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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아래
황 금 찬
고향은
백년을 두고 물어도
영원한 모정이라고 하리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고향이라 일러두라
천애의 땅이 되지 않고
언젠가는 갈 수 있는 향관이라고
묻거든 대답하라.
그리움이 사무치면
잠들어도 눈감지 못하고
또 하나의 실향민들의 은하수
밤하늘의 별이 되어
강물로 흐르네.
아! 이웃이여, 벗들이여
아침 창 앞에 낯설은 새 한 마리
날아와 울거든
남기고 온 정든 마을의 슬픈 소식이라
전해주고
그날 문을 열고 서시어
잘 다녀 오라 하시던
눈물에 젖은 어머님의 음성
다시 들을 수 있으려나.
구름으로 가교를 엮고
나비의 날개로 날으리라
눈썹 끝에 열리는 내 조국의 땅인데
산을 하나 넘어도 아득한 지평선
하늘이여 말해 달라.
여기 풀잎 같은 마음을 모아
물망의 정을 기리고자 하늘에
비를 세우노라. 즈믄 해가 여울로 흘러도
하늘의 비석은 이곳에 남게 하라.
길을 간다
황 금 찬
길을 간다.
시계의 초침
나는 길의 반향을 모른다.
누구에게 물어도
답은 하나뿐이다.
그 해답이
우리들에겐 없다고.
걸어갔고
갈 것이다.
나는 지금 가고 있다.
꽃잎이 바위에 지듯
달과 같이 걸어도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누구와 같이 가고 있는가.
강물과 같이 가고
바다와 같이 온다.
길은 말이 없고
길만 있었다.
꽃밭에서
최 은 하
휘돌아온 바람으로 예
비로소 자리 하여
하늘 가장 가차이
춤을 추는 몸짓으로
너는 꽃으로 피고
난 별빛으로 남아
네 향기 속에
내 이름 사르련다.
그 무슨 말을 더 하리
굳이 더해 무엇 하리.
우리 땅 한가운데
혼불의 새야.
숲으로 가리
최 은 하
숲으로 가리.
우리 사랑이 자리 잡았을 때
얼싸안고 숲으로 가리.
숲 속으로 걸어 걸어서
들어서서는 황혼을 맞으리.
돌아올 길을 잃으면 더 없이 좋으리.
숲으로 가리.
나의 사랑이 꽃인갑다 싶을 때
그 불씨 욱여 안고 숲으로 가리.
숲 속으로 들어가선 아침을 맞으리.
바다나 강이 보이는 숲에서 눈을 뜨리.
숲으로 가리.
우리네 사랑이 어두워지기 전에
눈 내리는 겨울 숲, 숲으로 가리.
숲 속으로 깊이 들어
교회당의 종소릴 들으리.
내 맨 처음과 마지막의 기도문을 떠올리리.
숲으로 가리.
오늘 하루가 다 가기 전에
까마귀 떼 우짖다 잠든 숲으로 가리.
숲 속으로 들어가서 나도 잠드리.
허구헌 꿈 속의 꿈으로 고이 잠드리.
숲으로 가리.
이 세상 태어나 배우고 익힌
사랑이란 말 허뜨려 버리기 전에
이제 어둡게 우거진 숲으로 가리.
숲 속에서 숲과 함께 바람을 맞아
사라지는 바람이 되리.
한 줄기 바람소리로 남으리.
望鄕歌ㆍ2
횡 송 문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기국 잘도 끓여 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 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冬至ㅅ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울음 꺼익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 가로 시집 오던 울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와서는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 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였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九萬里長天에 월매나 시장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먼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心情이 살아
母性의 피 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人情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紫雲英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밟아 볼라요!
보리를 밟으면서
황 송 문
보리를 밟으면서
언 뿌리를 생각한다.
아이들이 아비에게 대들 때처럼.
시린 가슴으로
아픔을 밟는 아픔으로
해동을 생각한다.
얼마나 교육을 시켜 주었느냐고,
얼마나 유산을 남겨 주었느냐고,
시퍼런 눈 들이대는 것은
나의 무능임을
나는 안다.
뿌리를 위하여
씨알이 썩는 것처럼,
사랑할 수록 무능해 지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아이들이 대어들 듯,
어릴 적 내가 대어들면
말을 못하시고
눈을 감으시던 아버지처럼,
나 또한 눈을 감은 채
보리를 밟는다.
잠든 어린 것 옆에
이불을 덮어 주며
눈을 감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온종일 보리를 밟는다.
마음에 섬
김 년 균
넓고 넓은 바다에 섬 하나가 떠오른다.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섬
그것이 하나는 눈으로 하나는 가슴으로
새끼를 쳐서
넓고 넓은 바다에 두 섬이 떠오른다.
눈은 또 눈으로 새끼를 치고
가슴은 또 까슴으로 새끼를 쳐서,
넓고 넓은 바다에
이윽고 많은 섬이 떠오른다.
이곳을 서성이는 낮선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 섬의 주인이 아니다.
그들은 이 섬의 손님도 아니다.
넓고 넓은 바다에 많은 섬들이
새끼를 쳐서
큰 섬이 되고
큰섬이 모여서 육지가 된다면,
그리움이여,
이제는 자라서 무엇이 되랴.
하늘까지 뻗치는 바람이 되랴.
장미를 보며
김 년 균
장미꽃을 샀다.
장희빈같은 여자를 샀다.
너를 보면 아름답다고 한다.
너를 보면 향기롭다고 한다.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너는 꽃 중의 꽃
벌거벗고 산맥도 타고 넘는
너는 불 같은 여자.
그러나 곁에서 살 비비며 살펴보면
손발마다 가시 돋혀 살기가 등등하고
교활하고 억센 마음 넝쿨처럼 솟구쳐
남의 집 담을 넘어 안방까지 활개친다.
밤낮없이 분바르고 향수로 몸을 씻던
이웃마을 소문난 아줌마가
너를 닮았다.
청주 가는 길
가 영 심
산이 들판을 놓아두고 달아나는
달아나며 내던져 둔 들판에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가다가 가다가
그리움 같은
몇 줄기 물과 만나 적시면서
홀로 가는 들꽃 같은 마음
어쩌리, 어쩌리.
나 또한 그렇게 가야 하는데
다 떠나고 빈 가슴으로
뒤 따라오면서
봄의 꿈 틔우고 있는 벌판
아, 사향(思鄕)의 눈물 묻어가며
가다가 다시 새롭게 만나는
그리운 고향이여.
인동기(忍冬記)
가 영 심
빈 저녁이
황량한 겨울에 갇혀 울고 있다
바람살로 쥐어뜯던 추위가
별들 심장 찌를 때마다
내 슬픈, 혼은
빈 손 벌린 십자가처럼
하늘 거울에 매달린 채
번쩍이는 시린 눈물 빛만
조각조각 찢어 날린다.
동면하는 긴 우주의 잠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기나긴 우리들의 침묵 속에서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들
시린 의식의 톱날 아래서
제빙공장에서 썰려나오는 얼음으로
마디마디 잘려나간다.
우리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뿐이라고 외쳐 대면서
마른 겨울 내내
빙판 가슴으로 얼어붙지만
흰 눈 덮인 산언덕처럼
번쩍번쩍 하얀 가슴 드러내 보이지만.
먼 길을 떠났습니다
김 하 영
먼 길을 말없이 떠났습니다.
하루 시작 길에 쓰러져
산소마스크를 쓰더니
그 것마저 벗어 내던지고
텅 빈 들녘에서
못다한 그 한마디 삭히고
긴 그림자 밟으며
마지막 문을 열어
홀연히 가 버렸습니다
끝내 그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푸른 꿈마저 풀어내지 못하고
어제, 오늘까지도
이승의 성 쌓기에만 바쁘더니
이제 시간의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회오리바람이 불어옵니다.
천만년의 바람 불어와
벅차게 꿈꾸는 이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고 일깨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바람이
불어왔다 되돌아갑니다.
바람의 그림자
김 하 영
그대는 파아란 바람입니다.
일상의 거리를 휘도는 구름입니다.
흩어져 내리는 꽃잎에
잠시 머물다가
머얼리 떠나는 손길입니다.
그대여, 그리움으로 굽은 등 너머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를 보셨나요.
한 무더기 안개꽃으로
저렇듯 피어오르는 숨결을 보셨나요.
이제 한숨 모아
허공에 자리 잡은 그림자 지워 버리고
다시금 한줄기 바람과 더불어
안개 속으로 훨훨 떠나요.
우거진 숲으로 찾아들어
꿈결에 별빛을 불러 모아요
그대여.
동지(冬至)
정 지 운
땅아
너의 닫혀지는 빗장을
나는 풀어줄 수가 없구나.
그래도 싱그러운 가슴에
상처를 내고
바람 피하기 급급했다.
용서하여라.
너는 상처로 하여
눈물바다 이루며
환한 웃음 잃었지.
성내는 일 없었지.
먼 날
너의 닫힌 빗장 열어주는 때
환한 웃음 꽃
함께 나누자꾸나.
그림자
정 지 운
까치소리가 눈발에 섞여 있었다.
새벽바람에 차이는 대로
푸석한 얼굴을 감싸 쥐고 일어선다.
매일매일 바라보던
꿈 조각이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뜻을 잃은 갈라진 소리로
목청을 돋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밤을 새운
서글픈 발톱을 세우고
비열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지는
뱃구레
낯익은 새끼까치 그림자가
눈밭에 섞여 시리다.
이명(耳鳴)
이 동 백
울어야 하네,
가슴 속 아득히 솟구쳐 흐르는
샘물 같은 그런 울음을
여보게, 울어야 하네.
울어야 하네,
봄날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꽃마냥 울컥 터져 오르는
그런 울음을
여보게, 울어야 하네.
들리는가, 저 까마득한 나락
퍼득이는 힘겨운 나래짓이
보이는가, 저 아슬한 심연
가득히 번져오는 파문이
여보게, 이제 그만 일어나게나.
빛바랜 껍데기일랑 벗어 던지고,
해맑은 눈빛으로
저 하늘 우러르게나.
우리네 한 줌 숨결
온전히 살아 숨쉬는
저 지평을 향해
자, 이제 떠나가게나.
촛 불
이 동 백
그대 눈동자
한 송이 장미로 피어오르고
아름다운 자탠 그대로 백합이어라.
방울방울 맺히는 그대 눈물로
내 아직 따순 피 흐르고,
그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 가슴 불타올라라.
그대 흘리는 눈물방울로
누리 밝아 오느니
내 그대 좇아
마지막 한 올 그리움 다 할 때까지
내 눈물 죄다 녹이오리다.
프리지아
정 민 욱
놀란 표정
감탄사에 묻어나는 향기
도드라진 꽃망울
봄의 음정을 닮아
바람은 건반를 두드려본다.
순간 터지는 꽃망울
향기로 퍼지는 봄 햇살들
빛이 모여 꽃이 피는
시간 속에
그 빛을 닮은 사람은
봄으로 가득하다.
이모티콘 (그림말)
정 민 욱
조각난 글자들이 흩어진다.
왁자지껄 자음들이 동요한다.
말보다 침묵으로 살피던 초성과 종성이
자음과 모음들에게 속삭인다.
순간 흩어졌다 모여든다.
자판위에
나란히 서 있던 글자들도
“헤쳐 모여” 구령에
순간 상형문자로 그림을 그리고
눈도장을 찍는다.
다시 조각난 글자들이 흩어진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인삼벤자민 구석 씨
유 회 숙
지난봄부터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 자꾸 손이 간다.
드러난 뿌리 위 어둠을 걷어내고
비틀어진 잎새 차츰차츰
나뭇가지 사이로 친근하다.
피돌기가 한창인
가지 끝엔 아이들 웃음소리
뿌리에서 정수리까지
뼈마디 환하게 열리고
까치발을 들고 바람이 지나간다.
오늘처럼 나무를 바라보는
한사람을 골똘히 생각한다.
잎잎이 푸른 물든 옥탑방
골목 안을 비춘다.
제 몸 깊숙이
마을길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몇 층 높이로 솟아오른 구석 씨
아침 해를 맞으며 막혔던 말문을 연다.
작은 새
유 회 숙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다
천상의 음계를 물어다
지상에 풀어놓아
새장 속에 갇힌 꿈을
때로는 귀 어둔 나를 위해
가까이 날아와 주는
종종종
귓속말 같은
無調音 같은
& & & & &*
8분 음표
봄의 높이로
연둣빛 햇살이 튄다.
* 작은 새로 낭송함
할머니의 묘비
정 희
충북 어느 산골마을
평생 팔순 넘게
독신으로 순결 지킨
고독해 할머니가 있었다.
가족이 아무도 없는 할머니
장의사에게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이렇게 새겨달라 유언했다
"처녀로 태어나 처녀로 살다 처녀로 죽다."
일 년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장의사는
비석장이에게 이 묘비를 부탁했다.
그러나. 비석장이
이묘비명이 쓸데없이 길다
생각하고 짧은 글로
이렇게 새겼다
...... "미개봉 반납."
깨진 항아리
정 희
유난히 눈이 시린 옥빛 오월
하늘 아래
깨진 항아리 속 햇빛 하나
집 짓고 누웠다
바람을 게워내던 항아리
구름 뒤척일 때 마다
하늘에 낯 씻고
깨진 밑둥치에 짓눌린 풀
햇빛에게도 손 흔드는
따순 정
난 그 옆에 누워
손 뻗어 뻗어
햇빛 한웅큼 쥔다.
제부도 ․ 2
송 선 애
불현듯 당신에게 갇히고 싶다
폭설에 갇힌 연인처럼
허공에서 하염없이 질주하던 은빛밀어마저도
수 천 년을 밀려왔다가 돌아가는 풍문마저도
만년설이 바다가 되는 일처럼
운명이라고, 운명이었다고…
잎 새
송 선 애
마지막 잎새가 말한다.
거미줄에 매달린 채
소슬바람에도
한 가닥 희망 놓치지 않으려
집념을 버리지 않는다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인연의 끈들이
마지막 춤을 춘다고.
몇 가닥의 미풍과
몇 번의 태풍을 맞으며
몇 줄기의 햇빛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던가.
이제는 거울 앞에서
세포(細布) 단장에
회한을 싣고 회항(回航)하는
마지막 잎새를 위하여.
하늘벌레의 잠언(蠶言)
박 기 동
스르르 감은 눈 속으로
봄이 왔다
세상은 온통 초록빛 이었다.
내가 네가 되는 느낌
남김없이 너에게로 돌려준다.
초록 잎이 하나의 빛으로
뭉텅뭉텅
지워지고 이어지는 연습
씨줄과 날줄을 풀어 칭칭
고치를 짓는다.
순백의 실을 토해
꽃빛 흐트러지지 않게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다.
내가 너에게로 이르는 길
몇 날 몇 잠이 지났을까
오래된 물레를 돌려
둘레둘레 매화 한 송이 피운다.
이 무렵 강가에는 물안개 자욱했다.
우수절기 내리는 눈
박 기 동
임이시어
봄의 길목에 번지는 번뇌
천천히 받아들인 호흡의 발아(發芽)처럼
물안개 퍼올리고
어디론가 놓쳐버린 시선
잠시 비틀거리다,
선문(禪門)을 여는, 임이시어
푸르름 속으로
김 아 랑
내 영혼의 연주는 오직 한 곡
수많은 음표도 오직 한 곡
그대를 위하여
그대 하나만을 위하여
아름다웠다는 인생은
목메인 그리움이었어라.
내 영혼의 노래는
오직 한 곡
봄날을 보듬어 안고
푸르게 노래하던 곡
그대를 위하여
그대 하나만을 위하여
아름다웠다는 인생은
맨발이었어라.
품팔이꾼
김 아 랑
앞 뒤창에 지저귀던 새들
뒷걸음질쳐 어디로 갔나.
흙을 빚어 구운 팔 다리
삭신은 쑤시는데
방바닥 온기 꺼져가네
첫닭 울 시간 멀리 남겨두고
헝클려 꺼질 듯한 촛불
손 닳은 아침 올 때까지
이웃에 해가 바뀐 것도
고단한 길이었네.
고향을 떠나온 뒤로
잔기침이 가슴팍을 파먹네.
애잔히 여위어간 달밤
떨지 않는 것은 회오리바람 뿐
민들레
이 병 훈
가을 길목에서
야윈 목 길게 뽑고
먼 하늘 올려다본다.
뿔뿔이 떠난 그리움이
구름으로 흩어지고
한 줄기 바람 따라
보따리 달랑 둘러메고
산 넘고 강 건너
객지에 뿌리내리다 보니
아득히 멀어져가는 고향
세속의 꽃향기에
무겁게 얽힌 내 발걸음
늘, 마음으로 달려가고
부푼 가슴으로
고향집 나서던 날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고갯마루 넘을 때까지
문설주에 기대어
발돋움하시던 어머니
채석강
이 병 훈
바다가 시를 낭송한다.
갈매기도 그리움에 끼룩대는 격포항
수만 권 시집을 켜켜이 쌓아둔 해변
지칠 줄 모르고 달려왔던 하루해가
수평선 아래로 벌겋게 익은 몸을 풀면
떠나기 싫은 발걸음소리만 남겨두고
잠잠해지는 부둣가
사랑하는 발걸음을 정답게 앉혀놓고
귀엣말 같은 속삭임으로
연정(戀情)의 시를 읊어준다
수천 년 소금물에 절여
산처럼 쌓아놓은 책 속의
가장 곱게 간이 밴 문장을 뽑아
밤이 새도록 읽어준다
이별한 발걸음도
되돌아오게 하는
채석강의 저녁 파도소리로……
아버지의 손목시계
정 명 숙
햇살 내리는 요양원
아버지는 창가에 기대어
손목시계를 보고 또 보다가
문밖소리에 귀 기울이고
흘러내린 허리띠 매 잡으며
마른 헛기침을 삼키시겠지.
오늘도 바깥으로 나서려
손목시계 어루만지다
헐거운 신발 끈 묶고
쓰러지는 지팡이를 세우시겠지.
물 한 사발에 입술 적시며
눈가 맺힌 눈물 닦아 내느라
야윈 손마디는 떨리고 있겠지.
바람 부는 날이면
아버지 음성 들려오는 듯하여
나는 아직도 꿈속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는 내 꿈결에 오셔서
고향집 싸리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겠지.
봄이 오는 언덕
정 명 숙
봄이 오는 언덕 길
아직 시린 손짓으로
누구를 부르는가.
가지 끝에 남은 바람은
매서운 함성으로 가득하다.
샛바람 불어올 날 기다리며
새순들의 환호성인지.
서리꽃 나르던 바람도
먼 길섶에서 뒤척이다가
이제 풀 내음으로 일렁이어 온다.
봄 이야기는 눈앞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뜨개질
이 원 희
오늘도
한 오라기
햇살로 뜨개질을 한다.
하루를 엮어
무늬를 만든다.
어디서부터인지
무늬는 어긋나고
지나온 세월을 풀러
바로잡을 수 있다면
바람과 햇빛 속에서 빛나는
볼레로1)로 상쾌히 살갗에
닿을 수 있으련만
별들은 조팝꽃처럼
이 원 희
푸른 저녁 빛이 문밖을 나서면
조팝꽃으로 하나 둘 피어오르는 별들
그 누구의 눈빛 닿지 않아 이름 갖지 못한 별 하나
아득히 멀리 있어 밝기는 일등성만 못해도
하늘이 캄캄한 사람의 눈빛에 위로처럼 반짝여요.
햇빛이 눈부시게 할 때 밤하늘을 잊어도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거리로 맴돌아
그 누구에게 이름 지어지는 날을 위해
꽃잎 열어 향기롭게 반짝여요.
그대여
하늘을 올려다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