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FP 2011-3-24 (번역) 크메르의 세계 크메르루즈 시대 강제결혼의 희생자들 Heartache of Khmer Rouge forced marriage victims 기사작성 : Michelle Fitzpatrick

| (사진) 전문가들은 크메르루즈 정권이 수만 쌍의 남녀를 강제로 결혼시켰다고 말한다. |
(프놈펜)---1976년 크메르 루즈가 팔라(Phalla)에게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할 것을 명령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악명높은 '킬링필드(Killing Fields)'에서 살아 남고자 한다면 무조건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 집단수용소에서 이미 그녀의 사촌과의 결혼을 거절함으로써 간부들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그 같은 도전은 두 번 다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만일 제가 여전히 (결혼을) 거부한다면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셈이죠."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재교육이란 일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결국은 결혼에 동의하고 말았어요." 54세의 팔라씨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본명을 감춰달라고 요청했다.
전문가들은 크메르 루즈가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고 말한다. 가끔은 대규모 결혼식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폴 포트(Pol Pot)의 인구증가 계획의 일환이었다.
권력자들은 개인의 삶을 모든 측면에서 콘트롤할 수 있기를 원했고 가족의 유대감을 깨뜨리고자 노력했다. 국가는 가족과 개인 모두가 원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강경 공산주의자 정권인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에 농업주의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매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75년부터 1979년 단 4년만에 200만이 넘는 인민들을 중노동과 굶주림 그리고 사형으로 죽음으로 몰아 넣은 책임을 떠 안게 됐다.
이 같은 운동을 이끈 가장 연장자인 4명의 지도자들- '제2인자' 누온 찌어(Nuon Chea), 전 국가수반 키우 삼판(Khieu Samphan), 전 외무장관 이엥 사리(leng Sary) 그리고 전 사회분야 장관 이엥 띠릿(leng Thirith)-은 UN이 세운 법정에 출석해 집권 기간에 행한 잔혹한 범죄에 대해 단죄를 받을 처지가 됐다.
기소 내용 가운데는 강제결혼 역시 인간성을 해한 범죄로 포함됐고, 재판은 이들 강제결혼 당한 남편과 아내들에게 정의를 되찾을 수 있는 최초의 토론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600쌍 이상의 강제결혼의 희생자들이 다가오는 공판에 시민사회 측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고 시민사회 이해당사자를 위한 해외 선임 공동 변호사인 실케 스투진스키(Silke Studzinsky)는 AFP에 말했다. 많은 이들이 증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 (사진) 크메르루즈 정권은 모든 형태의 개인적 요소를 분쇄하고, 가족적 유대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
공소내용에 따르면, 당시 결혼(결합)이라 함은 "일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한 방편이었고, 특별히 출산을 목표로 한 생물학적 관계 지움이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캄보디아 방식의 결혼과는 황량하게 대비되는, 폴 포트의 대규모 집단 결혼식이란 그 어떤 축하의 느낌도, 가족도 참석하지 않고 진행된 침울한 행사였을 뿐이라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관계기관이 남자의 이름과 여자의 이름을 지명할 뿐이었어요." 팔라 씨는 회상했다. "그들은 우리더러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맹세하라고 다그쳤어요. 그것이 제가 제 남편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많은 강제커플들이 결혼식을 치른 당일 밤, 그 결혼을 '완성'시킬 것을 강요 받았다고 증언한다. 강제로 결혼한 커플을 위해서 대나무 위에 나무로 만든 방을 만들어 허울좋은 밀실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호젓하게 남겨지지 않았다.
"군인들이 우리집 아래 쪽에서 앉아 있었지요. 우리가 잘 지내는 지 혹은 싸우는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코 거기에 있었어요. 마치 오누이처럼 말이죠." 그 다음날 이 (신혼) 부부들은 각기 자신들의 거처로 분산됐고, "아주 가끔식"만 미리 약속하고 재회할 수 있었다.
크메르 루즈 정권이 권력에서 물러난 1979년 이후 얼마나 많은 커플들이 실제 임신을 했는지, 혹은 갈라섰는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크메르 루즈가 물러난 이후,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갈라서는 일은 다반사였죠." 스투진스키는 말했다. "그러나 몇몇은 함께 살기도 했어요, 대부분은 강제 결혼으로 인해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팔라도 결혼을 유지했다. "폴 포트 정권 아래서 제 남편은 제 말에 귀기울여 줬어요. 그는 제 권리를 존중한 거지요. 저를 학대하거나 강간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결과적으로 저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여전히 팔라는 중대범죄가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서로의 진정한 반려자를 선택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에요. 저는 그 상황에 대한 정의를 되찾고 싶습니다."
뉴저지에 있는 룻거스 대학 소속 나탈래 앤더슨(Natalae Anderson) 연구원에 따르면, 르완다 시에라리온 혹은 우간다에서 벌어진 강제결혼--여기서는 남편이 주로 가해자가 된다--과 달리 캄보디아의 강제결혼은 남성들까지도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강제결혼은 다른 국가들에서의 사례와 비교해 무척이나 독특한 유형입니다." 그녀는 지난해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ocumentation Centre of Cambodia: DC-Cam)에 제출한 보고서에 크메르 루즈의 잔학성에 대한 증거를 모아 놓기도 했다.
감시자들은 이 사례가 길고 복잡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이 네 명의 피고인들은 기소내용을 부인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지난해 7월에 이뤄진 크메르 루즈 정권의 수용소장 깡 껙 이우(Kaing Guek Eav)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참고해야 한다. 일명 '돗(Duch)'으로 잘 알려진 깡 껙 이우는 1만5000명의 죽음에 대한 감독관의 책임으로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돗과 검찰 모두 판결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의 항소심은 다음주에 열릴 예정이다.
이 재판에는 강제결혼 희생자에 대한 개별 보상금은 존재하지 않고 대신 재판관은 대안적 형태의 '집단적 그리고 도덕적' 구제책에 대해서 요청해왔다. '교육 프로그램'과 '기념일'이 아이디어의 하나로 제안되기도 했다.
신 반(Sin Ban)은 시민사회단체 측에서서 "우리의 권리가 욕보였기 때문이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이제 57살의 농부인 그는, 자신이 속한 농민공동체 관료들로부터 베트남에 의해 나라가 자유를 되찾기 불과 일주일 전에 절름발이 여성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자유를 되찾은 순간 그녀를 떠날지 심각하게 고민했음을 인정했다. 이날 지팡이에 의지한 채 참석한 여섯 자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저는 그녀가 이미 부모를 잃었고 스스로도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녀가 너무 불쌍해 그녀를 돌봐주리라고 결심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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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악마같은 행위를 했군요.
이 결혼의 후유증이 상당한 것 같은데.. 아직 많은 연구가 안 되어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중후반 출생자들 중에
이러한 출생배경으로 인해, 불행하게 성장한 인구가 제법 된다고 하는데..
그나마 이번 재판으로 인해 조명을 받게 된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