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강설(청봉선사) 08-A-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離相寂滅分 第十四 (상을 여의면 적멸함)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고 深解義趣하여 涕淚悲泣하며 而白佛言하되 希有世尊이시여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도 未曾得聞如是之經이나이다.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함을 듣고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한 이토록 심오한 경전은 제가 옛부터 얻은 지혜의 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듣지 못하였사옵니다.
淸峯:혜안은 사람(我)이 공함을 요달함이고, 듣지 못함은 진리가 공함을 요달함인 것이다. 즉 들어도 들음이 없는 것으로 일체 모든 진리가 공한 것을 깨달았음이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여 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을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게 되어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실상을 내게 됨을 마땅히 알겠사오니 이 사람은 가장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옵니다.
淸峯:실상을 낸다는 것은 일체가 절대 청정하여 둘 아님(不二)을 보아(契合) 반야지혜가 발현됨을 이르는 말이다. 실상을 내는 것은 청정함으로 인하여 반야(지혜)가 나게 되는 것이니 일체의 차별 현상을 떠났으되 또한 이 현상에 상즉하며, 유무를 떠났으나 유무에 상즉하는 것이다.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이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진실한 모양(실상)이라는 것은 곧 모양이 아니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이름하여 참 모양이라 하셨사옵니다.
淸峯:무슨 뜻인가? 세존께서 말씀한 참모양은 형상 있음이 아니라, 설명하자니 참 모양이라 했을 뿐이다. 마음도 마음이라 하면 본체의 마음이 아니요, 청정함도 청정하다 하면 청정이 아니니, 일체가 그러해서 말로써 이를 수 없는 공적영지한 것이나 방편상 참 모양이라 표현한 것이다.
世尊이시여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오나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사오나
淸峯:즉, 수보리 존자는 혜안을 갖춘 해공 제일 아라한이라 세존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나 일반 중생으로서는 쉽지 않다 하는 것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알음알이를 여읜 진리이기 때문이다.
若當來世인 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여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나이다
만약 이다음 세상 후 오백세(2천5백년 후)에 중생이 있어 이 경을 듣게 되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가장 희유하게 될 것이옵니다.
淸峯:받아 지니다(受持)하는 것은 이 경을 끼고 다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이 경의 심오한 근본 뜻을 혜오(慧悟)함인 것이다.
何以故하면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고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하면 我相은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니 何以故하면 離一切相이 卽名諸佛이나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내라는 상이 없고, 사람이라는 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상도 없으며, 오래 산다는 상도 없는 것이니, 어째서인가하면, 내라는 상은 곧 상이 아니며 사람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오래 산다는 상이 곧 상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을 곧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하는 것이옵니다."
淸峯:여여 부동하여 본래 실상은 같고 같아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없이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본체와 계합하여 둘 아니게 되는(見性?成佛) 것은 형상에 집착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상을 여의어야 만이 실상을 증득 할 수 있는 것이다. 내라는(假我) 것이 있다고 집착하고서 어찌 진여의 묘유를 체득할 수 있으며 무여열반에 들 수 있겠는가? 실상은 일체의 차별 경계를 떠나되 일체 차별적인 경계에 상즉하여 유?무를 여의며 유?무가 아님도 여의고, 유?무와 둘 아니며, 또한 유?무와 곧 합하지도 아니하므로 실재(實相)라 한다.
이경에서 말씀한 4相과 4見은 일체의 차별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차별 견해를 총괄하는 명칭인 것이다. 이 4상으로 인하여 주관적인 주장인 근본 견해가 나게 되는(4見) 것이다. 따라서 4상으로 인한 일체 모습과 일체 견해는 허망된 망상이 되는 무명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으로 미혹한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는 습기는 육근에 있어서는 대상의 경계를 분별하는 식(見分)이 되고, 견분의 그림자로 나타난 지각의 세계인(육경) 相分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의 기능으로 작용하는 견해의 분야 즉 견분을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하고 그 견분의 그림자로 나타난 상분인 육경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 인, 중생, 수자라는 4상인 상분의 허상에 집착하여 그 견분(4見)의 망상에 걸려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인연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잠시 뭉쳐진 환과 같은 지수화풍 4대를 잘못 나로 알고 4상의 견해인 4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4상과 4견은 일체의 모습과 일체의 견해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그 근원은 4대를 집착하여 내라고 고집하여 아상, 아견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니, 이 아상으로 일체의 집착과 끄달림이 일어나 모든 증애(憎愛)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법상(즉, 모든 일체상)이 실재로 존재해 있다고 생각하면 상견(있음이 항상 하다는 소견)에 떨어지게 되고 법상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단견(즉, 끊어져 없다는 공 하다는데 매이는 소견)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야의 중도를 잃게 되는 것이다.
佛이 告須菩提하시되 如是如是로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렇다.
淸峯:그렇다 그렇다. 한 것은 수보리의 깨달은 바 견처가 부처님과 계합함으로 인정하여 인가한 것이니, 두 번을 거듭 옳다 한 도리를 또한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공안이 되므로 파설 될까 염려하여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격외로 한마디 한다면,
“달이 달을 삼키고, 물에 도장을 찍었으되 흔적이 없음이로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여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이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한 것이니라.
淸峯:어떻게 하는 것이 놀라고 겁내고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일까? 의심함이 없고 물러남이 없으며 어지럽지 않아 적적요요(寂寂寥寥)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공하여 말에나 문자에 있지 않음을 요달(의심하지 않고 믿고 깨달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