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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권대진(權大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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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기간 | 1869. 3. 7 ~ 1918. 7.19 |
| 출생지 | 경북 영일 죽장 입암리 |
| 운동계열 | 의병 |
| 사망지 | |
| 훈격(연도) | 건국훈장 애국장 (90) |
| 공적내용 |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가자 민족적 위기의식을 느낀 박한종은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때 황제의 측근에서 시종관으로 종사하고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황제의 밀명을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고향 영천(永川)으로 보내어 거사를 준비케 하고 자신은 뒤에서 후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과 더불어 의진을 구성한 것이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본래 산남의진은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남 지방의 크고 작은 그리고 멀고 가까운 모든 고을을 망라한 포괄적인 의진을 기획하였다. 그리하여 박한종(朴漢宗)은 영산(靈山)과 밀양(密陽) 지역의 의병을 소모하여 의진을 구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죽장의 권대진(權大震)과 더불어 영산과 밀양 일대에서 포수 및 민병을 소모하여 정용기의 휘하로 달려가 산남의진 의병운동에 적극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킬 때, 박한종과 함께 영산(靈山)·밀양(密陽)·청도(淸道) 등지에서 의병소모와 군수품 조달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으나 신병으로 인해 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뒤 1907년 10월 죽장(竹長)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이 모두 전사, 순국하고 의진이 해산될 때 정환직(鄭煥直)이 잔여의병을 수습, 산남의진이 재기하게 된다. 그러나 정환직 의병장도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다가 정환직이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1907년 음력 11월 16일 영천(永泉) 朝陽閣아래 금호강변에서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게 되자, 권대진은 1908년 1월에 최세한(崔世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그 참모장(參謀將)이 되어 5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흥해(興海)·청하(淸河)·청송 등지에서 일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의성(義城)전투에서 패하여 의병장 최세한 역시 일군에게 피체되었다. 이에 권대진은 후일 재기를 기약하고 해진(解陣) 하여 이후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山南倡義誌(下) 56·57面 ·山南義陣遺史 258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2面 |
첫댓글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문중역사보록 31세 인물 자료에도 비고난에 링크시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형재분중의 두번째 할아버지입니다 첫번째 할아버자는 종손 영진형님의 할아버지시고 저의할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입니다 (3 형제분) 미국에서 둘째 할아버지의 의병활동 사료를 보고 가슴이 뿌듯합니다
권태준 (구민4댁)
대자 원자 할배가 둘째할배이고 태준이 할배이며 세째할배가 대자 영자할배가
종가에 양자가셨다
두분 형님 반갑습니다 부산 동생 권태수(구민3 석정댁)입니다 대자 진자 대진 조부님 손자 입니다 태준 형님은 4촌형되고
종손 영진 형님은 6촌 형님 되네요^^아무쪼록 입일리 산 25번지가 독립운동현장으로 지정되어 권 송(조부님 호)거리가 조성 되엇으면 좋겠습니다
입암리로 바로 잡습니다^^
귀한자료 잘보았습니다.
독립운동하느라고 애쓰셨는대
결과가 좋지않아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