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만 - 청정한 마음의 세계 박정기(미술평론)
1999, 김영만의 7회 개인전 팜플릿
김영만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다 41세 때인 지난 90년에 전업화가로 진로를 바꾼 드문 경력의 화가다. 그러나 그는 이미 29세 때인 76년에 당시 국전에 출품하였고, 목우회전, 한국미협전에 출품하다 34세에 첫번째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마음의 고향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고향인 화순의 시골마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광주의 무등산, 목포의 선창가 등 주로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과 자연에 대한 소박하지만 남달리 짙고 진실한 애정을 신선하고 명료한 색채로 표현해온 작가이다.
90년 개인전 이후 김영만은 유화보다는 주로 목판화에 몰두하여 94년에는 그때까지 불교책자와 잡지, 신문 등에 발표했던 목판화들을 모은 불교목판화집 <고향가는 길>을 출판하고 이어 서울과 광주에서 불교목판화전을 갖는다. ...이 무렵부터 청화스님 등을 만나 불교의 세계에 침잠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의 세계를 소재로 한 목판화에 작업을 집중하게 된다.
<고향가는 길>에 실린 그의 목판화들은 단순히 스님이라든가 절간, 돌부처, 석탑, 목탁 같은 불교적인 모티브에 의해 불교의 세계만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광주민중항쟁, 동학혁명의 전봉준, 조국통일의 염원 등도 중요한 소재, 또는 모티브가 되어있다. 이점은 그가 판화가로서 서울판화미술제에 참가하는 등 판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환예총(민족 환경생태보존 예술인총연합회)을 공동으로 창립하여 고속전철의 경주통과 반대운동을 벌이고, 또 광미공의 5.18기념거리미술전과 DMZ전, 생명의근원전 등에 참가한 사실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가 95년 경부터 황토를 사용하는 천연염색의 특수기술 개발에 몰두하게 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힘든 목판화작업으로 나빠진 건강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이 염색작업의 성과를 토대로, 96년 화순 운주대축제에서 설치작품전을 가졌다. 이 작품전은 화순장터에서 운주사의 와불에 이르기까지 4km에 걸쳐 불교목판화를 찍은 천, 1천여 점을 2m 간격으로 내걸어 휘날리게 한 것이었다.
90년대 마지막 해인 올해 99년 전시회를 통해 김영만은 새롭게 진전되고 변화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청정한 마음의 세계"로 이름 붙여진 이번 전시에서는 우선 그가 지금까지 주로 제작해 온 목판화를 찾아볼 수 없고, 수채화 만이 출품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이들 작품들 모두에는 투박하고 강한 검은 색이 사용되어 있고, 또 검은 색의 형상들이 마치 수묵화처럼 먹물이 번진 그림들로, 전체적으로 어둡고 외로운 느낌으로 물들이고 있다.
김영만의 불교목판화에 친숙한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세계의 이러한 변화가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향과 자연에 대한 정감이나 정서가 지금까지 내면적, 정신적으로 심화되어 왔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고 또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세계는 궁극적으로 "청정한 마음'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김영만
1949 전남 화순생 조선대 대학원
개인전 7회, 한국파스텔작가회창립전, 한국불교미술인협회창립전, 한국구상미술단체연합전, 광주통일미술제, 민족미술전, 생명의근원전, 서울판화미술제, 바람머물다핀드꽃전, 한국목판화어제와오늘전.....
epilogue
순산과 다산의 묘미를 적당히 갖춘 작가라면 김영만 선배를 꼽겠다. 나는 가수가 아무리 잘 부른다 하여도 쥐어짜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왕년에 양희은이거나 송창식이 좋았던 것도 후에 보니 그 순조로운 발성에서 받은 매력이 었던 성싶다. 목이 무거워 고음이 고약한 내 목청이 어찌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심수봉이 간드러지는 것도 나는 몰래 좋았다. 또 하나. 노래를 타고난 음색으로 부르는 친구를 즐겼다. '하숙생'의 최희준이 어떻던가! 요새로 치면 JK김동욱? 김영만 선배는 글, 판화, 그림들이 각각 타고난 음색은 아니라 하여도 수월하게(당신은 정반대이겠지만..) 뽑아내는 담박한 맛을 이를 땐 참 편하고 톱톱하다. 불교풍의 시와 판화를 결합하여 책을 낸 바 있으며 화순고인돌축제의 미술이벤트에 닿도록 또한 다면적이다. 나와는 인연이 그리 길지 못하여 아쉽게도 광미공 해체와 함께 멀어졌지만 아직도 화순 곳곳에서 ‘고인돌 판화’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고향사랑과 마당발의 저력도 지녔다. 공무원을 마다한 예술가이어니 얼마나 바쁘고 당연한가! 살면서 표현하고 낫낫한 표정으로 나누고 그래도 힘이 남으면 크고 야문 그림도 생애에 몇 남기면 되지 않겠는가! 2008. 4.1김진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