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초정 박제가 등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엽까지 활동했던 당대의 실학자들을 이용후생학파의 학자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약 한세대정도 뒤늦은 다산학은 성호학파의 학문에 이용후생의 학문이론까지를 종합해서 이룩한 학문이어서 실학을 집대성한 학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양에서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3천리나 되고 사신(使臣)의 오고감이 길 위에 끊임없이 연이어져 있었건만, 아직까지 이용후생의 물품들을 단 하나라도 얻어 돌아와 전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하여 사람들이 백성에게 해택을 끼쳐주려는 뜻이 그처럼 없었을까.”
(燕之距漢陽 三千餘里 而冠蓋之往 復徠去者 繹繹乎織於路矣 而所以利用厚生之物 曾未有得其一 而歸傳之者 何人之㧾 然無澤物之志 若是其極哉)(送李參判基讓使燕京序) 라고 하여 이용후생의 물품을 가져오지 못하는 사신들을 질타한 내용을 보면 다산의 입장을 이해하기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그 옛날 문익점(文益漸)은 목화씨를 얻어 돌아와 심게 하였고, 아울러 씨아와 실 뽑는 기구를 만드는 법까지 알아 와서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실 뽑는 기구를 문래(文來:문익점이 가져온)라고 하여 그 공로를 잊지 않고 있으니 그야말로 위대한 일이 아니리오.” 라며 이용후생의 가장 확실한 예를 들기까지 했습니다.
‘이용후생’이란 본디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실용의 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후하게 한다는 의미로써,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탐관오리들이 인민을 착취하는 행위가 극에 달하던 조선왕조 후기에 자주 거론되던 담론의 하나이자 학파의 이름으로까지 일컬어지던 용어였습니다. 이기양(李基讓)은 다산의 대선배로 학문이 높던 분인데, 연경으로 사신 갈 때에 다산이 송별사로 이용후생으로 백성 사랑의 뜻을 펼치라고 바친 글이 위의 인용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을까만을 연구하던 다산의 깊은 뜻이 담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