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우(류승범)가 자전거를 타고 경민(이미숙)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남자는 자전거라곤 한 대밖에 없으니 빨리 타라고 약 올리듯 재촉하고, 여자는 안 타겠다고 버티다 못 이긴 척 오른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이렇게 생각보다 쉽고, 또 생각보다 어렵다. 그것이 환영받지 못한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표민수 PD -노희경 작가 콤비의 남녀들은 늘 당황스러운 사랑을 불사해 왔다. 또다시 찾아온 바보 같은, 거짓말 같은 사랑 이야기 <고독>. 그렇지만 <고독>은 애초 세간에 알려진 40대 여자와 20대 남자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표PD가 보는 <고독>은 “압구정동의 화려한 밤, 잘 차려 입은 여자가 어느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허망한, 속이 텅 빈 고목 같은 여자의 사랑과 죽음”에 가깝고 노작가의 <고독>은 “평범한 남녀가 세상의 온갖 편견과 죽음에 맞서 꿋꿋하게 지켜가는 행복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다. 류승범은 이 드라마를 “세상에 없을 법한 아름다운 청년이 사랑을 지켜가는 법”이라 했고, 이미숙은 “겉은 강하지만 안은 상처투성이인 한 여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고독>은 하나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파장은 넓다. 하지만 네 명의 단상은 다시 삶이 흘러가는 모습으로 포개지며 하나가 된다. 이것이 <고독>의 매력이자 힘이다. 이미숙이 말했듯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파고 들어 혼란스럽고, 그러면서 한 발 더 다가서는” 경민과 영우의 대사들처럼.
사랑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한 편 한 편 두터운 마니아 집단을 만들어냈던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아직은 사랑할 시간> <슬픈 유혹>에 이어 다섯 번째 만나는 '전설적인' 콤비 표민수 PD와 노희경 작가. 이들도 <고독>의 시작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한다. 늘 그래 왔듯 수많은 만남과 전화 통화 중에 혹은 하룻밤 긴 이야기 와중에서 나온 작은 모티브였을 테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표PD는 “두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최초의 <고독>을 기억해냈다. 인간은 뭘까 사랑은 뭘까, 평생 해도 모자라는 얘기를 나누다가 나이 든 여자와 젊은 여자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불리고 싶은 여자와 그 반대인 여자. 전자는 경민이고 후자는 영우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지내다 지금은 그를 사랑하는 진영(서원)이다. 다른 삶을 살던 이들 중 한 여자가 죽음이라는 대사건을 맞게 된다. 이들 사이에 영우라는 한 남자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영우는 주위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는 청년이지만 저돌적으로 금지된 사랑을 쟁취하거나 여주인공을 죽음에서 구해주는 투사는 아니다. “지금 저 사람이 너무 힘들어하니까 내가 물만 건네 주고 올게” 하는 심정으로 경민에게 다가선다. 처음 영우를 아이 같은 남자로 설정한 류승범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듯 그를 치기 어린 철부지로 보면 곤란하다. 그는 인간에 대한 애처로움과 아련함을 가진 청년이다. 경민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상처와 고독을 감싸 안아주는 과정에서 영우는 고독을 배운다.
반면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는 여자 경민은 강인하고 의연한 여자다. 그녀는 혼자 딸을 키우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러나 값비싼 고층 빌딩 통유리벽 안에서 메말라버린 사람이다. 사랑 말고도 할 일이 많아서 사랑은 사치로 알고 살아왔다. 죽는다는 걸 별로 두려워 해본 적은 없지만 넋 놓고 울기보다는 왜 하필 지금인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먼저 든다. 딸 정아도 아직 어리고, 무엇보다 영우에게 받은 사랑을 하나도 돌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게 여한이 없다. 그 의연함은 영우에겐 차가움으로 비쳐진다. 아무튼 그녀는 많은 시간을 진통한 끝에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의 사랑을 납득시켜야 하는 힘든 지점에 서게 된다.
“누가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누가 그 여자가 이제껏 살아온 삶과 앞으로 겪어야 할 죽음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까요?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췄어요.” 표PD와 노작가는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한결 같이 바라는 안정되고 합리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세대의 모순되고 모자라는 사랑에 힘을 실어줘 왔다. “사랑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공평하다”고 믿는 이들은 이번에도 “<고독>이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죽음, 응시해야 하는 것
제작진들의 진심어린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독>은 고독하다. 영우와 경민의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랑을 환영하지 않았듯, 지금까지는 시청자들도 이들의 사랑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단순히 시청률 문제가 아니다. 한때 <바보 같은 사랑>이 화면조정시간 시청률보다 더 낮은 1%대를 기록했던 ‘기록적인 날’, 서로를 격려했던 표PD와 노작가에게 8%대를 기록한 <고독>의 시청률은 차라리 행운에 가깝다. 그러나 범인들에게 영우와 경민의 사랑은 아무래도 낯설다. <거짓말>의 준희(이성재)와 성우(배종옥), <바보 같은 사랑>의 옥희(배종옥)와 상우(이재룡)의 사랑은 동의는 없으나 이해받을 수 있었던 사이라면, <고독>의 영우와 경민은 인정받기조차 힘든 관계다. “영우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경민은 이상한 여자가 돼 버려요. 그래서 더욱 영우가 경민이 충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어야 해요”라던 류승범의 말처럼 이런 우려들을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표PD는 “나이로 사랑을 재단하는 것은 ‘너처럼 없는 놈이 무슨 사랑이냐’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아요. 그런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맞서는 것이 <고독>을 만드는 이유”라고 말한다.
또 하나 <고독>을 옥죄는 것은 시청자들의 ‘죽음 콤플렉스’다. 시청자들은 경민이 전이성 난소암으로 죽음을 선고받는 설정을 힘든 사랑 대강 마무리하는 그저 그런 봉합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표PD와 노작가에게 경민의 죽음은 대단한 반전인양 숨길 것도 아니고 피해갈 것도 아니다. 경민의 죽음이 너무 이르다 싶게 아예 극의 초반에 다 드러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들은 “죽음을 앞둔 경민이 어떻게 생을 정리하고 그간의 오해를 풀려고 하며, 하다 만 사랑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를 말하고 싶다”고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표PD와 노작가 모두에게 죽음은 성장하는 계기다. 특히 노작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사무친다. “어머니를 암으로 떠나 보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쓸 때 매일 매일 울면서 썼어요. 그리고 한 달을 앓았어요. 죽음 이야기 쉽게 한다고들 하는데, 절대 쉽지 않아요. 보는 사람이 괴로운데 쓰는 사람이라고 편하겠어요? 하지만 이들을 한 번 끝까지 보내볼 생각이에요.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 한 번쯤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요.” 요즘 노작가는 시청자들의 반응과 주변의 반응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단다.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탓”이라고 했다. 대신 암투병 중인 환자와 그 가족들이 가장 많이 신경 쓰인다. 이들이 “우리도 저런 얘기 빨리 나눠야지 생각했으면 좋겠고 죽음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라는 희망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정적인 긴장감이 흐르는 표PD의 빼어난 영상미와 노작가의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사람 마음 한쪽을 꽉 움켜쥐는 <고독>은, 인생이란 서로에게 수혈(輸血)해 주는 사랑이 있어 소중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노정은 험난하다. 그래서 <고독>은 터무니없는 사랑에 대한 안전한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를 포착한 위태로운 드라마가 된다. 그것이 얼마나 절실하고도 매력적인지를 알고 있기에 오늘도 표-노 콤비는 장면을 만들고 있고, 서서히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향해 수줍지만 당차게 손을 내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