찌들던 부모님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뼈 빠지게 벌어도 형편은 펴지지 않고 아침은 깡 보리밥. 점심은 아침에 해놓은 보리 찬밥에 누렇게 시어터진 열무김치, 저녁은 늘 밀가루 국수가 아니면 여러 종류로 바꿔가며 끓이는 죽이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끓여먹는 것이 누런 호박으로 쑨 호박 풀대 죽이었다.
난 그때 그 호박죽에 물렸는지 지금까지도 호박으로 만들어진 음식이 가장 싫다. 내 나이 스무 살 이전에 성장기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저 안다면 가족들에게 혹은 이웃들에게 내 자라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성장과정 이야기를 들어 대충 알게 된 것이 전부이며, 15세 때부터 스무 살까지 간간히 기억 되는 건 아팠던 기억뿐이다.
병으로 몸이 아팠던 것이 아니고 가족들로 부터 혹은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맞아 아팠던 기억이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내가 태어난 순서로는 6번째 딸로 태어 난지 백일이 되었을 때 갑작스레 눈알이 뒤집히는 경기를 하는데 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병원을 데려가 보아야 소용이 없을 정도로 숨만 붙어있지 완전히 죽은 거나 다름없어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고 하여 방 윗목에다 이불을 덮어 밀어놓고 숨 떨어 질 때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 기간이 일주일이 가는데 매일 죽었나 하여 이불을 들쳐보면 숨은 붙어있어 죽지 않은 걸 내어다 버릴 수도 없어 그냥 두고 지켜보던 어느 날 새벽, 모기소리 보다 더 작은 힘없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이불을 들쳐보니 뒤집혀 있던 눈알이 정상으로 돌아와 경기에서 깨어나 있어 젖을 물리니 기운이 없는지 빨지 못하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젖을 숟가락에 짜서 입을 벌려 흘려 넣는 식으로 몇 날을 먹이니 차차 회복되어 정상으로 젖을 빠는데 아프기 전 아기는 위로 차 올라가며 울고는 했었는데 아프고 난 아기는 아무리 먹여도 살이 찌지 않을 뿐더러 울어도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우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은 하였지만 몹시 아프고 난 후라서 약해진 몸이라 그런 것이겠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첫돌이 지나도 일어 설 생각을 하지 않아 이름 모를 병을 앓고 나서 성장이 늦되나 생각하여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가난한 형편에만 신경을 쓰며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다 네 살이 되어도 일어 설 생각을 하지 않고 기어만 다녀 하루는 아이를 세워보니 다리를 세우면 주저앉고 하여 그때서야 아이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용하다는 의원마다 찾아다니며 수도 없이 침을 놓고 치료를 해보았지만 회복되지 않고 소아마비란 병 이름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아마비라는 병마는 다리만 마비시킨 것이 아니고 머릿속 뇌까지 마비시켜 놓았는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바보 아이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개처럼 기어서 온 동네를 돌아 다녀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부모나 형제들이 나를 길에서 만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려 주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그러니 동네 아이들도 때려도 되는 아이인 줄 알고 놀리고 때렸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 나이 15세 이전 기억은 아팠던 기억 말고는 전혀 나지 않는다. 15세 이후부터 스무 살까지는 나 자신의 정확한 파악은 못하지만 대충은 기억이 난다. 방치해둔 장애인으로 가족들로 부터 받았던 천대와 이웃들에게 받았던 냉대 속에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외롭고 쓸쓸했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삶은 들판에 자라는 이름 모를 잡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불행했던 청소년 시절에 개처럼 말 갈 때 소 갈 때로 기어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 같은 포근한 사랑이 머무는 곳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야산을 밀어내고 지은 교회였다. 처음에 동네 아이들이 가기에 궁금하여 논 둑 좁은 길을 따라 도랑건너 바위로 된 자갈길을 타고 올라가 보니 신축중인 교회로 주택만 먼저 지어놓고 예배당을 짓고 있는 상태였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때가 싸늘한 봄바람이 품안으로 파고들던 춘 삼월 중순이라고 추측된다. 밤새 얼어있던 땅이 오전 햇살이 퍼지면 질척하게 녹고는 했으니까. 옷도 속 팬티만 입고 벌건 다리로 질척한 땅을 기어 올라간 내 손과 두 다리는 황토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 아이들은 주택 방으로 서슴없이 들어가는데 나는 그럴 수 없어 주택 굴뚝아래 시멘트로 발라진 곳에 앉아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흙벽돌을 리어카에 실어 나르던 남자 한 분이 굴뚝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자꾸만 쳐다보며 일을 하더니 하던 일손을 멈추고 다가와 햇살에 말라가는 내 다리 흙을 털어주며 어디에서 사는 누구냐고 묻는데 그 분의 말과 표정은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다정함 그것이었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세상에서 처음 만나보는 내 마음은 '아! 이토록 좋은 사람도 있었나' 하는 사실이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 분은 나에게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또렷이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 분과의 만남 5년 후 내 존재를 알고 나서 그 분과 첫 만남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처음 만날 때 그 분은 교회를 개척하는 전도사님이셨는데 1년 후 목사님으로 승격하여 몇 년을 그곳에 계시다 떠나셨다. 그것이 내가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내 삶의 활력소가 되는 동시에 급속도로 정신적 성장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15세에서 20세까지는 내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맹자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것은 교회 가는 일이었다. 속 팬티만 입고 벌건 두 무릎으로 2km을 기어서 다니는데 그 길이 학교 가는 길이기도 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면 놀림을 많이 당했다.
어느 날은 “바보! 병신!” 하며 놀리는 아이들이 던진 돌팔매에 이마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교회 가다 아이들 만나는 것이 가장 싫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집에 오면 절에 다니는 부모님의 반대 또한 대단히 심각했다.
그러나 멸시와 천대로 육신은 아파도 마음은 그 무엇이 즐거운지 잘 모르면서 마냥 즐겁고 기쁨이 넘쳤다. 그래서 그 누구도 내가 교회 가는 걸 말릴 수는 없었다. 목사님의 가족들과 교인들의 친절하고 다정함이 좋아서 매 맞아 육신이 아무리 아파도 교회를 가면 다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교회가면 기도 할 줄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기어 다녀 무릎은 사흘이 멀다 하고 모래알이 박혀 종기가 생기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불쌍하게 생각 되신 은혜의 하느님은 내 머리 뇌줄의 마비를 풀어 주셨는지 스무 살이 되면서 나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이 떠진 것이다. 나 자신의 처지를 아는 그 순간 높은 벼랑위에서 어둠의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는 절망감을 이루 다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네발로 기는 짐승으로 살고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움은 세상 그 어디에든 나를 숨길 수 있는 곳이면 영원히 숨겨두고 싶었다. 짐승의 모습으로 온 동네를 기어 다니는 나를 그토록 싫어했던 가족들의 마음을 그때서야 이해 할 수 있게 됐다.
나 자신을 안 이후로는 밖으로 나가라고 등 떠밀어도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저히 나 갈 수 없어 교회는 어둠이 내려지는 밤에만 다녔다. 그리고 제일 먼저 글을 모르고 있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하여 글을 배우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나보다 몇 살 아래인 동네 아이들에게 내 이름 쓰는 것을 배워 집 마당 흙 땅은 공책이고 나뭇가지는 연필로 하루 종일 이름을 쓰는 낙으로 지내며 날아다니는 종이쪽지의 글을 보고 그대로 그림을 그려가며 한글 배우는데 미쳐 지냈다.
그렇게 1년이 되어 한글을 대충 알게 되면서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책 읽는 것이 생활화가 되었다. 책속에서 세상 모든 걸 알게 되면서 몸은 편안한 대신 내 마음은 좌절과 절망의 능선을 넘나들며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스물네 살 때 주민등록증을 하라고 면사무소에서 나온 통지문이다.
그 통지문에는 이름 나이가 엉망으로 실려 있었다. 호적에 내 이름은 양여자로, 나이는 여동생보다 두 살이 아래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동생은 나에게 언니라 부르지 않고 지가 언니라고 주장을 했었다. 출생신고 하기 싫은걸 어쩔 수 없이 아무렇게나 해 놓았다는 생각이드니 부모님이 한 없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래서 부모님께 내가 죽어 없어져 주겠으니 면사무소에 가서 당장 사망신고를 하여 호적을 없애라고 울면서 대들었다. 그랬더니 내가 죽을 때까지 저런 원망을 듣겠으니 변돈을 내어서라도 고쳐 놓겠다며 엄마는 이리저리 다니시며 노력을 하셨지만 그때에 호적 고치기는 여간 어려워서 엄마의 능력 밖이었다. 그리고 사회 활동하면서 호적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을 때마다 스트레스로 부모님을 원망하게 되고 나름대로 정상으로 고쳐 보려고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고쳐볼 길이 없었다.
그러다 2003년도 이유가 분명한 호적은 절차를 밟으면 고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한 맺힌 호적의 이름 개명과 나이를 정정하여 고치는데 약3개월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저 세상에 계시는 부모님을 용서하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원망의 골은 나날이 깊어져 세상에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나 같은 사람을 왜 하느님은 태어나게 하셨는지 의문을 품으며 자신을 학대해 갔다.
그러다 보니 바보 시절에 뚱뚱하던 몸은 젓가락처럼 말라가고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나를 천대하던 가족들이며 동네 이웃들까지도 모두 죽이고 싶도록 밉고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때 그런 내 마음을 낙서로 표현했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했다. 더는 세상을 살아갈 목적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낙서 글은 잡지나 라디오 방송에 보내니 채택되어 방송에 나가면서 전국의 독자들로부터 위로가 담긴 많은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좌절에 늪 속을 방황하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마음의 병은 점점 골이 깊어져 결국은 죽음을 결심하고 어느 날 한글을 알면서 쓰기 시작했던 일기이며 독자들로부터 받은 편지와 아끼던 책들을 정리해 불태우고 죽음을 계획했다. 그 첫 번째로 먹지 않고 굶어서 죽는 방법을 택하여 시행하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첫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틀 지나고 사흘째 되니 기운이 없고 나흘째 되는 날부터 누워서 지내고 먹지 않은 7일째가 되니 일어날 기력이 없음은 물론, 귀도 들리지 않고 널 부러져 있었다. 그러다 말겠지 생각하던 엄마가 딸년을 보니 죽기로 작정한 것이 분명하다 싶었는지 통곡하기 시작했다.
슬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엄마와 둘이 살면서 지금은 때가 아니다 싶어 죽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미음을 먹으며 차차 기력을 회복한 나는 엄마를 오빠 집으로 모셔다 놓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빠 내외를 설득하여 시골에서 청주 오빠의 집으로 엄마를 모셔다 놓은데 성공 하였다. 그러나 오빠의 집으로 이사를 나오니 죽고자 하는 일에 차질이 생겼다.
오빠가 나에게 쇠로 만든 보조기를 맞추어 주어 목발 짚고 걷게 해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착용하는 것과 풀어내는 불편함 때문에 보조기를 벗어 던지고 휠체어를 굴리며 살지만...처음엔 걸을 수 있다는 신기함에 발이 부르트도록 낙엽이 쏟아지는 길, 눈이 펑펑 내리는 길, 비가 억수로 내리는 길을 날마다 걸어 다녔다.
차츰 죽음의 굴레를 걷어내며 한 번 다시 살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희망을 품고 가발 공장에 취직도 해보고 미장원을 다니며 어깨 너머로 열심히 미용 기술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머리 만지는 취미가 있는 걸 본 오빠가 미용 기술을 배우면 미장원을 차려 주겠다고 하며 내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종업원을 두었을 때 미장원 주인은 종업원의 기술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미용기술 배울 것을 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격증을 따기란 1급 장애인 나에게는 불가능 했다. 우선 학원이 모두 2-3층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도전할 수 없는 큰 장벽이라는 걸 알고 사회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경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6개월 미장원을 다니며 어깨 너머로 열심히 미용 기술을 배워 가족들의 머리로 실습을 하니 의외로 파마가 예쁘게 잘 되어 성공이었다.
그러면서 가발 공장도 열심히 다녔지만 절망의 구름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리듯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순간순간 일어나 갖고 있던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잠시 보류됐던 죽음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잠자는 척하며 엄마 곁에 누우면서도 죽음을 계획하는 것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여행을 떠나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 바로 위에 언니가 그때 당시에 전북 남원에 시집가 살고 있었다.
언니 집을 다녀오겠다고 하면 가족들은 아무런 걱정 하지 않고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짐작이 맞아 나는 가발 공장에 사표를 내고 휴가라고 거짓말을 하고 떠나기 전날 밤 엄마와 오빠 내외에게 각각 유서를 써서 낙서 장 갈피에 넣어두고 집을 나섰다. 혼자 목발 짚고 걷는 이 길이 죽으러 가는 마지막 길이라 생각하며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내 두 번째 죽음의 계획으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신원을 알 수 없도록 신분증이 될 만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 형제 중 가장 나에게 잘해준 언니라서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자고 생각하여 돌아오는 길에 죽기로 결정을 했다. 언니 집은 열차와 택시를 타며 찾아갔다. 언니와 형부 어린 조카들은 나를 반겨주었다. 언니네 집을 가보니 양복 재단사로 일하는 형부의 박봉으로 언니가 어린 아이들만을 놓아두고 식당일을 하여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는 모습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 생각되어 언니랑 여수 오동도 다리도 가보고 4-5일을 함께 지내다 다음에 다시 온다고 빈 약속을 하고 언니와 이별한 뒤 돌아오는 열차에 눈물을 감추며 올라탔다. 정해진 좌석 의자에 잠시 앉았다 일어나 문 칸으로 나와 문 앞에서 창 너머 들판 풍경을 바라보다 걸어 놓은 열차 문고리를 벗겼다.
열차 출입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털커덩 열리고 나는 한 발을 계단아래 내려놓으며 목발과 몸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내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이 아가씨 미쳤나? 왜 이러는 거요?” 당황한 나는 고개를 돌려보니 열차 관리인 즉 차장이었다. 나는 거짓말로 달리는 열차 밖을 구경하고 싶어서 문 고리 벗겼다고 하였으나 차장은 거짓말인 줄 안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 가서 의자위에 앉혀 놓고 아가씨가 열차에 오르는 얼굴이 많이 어두워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며 세상은 살아 볼만한 곳이라는 등 나름대로 인생철학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두 번째 죽음을 실패했다는 낭패로 내 귀에는 차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은 열차가 조치원역에 올 때까지 나를 감시하고 있다가 친절하게 청주행 버스를 태워주고 버스 기사에게까지 나를 부탁 했는지 버스 기사는 택시를 태워주며 “아가씨! 힘들어도 열심히 밝게 살아요.”하는 말까지 덧 붙였다. 택시 기사는 오빠의 집 마당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 유서를 보지 못한 가족들은 잘 다녀왔느냐고 먼 길 고생했다고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그날 밤 또 깊이 생각해 보았다. 치밀하게 계획했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곰곰이 분석해 보았다. 내 목숨이고 또 내 몸이지만 내 맘 내 뜻대로도 못하는 것은 운명이란 말인가! 그렇게 몇 날을 그런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 내린 결론은 “그래! 죽는 것이 나의 길이 아니라면 죽는 노력으로 어디 한번 살아보는 길로 노력하여 보자!”였다. 그런 결론을 내려 결혼이라는 것도 해보고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 보자고 다짐을 한 후부터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길들여갔다.
엄마 살아생전에 짝을 찾아 결혼하여 엄마가 세상 소풍을 끝내고 저 세상 가실 때 홀가분하고 마음 편안하게 떠나시게 해드리자고 결혼을 결심하고 상대는 나보다 더 불편한 사람을 만나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다. 이분을 알게 된 건 장애인 딸을 두고 있는 어느 치과 박사님이 장애인 봉사를 한다는 뜻을 담고 장애인의 정보를 실은 “날개”라는 소식지를 펴내 전국 장애인들이 받아보게 된 것이 인연의 고리가 되어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세월 7년이 되던 해 가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나이가 나 보다 11년 차이로 몸도 많이 불편하여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하는 1급 장애인이다. 얼굴은 미남이고 마음은 비단결인 사람으로 성격이 모나있는 나에게 언제나 편안함을 주는 넉넉한 분이기도 하다.
맨 처음 1급 장애인과 결혼 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우려하여 양가에서 모두 반대를 하였고 주변 사람들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살아 보겠다고 마음 돌려 먹은 나에게 몸 불편 한 것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사고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분과 힘을 합쳐 모든 것을 헤쳐 가며 살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 반대를 외면하고 내 나이 30세 되는 해 1984년 7월15일 우리 집이었던 청주에서 성대하게 약혼하고, 그해 10월9일에 신랑 자택에서 전통혼례식으로 결혼 하는데 기어 다니는 사람끼리의 결혼이라 하여 구경꾼으로 몇 동네가 모였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 신부라서 둘러보지 않아 모른다. 둘 다 불편하고 또 기동력도 없어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다.
책이나 읽고 낙서를 즐겨하며 감상주의자로 삶과 죽음의 갈림 길을 방황하던, 어쩌면 온실 안 화초처럼 나약했던 굴레를 벗어던지고 현실 삶의 강한 여인이 되어 살아 보자 마음 고쳐먹으니 이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것이나 겁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시부모님 두 분이 다 계셨다. 아들이 있었지만 불편한 아들을 돌보아 준다고 일찍부터 불편한 아들을 데리고 따로 살림을 나와 살고 계시는 곳으로 내가 시집을 온 것이다. 두 분의 시부모님들은 인자하셔서 불편한 며느리인 나에게 참 잘 해주셨다. 그러나 시댁 형제들은 노골적으로 냉대를 보였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는 만큼 나도 그들을 무시하고 살았으니까. 나는 처녀 시절 어깨 너머로 미장원을 다니며 배운 미용 기술로 시어머니 머리 파마를 해 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계획은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미용사로 발전해 갔다. 한 사람이 두 사람 되고. 두 사람은 네 사람으로 몇 년이 흐르니 평창 일대를 주름잡은 소문난 무허가 미용사로 발전해 하루의 일상은 눈 코 뜰 사이 없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바쁘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평창군 미장원에서 미용사들이 들고 일어나 무면허 미용사인 나를 처벌하라고 데모를 하며 경찰서에 고발하는 등 몇 년을 괴롭혔지만 경찰서는 나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은 미용사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경찰서에서 미용사들의 고발을 받아 들여 나를 민사 재판을 하여 처벌이 내려진 것이 벌금형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20만원 벌금을 2년에 걸쳐 결국은 할부로 해결했지만... 시부모님은 나와 1년을 사시다 두 분이 백일 간격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딸아이를 기르며 내 두 손이 필요로 하는 곳이면 봉사로 활동해 보자고 결심하고 내가 배운 기술이 미용이므로 평창, 정선, 영월, 횡성 이렇게 4개 군을 돌면서 5년간 불우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미용 봉사를 했다. 그리고 평창군에 장애인협회가 생기면서 협회 임원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나는 장애인협회 임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운전면허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맞는 학원이 없어 혼자 공부하여 학과 시험을 보았고 중고차를 구입하여 집에서 연습, 실기 시험을 보는 등 어려움이 참 많았다. 운전면허를 취득하여 차를 운전하고 다니니 이건 머슴 하나 집에 둔 것보다도 더욱 편리하였고 그 후부터 차가 있어 기동력이 활발해 지니 내 생활은 그 두 배로 바빠졌다.
집에서 부업으로 미용하여 번 돈은 오막살이집을 우리 두 부부가 살아가는데 편리하게 5년 간격으로 고쳐나갔다. 15년 걸쳐서 고친 집은 보기 좋은 집은 아니지만 1급 장애 우리 부부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집 다 고쳐놓고 마음에 여유로움이 생기니 나에게 또 다시 삶의 브레이크가 걸렸다. 앞 뒤 돌아볼 시간조차 없이 살아가던 18년의 내 결혼 생활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질없게 느껴졌다.
김 도향님이 부른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어느 날 낙엽 지는 소리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가사처럼 허무함이 내 마음에 어둠의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으로 시달리기 1년을 보내고 나니 식욕도 떨어지고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세상 그 어떠한 소리도 듣기 싫고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조차 만나기 싫었다. 머릿속은 온통 죽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을 집요하게 지배하였다.
그러다 1년이 될 무렵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2002년은 나 홀로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 친정 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아픔까지 겹쳐 나를 참 많이 힘들게 하였다. 죄 없는 남편과 중학생이던 딸아이를 힘들게 하였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사랑해준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덕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그때 병원에서 잠재우기 위하여 수면 주사를 많이 맞은 탓으로 눈 시력이 약해져 미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 동안 단골손님들의 전화가 괴로워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봉사와 배움의 길로 바꾸게 되었다.
사회복지 대학을 수료하고 학급 회장으로도 활동하며 내 두 손이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바쁘게 다녔다. 소년 소녀의 가정, 독거노인들의 가정을 돌며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할 때 육신의 절반만 쓰는 나로서는 무엇인가 남을 위하여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마냥 즐겁고 뿌듯한 행복은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나는 밤으로 남모르게 검정고시 책을 안고 공부와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03년 봄 무학 출신에서 당당히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또 다시 나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갖게 하였다. 2004년은 남편의 회갑으로 쉬고 2005년부터 중학교 과정을 혼자 공부하는데 초등 과정 시험은 운이 따라준 덕분에 6년이란 세월을 두 달로 해결 보았지만 중학교 과정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도자 없이 공부한다는 것은 황무지를 맨 손으로 후벼 파내는 것이나 같다고 생각되었다. 시험 때면 밤잠을 마다하고 공부하여 두 번 시험을 보아 과목당 합격을 하고 영어와 수학만 남아 2006년 8월에 있을 시험 준비와 원주 상지대학원에서 실시하는 아카데미 교육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나에게 또 다시 찾아온 불행은 불의의 사고였다.
보건소로 혈압 약 지으러 전동 스쿠터를 타고 가서 경사로를 올라 전진기아를 놓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깜박 잊고 잡은 채로 문을 열려다가 전동스쿠터가 속도 빠르게 유리문으로 돌진하는 것에 놀란 나는 무의식중에 옆으로 핸들을 돌린 것이 계단 세 개를 굴러 시멘트 바닥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좌측 다리 무릎 뼈가 박살이 나는 사고로 5개월 병원 생활은 또 다시 나에게 생과 사의 갈림길을 방황하게 하였다. 주변 사랑의 수호천사님들의 극진한 간호와 염려덕분에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 하도록 회복되어 그 고마움은 언제나 내 가슴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그 아린 후유증은 남아있지만... 단계별로 연단을 겪으며 흐르는 세월 따라 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 어려움을 겪어내며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배움의 집착으로 인하여 지나간 겨울 동안 나는 고민의 늪에 빠져 지내기도 했었다.
이제 혼자 하는 공부는 자신이 없는데 평창에는 내가 갈 수 있는 학원도 없고 배움의 도움을 받을 길도 막막하였다. 딸아이가 경기도 부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기에 부천에 가서 아이와 함께 지내며 학원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할 생각으로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혼자 살아볼 테니 모녀만 나가서 지내라고 하여 남편을 혼자 두고 떠나야 하나, 아니면 배움을 포기해야 하나로 고민 고민하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평창 교육청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교육장님을 만나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호소하였더니 평창 중학교 교장 선생님께 연결 하여 주셔서 평창 중학교를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거절당하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환영하여 주어 결정을 해 놓고 한 동안 또 갈등을 하였다. 나로 인해서 학교 모든 분들을 힘들게 하면 어찌하나 하고 말이다.
등교에서부터 육신이 겪어야 될 모든 어려움은 감당 할 각오는 되어있었다. 그것은 확실한 내 꿈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꿈에 도달 하려면 긴 세월이 필요하고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막상 14세의 팔팔한 청소년 대열에 끼어 공부를 하여 보니 맨 처음 어색함을 해소 하는데 몇 달이 지나고 연속되는 크고 작은 시험은 늙은 여자가 감당하기 많이 힘들다.
녹슨 뇌 세포에 입력이 되지 않고 잊어버리는 어려움이 솔직히 너무 벅차다. 선생님들과전교 학생들은 모두가 친절하게 참 잘 대해준다. 두 달 벼락으로 공부하여 초등학교 졸업장은 얻었지만 6년이란 긴 세월의 연륜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걸 학교 다니며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음은 모래위에 집을 지으려는 어리석음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그래서 요즘 집에서 EBS 교육 방송을 통하여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 한다. 집에서는 초등학생, 밖에서는 중학생으로 한 가정의 주부로 한 남자의 아내이며 딸에게 엄마로 또 사회인으로 순간순간 주어지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생활은 늘 바쁘기만 하다.
몸은 고달프고 마음도 늘 지쳐 있지만 내 인생에서 배움은 마지막으로 거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목표는 서울대를 들어가는 것이다. 내 몸이 건강하고 내 차가 잘 굴러주고 있는 한, 이 생명 다 할 때까지 남은 생애 동안 공부를 계속 할 것이다. 그래서 황혼 언덕위에 인격과 미덕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것이 지나친 욕심이라고 그 누가 말을 한다면 난 아무런 할 말이 없어 침묵하련다.
끝으로 제목으로 정해 놓은 내 나이 이제 서른세 살은 바보로 살았던 20년을 내 인생에서 빼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53세에서 20을 빼고 나면 내 나이 서른세 살이 된다. 아직도 가슴엔 많은 사연이 남아 있지만 그 고난과 역경을 모두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내 슬픔이 더 진저리쳐 오기 전에 내 삶의 넋두리를 이쯤에서 마친다.(양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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