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니, 나의 이십 대는 아름다운 사명과 순수한 젊음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자리가 없어 발령이 나지 않는 중학교 국어과 교사 자격증을 두고도, 초등과 (그당시는 국민학교) 교사 자격증을 사흘 간 보수교육 끝에 쉽게 받아 쥔 나는 안동에서 서북쪽에 있는 서후(西後) 면으로 초임발령을 받았다. 조용한 면소재지인데다 여러 종가가 자리하고 있어 지조와 기품이 넘치는 양반의 고장이었다. 몇 해 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여 "원더풀!." 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한 '봉정사'가 있어 더 유명해 진 곳 서후는, 첫 자취생활을 햐며 3 년 간 고생을 한 곳이기도 했다.
전공과목만 가르치는 것보다 교과목 전부를 가르쳐야 하는 부담감은 적잖았다. 그것을 감수하며 열심히 해 보리라는 각오로 시작한 교직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많았다. 음악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피아노나 풍금을 배워 두지 못한 까닭에, 내일 가르칠 곡을 미리 풍금으로 연습해 두는 일은 기본이었다. 다행인 것은 1~2학년 음악 교과서는 매우 단조로워 달달 연습만 해 두면, 그 시간 수업은 누워서 떡 먹기만큼 쉬운 일이긴 했다. 둘러싸인 산 너머로 해가 늬엿늬엿 지면, 운동장에 깔린 흙바닥이 함초롬히 붉어지고, 교실 안은 어두워 건반이 보일락말락할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풍금에 매달려 지냈다.
또 기성회비를 받아서 각 학교운영을 하던 시기라, 기성회비를 내지 못 하는 아이들은 결석이 잦았다. 나라 전체의 경제가 빈약하던 그 시절엔 기성회비를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산촌의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조르면 학교 그만 두는 게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식이었으니, 학부형만 나무랄 일도 아니어서 가끔씩 '가정방문' 이라 하여 결석이 잦은 아동의 집에 찾아가 학부형의 사정도 알아보고 독려하여, 아동을 출석 시키라는 특명(?)을 띠고 나가는 게 일수였다. 높은 산이 많고 논이 적은 마을이 뜸뜸이 흩어져 있어, 가정방문을 가는 날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출석한 아이를 앞세우고 결석한 아이의 동네를 찾아가기란 쉽고도 어려웠다. 산길을 타며 재빠르게 다니던 아이들은 여선생님 걸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만치 멀리 달아난다. 나는 그 아이들 걸음을 따라 가려면 진땀을 뺄 수 밖에.... 오전 중 수업을 일찍 끝내고 학교를 떠나, 한 두 마을만 다녀도 해가 짧아 동동 걸음을 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숨이 턱 끝에 차 올라도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고통이 따랐지만, 교사라는 사명감이 나를 버티게 했다. 겨우 찾아간 아이 집엔 아무도 없을 때가 많았다. 산골짜기 밭에 일하러 가기도 했고 좀 먼 읍내에 장 보러 가기도 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돌아온 학부모를 만나 보는 것만이, 그 땐 가장 기뻤던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커다란 주전자에 누런 막걸리를 내놓기도 하였고, 어떤 엄마는 감자나 고구마를 급히 쪄서 내오기도 하였다. 시간이 급하여 일어서기라도 하면 새 밥 지어 드릴테니 먹고 가시라며 한사코 말린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인 그들의 소박한 인심에 감동을 받아 쉽사리 뿌리치고 온다는 것은 잔인했다. 기성회비 건은 입 밖에도 못 내고, 어렵지만 아이들 교육은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내일은 꼭 학교에 보내 달라는 부탁만 하고 일어나는 내 손엔 꼭 삶은달걀이나 생달걀이 쥐어진다. 따뜻한 그 정성에 가슴이 메인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에게 어른들은 손을 흔들어 주며, 아이들은 하산 길을 쉽게 안내 한다. 아이들과 산행을 한 젊은 날의 낭만은 피곤한 줄도 몰랐으며, 또다른 시간을 기다렸다.
가을 운동회가 돌아오면 무용복이나 마스게임 복장을 갖추기가 제일 곤란했다. 가장 적은 비용도 못 내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나는 모두 함께 즐거운 운동회를 치렀으면 싶은 생각으로 묘안을 짜냈다. 질긴 문종이에 필요한 물감을 들여 말려서 손바늘질을 하여 입혔다. 무용이나 마스게임을 하루 하는 데 돈 안들이고는그만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 고마워요.! 미안해요! " 소리치며 달아난다. 학부모들도 좋아했다. 운동회 날, 일부러 찾아보고 가는 분이 계실 땐 그것만이라도 고마운 마음에 어깨가 으쓱했다. 소풍 가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1~2 학년 꼬마들에게 따라 나서는 학부모 한 명 없어도 소풍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담임선생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해도 믿고 따라줬다. 그시대 아이들은 그만큼 순수했다.
학교에서 '어린이 신문' 을 구입하라고 할 때도 있다. 몇 푼 안되지만 구독하려는 아이들이 적다. 나는 동시나 동화를 아주 재미나게 구연해 준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쫑긋 듣다가 서로서로 보겠다고 손을 번쩍 든다. 어물스럽도록 티끌이 묻지 않은 아이들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보다, 지진아. 부진아들에게 관심을 더 쏟았다. 그래서 학급 평균 성적은 늘 중 이상을 맴돌았다. 왜냐하면 백 점. 구십 점을 받는 아이들보다 영 점을 받거나 삼십 점 이하의 성적을 구제 하는데, 더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런 게 교사의 올바른 양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첫 부임부터 교직을 그만 둘 때 까지, 1~2 저학년을 도맡아 담임한 일은, 내 인성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사가 다 되어, 뒷날, 나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데 많은 참고가 돨 수 있었다. . 큰 아이의 까다로운 식성도 담임선생님 지도로 고쳤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밥과 반찬을 남기는 아이가 있으면 검사를 해서 깨끗하게 먹도록 음식을 안 남기는 버릇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늘 고마웠다. 얼마전 신문지상에 교권이 땅에 떨어진 두어 건의 기사에 놀랬다. 지나친 엄마들의 간섭에 교사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는 일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테지만, 일부의 교육열이 지나친 모성애와, 학교측의 문제 해결의 소통 부재로 선생님과 아이들을 괴리 시키고 교권을 멍들게 하는 일이 발생한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깝다.
교직은 천직이다. 하늘에서 내려 준 특수 전문직업이다. 그들에게 교육자의 사명감이 없다면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마음놓고 맡길 수 있겠는가? 교직자는 말없이, 사명과 책임있는 양심으로 교단을 지키며 서 있다. 정치행정의 부재로 우리니라 교육의 백년지대계를 세우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이 학부모와 선생님 사이를 볼썽사납게 만들었다 싶다. 어느 계통이나 물 흐리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겐 엄중하게 법으로 다스리고 '스승의 날 ' 하루만이라도 스승과 제자가 베품과 배움에, 꽃다발 한 묶음의 소박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풍경이 이 땅에 펄쳤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올 스승의 날, 휴업한 학교가 꽤 된다고 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촌지 때문에 생긴일이라니...... 적어도 내가 학교에 근무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요즘 사태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황금만능 시대라고 하지만 아무렴 교권조차 땅에 떨어진 것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다. 교육공무원이면 으젓한 국가공무원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와 의무가 있다고 배운 나는 이해가 안된다. '스승의 날' 운동장에서 전교생들이 모여 줄을 서 있고, 그 맨 앞줄에 서 계신 담임선생님에게 반장 아이가 대표로 나와서 담임선생님 왼쪽 가슴 옷깃에 빨간 카네이숀을 달아주면 아이들은 모두 손뼉을 치고, 빨간 꽃송이의 향기가 코끝에 닿아 감미로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대단한 자부심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는데, 사제지간에 그런 감격조차 누릴 수 없도록 세상은 혼탁해졌다는 말인가? 불신은 독약이지 않는가. 여하튼, 교육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나아갈 때, 나라가 바로 선다는 확신만 든다. 낭만과 정열이 넘치던 떠나 온 그 교단이 가끔 꿈속에 보인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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