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스타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스타들입니다. 손기정, 김일, 차범근, 양영자, 조오련, 박세리, 박찬오, 최경주, 박태환, 김연아 같은 선수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최근까지 가장 인기 있는 이가 김연아 선수입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이렇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은 다른 선수와 구별되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결점 기본기와 차가운 승부사 기질입니다. 톱클래스 선수가 되면 놓치기 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도의 기술과 화려한 연기에만 신경을 쓰고 기본기 연습을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연아는 예외입니다. 작은 기본기 하나에도 무섭도록 집중합니다. 김연아에게 기술과 표현력을 전담 지도하고 있는 트레이시 윌슨 코치는 “김연아의 훈련 방식은 충격적입니다. 톱클래스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점프나 스핀을 열심히 연습하고 코치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마치 처음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는 학생 같습니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끊임없이 기본기를 다지는 훈련과 차가운 승부사 기질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어 냈습니다.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본기를 다지는 일은 흥미 없고 지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지속적인 실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곧 멈추고 맙니다. 그러므로 스포츠에서 <기본기> 생명입니다. <기본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회도 기본이 있습니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 중에 기본이 무엇입니까? 중생, 거듭남입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독립 교단은 러시아의 정교회(正敎會)입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주후 988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의 국교였으며 신도 수는 한 때 약 5,000만 명까지 되었습니다. 러시아 어디를 가든지 교회당과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때 무성했던 러시아 정교회가 시간이 지나 점점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종교라는 형식적인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신도들은 무사안일과 나태한 신앙태도로 변했고, 성직자들은 교권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제정(帝政) 러시아가 쇠퇴해 갈 무렵 정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의 가운을 어떤 모양으로 입어야 하는가, 가운의 옷단을 붉은색으로 할 것인가 황금색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10일을 밤낮으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건물 지하에서는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들이 모여서 러시아를 뒤집어엎을 혁명을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일어났고, 혁명 지도자 레닌은 ‘반(反) 교회(敎會) 포고령(布告令)’을 선포했습니다. 새로 들어선 공산당 정부는 많은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교회 건물과 수도원 등 대부분의 교회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창고, 극장, 박물관 등으로 전용하였습니다. 1930년까지 3만여 개에 달하던 교회의 수가 1940년 스탈린의 탄압 정책으로 1천 개 이하로 줄어들었고, 1969년도에는 많은 종교인들이 수용소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실제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던 교회는 100개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러시아 정교회가 무너지게 된 것은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고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변질 됐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가의 잣대는 철저히 영적인 변질이냐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1. 니고데모(1)
앞 장의 마지막에서 볼 때 믿는 자는 많았으나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실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니고데모, 그는 누구인가? 권세 있고 고귀하다고 불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며 몇몇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관원 중에도 흔치 않은 사람이요,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사람이요,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학문으로 훈육 받은 바리새인이요, 학자였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예루살렘 당국자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좋지 않은 풍조가 있었으며 어떤 관원들은 그러한 풍조에 쉽게 휩싸였다. 니고데모는 자기의 지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때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니고데모.'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으로서(참조, 요 7:50) 바리새인이었고, 사람들로부터는 존경받는 선생이었으며 (참조, 요 3:10). 또 재력이 있고 예수를 신실하게 섬기는 자였다는 (참조, 요 19:39) 사실이다.
요 3:1
Farisaivwn, 명-소남-복 5330 Farisai'o" 바리새인 the Pharisees, of the Pharisees
Nikovdhmo" 명-주남-단 3530 Nikovdhmo" 니고데모라 Nicodemus, Nicodemus
a[rcwn 명-주남-단 758 a[rcwn 관원이라 a ruler a ruler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엄위로운 호칭(2)
(1) 니고데모가 방문한 시간 :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니고데모는 예수의 대중적인 공개 강연을 듣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그가 예수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혼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니고데모는 이 호칭을 밤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첫째,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것이었다.(겸손한 니고데모 ,2b) 그리스도께서 매일 공적 사역에 매여 계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리스도의 시간 일정을 잘 살펴서 쉬시는 시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대적을 갖고 계셨으므로 니고데모는 특히 그리스도께 대하여 적개심을 많이 품고 있는 대제사장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아무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온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 그의 행동은 대단히 열심 있는 행동이었다. 저녁 시간이나 밤 시간의 일부를 그리스도와 대화하는데 이용함으로써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와 대화하지 않는 사람보다 오히려 시간을 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거나 졸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참 지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빨리 그 도시를 떠나시려는지, 지금 이 유월절과 다른 절기 사이 어느 때에 다시 나타나시려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밤이라면 그리스도와 대화하는 일이 더욱 자유로울 것이며 소란스럽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두려워하는 겁쟁이의 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띌까봐 두려워했으며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왔던 것이었다. 비록 그가 밤에 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그의 고결함을 인정하시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심으로써 그의 사역자들에게 비록 연약할지라도 훌륭하고, 선한 시작(출발)이라면, 격려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지금은 니고데모가 밤에 그리스도께 나아 왔지만 훗날에는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요 7:50,19:39). 은혜는 처음엔 단지 겨자씨 한 알에 불과하지만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이다.
ⓐ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2절) <rJabbiv,oi[dmaen o{ti ajpo; qeou' ejlhvluqa" didavscalo": 랍비, 오이다 멘 호티 아포 데우 엘렐 뤼다스 디다스칼로스> 본문은 니고데모가 예수께 질문하는 내용의 일부이다. <rJabbiv: 랍비>는 유대의 저명한 율법 교사를 부르는 호칭이며(참조, 마23:7,8:요3:26:9:2 등), 히브리어의 < ybir;: 라비>에서 나온 말로서 '나의 스승'이라고 번역된다. 본문에서는 남성 단수 호격으로 쓰여서 '선생이여'라고 번역한다. <oi[dmaen: 오이다멘>은 '안다, 깨닫는다, 경험한다'의 뜻을 가진 <oi: 오이다>의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 복수 1인칭으로 '우리가 안다'로 번역한다. <oi: 오이다> 동사는 현재 완료의 형태를 가지지만 현재로 해석되는 동사이다. < o{ti : 호티>는 접속사로 영어의 'that'과 같은 것이며 명사절을 인도한다. 본문에서는 동사의 목적절로 사용되었다. < ajpo; : 아포>는 소유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본뜻은 어떤 사람 혹은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나타낸다. 순전히 장소적인 뜻으로는 '…으로부터, …으로부터 멀리'이며, 어떤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나타낼 때는 '…에서 부터'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기원 혹은 근원을 나타낼 때는 '…에서'라고 번역된다. 여기서는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사용되어 '…에서'로 해석된다. < qeou': 데우>는 '하나님, 신'의 의미를 가진 남성명사 < qeov": 데오스>의 단수 소유격으로 앞 전치사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 ajpo; qeou' : 아포 데우>는 '하나님에게서'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 qeov": 데오스>가 고후4:4에서는 신적인 존재로서 '악마'를 가리키기도 한다. <ejlhvluqa": 엘렐뤼다스>는 '온다, 나타난다, 간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e[rcomai: 엘코마이>의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 단수 2인칭으로 '당신은 왔다'로 번역한다. <didavscalo": 디다스칼로스>는 '교사, 선생'의 뜻을 가진 남성명사 단수 주격이다. 눅2:46에서는 유대교사로 쓰였고, 요8:4에서는 예수로 사용되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3절) <ejavn mhv ti" gennhqh'/ a[nwqen: 에안 메 티스 겐네데 아노덴> 본문은 디고데모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가 대답하는 내용의 일부이다. <ejavn : 에안>의 만일(if) 이라고 번역되는 접속사이다. <mhv : 메>는 부정어로 직설법 이외의 부정사나 분사 등에 사용된다. < ti": 티스>는 부정대명사로 '어떤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gennhqh'/ : 겐네데>는 '낳는다'라는 뜻을 가진 <gwnnavw: 겐나오>의 단순과거 가정법 수동태 단수 3인칭으로 '그가 낳아진다면'이라고 번역한다. <a[nwqen: 아노덴>은 장소를 가리키는 부사로서 '위로부터'의 뜻이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위로부터 낳아지지 않는다면'이라고 할 수 있다.
(2) 니고데모가 부른 칭호 : 니고데모는 즉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놓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부르고 있다. 랍비란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그에 대하여 높이여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범접하기 어려운 비할 데 없는 곳에 계신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1)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주장 :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적 영감과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교사가 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칼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자기의 주장에 대한 그의 확신 : 우리가 즉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나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이 아주 널리 알려진 사실이요 자명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3) 이런 확신의 근거.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여기 이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사려 깊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탐구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가르치심 교훈과 행하신 이적을 조사해 볼 이유가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이적들이 진정한 이적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였고 그 이적에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써 그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의 대세와는 반대 방향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하신 이적에서 무엇을 추론해 내느냐에 따라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분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1)이 중생의 진리는 니고데모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3절).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사실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즉 그는 거듭나야 했다. 니고데모가 이제 곧 나타날 하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일찍부터 그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신생에 해당하는 성령에 속한 변화가 없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상태의 변화가 올지라도 그에게 전혀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 인정한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가지고 오셨으니 이 계시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는 욕구가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시를 선언하신 것이다.
2)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중생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①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우리는 옛 생명으로 살지 않고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출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다시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곧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낡은 건물을 수리해 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기초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도리, 새로운 감성, 새로운 목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되 아노오덴(ano-othen)해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시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하며 새롭게 생기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출생은 하늘에서부터 연유한다. 신생은 곧 신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기서 '거듭나다'는 말은 <a[nwqen 아노덴>인데, '위로부터'라는 뜻과 '새롭게', '다시'라는 뜻이 있다. 전자는 마 27:51 막 15:38 요 3:31; 19:23 약 1:17에서 사용되었으며, 초대 교회 시대의 교부 '오리겐'(Origen)이나 '벵겔'(Bengel) 같은 학자들이 이를 지지한다. 후자는 갈 4:9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루터'(Luther), '칼빈'(Calvin), '고데트'(Godet) 등이 지지한다. 그러나 '이상근' 박사의 주장대로 공간적으로는 위로부터 시간적으로는 새롭게 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한 듯하다(Chrysostom).
요 3:3
gennhqh'/ 동가과수--3단 1080 gennavw 나지 be born is born
a[nwqen, 형부 509 a[nwqen 거듭 again, again
3.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강화(3-21)
대한민국은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현재 경제협력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사망률이 1위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지난 10년 동안 2배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통계청의 2009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1만 5000명을 넘어섰습니다. 하루 평균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시간 당 1.5명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린 가난한 부부부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 여학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연예인과 전직 대통령까지 다양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자살을 많이 하고 있는데 20~30대 사망원인 중 1위는 ‘자살’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의 매래를 책임질 대학생들이 평균 230명 이상입니다. 그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먹고, 입고, 안락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의식주문제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의식주문제일까요?
이 세상에는 아직도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아이티’는 세계 최빈국으로 꼽히는 나라입니다. 인구 약 800만 정도의 이 나라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흙으로 만든 쿠키를 식량 대신으로 먹기도 합니다. 진흙을 걸러 반죽하여 소금과 마가린을 조금 섞어 과자처럼 둥글게 구워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식사대용으로 먹는데 이것을 먹고 배탈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네팔에서는 한 사람이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려면 800원이 있어야 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무거운 망치로 하루 종일 돌을 깨고 쓰레기를 줍기도 합니다. 베트남의 여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먼 나라의 낯선 남자에게 시집가는 말도 할 수 없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고, 대리모를 자원하여 번 돈으로 연명해 나가는 인도의 여성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을 하는 통계를 보면 이런 나라들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살아가는 스웨덴, 일본, 헝가리 등이 자살률이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도 40년 전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소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6월 보리가 추수되기 전에 먹을 식량이 바닥나서 보리가 추수할 때까지 버티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쌀밥 한 그릇만 실컷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계 발전을 이루어 짧은 시간에 배부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가난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대국이 되고 난 지금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나라가 자살 공화국이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11-12절을 먼저 살펴보라.) 여기에서 우리 주께서는 다음에 네 가지 즉 첫째, 중생 또는 신생의 필요성과 본질에 대하여, 둘째, 복음 진리의 확실성과 탁월성에 대하여, 셋째, 자신이 세상에 오신 위대한 뜻과 믿는 자의 행복에 대하여, 넷째, 불신앙과 무지로 일관하는 자들의 비참한 참상에 대하여 강화하고 계시다.
(1) 중생 또는 신생의 필요성과 본질(3-8절).
②이러한 중생의 필수 불가결성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본성)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로도 받을 수가 없다. 중생은 이제와 금후의 우리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일의 성질상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 나야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엄숙하게 강조된 중생의 필요성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니고데모는 이 진리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절).
요 3:4
deuvteron 형부서 1208 deuvtero" 두 번째 the second time a second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그의 지식의 취약성이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니고데모는, 마치 영혼과 육체 사이에 뼈가 새로이 형성되지 아니 하고서는 심령을 새로이 소성시킬 수 없는 그러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태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누가 한 사람의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나고 양육 받은 것보다 더 훌륭하게 태어나서 양육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그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서나 다시 태어나거나 새롭게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여겼지 유대인,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와 같이 자기들의 처음 출생을 자랑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그의 진지한 태도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난해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의 무죄를 시인한다. "주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시켜 주십시오. 내게는 그 말이 수수께끼만 같습니다. 내 머리로는 사람이 그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캄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께 속한 일에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조차도 우리는 계속해서 지식의 매개 수단을 활용해야만 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의 개념이다. '칼빈'(Calvin)은 이 '물'을 성령으로 이해하면서 '세례 의식'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반박한다. 그가 물세례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요건이 되지 못하며, 결국 본 절의 '물'은 그 다음에 언급된 성령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물세례'로 해석해 왔다(Augustine, Chrysostom, Hendricksen, Albert, Barrett, Westcott, Godet, Plummer, Bernard). 즉 이들은 물세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은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죄의 정결을 상징하는 외형적이고 의식적인 것으로 필요한 것이며, 성령은 구원의 필수적이며, 적극적인 측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물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Ironside) 고대 문헌에 의거하여 '물'을 남성의 정액으로 이해하여 자연적인 출생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Odeberg, Morris). 물을 세례로 해석하는 학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네 번째의 해석도 학계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을 가리키는 <savrx 사르크스>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성을, 또 '영', 즉 <pneu'ma 프뉴마>는 양심과 이성의 통제를 받는 신의 영역을 가리킨다.
물은 ①전통적 의미 : 물세례, 성령 세례 ②좁은 의미 : 십자가의 물과 피(속죄의 수단) ③넓은 의미 : 말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에베 5, 26)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전 1, 23)
요 3:5
u {dato" 명-소중-단 5204 u {dwr 물 water of water
kai; 접등 2532 kaiv 과 and
pneuvmato", 명-소중-단 4151 pneu'ma 성령 of the Spirit, and the Spirit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5절) <ejavn mh; ti" gennhqh'/ ejx u{dato" cai; pneuvmato": 에안 메티스 겐네데 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ejavn : 에안>은 '만일…이라면'의 뜻을 가진 접속사로서, 가정법과 함께 사용되며, 일반적으로나, 혹은 특수하게, 그리고 현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떤 환경에서 생기리라고 기대되는 바를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 mh;: 메>는 부정어이며, 직설법에서는 <ouj: 우>를 사용하지만, 그 이외의 법, 즉 가정법, 명령법 등에는 < mh; : 메>를 사용한다. < ti" : 티스>는 부정대명사이며, '어떤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gennhqh'/ : 겐네데>는 '낳다, 산출하다'의 뜻을 가진 <gennavw: 겐나오>의 단순과거 가정법 수동태 단수 3인칭으로 '그가 낳아진다면'이라고 번역하지만, 앞의 단어들과 연결시켜 번역해보면 <ejavn mh; ti" gennhqh'/ : 에안 메 티스 겐네데>는 '만일 어떤 사람이 낳아지지 않는다면'이라고 할 수 있다. <'/ ejx : 엑스>는 소유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모음 앞에서는 <'/ ejx : 엑스>가 되고, 자음 앞에서는 <ejc: 에크>가 되며, '…으로부터, …에서 밖으로'의 뜻을 가진다. <u{dato" : 휘다토스>는 '물'을 가리키는 중성명사 <u{dwr: 휘도르>의 단수 소유격으로 번역하면 '물의'가 되지만, 전치사 <'/ ejx : 엑스>의 지배를 받아 '물로 부터'의 뜻이 된다. < cai;: 카이>는 '그리고'라고 번역되는, 등위접속사이다. < pneuvmato": 프뉴마토스>는 '숨, 성령, 영'의 뜻을 가진 중성명사 <pneu'ma: 프뉴마>의 단수 소유격으로 '성령의'라고 번역하지만, <u{dato" : 휘다토스>와 마찬가지로 전치사 <'/ ejx : 엑스>의 지배를 받으며, 이를 연결시켜 보면 < ejx u{dato" cai; pneuvmato": 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는 '물과 성령으로부터'가 된다. 이 구절 전체를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부터 낳아지지 않는다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복음을 연결시켜 주는 말이다.
ⓑ 하나님의 나라에(5절) <eij" te;n basileivan tou' qeou':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이 말씀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의 일부이다. <eij" : 에이스>는 목적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어떤 물건이나 또는 그 근처로 들어가는 동작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며, '안으로, 향하여, …에게로'의 뜻을 가진다. <te;n: 텐>은 정관사로 여성 단수 목적격이다. < basileivan: 바실레이안>은 '왕권, 왕국'의 뜻을 가진 여성명사 < basileiva: 바실레이아>의 단수 목적격으로 '왕국을'이라고 번역하지만, 여기서는 전치사 <eij" : 에이스>의 지배를 받아 '왕국 안으로'로 번역된다. <tou' : 투>는 정관사로 남성 단수 소유격이다. < qeou': 데우>는 '하나님, 신'의 뜻을 가진 남성명사 <qeov": 데오스>의 소유격 단수로 '하나님의'라고 번역한다.
㉡이 위대한 중생의 필수성에 대한 진리는 우리 주 예수께 의하여 밝혀지며 좀 더 설명되고 있다(5-8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론을 듣고 자신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여 확언하고 계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5절). 비록 니고데모가 중생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전과 같이 적극적으로 중생의 필연성을 강조하신다. 복음의 교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복음의 교훈에 대한 의무를 피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여 주신다.
첫째, 이러한 복된 변화의 조성자가 누군지, 즉 그 일을 역사하시는 분이 누군지를 보여 주신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5-8절). 그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의 어떤 지혜나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복된 성령의 권능과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이 변화의 본질과 그 역사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영이다. 중생한 사람들은 신령한 지음을 받았다. 거듭난 자들, 곧 신령하게 지음을 받은 자들은 이성적이고 꺼질줄 모르는 불멸의 영혼의 명령과 주장에 따라 육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 변화의 필수성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므로 일의 본질상 이러한 변화가 필수적임을 보여 주신다(6절).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듣게 된다. 즉 우리는 육이다. 영혼은 여전히 영적 실체이긴 하지만 육과 결합되어 육의 뜻에 좌지우지되며 육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이라 부른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러한 상태로는 영이신, 즉 신령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교제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렇게 되었는가? 육으로 태어나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타락한 본성, 즉 육신은 우리의 처음 출생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본성, 즉 영은 두 번째 출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설혹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니고데모가 수백 번 그 어머니 뱃속을 들락날락 할지라도 문제의 핵심을 고치지 못하고서는 여전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따름이다. 부패와 죄는 우리의 본질 안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 만들어졌다(시 51:5). 그러므로 새로운 겉옷을 입는다거나 새로 얼굴을 단장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의 말씀 가운데서 그 필수성을 강조하시고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변화의 필수성을 말씀하셨다. 심령을 고치시는 위대한 의사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거듭나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좇아 행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본질, 우리 본성의 타락을 생각해 볼 때,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필요한 유일의 것으로 그렇게 안 될 일이다.
넷째,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를 비교하므로 설명되고 있다. 그 하나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이 물로 비유되고 있다(5절). 그리고 또 하나는 거듭난다는 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말이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 영혼을 성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 물과 같이 그 영혼을 정결케 하며 그 더러움을 씻어 준다는 사실과 물이 상처 입은 사슴으로 해갈시키고 지친 여행자를 신선하게 하듯이 그 영혼을 시원하고 신선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행하였으며 자신이 또한 베풀어 주기를 시작했던 세례 의식을 염두에 두셨으리라 짐작된다.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겠다는 그 말은 신령한 영적 은혜를 나타내는 가견적 표증으로서, 물로 씻는다는 사실에 의해 성령에 의한 중생을 표상하셨음에 틀림없다. 또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사역이 바람에 비유되고 있다. 발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헬라어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이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임의로 역사하신다. 성령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원하는 사람을 원하시는 정도로 감화시키신다(고전12:11). 성령께서는 강력하게 그리고 분명한 효과가 나타나도록 역사하신다. 그것이 바로 네가 그 소리를 듣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원인은 감추어져 있지만 그 효과는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신비스럽다. 그는 비밀스런 감추인 방도로 역사하신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이 어떻게 임해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우리에게 수수께끼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과 방법은 하나의 신비이다.
요 3:7
gennhqh'nai 동부과수 1080 gennavw 나야 be born be born
a[nwqen. 형부 509 a[nwqen 거듭 again. again
요 3:8 (성령의 주도성)
pneu'ma 명-주중-단 4151 pneu'ma 바람이 The wind The wind
qevlei 동직현능--3단 2309 qevlw 임의로 it listeth, it wishes
인격자 성령은 우리의 응답을 원하심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육안, 지안, 영안
영적인 세계가 주는 풍성함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가나안 혼인 잔치
세메이온(예고)
this beginning miracle
this beginning of his sign
손 씻은 구정물ㄹ을 향기 나는 포도주로
오래 믿었지만 – 영안이 떠지시길
초신자 - 인식
요 3:2
shmei'a 명-목중-복 4592 shmei'on 표적을 miracles signs 요 2:11
shmeivwn 명-소중-복 4592 shmei'on 표적을 of miracles of [His] signs
dovxan 명-목여-단 1391 dovxa 영광을 glory; His gl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