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구례 수오당 글 사진 이형권 구례군 산성리 절골에 가면 저물어가는 지리산의 뒷모습 같은 슬픈 집 한 채가 있었다. 이름 하여 수오당(羞烏堂), 한낱 미물인 까마귀의 효행을 보고 부끄러워 까마귀가 부끄럽다는 뜻의 당호를 지닌 이 집은 금환락지에 자리 잡은 저 운조루와 짝을 이룰만한 큰 집이었다.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의 소슬한 모습이 마치 깊은 산중, 면벽에 든 노승을 보는 듯 고요하였다. 버드나무 가지에 앵무새가 지저귄다는 명당에 터를 잡아 남도 소리꾼들의 율려(律侶)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미 인연을 다한 듯 빈집을 떠도는 바람소리가 가득했었다. 서편제의 송화가 돌부리에 넘어지던 돌담길을 기억할 것이다. 떠돌이 소리꾼 부녀가 어느 부잣집의 사랑에 묵으며 눈먼 여식의 머리를 빗겨 주며 나누던 대화. 근처에 절이 있는가보죠. 저 너머에 백련사라는 절이 있다는 구나. 노을이 지는가 보죠. 그래, 붉고 큰 노을이다. 저는 이제 노을과 반짝이는 별들을 볼 수 없게 되나요? ............ 아버지 저 소리하고 싶어요. 이윽고 누마루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이 거문고를 다스리고 유봉은 잔 북 가락을 일으키고 송화는 사철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동생과 송화가 소리로서 밤을 지새우던 마지막 장면보다 이 거문고 가락에 실린 아버지와 딸의 마음이 더 절절했던 것 같다. 그 집이 바로 구례 절골 수오당이다. 처음엔 화전을 일구었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근면하여 천석꾼이 되었고 어찌어찌 양반치레를 한 집이었다. 하지만 근본이 한미하다 구례 토족들의 괄시가 심했고 그 한을 다스려 떠돌이 소리꾼을 식객으로 불러 풍류를 즐겼던 집 번듯한 양반가에 기죽지 않으려고 서까래 하나에 쌀 한 섬씩 주고 지리산 적송으로 지었다는 집 이 집 처마 밑에서 국창 송만갑도, 만정 김소희도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단소와 거문고로 한 세월을 살다 간 백경(白耕) 김무규 선생이 살았다. 내가 처음 그 집을 찾았을 때에는 뜰 앞에 영산홍이 흐드러지던 날 한숨소리처럼 깊은 대숲과 돌담길이 영화 속 그대로였다. 다만 적막해진 사랑채 누마루에는 무정한 세월의 잔해가 켜켜이 쌓여 있을 뿐 이미 삶의 기운을 잃어버린 듯 마음 둘 데가 없는 풍경들이 안쓰러웠다. 그곳에, 늙은 아들과 생애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여인네의 손길이 떠나버린 삶의 처소가 얼마나 초췌한 것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 숲속에서 뻐꾹새가 서럽게 울어댔다. 그 알 수 없는 적요 속에 우리 시대의 마지막 야인(野人) 백경 선생이 누워 계셨다. 백경 선생은 천석꾼의 아들로 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 때 우국지사 매천 황현선생의 손녀딸 묘숙과 혼인하였고 금란회(金蘭會)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에는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랠 길 없어 명륜전문학교에 진학, 북경대학 유학을 꿈꿨으나 중일전쟁으로 뜻이 꺾이고 말았다. 중국행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 백경은 크게 낙심하였다 그때 부친께서 마음 붙이라고 인연을 맺어 준 것이 단소였다. 당시 수오당 사랑방은 내로라한 명인들이 모여 들던 풍류방이었다. 거문고 김윤덕, 해금 김화중, 단소 전추산, 명창 송만갑, 고수 신윤직 모두 기라성 같은 당대의 풍류객들이다. 부친은 먼저 추산 선생을 식객으로 모셔 단소를 배우도록 했다. 추산(秋山) 전용선, 고부 사람으로 전무후무한 단소의 명인 그는 예(藝)를 돈과 바꾼 일이 없이 평생을 단소가락에 의지해 표표히 떠돌던 율객이었다. 남긴 것이 있다면 허공으로 날려 보낸 신령스러운 소리뿐 사람들은 그에게 죽신(竹神)이 들었다 했고 대나무 지팡이를 불어도 소리가 난다고 했다 정악 단소에 달통했고 그로도 풀지 못한 한이 있어 산조 단소를 창안한 그가 피리를 불면 하늘의 달도 고요히 발길을 멈춘다는 신기(神氣)의 소유자였다. 백경 선생은 자신의 처지와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듯 단소에 빠져들었다. 성질이 괴팍하고 까다로워 제자를 두지 못했던 추산 선생도 백경의 성품을 높이 사 자신의 단소가락을 물려주었다. 지리산의 호젓한 산사를 찾아 스승을 모시고 다니며 영산회상, 청성곡, 굿거리, 산조 가락을 익히고 다듬어갔다. 처음엔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것이 평생의 반려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이때 스스로를 백경(白耕)이라 자호하였다. 두메산골에 묻혀 흰머리로 밭이나 갈며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 죽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는 또 단소를 배우던 사이 거문고에 매료되었다. 오동판을 훑어 내리는 술대소리에서 장부의 기상을 알만했고 그윽하게 울리는 선율에서는 선비의 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거문고를 물려준 스승은 우당 김윤덕이다. 어느 날 우당 선생이 백경의 거문고를 듣고 자네는 나중에 산조꾼이 되겠어 하고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려 했다. 그때 백경은 산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는 못했다. 정악이 우아하고 단아한 양반의 품격을 갖춘 소리라면 속악이라 부르는 산조는 분방하게 인생의 애락(哀樂)을 표현했다. 그래서 정악은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프되 비(悲)까지는 가지 않는 절제가 있고 산조는 창자까지 끊어내는 슬픔으로 치달려 가는 음악이다. 백경 선생은 산조에서 오히려 단소와 거문고의 깊은 맛을 느꼈고 이리하여 향리를 떠돌던 줄풍류의 마지막 계승자가 된 것이다. 풍류는 사특한 마음을 지우고 하늘에 다가서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자연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낱낱의 현상을 아우르는 말. 그래서 풍류는 풍속의 흐름이라 하여 한 시대의 문화를 뜻하기도 하고 자연 인생 예술이 일체화된 삼매경에 대한 미적 표현이 되기도 한다. 옛 사람들은 상고시대로부터 풍류로서 하늘의 세계와 융합하려 했으니 풍류는 하늘을 섬기는 도(道)요. 내 안에 신명(神明)을 모시는 예(禮)였다. 하늘과 인간이 합일된 존재양식, 거기에 시가 있고 그림이 있고 거문고가 있고 술이 있고 노래가 있었다. 이는 자기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로 넓어지는 길이었으니 도의(道義)로서 몸을 밝히고 가악(歌樂)으로 교화되는 모든 것이 풍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국선(國仙)들이 수양하던 현묘한 도(道)였고 조선의 선비들이 아욕(我慾)을 버리고 근본으로 돌아가 길이었다. 순수한 천성을 회복하는 이복기성(以復己性)의 길 초야를 떠돌던 은일자(隱逸子)에게 풍류는 술과 자연과 거문고를 벗 삼아 세속을 버리는 아름다운 유희였다. 그 속에 백경의 길이 있었다. 울분을 간직한 지사처럼 큰 뜻을 펼치려했지만 그가 돌아온 자리는 언제나 초야를 떠돌던 은자의 삶이었다. 한 때 인재를 키우기 위해 사학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불의를 참지 못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향토사를 기록하고 지역 문화사업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모질지 못한 성품은 세속의 영화를 붙잡지 못했고 그 많던 재산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말년에 남은 것은 병든 아들과 거문고와 단소뿐이었다. 구례문화원 뒷방에서 식당밥으로 끼니를 연명할 때도 그의 곁에는 오로지 단소와 고금(古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생을 허망한 꿈을 쫓다 흩어진 저 하늘의 피리소리 같았다 백경 선생이 마지막까지 마음을 다한 것은 구례 향제 줄풍류 수오당과 같은 양반가의 사랑에서 율객들이 즐기던 풍류였다. 궁중음악에서 전승된 서울의 경제풍류에 구별해 향제풍류라 했는데 경제가 기름지고 화려한 맛이라면 향제는 깊고 정갈했다 부처님이 영산에서 설법하시던 날의 거룩한 영산회상을 거문고, 가야금 단소, 대금, 해금, 장고가락에 실어내던 연주 불교음악을 유교적 어법으로 발전시켜 군자의 덕에 이르고자 했던 풍류였다.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가 주가 되면 줄풍류 향피리와 같은 관악기가 주가 되면 대풍류라 했으며 줄풍류는 절제미가 뛰어난 실내악으로 지식층 율객들이 향유했고 대풍류는 감정을 발산하는 폭이 커 한을 다스리는 무속인들이 즐겨했다. 구례 땅에서 울려 퍼지던 줄풍류는 전주 남원에서 하동 진주에 이르기까지 섬진강을 따라 흐르던 율객들의 소리였고 그 마지막 풍류방이 절골 수오당이었다. 백경선생은 생애 마지막을 수오당 마저 남의 손에 저당 잡히고 오롯이 구례 향제 줄풍류의 명인으로 살다 가셨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1979년 서울 공연에서다 전국의 숨은 예인들을 불러 모아 무대를 열었던 공간 사랑에서 도포자락 날리는 훤칠한 선골풍(仙骨風)의 풍류객이 내는 소리에 모두들 추산의 전설적인 단소 가락이 살아왔다고 했다. 때로는 절절히도 구슬프고 처량한 가락으로 때로는 아무런 기교에도 물들지 않는 담백함으로 그의 소리는 추산의 가락에 오히려 농현을 줄이고 감정을 절제하여 슬픔을 관조하는 중려음의 편안함으로 숨죽인 좌중들을 압도하였다 그후 백경은 흩어진 율객들을 모아서 잊혀 진 향제 줄풍류를 재현하였고 1985년 구례 향제 줄풍류의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정치바람에 휩싸여 허망하게 보내고 환갑의 나이를 넘기고서야 그 헛된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잡은 단소와 거문고소리에 잃었던 예(藝)의 기운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애달팠던 그 세월마저 저물어 가려는 것인가. 1993년 내가 백경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 소리는 온전치 못했다. 예의 단소와 거문고는 머리맡에 놓여 있지만 하늘에 닿고 땅을 울리던 그 소리에는 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먼 길을 찾아와 소리를 청하던 젊은 길손에게 선생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흰 두루마기를 꺼내 입으셨다. 휘청이며 허름한 입성을 벗어내던 선생의 육신은 처량한 거문고소리가 튕겨 나올 듯 말라 있었다. 평생을 흰 머리로 살며 밭이나 갈겠다던 사람 단소가락에 의지해 신산고초의 세월을 건너온 한 인간의 몸짓에는 소리의 혼들이 이슬처럼 흥건히 맺혀 있었다. 병석에 일어나 마지막 소릿길을 닦으시려는지 수오당 누마루로 향하셨다. 단소는 아랫배로 불어야하는데 뱃가죽이 헐거워 바람소리가 새어버린다고 바닥에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소리를 일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단소는 끝내 제 가락을 토해내지 못하였고 백경선생은 눈을 감고 구음(口音)으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이나 나이나 나이나 나나............ 그 소리는 마치 앙상한 뼈마디에서 새어나오는 듯 애원 처절하였다 퇴락한 옛집의 처마 밑에는 온갖 소리의 넋들이 떠돌고 있었고 오래된 먹감나무 가지에서는 여린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다시는 절골에 가지 못했다. 정녕 아름답고 슬픈 것이 흘러가는 세월이란 말인가. 백경선생이 몸을 가눌 수도 없이 기력을 잃었다는 소식과 함께 1995년 8월 14일 87세의 예인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얼마 후 경매처분 된 수오당이 뜯겨져 어디론가 팔려갔다고 했다. 그리운 분들께 보내주신 답신에 일일이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며칠 동안 내 마음은 줄곤 추산과 백경 선생의 단소소리에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은 좀체 마무리가 되지 못했고 생각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한때 나는 글쓰기를 하지 않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습니다. 나의 생계형 글쓰기는 무디고 어눌한 재주로 낙망스러울뿐 다른 방편을 가지지 못해서 언제나 무거운 가슴 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쩜 발품을 팔며 그토록 답사에 집중했던 것도 카메라를 들고 풍경 속을 전전했던 것도 기실 글쓰기의 버거움을 피해보고자 했던 소치였습니다. 발이 묶이고 보니 그래도 한미한 재주일망정 쓰는 일에 몸이 돌아와 있습니다. 백경선생 이야기는 90년 초 광주 잡지사에서 알게 되었고 수오당은 93년 세상을 떠돌면서 찾았던 곳입니다. 한 일가의 몰락과 파란만장한 선생의 일생이 한없이 외롭고 쓸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백경 선생은 의연하고 너그러웠습니다. 병중임에도 가난한 길손에게 하루 동안 벗이 되어주시던 분 선생을 졸라 거문고와 단소를 들었던 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이제 선생께서 세상사를 훌훌 털고 지리산에 올라 부르던 섬진강의 저녁 물길처럼 처연한 선율은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철쭉꽃 피는 세석의 달밤에 단소를 불자 그 소리를 듣고 산짐승이 찾아와 텐트를 득득 긁고 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친의 유업으로 남겨진 수오당을 그 자리에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세상인심은 싸늘했고 남아 있는 것은 술병에 찌든 나이든 자식과 회한이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참담함에 목이 메었고 언젠가는 당신의 피리소리를 아름다운 시로서 기억하게 하리라고 약속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94년 경향신문에 연재할 때 선생의 야기기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글이 나가고 이틀 후에 선생은 거짓말처럼 돌아가셨습니다. 한없이 미진한 글이어서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탈고를 한 느낌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인생과 예술이 가 닿는 비감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07년 12월 13일 무심재
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첫댓글 좋은 글 퍼오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작년에 뭣도 모르고 절골에 다녀왔는데..절골이 유서가 깊은 곳인가봐요? 돌담길을 거닐어보는것도 나름 운치가 있을듯하내요.
첫댓글 좋은 글 퍼오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작년에 뭣도 모르고 절골에 다녀왔는데..절골이 유서가 깊은 곳인가봐요? 돌담길을 거닐어보는것도 나름 운치가 있을듯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