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0(금)~21(토)
石華 시인과 함께 한 나들이 (3)
★20일(금) : 새만금방조제- 하섬. 채석강- 내소사- 석정문학관- 아리랑문학관
★21일(토) : 무량사- 미암사- 이상재생가- 신성리갈대밭
변산반도국립공원의
내소사來蘇寺를 찾아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이다. 633년(백제 무왕 34)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淸旻이 대웅전大雄殿(보물 291)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865년(고종 2) 관해觀海가 중수하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고려동종高麗銅鐘(보물 277),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보물 1268), 3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124), 설선당說禪堂과 요사(전북유형문화재 125)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내소사의 유래에 관하여, 일설에는 중국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도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며, 원래는 '소래사蘇來寺'였음이《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고, 최자崔滋의《보한집補閑集》에도 고려 인종 때 정지상鄭知常이 지은〈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의《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소래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속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 · 지장암地藏庵이 있다. 1986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일원이 문화재보호구역(전북기념물 78)으로 지정되었다. 일주문一柱門부터 천왕문天王門에 걸쳐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觀音峰(433m) 아래 있는데, 관음봉을 일명 ‘능가산’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보통 '능가산 내소사'로 부르기도 한다.
◈ 내소사 전나무 숲길
참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웅보전 앞에서 두리번거린다. 처마 끝을 살펴보기도 하고 문 안쪽으로 몸만 들이밀고 구석구석 살핀다. ‘도대체 어디가 나무토막이 비었다는 거야?’ 내소사는 조선 인조 때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사미승의 장난으로 나무토막 한 개가 부정 탔다 하여 빼놓은 채 지었다. 그때의 흔적을 찾으려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춰 지었다는 절, 단청도 흐릿해서 언뜻 보기에 볼품없어 보이는 대웅보전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모두 나무 얘기다. 내소사는 시작부터 끝까지 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 150년 전 만들어진 전나무 숲길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1300여 년 된 내소사.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다시 복구하는 일이 계속됐으나 입구가 여전히 삭막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50여 년 전 일주문에서 사천황문에 이르는 길에 전나무를 심었다. 6∙25 때도 절은 피해를 입었지만 입구의 전나무들은 다행히 무사했다. 내소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매표소가 나온다. 주변에는 여느 등산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커다란 문이 보인다. 문화재관람료 2천원을 내고 들어서자 시작부터 나무의 향연. 고개를 치켜세우고 나무 끝을 바라보니 족히 30~40미터는 될 듯하다. 몇 걸음 앞에는 나무의 역사를 보여주는 나이테가 드러난 기둥이 있다. 전나무 숲은 너무나 울창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가을이 된다. ‘아름다운 숲’과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다.
◈ 남녀노소 모두 걷기에 즐거운 길
새벽이면 스님들과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날이 밝으면 등산객, 관광객이 북적인다. 약 500미터의 전나무 숲길. 하얗게 머리가 샌 할머니도 막 돌이 지난 어린아이도 숲길을 걷는 데 어려움이 없다. 티셔츠를 맞춰 입은 커플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까지 모인 대가족도 즐겁게 이 길을 걷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이 숲길을 걷게 해준, 150년 전 이곳에 나무를 심은 스님이 새삼 고마워진다. 전나무 숲길에선 나이테 안내판을 비롯해 숲을 설명해주는 해설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나무 밑에는 의자를 놓아두어 누구든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왼쪽 계곡엔 조잘조잘 물이 흐르고 이따금 길을 가로지르는 다람쥐는 사람들을 반긴다. 길지 않은 길이지만 마치 거대한 트레킹 코스의 축소판처럼 모든 것을 갖췄다. 등산로도 갈라지고 폭포로 향하는 길도 있다. 길의 끝에는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 장소였던 작은 연못도 있고 오른쪽엔 부도탑도 있다. 전나무, 왕벚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피톤치드’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 내소사의 나무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 교수는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로 내소사를 꼽았다. 건물 자체보다 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매력으로 꼽혔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길이가 제각각 다른 24개의 기둥을 가진 봉래루 앞에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보리수나무가 있고 가을이면 노란 단풍이 일품인 당나무가 내소사 마당을 지키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보물 291호 대웅전 역시 나무로 이뤄졌다. 화려한 단청이 있거나 커다란 건축물은 아니지만 수수한 매력이 있어 아름답다. 정면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나무를 깎아 만들 수 있는 조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연꽃, 국화, 해바라기 등 꽃무늬가 문살에 섞여 있다. 마치 손으로 조물조물 만들어낸 듯 잎사귀까지 표현한 나무 조각은 세월의 흔적과 함께 수수한 멋을 내고 있다.
— <http://www.ibuan.co.kr/tour07/page_1.htm>에서
변산반도를 휘 돌아가는 30번 국도의 해변을 따라 내소사 앞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내소사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길 양쪽에 줄지어 있는 상가商街다. 각종 토속음식과 기념품 가게가 줄지으면서 두 눈을 붙들고 입맛을 부른다. 이윽고 일주문一柱門 앞에 이르다가 보니 오른쪽으로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부부처럼 서 있다. 느티나무 허리춤에서부터 늘어뜨린 오색 천을 보니 문득 이곳에서 전통 민속예술행사가 이루어진 듯하다. 자세히 본디 그러다가 문득 안내판을 본다. <2014년 작은공동체 전통예술잔치. 우수축제선정마을.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라는 문화체육관관부 및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명시해놓은 것이다. 두 느티나무가 여느 느티나무와는 달리 이 마을에서는 마을공통체를 이끌어준 범상한 나무라는 걸 깨닫다.
일주문 안에 들어서자 곧 전나무 깊이다 건설교통부가 세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표지판이 보인다. 전나무에서 알 듯 모를 듯하게 뿜어 내려오는 나무향에 취하여 마음을 조금씩 정화하면서 내소사로 향한다. 몇 발자국을 떼다가 길가의 벚나무에서 몇 송이의 성질 급한 꽃송이를 만난다. [大長今 撮影場所]라고 알려주는 연못이 있고, 연못 너머로는 온갖 부도들이 보인다.
天王門을 거치면 눈앞을 가로막는 두 그루의 장엄한 나무, 한 그루는 수령 1,000년, 높이 20여m, 그 둘레가 7.7m나 되는 고목 느티나무이며, 또 다른 한 그루는 300년이 넘었다는 보리수나무이다. 그러나 나의 두 눈을 사로잡는 나무는 겨울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짙푸른 잎 사이로 붉은 꽃잎을 가득 품고 있는 동백나무이다. 한 그루가 아닌 여러 그루의 동백은 삭막한 겨울 풍경에 길들여진 나의 두 눈을 반짝 빛나게 한다.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채색과 단청이 없는 蓬萊樓 밑으로 하여 몇 걸음하니 곧 大雄殿이 눈앞에 나타난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다.
그 뿐이 아니다. 보종각寶鍾閣에는 고려시대 梵鐘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는 보물 277호 고려동종高麗銅鐘이 보인다. 내소사고려동종扶安來蘇寺銅鍾은 원래 청림사에 봉안되었던 동종이며, 사찰이 폐사된 이후 1850년에 전라북도 부안 내소사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전체 외형은 종의 입구가 좁아지는 형태이며, 단룡單龍의 종뉴와 구슬 장식이 있는 음통音桶을 갖추었다. 천판天板에는 입상화문대가 있고 상대와 하대는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대 아래에는 연곽이 있고 그 하단에는 당좌를 배치하였다. 당좌는 뾰족한 꽃잎을 이중으로 둘러싼 형태로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몸체의 중심에는 삼존불좌상이 네 군데 부조되었다. 활짝 핀 연꽃 위로 구름이 있는 자리에 삼존불이 묘사되었는데, 본존은 연화좌에 앉아 있고 협시보살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서 있다. 삼존상의 두광 뒤쪽에는 구름의 꼬리가 묘사되어, 천상에서 내려오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 위에 묘사된 천개에도 바람에 날리는 술 장식이 표현되어, 삼존불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각 솜씨가 돋보이며 음통, 입상화문대, 당좌 등의 세부장식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보물 1268호로 내소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산회괘불화來蘇寺靈山會掛佛幀는 1700년(숙종 26)에 조성되었는데, 불화의 내용은『법화경法華經』이 설해졌던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의 설법모임을 도설화圖說化한 것이다. 이는 주로 법당 바깥에서 베풀어지는 큰 의식이나 법회에서 사용되었고, 이 영산회괘불화의 경우는 특히 영산재靈山齋에서 사용되었다 한다.
대웅전 앞에 놓여 있는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만들어진 것이나 신라 양식을 따른 높이 3.46m 높이이다. 보물 제291호인 내소사대웅보전來蘇寺大雄寶殿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보현보살님, 좌측에는 문수보살님을 모시고 있으며, 불 상 뒤 벽에 그린 관음보살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 한다. 내소사의 본전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이 건물은 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만으로 지었다.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연꽃과 국화꽃을 가득 수놓아 화사한 꽃밭을 떠올리게 하는 문살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문살은 법당 안에서 보면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비출 뿐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요란하지도 아니하고 장중함보다는 다정다감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이다.
지장전과 조사당, 그리고 대웅전 뒤 언덕에 자리 잡은 삼성각 등을 골고루 살펴보다가, 출입금지를 알려주는 현수막 뒤로 진화사眞華舍를 넘겨보기도 하다가, 설선당의 곁으로 지나다가 거대한 무쇠솥을 만난다. 부엌문이 열려있다. 신발을 털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왼편으로 큰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 건너편으로 거대한 무쇠솥이 걸려있다. 지름이 족히 150m는 되어 보인다. 지금도 큰일이 있을 때나 동지 팥죽을 끓일 때는 이 솥에다 팥죽을 쑨다고 한다.
설선당說禪堂인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8년에 청영스님이 지은 것으로, 스님과 신도들의 수행 장소이며, 요사는 스님들이 거처였다. 두 건물은 ‘ㅁ’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건물 가운데에는 마루와 우물을 설치했다. 설선당 동쪽 한 칸은 마루고, 남쪽 2칸은 부엌으로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다.
요사寮舍는 2층으로, 1층은 승방과 식당으로 사용했으며, 2층은 각종 곡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고방으로 바닥을 나무로 하였다. 전에 아산 봉곡사에도 ‘ㅁ’ 구조의 요사 2층에 고방이 있어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의 벽면은 여러 개의 창을 두어 환기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설선당說禪堂과 요사寮舍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25호인 눈에 띈다.
무쇠솥을 뒤로 하고 나오니 뜰 안에 큰 산수유나무 한 그루가 갈 길을 재촉하며 쉽사리 헤어지려데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회자정리임이 분명한데 문득 발길을 막는다. 그러나 石華 시인과 나란히 보리수나무 밑으로 하여 들어오던 길을 따라 전나무 길을 천천히 걸어나온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국어 위키백과> 등에서
[명상음악] 당신이 날 두고 떠날 때
*음악 : 관악산의 추억(http://cafe.daum.net/e8853/MUq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