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무잎 사이로 삵괭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 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않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산이 하나의 예술품이라면 이 땅에 설악산 만한 걸작은 달리 없다. 이러한 전제가 금강산은 도무지 못 마땅할 것이다. 설악은 여전히 이 땅의 사람이 비로소 자유롭게 자연에 귀의 할 수있는 절승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빼어나다. 설악의 정상인 대청봉에 올라 그곳서 지척인 향로봉과 금강산을 바라다보고 동으로는 발 아래 창파에 휘몰리는 동해가 펼쳐지는 장관을 보라. 그리고 서쪽과 남쪽으로 펼쳐지는 기치창검의 산세를 보노라면 제 아무리 강인하고 오만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작아지는 미적 카타르시스를 맛 볼 것이다. 그 대청봉의 정상에 서서 산은 크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작다" 는 어휘를 문득 떠올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설악의 아룸다움을 제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예술가가 된다. 그 과장과 허세조차도 대청봉이나 설악산의 여느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조망 앞에서는 전혀 과장이 되지 못할 뿐 그것조차 부족이 되고 만다. 설악산의 특징은 금강산이 그러하듯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오묘하고 다양한 산세에 있다. 산굽이를 돌거나 능선에 올라 설 때마다 선보이는 기암괴석의 정교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설악 산행의 백미다. 그만큼 다양한 산세를 지녔기에 게곡에는 수십길의 폭포와 웅덩이가 줄을 잇는다. 따라서 능선에서는 설악의 수석미를, 계곡에서는 폭포와 웅덩이가 어울려 빚어내는 수묵화를 즐기도록 설악 산행은 짜여진다. 설악산은 그 주릉인 공룡능선을 분수령으로 그 서쪽의 내설악과 동쪽의 외설악으로 가른다. 속초시와 양양군에 산세를 드리운 외설악과 인제군에 그 깊고도 빼어난 산자락을 허락한 내설악은 음양의 조화를 이룬 동양철학의 진수와 그 품위를 나타내는 내외의 뜻에 그대로 부합된다. 그 내설악은 지난 시대의 독재자마저 외면하지 않는 지어미의 모성을 품고 있고 외설악은 준엄한 교훈을 내리는 지아비의 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이성의 설악을 등산으로 결합시키는 일이야말로 산사람으로 설악에 귀의하는 참뜻이다. 우리나라 산들이 대개 산승들처럼 바랑이나 괴나리 봇짐 하나 달랑 짊어지고도 넘을 수 있는 수월함을 설악산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작은 실수만으로도 팔다리가 성치 않게 될지도 모를 불상사가 나게 된다. 그래서 내설악을 넘나들며 그 발길을 대청봉까지 올라서는 눈길을 이 땅 최고의 절승지에 두게 되는 설악산 감상에는 사랑의 기술과 같은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없이 감히 설악을 넘보다가는 이 산의 부성이 터뜨리는 분노에 화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을 벗삼아 화채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의 박동은 마치 천둥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땀은 물줄기로 흘러내리고...
두터운 아침공기가 장막을 뚫고 달려온다. 가을바람의 서정을 타고 흐르지만 어찌 무겁다는 느낌이 앞선다.
시월 <R 프로스트>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는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일출! 쾌청하지 못한 날씨 때문에 장엄하지는 못했지만 그 타는 듯한 빨간 빛깔의 태양은 찰나의 황홀함을 안겨 주고도 남았다.
신선한 자연앞에 도전장을 내미는 겁 없는 사물들은 순간적인 착각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이다. 이를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여명의 실력 발휘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바램이었다.
단풍은 이미 대청봉을 떠났다는데...하루하루 날은 가고 벌써 시월의 중순! 화채능선 오름길에도 만추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침녘 안개구름이 걷히면서 신비한 설악의 몸체는 햇살에 비쳐 조금씩 옷을 벗고 있었다. 처음엔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은빛 무림이 석양의 노을빛처럼 연초록 빛깔이 반사된다. 매끄럽고 균형미 있는 완곡의 나신, 황홀한 그 자체이었다.
산과 바다가 산과 바다의 색깔을 내는 것이, 꽃과 노을이 꽃과 노을의 색깔을 내는 것이 모두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빛에 의해 그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 태양의 빛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빛깔들을 주기 위해 그 얼마나 고통 스러웠을까?
걸음을 옮기며 눈에 드는 설악의 솟구친 암봉과 능파는 애간장을 태운다.
전망바위 뒤쪽 오솔길을 거치고 솔향 그득한 곳에 수석전시장 같은 두평짜리 바위가 오롯이 좌정하고 있다. 전망암이다. 그 암을 둘러싸고 있는 의연한 소나무들은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함께 어우러진 구도는 추상과 사색을 추스르게 하는 예정된 여름날의 원상이었건만 가을앞에서는 이 산정의 영원이 되어버렸다.
연속된 단애에 걸쳐있는 소나무가 率舞처럼 고고하게 드러난다. 휘어진 곡선따라 잘 정재된 소나무와 탐미로운 기암속에 단아하게 걸쳐있는 소나무가 한 폭의 석송도이다. 바라보는 순간 세상이 훤히 보였다. 그 많은 소나무 가지에 가려졌던 시야가 완전히 탁 트인 것이다. 천하에 보기 어려운 놀라운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화채봉에 오르는 순간 눈앞에 공룡능선의 신선경이 펼쳐진다.
눈 안의 信美함에 도취되어 산봉을 향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부신 가을산이 펼쳐진다. 완곡된 능선미가 나체로 누운 여신의 모습이 이럴까. 조금도 추하지 않고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 산정은 자연에게 축복받은 존재였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을은 화채능선에 머물러 있었다. 만추의 모습으로... 따사로운 가을의 햇살에 취한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그 높은 나무 잎새들에 가려진 하늘아래 숲길은 소솔길이다. 바람은 가을을 타고 온 산정을 휘감아버린다. 가을이 왔다 말하고 있는 듯하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숲길을 가득 채우니 이는 잎새와 가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 가을에 기대고 싶다.
화채봉에서 칠성봉으로 가는 산길은 그야말로 신선의 길이요 신선의 그 길을 걷는 난 신선이 된듯 우쭐댄다.
고도를 서서히 높이며 삼림의 무성함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난여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아있으니 아마 그 형상은 절서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연의 이음새이다.
방대한 기암이 병풍 치듯 위엄하게 내려보고 있으니 들려오는 건 탄성뿐이다. 그 위에 서서 신선이 호령하는 큰 장음을 마음속에 새겨보며, 웅장한 산울림에 다시 한번 경악을 금치 못한다.
가을의 촉촉한 산길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걸었다. 우렁찬 바위의 함성이 이곳저곳에서 힘차게 들려왔다. 무림들의 함성도 그와 같이 온 산하에 정적을 깨트리며 자연속의 큰 울림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주위의 산자락들은 생동찬 치마바위를 연상케 하는 바위들을 가득 두르고 있다. 비와 바람과 세월을 그려내듯 바위엔 무한히도 億劫의 흔적이 짙게 배인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절제된 자연의 원초적인 삶이었다.
겹겹이 이어진 높이 솟은 우람한 산과, 산그림자를 담아 짙푸른 색을 띤 채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 펼쳐지는 가을 무림의 서, 그리고 그 끝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봉우리들. 그 모두 초록의 천위에 그려낸 한 폭의 그윽한 수묵화의 느낌이었다.
두텁고 넓게 펼쳐진 산마루가 거대한 푸른빛을 띠며 능선에서 계곡 아래로 뻗쳐 있었다. 능선마다 큰 봉우리를 끼고 있어 Y자형을 이룬 수려한 골(谷)과 그 위로 맑은 흰 구름, 푸른 하늘이 대비를 이루면서 한 폭이 그림이 되었다.
칠성봉에 서면 산형의 정적인 그림에 눈이 부실정도다. 그 조망된 그림이 우리에게 가을의 푸르름과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워주니 마음은 한없이 넓을 뿐이다. 超然한 가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설악산에서 길을 잃었다.
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빠지는길
길은 그냥 하늘 속에 있었다.
(중략)
십년여 산을 들어도 길을 잃은 일은 없었다.
깊은 골짜기 함께 쓰러져
산과 내가 상처를 나누어 갖지는 못했다.
짐승 사이로 별 사이로 가듯
길을 잃었어야 했다.
누구나 정상에선 길을 잃는 것을
앞서 가면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아래로만 고개를 내밀고 우왕좌왕했을까.
이젠 길을 잃어라.
낙엽 속에 웅크려 자듯
별 사이로 헤매어 떨듯
더 크게 길을 잃어라.
- 이성선(길을 잃어라)-
웅장한 설악의 물결이 한없이 요동친다. 그 아래로는 토왕성폭포,설악동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고, 서쪽으로 신명한 집선봉 허리에 구름이 내려앉아있어 선계처럼 보인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중용의 미덕을 이 산정을 통해 깨치니, 감춰진 감정이 솟아오르며 불현듯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온다.
돌아보며, 기세등등한 바위의 힘찬 모습과 단애에 걸쳐 쌓여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기묘하게 어떻게 뭉쳐져 이루어졌는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신묘하기 이를 데 없다. 산 아래 계곡의 수려한 바위는 물살이 깎아냈다면 설악의 바위들은 억겁의 세월과 바람이 조각한 것이 다름없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된 설악산 그 산정에 귀의한 몇 시간은 신이한 선계의 정경을 보면서 새로운 상상력을 품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또 그 길을 걷다 보면서 좀더 삶을 어떻게 영위 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이 하나씩 펼쳐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토왕성에 가려서 설움의 눈총을 받고 있는 비룡폭포의 물줄기가 오늘은 줄기차다.
산자락의 무이한 자태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든,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지나가는 그 흔적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유한한 존재이며 영원한 것은 오직 바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구름이 바람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린다.
그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두웠던 새벽녘 떠났던 설악에 저녘의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차에 오르며 창문을 내린다.
열어젖힌 창문을 넘어 시월 열이튼날 초저녁...만추의...가을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도 금단의 능선 화채능선......
만추의 계절에 화채을 찾아 나섰던 설악의 하루는 꿈결처럼 흘러갔다.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자연의 윤회에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며 백설이 만건곤 할때 나 다시 설악의 품에 안겨서 독야청청 해보리라.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무잎 사이로 삵괭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 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않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산이 하나의 예술품이라면 이 땅에 설악산 만한 걸작은 달리 없다. 이러한 전제가 금강산은 도무지 못 마땅할 것이다. 설악은 여전히 이 땅의 사람이 비로소 자유롭게 자연에 귀의 할 수있는 절승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빼어나다. 설악의 정상인 대청봉에 올라 그곳서 지척인 향로봉과 금강산을 바라다보고 동으로는 발 아래 창파에 휘몰리는 동해가 펼쳐지는 장관을 보라. 그리고 서쪽과 남쪽으로 펼쳐지는 기치창검의 산세를 보노라면 제 아무리 강인하고 오만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작아지는 미적 카타르시스를 맛 볼 것이다. 그 대청봉의 정상에 서서 산은 크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작다" 는 어휘를 문득 떠올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설악의 아룸다움을 제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예술가가 된다. 그 과장과 허세조차도 대청봉이나 설악산의 여느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조망 앞에서는 전혀 과장이 되지 못할 뿐 그것조차 부족이 되고 만다. 설악산의 특징은 금강산이 그러하듯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오묘하고 다양한 산세에 있다. 산굽이를 돌거나 능선에 올라 설 때마다 선보이는 기암괴석의 정교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설악 산행의 백미다. 그만큼 다양한 산세를 지녔기에 게곡에는 수십길의 폭포와 웅덩이가 줄을 잇는다. 따라서 능선에서는 설악의 수석미를, 계곡에서는 폭포와 웅덩이가 어울려 빚어내는 수묵화를 즐기도록 설악 산행은 짜여진다. 설악산은 그 주릉인 공룡능선을 분수령으로 그 서쪽의 내설악과 동쪽의 외설악으로 가른다. 속초시와 양양군에 산세를 드리운 외설악과 인제군에 그 깊고도 빼어난 산자락을 허락한 내설악은 음양의 조화를 이룬 동양철학의 진수와 그 품위를 나타내는 내외의 뜻에 그대로 부합된다. 그 내설악은 지난 시대의 독재자마저 외면하지 않는 지어미의 모성을 품고 있고 외설악은 준엄한 교훈을 내리는 지아비의 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이성의 설악을 등산으로 결합시키는 일이야말로 산사람으로 설악에 귀의하는 참뜻이다. 우리나라 산들이 대개 산승들처럼 바랑이나 괴나리 봇짐 하나 달랑 짊어지고도 넘을 수 있는 수월함을 설악산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작은 실수만으로도 팔다리가 성치 않게 될지도 모를 불상사가 나게 된다. 그래서 내설악을 넘나들며 그 발길을 대청봉까지 올라서는 눈길을 이 땅 최고의 절승지에 두게 되는 설악산 감상에는 사랑의 기술과 같은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없이 감히 설악을 넘보다가는 이 산의 부성이 터뜨리는 분노에 화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을 벗삼아 화채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의 박동은 마치 천둥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땀은 물줄기로 흘러내리고...
두터운 아침공기가 장막을 뚫고 달려온다. 가을바람의 서정을 타고 흐르지만 어찌 무겁다는 느낌이 앞선다.
시월 <R 프로스트>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는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일출! 쾌청하지 못한 날씨 때문에 장엄하지는 못했지만 그 타는 듯한 빨간 빛깔의 태양은 찰나의 황홀함을 안겨 주고도 남았다.
신선한 자연앞에 도전장을 내미는 겁 없는 사물들은 순간적인 착각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이다. 이를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여명의 실력 발휘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바램이었다.
단풍은 이미 대청봉을 떠났다는데...하루하루 날은 가고 벌써 시월의 중순! 화채능선 오름길에도 만추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침녘 안개구름이 걷히면서 신비한 설악의 몸체는 햇살에 비쳐 조금씩 옷을 벗고 있었다. 처음엔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은빛 무림이 석양의 노을빛처럼 연초록 빛깔이 반사된다. 매끄럽고 균형미 있는 완곡의 나신, 황홀한 그 자체이었다.
산과 바다가 산과 바다의 색깔을 내는 것이, 꽃과 노을이 꽃과 노을의 색깔을 내는 것이 모두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빛에 의해 그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 태양의 빛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빛깔들을 주기 위해 그 얼마나 고통 스러웠을까?
걸음을 옮기며 눈에 드는 설악의 솟구친 암봉과 능파는 애간장을 태운다.
전망바위 뒤쪽 오솔길을 거치고 솔향 그득한 곳에 수석전시장 같은 두평짜리 바위가 오롯이 좌정하고 있다. 전망암이다. 그 암을 둘러싸고 있는 의연한 소나무들은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함께 어우러진 구도는 추상과 사색을 추스르게 하는 예정된 여름날의 원상이었건만 가을앞에서는 이 산정의 영원이 되어버렸다.
연속된 단애에 걸쳐있는 소나무가 率舞처럼 고고하게 드러난다. 휘어진 곡선따라 잘 정재된 소나무와 탐미로운 기암속에 단아하게 걸쳐있는 소나무가 한 폭의 석송도이다. 바라보는 순간 세상이 훤히 보였다. 그 많은 소나무 가지에 가려졌던 시야가 완전히 탁 트인 것이다. 천하에 보기 어려운 놀라운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화채봉에 오르는 순간 눈앞에 공룡능선의 신선경이 펼쳐진다.
눈 안의 信美함에 도취되어 산봉을 향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부신 가을산이 펼쳐진다. 완곡된 능선미가 나체로 누운 여신의 모습이 이럴까. 조금도 추하지 않고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 산정은 자연에게 축복받은 존재였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을은 화채능선에 머물러 있었다. 만추의 모습으로... 따사로운 가을의 햇살에 취한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그 높은 나무 잎새들에 가려진 하늘아래 숲길은 소솔길이다. 바람은 가을을 타고 온 산정을 휘감아버린다. 가을이 왔다 말하고 있는 듯하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숲길을 가득 채우니 이는 잎새와 가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 가을에 기대고 싶다.
화채봉에서 칠성봉으로 가는 산길은 그야말로 신선의 길이요 신선의 그 길을 걷는 난 신선이 된듯 우쭐댄다.
고도를 서서히 높이며 삼림의 무성함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난여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아있으니 아마 그 형상은 절서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연의 이음새이다.
방대한 기암이 병풍 치듯 위엄하게 내려보고 있으니 들려오는 건 탄성뿐이다. 그 위에 서서 신선이 호령하는 큰 장음을 마음속에 새겨보며, 웅장한 산울림에 다시 한번 경악을 금치 못한다.
가을의 촉촉한 산길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걸었다. 우렁찬 바위의 함성이 이곳저곳에서 힘차게 들려왔다. 무림들의 함성도 그와 같이 온 산하에 정적을 깨트리며 자연속의 큰 울림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주위의 산자락들은 생동찬 치마바위를 연상케 하는 바위들을 가득 두르고 있다. 비와 바람과 세월을 그려내듯 바위엔 무한히도 億劫의 흔적이 짙게 배인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절제된 자연의 원초적인 삶이었다.
겹겹이 이어진 높이 솟은 우람한 산과, 산그림자를 담아 짙푸른 색을 띤 채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 펼쳐지는 가을 무림의 서, 그리고 그 끝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봉우리들. 그 모두 초록의 천위에 그려낸 한 폭의 그윽한 수묵화의 느낌이었다.
두텁고 넓게 펼쳐진 산마루가 거대한 푸른빛을 띠며 능선에서 계곡 아래로 뻗쳐 있었다. 능선마다 큰 봉우리를 끼고 있어 Y자형을 이룬 수려한 골(谷)과 그 위로 맑은 흰 구름, 푸른 하늘이 대비를 이루면서 한 폭이 그림이 되었다.
칠성봉에 서면 산형의 정적인 그림에 눈이 부실정도다. 그 조망된 그림이 우리에게 가을의 푸르름과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워주니 마음은 한없이 넓을 뿐이다. 超然한 가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설악산에서 길을 잃었다.
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빠지는길
길은 그냥 하늘 속에 있었다.
(중략)
십년여 산을 들어도 길을 잃은 일은 없었다.
깊은 골짜기 함께 쓰러져
산과 내가 상처를 나누어 갖지는 못했다.
짐승 사이로 별 사이로 가듯
길을 잃었어야 했다.
누구나 정상에선 길을 잃는 것을
앞서 가면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아래로만 고개를 내밀고 우왕좌왕했을까.
이젠 길을 잃어라.
낙엽 속에 웅크려 자듯
별 사이로 헤매어 떨듯
더 크게 길을 잃어라.
- 이성선(길을 잃어라)-
웅장한 설악의 물결이 한없이 요동친다. 그 아래로는 토왕성폭포,설악동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고, 서쪽으로 신명한 집선봉 허리에 구름이 내려앉아있어 선계처럼 보인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중용의 미덕을 이 산정을 통해 깨치니, 감춰진 감정이 솟아오르며 불현듯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온다.
돌아보며, 기세등등한 바위의 힘찬 모습과 단애에 걸쳐 쌓여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기묘하게 어떻게 뭉쳐져 이루어졌는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신묘하기 이를 데 없다. 산 아래 계곡의 수려한 바위는 물살이 깎아냈다면 설악의 바위들은 억겁의 세월과 바람이 조각한 것이 다름없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된 설악산 그 산정에 귀의한 몇 시간은 신이한 선계의 정경을 보면서 새로운 상상력을 품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또 그 길을 걷다 보면서 좀더 삶을 어떻게 영위 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이 하나씩 펼쳐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토왕성에 가려서 설움의 눈총을 받고 있는 비룡폭포의 물줄기가 오늘은 줄기차다.
산자락의 무이한 자태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든,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지나가는 그 흔적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유한한 존재이며 영원한 것은 오직 바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구름이 바람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린다.
그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두웠던 새벽녘 떠났던 설악에 저녘의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차에 오르며 창문을 내린다.
열어젖힌 창문을 넘어 시월 열이튼날 초저녁...만추의...가을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도 금단의 능선 화채능선......
만추의 계절에 화채을 찾아 나섰던 설악의 하루는 꿈결처럼 흘러갔다.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자연의 윤회에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며 백설이 만건곤 할때 나 다시 설악의 품에 안겨서 독야청청 해보리라.
첫댓글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네요 ㅎㅎ
광마 선배 눈팅 잘하고 갑니다 .야불따기 Female 은 누군교 ?
원조산악회 대빵 설여사 아지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