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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채아재비
이름을 검색하니 쇠채아재비란다
꽃보다도, 한껏 부푼 씨앗봉이
충일한 솜사탕처럼 나를 유혹한다
징을 치는 채 같아서 쇠채라고 했을까
꽃말이 너무 좋다 ‘영원한 행복’
그 속에 위리안치 된들 어떠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모이 뜯어보는데
아, 둥글게 박힌 홀씨 하나하나가
삼지창보다 가다리가 많고 끝이 예리한 작살 모양
달콤하고 포근할 줄 알았던 솜사탕 속이
웬 작살들이란 말이냐, 안 봐도 될걸
내 너무 자세히 봐 버렸구나
잘 못 건드린 작살들 급기야 일어서고
한참을 쪼그렸던 내 관절들 풀리질 않는다
대충 보고 예쁘면 됐지
뚫어져라 널 들여다 봤구나
작살 뭉치 겨우겨우 헤쳐 나온
내 목구멍엔 까끄라기 걸린 듯한데
그 까끄라기, 제겐 유일한 믿음이라고
지음이 되지 못한 나를 흘겨보며
홀씨 하나 뱅그르르 징을 찾아 날아간다
한탄강
남으로 간다
용암 발부리 무서운 줄 모르고
낮은 포복, 골짜기를 깎으며
재게재게 남으로 간다
나무 가시에 찔리고 암석에 넘어져
손발바닥 다 닳아도 초록 벌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간다
골짝에서 흘러드는 개울물 데리고
안돌이 지돌이 협곡들을 지나
주상절리 유로가 없다고 한들
남으로 향하는 발길 어찌 막으랴
까마득한 벼랑도 보짱 있게 뛰어내리고
철조망에 긁혀 핏물이 나도
엄마 같은 큰 강의 핏줄 당김을
몸이 먼저 알아채고 흐르나니
남으로 남으로 우리는 간다
새들도 구름도 누치들도
흐름 따라 모두 남으로 오는데
그 사람은 언제쯤 남으로 오나
사회적 거리
-코19
유행가처럼 흘러가겠지
길어봤자 양양 터널만 하겠어?
하지만 이번 것은 끝이 안 보이네
곧 가겠거니 하고 난 널 신경 쓰지 않았어.
한데, 두 돌이 다 되건만 끝이 안 보여
손주들 영상으로만 보고
친구들도 카톡으로만 보지
비대면이 더 긴 대면이 될 거란
아이러니한 진리.
우얬든 후회나 없게
빠듯이 말고 넉넉잡아 딱 한 달만
육해공 완전봉쇄나 해볼 걸 그랬나?
그러면 사람들은 또
이래저래 죽겠다고, 못 참는다고
자기 진리로 다른 진리를 막 잡아먹겠지
창이 방패가 되고 방패가 창이 되겠지
이제껏 외롭다 했던 건 사치였어
이제야말로 진짜 외로움, 전봇대가 스승이야
일기장에서
-2016년 4월 16일
이슬과 바람이 청소했을
소공원 꽃밭 길이 깔끔하다
암탉 품속 같은 정오께
햇볕이 데워 놓은 따끈한 벤치에 앉아
으슬으슬한 내 한 몸을 맡겨본다
해 가려지면 조금은 쌀쌀하고
해 나오면 다시
내 시야는 병아리 눈꺼풀 감기듯 좁아진다
새 몇 마리 건물 위로 나는 소리에
나무의 가지들이 보이고
방금 이발한 것 같은
향나무들도 이제야 눈에 뜨인다
안개처럼 희끄무레했던 라일락
저만치 나무들 사이사이로 선명히 보인다
청사 앞 깃발들이, 이 년 전 오늘
이런 봄날 흐릿한 눈동자로 있지 말자고
시야를 멀리해 걸어보자고
높은 곳을 가리키며 펄럭거린다
아이야 나의 아이야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야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이 현실의 구조를 어찌 바꾼단 말이냐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도 옛말
보다시피 이젠 개천에서 지렁이밖에 더 나더냐
힘센 냇물 정도라야 용의 흉내라도 낼
인물이 나오는 세상 아니더냐
예쁘지만 슬픈 눈을 가진 아이야
이 세상의 구조를 타박만 하지 말아라
어떻게 해보지 못하는 이 아비도 자신이 싫다
더럽고 냄새나지만, 그 돈을 버느라 뛴다
그 돈이 거름이 되어 네가 커가고 있지 않으냐
돈은 거름이니 무조건 타박만 하지 말아라
푸른 꿈을 가진 나의 아이야
저 깨끗하고 조약돌 덮인 모래밭엔
가냘픈 풀 몇 포기밖에 더 나더냐
그걸로 오두막 기둥이라도 세우겠느냐
어떤 길이라도 우선 바른길로만 가다가
네가 큰 배를 짓고 선장이 되었을 때
네 세상의 틀을 만들어 보거라
그때까지 깨끗한 네 기도를
명치 끝 저 밑으로 잘 건사해 두고
후일 혹여 그 소망, 아비처럼 잊지는 말고
찬찬히 찬찬히 바르게 걸어가 보아라
삼등공인중개사
깃발이 부동인데 칼춤 추며 전진하네
후진을 몰라 후진 생각 쬐끔도 없고
급발진도 가끔 하는 돈독 오른 괴물
잠시 애물단지라도 있으면 좋아
상승이나 직진에는 부동의 1위
이름이 부동이라면 꼼짝 말고
차렷! 열중쉬어 차 리 엿!
다 강남 같은 데서나 나온 얘기고
여긴 덕천읍내 꼬불탕 골목 삼등공인중개사
......만에 월세 한 件 썼다
......없어 참았던 담배 한 갑 낼름 사고
......독촉장, 끊겠다는 전기요금 냈다
......또 누군가 뜬금없이 와서
한 件 하겠지.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히어리
달빛에도 녹을 밀랍 같은
여리고 여린 꽃이여
봄의 노래 원곡자이면서
고개 숙여 다른 꽃노래를 경청하네
봄 찾아 여기저기 들쑤시던 사람들이
앵콜을 부탁하면 어리어리 히어리
꽃송아리 요령처럼 흔들며
지금은 다른 꽃 노랠 듣자 하네
훗날 눈보라 渡河 숲속
갈길 몰라 서성일 때
어리어리 히어리
그때 제 노래 들려주겠다 하네
어리 같은 꽃 속에
병아리 품듯 그대들 품을 테니
범종 소리 울리는 엄마 품속
거기 같이 가보자 하네
이모작
먼 여행이 아니다 그래도
첫차를 타야 한다 시내버스.
고추바람에 눈 날리는 어둑새벽 첫 출근
마음은 졸여도 첫차는 널널하겠지
나 같은 사람 정류장에 한 둘 서성이고
창박골에서 오는 첫차가 떴다고 모니터가
똘똘하게도 5분 전, 3분 전, 곧 도착
차 문이 열리고 나는 놀라고
승객 만땅 거무칙칙한 옷차림들
흑임자떡에 잣처럼 여자 한 둘 박혀 있고
영락없는 중고등 시절의 콩나물시루 통학버스.
모자가 벗겨져도 비집고 들어가야 해
-나 같은 늙은이들 이렇게 출근해서
아파트의 새벽을 열었었구나-
앉았건 섰건 다 늙으니 자리 양보란 없다
중간쯤 앉아 가면 재수 좋은 것
예순다섯 넘으면 잘 안 써 주는 경비원.
콩나물시루 경쟁을 뚫고 용케 틀어박힌
이모작 나의 새벽이 배시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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