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소설]
잔다리 사람들
전유철(소설가 ․ 평택잔다리족구회장)
-제1부.
족구이야기
제2장. 족구클럽을 만들며 ③
-기다림은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이다.
성구는 주말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한 주를 보냈다. 평소에는 한 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족구클럽 창단을 앞둔 이번 주는 더디기만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약된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림보로 가는 행복의 길목에서 보내는 나날이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이성부 시인의 노래처럼 성구가 기다리는 주말은 느리지만 어김없이 찾아왔다.
드디어, 9월 초 일요일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여우의 말처럼 성구는 아침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터였다. 그 행복을 만끽하다가 성구는 오후 2시쯤 설레는 발걸음으로 운동장에 갔다. 한쪽 족구장에는 가을 초입으로 들어선 햇볕이 아파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황토색 이불처럼 펼쳐져 있었다.
낯익은 사람들이 한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눈빛에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묻어있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우선 먼저 온 서너 명이 네트부터 설치하고 옆 의자에 둘러앉았다.
잠시후, 네댓 명이 운동복차림으로 도착하였다. 성구는 처음 보게 되는 사람들과도 수인사를 하였다. 모두 여덟 사람이다. 저번 주에 만났던 사람 이외에도 두 명이 늘었다. 간단한 소개를 하고보니, 쌍용자동차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구는 클럽을 주선하는 입장에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모두 반갑습니다. 클럽을 만드는 취지는 지난번에 다 말씀 드렸고, 이 자리에서 클럽명과 임원들을 선출하였으면 합니다. 먼저 추천할 클럽명을 말씀해 보세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일별하는 침묵이 흐른다. 잠시 머뭇하다가 만규가 입을 연다.
“클럽이름을 평화로 하였으면 합니다.”
다른 한 사람들이 평화? 라고 발음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승리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승리를 추천합니다.”
이번에는 동재가 주위를 일별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주위 사람 서너 명이 승리? 하고 발음해 본다. 성구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입을 연다.
“제 생각에는 잔다리로 하였으면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세교동인데, 우리말로는 잔다리라고 부르는 것은 잘 알고 있지요? 옛날에 통복천에 작은 다리가 많았던 이유로 세교동이라고 하였답니다. 족구는 머리와 다리로 하는 운동인데 의미는 다르지만 발음상 잔다리와도 맞아떨어집니다. 여기서 잔다리는 세밀한 다리를 의미하므로 세밀한 다리로 세밀한 기술을 익히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다가 그거 괜찮은데, 말하며 수긍하는 눈치들이다.
“더 다른 의견이 없으면 거수로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럽시다!”
이봉걸이라고 이름을 밝힌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소리가 너무 커 옆 사람이 움찔 놀라는 기색이다.
“아, 거수하기 전에 제가 한 마디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이환구라는 사람이 말문을 트자,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한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평화나 승리, 이런 단어는 너무 흔하고 추상적인 단어로 클럽명으로 쓰기에는 거시기한 것 같습니다. 잔다리는 우리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명이기 때문에 클럽명으로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잔다리가 상징하는 세밀한 다리의 뜻도 의미심장하구요. 뿌리도 근거도 없이 추상적인 단어를 쓰는 것은 좀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와, 박수를 친다. 그것으로 거수고 다수결이고 더 왈가불가할 분위기가 아니다.
성구는 자신이 낸 의견의 반응이 좋아 쑥스럽게 느끼며, 그래도 형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추천 클럽명을 하나씩 호명하며 거수를 유도하였다. 결국 잔다리가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아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름은 결정되었는데, 클럽명칭을 족구회로 할 것인가 족구단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족구단’이라면 조직의 규모가 크고 실력도 겸비되어야 하는데, 지금 일천한 조직과 실력으로 어울리는가, 하는 의견이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지금은 비록 일천하지만 앞으로 무한한 발전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고 또 우리들이 추구할 대상이 높아야 발전을 꾀하는데 자극이 될 거라는 의견이었다. 결국 후자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회원이 많아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성구의 생각도 같았다. 꿈은 커야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다음은 임원 선출을 하겠습니다.”
성구는 클럽명칭이 결정되자 뭔가 하나씩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는 것에 힘을 실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 동안 클럽을 만들기까지 수고한 성구 씨가 회장으로 하였으면 합니다.”
성구와 평소에 안면이 있던 이봉걸이라는 사람이 의견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낸다. 성구는 그들의 호응을 받아들이며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감독은 이봉걸, 총무는 신종호가 좋겠습니다.”
정진수라는 사람이 한꺼번에 두 직책을 추천하였다. 감독으로 추천 받은 이봉걸은 연배도 그 중 높은또래이고 족구실력도 월등해서 제격이었다. 총무는 연배가 낮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할 것이란 믿음이 전해졌다. 그 느낌대로 회원들은 마침내 두 사람의 직책을 결정하였다.
“그럼, 우선은 회장, 감독, 총무로 임원을 결정하고 추후에 필요한 임원을 선정하겠습니다. 다음은 회비에 대해 거론해 보죠?”
“회비는 월 1만원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회원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입회비도 1만원으로 하고요.”
총무로 선출된 신종호가 말하며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웃는다. 모두 이견이 없어 회비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럼, 회칙은 제가 다음에 초안을 잡아 프린트해 와서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족구클럽마다 인터넷 카페가 많던데, 우리도 하나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성구가 말하자 회원들이 모두 ‘좋습니다!’하며 슬슬 일어설 채비를 하였다. 족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론보다는 실전을 좋아하는 습성이 누구나 배어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일류 선수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코트로 나갑시다.”
의자에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아니 이제는 엄연한 회원들이 모두 일어섰다.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에는 군인이 아니라 그냥 ‘장정’이라고 부르던 것을 생각하며 성구는 피식, 웃었다. 이제는 우리도 누구누구 사람, 누구누구 씨가 아니라 누구누구 회원으로 부를 수 있는 거였다. 회원들이 일어서 원으로 빙 둘러 섰다.
“잔다리족구단 파이팅! 회원 여러분 파이팅!”
성구가 그렇게 외치자 회원들이 함께 파이팅을 외친다. 서로 하이파이브도 하고 악수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드디어 족구클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성구는 기쁜 마음으로 운동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록 잎새가 무성한 나무들이 더욱 싱그러웠다. 나무들도 그들을 축하해 주는 듯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뭇잎들이 하나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들뜬 몸으로 코트에 들어서는 회원들, 그대들은 느낄 수 있었을까? 함초롬한 가을햇볕이, 신선한 가을바람이,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주위를 날던 새들이, 그대들에게 보내던 축하의 메세지를...
여덟이니까, 네 명씩 한 팀으로 코트 양편에 갈라서는 회원을 따라 성구도 코트에 들어섰다. 가볍게 발과 허리를 흔들며 몸을 푸는 회원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아, 게임을 하기 전에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5분간만 각자 몸들 좀 푸세요!”
감독을 맡은 이봉걸이 한 마디 건너자 회원들이 공을 멈추고 저마다 몸을 움직였다. 회의하느라 몸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날씨가 더워서 충분한 스트레칭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래도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쏟으면 부상하기 쉬운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특히 공격수는 순간적인 힘을 파워로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에 땀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터였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게임에 돌입하였다. 클럽이 창단되고 처음 해보는 게임이었다. 모두들 들뜬 마음이어서인가, 공격과 수비에서 실수가 나와도 웃음들이 쏟아진다. 전혀 어색한 분위기가 아니다. 작은 단체지만 조직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성구는 새삼 분위기를 실감하며 회원들을 하나씩 일별하곤 하였다. 좀 아쉬운 점은, 한 명이 더 있어 심판을 보면 안성맞춤일 거였다. 점수를 서로 머릿속에만 넣고 있으니까 강한 공격을 머리로 수비 한번 하고나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서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점수판도 하나 필요하고, 족구공도 몇 개 필요한 거였다.
잔다리족구회원들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을 하였다. 바야흐로 잔다리의 역사가 시작된 거였다. 저녁 늦도록 게임을 하고 그들은 코트를 거둬들이고 다시 넝쿨 그늘막 아래 긴 의자에 앉았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슈퍼에 다녀온 총무도 합류하였다. 막걸리를 생두부와 김치로 안주삼아 한 잔씩 들이켰다.
“아, 막걸리 맛 좋다!”
공격수였던 조영철 회원이 손등으로 쓱, 입을 닦으며 맛을 돋웠다. 시원한 막걸리보다 그들의 기분이 더 상큼한 듯했다.
그들은 그렇게 조촐한 축배를 들고 다음 주말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운동장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내리고 주위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구장 옆 아파트 창문에서도 불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성구는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가방을 둘러메고 발길을 옮기다가 잠시 족구장을 돌아보았다. 회원들은 모두 돌아가지만 코트 안의 네모난 땅은, 잔다리 회원들이 흘린 땀방울로 목을 축이며 다시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임을 은혜하며 기다리는 두 쪽 네모난 가슴으로 행복함을 느끼며, 한 주일 동안 그렇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