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는 무훈담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 용맹이 후대에까지 전설적으로 회자되어 왔다. 역대 잉글랜드 국왕 가운데 그처럼 숫자가 아니라 별칭, 즉 사자왕 또는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로 후대에까지 널리 일컬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으면서도 백성들로부터는 신앙심 깊은 왕으로 평가 받으며(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 때문이었지만), 후대에까지 잉글랜드의 상징적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하겠다. 그 아이러니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근대 유럽 여러 나라가 제국주의 확장을 추진하던 시기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군주, 귀족들을 전설적 영웅으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은 리처드 1세, 독일은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등이다.
사자왕의 마지막은 허무했다. 1199년 3월 리처드는 리모주에서 리모주 자작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3월 25일 초저녁 리처드는 갑옷을 입지 않고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상처가 심하게 곪아 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리처드의 머리는 쁘아뚜의 샤루 수도원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에, 그리고 나머지 유해는 앙주의 퐁테브로 수도원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