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가 좋아야 울륭한 인물 난다
경상남도 밀양은 예로부터 경상북도 안동과 더불어 영남의 유향(儒鄕)으로 이름 높은 고장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명현인 춘정 변계량(1369~1430),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송운대사 유정(사명대사, 1544~1610)을 비롯하여 수많은 큰 인물을 배출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다. 산수(山水)가 좋아야 인물 난다는 뜻으로, 밀양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밀양의 북쪽에는 화악산․구만산․억산․가지산, 동쪽에는 재약산․향로봉, 서쪽에는 열왕산․영취산․덕암산 등이 늘비하여 삼면은 험준한 산악지대다. 반면에 시내의 가운데로는 북에서 남으로 밀양강이 관통하다가 창원 및 김해와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니, 이 유역은 기름진 평야지대다.
이처럼 산과 물이 더불어 좋은 밀양은 많은 경승지와 유적지를 품었다. 밀양 시내의 영남루․아랑각․무봉사석조여래좌상․백운사범종, 삼랑진의 만어사3층석탑․숭진리3층석탑․작원관터, 단장면 재약산 기슭의 표충사, 산내면의 얼음골과 호박소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밀양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일 새가 없지만 구만산을 아는 외지인은 별로 없는 듯하다.
집채만 한 바위 사이의 투명한 탕들
구만산은 임진왜란 때 9만 명의 사람들이 피신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실제로 9만이나 되는 사람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 산속에 숨을 수야 없었겠지만 많은 주민들이 피신한 것은 사실이리라. 구만산은 해발 785미터에 불과하지만 산세가 아기자기하며 남쪽 기슭에 이색 지대인 약물탕과 통수골을 거느리고 있다. 구만산 자락의 여러 지류가 모여 북에서 남으로 굽이치는 구만계곡, 일명 통수골이 빚은 오묘한 신비경이 개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작은 암자인 구만암 앞에서 10분 남짓 산길을 오르면 계곡의 가풀막을 꽉 메운 바위 지대가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크게는 집채만 한 것에서 작게는 봇짐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제멋대로 생긴 바위들이 위태롭게 서로서로 지탱하며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담한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가운데 바위들 사이사이에는 작은 탕들이 여기저기 드리운 채 투명하도록 맑은 물을 담고 있다.
불현듯 탕 속에 들어가 목욕하고 싶어진다. 실제로 산내면 주민들은 종종 이곳을 찾아 피로를 푼다고 한다. 어떤 성분이 물에 스며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몸을 담그면 신경통이나 피부병이 낫는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래서 약물탕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이다.
한여름에도 구만약물탕의 물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탕에 몸이나 발을 담근 뒤에 바위 위에서 등걸잠을 즐기면 삼복더위쯤은 저 멀리 물러날 것이다. 더욱이 첩첩이 포개진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 ‘배 먹고 이 닦기’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인 듯싶다.웅장한 물기둥 아래로 짙푸른 못이 입을 벌리고
예전에는 여기까지였다. 전문 등산객이 아닌 일반인들은 약물탕에서 쉬다가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약물탕 위로 위태롭게 걸린 밧줄을 잡고 조심스레 암벽을 기어올라야 등산로가 이어졌기에 어지간해서는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튼튼한 층계가 드리워 누구나 손쉽게 상류로 오를 수 있다. 약물탕 옆으로 이어지는 층층대를 오르다 보면 암벽을 타고 흐르는 실폭포가 반기는가 하면, 절구통인 양 푹 파인 탕이 어서 들어오시라고 유혹한다.
이제 통수골을 따라 오른다. 맑고 시원한 계류가 땀을 씻어준다. 동서로 수직을 이룬 암벽들이 늘어선 가운데 남북으로 길고 깊은 통속처럼 골짜기가 뚫려 있어 통수골이란다. 또는 통장수가 메고 가던 대나무통이 암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에 따라 통수골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날이 흐리고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면 두고 온 가족들을 애타게 부르는 통장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데…….
약물탕에서 쉬엄쉬엄 약 1시간, 너덜경지대의 돌탑을 지나면 구만폭포가 코앞이라는 신호. 통수골 으뜸의 절경인 구만폭포는 좌우로 험상궂은 암벽이 솟구친 가운데 40여 미터 아래로 곧바로 쏟아져 내리는 웅장한 물기둥이다. 수직 낙하하는 거센 물줄기 아래로는 지름 15미터에 이르는 깊고 짙푸른 못이 입을 벌리고 있다. 먼 옛날 선녀가 내려와 퉁소를 불었다는 전설에 따라 퉁소폭포라고도 불린단다. 한여름이면 알탕의 명소로도 사랑받는 폭포지만 물이 불었을 때는 위험하다. 여기서 암벽에 걸린 밧줄을 타야 하는 가파르고 까다로운 산길을 1시간쯤 더듬으면 구만산 정상에 오르지만 사방이 숲에 가려 있으므로 조망은 기대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