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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b.1958)은 홍천에서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흙을 구워내 검은도자기(흑유)를 만들어내는 도공이다. 이정섭(b.1971)은 홍천에서 끌과 망치와 대패로 나무를 다듬고 쇠를 두드려 가구를 만들고 나무집을 짓는 목수다. 두 작가 모두 홍천에 기반을 두고 활동을 하지만 나이 차이도 있고 학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적으로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다. 둘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작가이다. 그런 둘이 합동전을 열었다. 이 둘의 작업에서 둘의 세계를 잇는 점을 찾아내고 그 공통점의 지평을 탐구하며 합동전을 성사시키고 조직한 이가 정영목 교수(서울대 미술관장)이다. 정 교수는 왜 둘의 세계를 묶어 보려고 했을까. 결과론적으로 보면 재료의 물성과 에너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두 사람이지만 과정은 많이 다르다. 김시영은 엔지니어 출신(연세대 금속공학과)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작업 초기 그는 가마의 불길의 흐름과 온도를 계량화하고 측정하고 지도를 만들면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불의 장난’으로 불리는 가만 안 불길의 움직임에 작품을 맡긴다. 계량(과학)에서 비계량(예술)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김시영은 엔지니어 출신(연세대 금속공학과)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작업 초기 그는 가마의 불길의 흐름과 온도를 계량화하고 측정하고 지도를 만들면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불의 장난’으로 불리는 가만 안 불길의 움직임에 작품을 맡긴다. 계량(과학)에서 비계량(예술)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1300도가 넘는 가마 안은 흙의 에너지와 불의 에너지가 팽팽히 맞붙는 전쟁터이다. 흙은 도공이 다듬은 흙의 물성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불은 그가 움직이는 골마다 온도라는 매개를 통해 다른 문양과 색을 낸다. 불의 움직임을 견디지 못하는 흙은 무너져 내린다. 도자에서는 이런 불의 운동에 따른 우연적인 결과물을 예술로 받아들인다. 한쪽이 무너져내리고 이지러진 달항아리의 ‘예술’이 대표적인 불의 장난이다. 정영목 교수는 파형 작품을 주목하며 “김시영의 작품은 이번에는 기능성 보다는 작품성‘, ’정통 보다는 일탈‘, ’아름다움 보다는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연출했다”고 주목했다. 정 교수는 이번 전시에 출품할 작품으로 파국을 맞이한 작품보다는 아슬아슬하게 파국을 면한, 어깨와 주둥이가 함몰된 작품을 지목해 전시를 꾸몄다. 에너지가 격렬히 맞붙었던 대파국의 상황을 담은 작품은 ‘너무 튄다’는 이유로 막판에 뺐다고 한다. “기획자가 이번 전시에서 최소한의 기능과 최대한의 형태미를 염두에 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전시장이 백악미술관(일중 김충현기념관인 고로 일중선생님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영광이었다. 김시영, 그는 대학 때 산악반이었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다 만난 가마터에서 검은빛 사금파리를 만난 뒤 그는 도예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설악산에 귀때기청봉이라고 있다. 능선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고 너덜지대라고 큰돌이 쏟아져내린 계곡이 있다. 거기 돌에선 어마어마한 자연감과 무게감이 풍긴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그런 자유로움이 이번 작업에서 느껴지길 바랬다. 이건 두뇌에서 나온 감각이 아니라 자연, 자유로운 형태에 중점을 둔 작업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 선을 예쁘게 낸 작품을 내지 않았다.” 김시영의 작업이 불의 에너지와 흙의 에너지가 맞붙는 치열한 전투의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 것과는 달리 이정섭의 작업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세심함과 집요함을 통해 작품에 생명을 부여한다. 뭉텅이째 툭툭 잘라내 쌓아올린 듯한 그의 플랫 시리즈도 실상 나무가 뒤틀리거나 높이가 맞지 않으면 책상이라는, 테이블이라는 기능을 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이렇다 할 장식도 없이 오직 장식적 표현을 덜어내는 데 집중했을 것 같은 그의 작업은 실상 치밀한 계산과 다듬기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서울대 미대)한 뒤 평면 작업을 선보이던 그가 비계량적인 세계에서 계량이 꼭 필요한 목가구의 세계로 전향했다는 점은 김시영의 행보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정영목은 이정섭 작가에 대해 “작품의 스케일이야말로 이 목수의 작품을 평가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물질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스케일의 변화란 그 ‘노하우’의 경험에 결정적인 차이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특히 공간 전체를 다루어야 하는 작업일 때에는 그에 따르는 계량적인 정교함을 태생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쇠와 함께 그가 미니멀풍의 작업을 시도한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이정섭 목수의 조형적 장점과 성정이 반양되었다”고 평했다. 이정섭 작가는 이번 전시에 그간 선보였던 목조 작품은 물론 쇠를 두들겨 앉은뱅이책상과 본체는 나무로 만들고 상판은 철로 만든 테이블 등 스틸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는 이 상판을 수없이 두들기고 다듬어 마치 흑유의 표면처럼 반짝이게 만들었다. 그에게 이런 질감을 표현한 의도가 있냐고 물어봤다. “내가 작품을 만들 때는 어떤 의도 같은 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정섭의 궤적은 좀 더 기이하다. 마산고 중퇴, 서울대 서양화과 건성으로 졸업,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지하보도에서 첫 개인전, 태백에서 목수 일 배운 뒤 '내촌목공소' 설립, 청담동 명품 브랜드로 등극. 대목(大木)으로 전환해 집도 짓기 시작한 그는 "한국 건축계의 벼락같은 축복" "면허 없는 건축가의 치기 어린 실험"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홍천에 살면서도 북쪽 끝, 동쪽 끝에 살아 만날 일 없던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작품을 알아봤다. "솔직히 난 도자기가 싫어요. 대부분 전통을 이미테이션하니까. 근데 김시영의 흑자는 다르더라고요. '도자기' 하면 떠오르는 도자기가 아니라서! 인생을 걸 만하죠." 정형(定型)에서 벗어나려는 두 사람의 실험은 끝이 없다. 이정섭은 1년 전부터 쇠를 다룬다
. "강렬한 에너지가 좋아서요. 철근 콘크리트로도 실험해요. 나무나 쇠로 만들 수 없는 수십m 길이 가구도 콘크리트로는 만들 수 있으니까." 김시영의 '제멋대로' 자기도 계속 진행 중이다. "그거 아세요? 가마 온도가 너무 높아 도자기가 주저앉는 찰나에 정말 멋진 그릇이 나온다는 거.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을 구현해보고 싶어요." 2009년도에 내촌 이정섭목공솔르 다녀왔었다. 리움박물관회원답사였다 산과 하늘만 보며 살던 마을 내촌의 큰골에 2001년, 집 짓던 목수 이정섭이 터 잡고 가구를 만들며 내촌 목공소는 시작되었습니다. 낡아 버려진 곡식 창고에 문화를 채우고, 정직한 이들이 만든 정직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도 문을 엽니다. 내촌 목공소의 목수들은 가구를 만들고 집도 지으며, 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이 마을이 상하지 않게, 사람들이 치우침 없이 온전한 일상을 살아가는 곳. 그리하여 마을, 내촌입니다. 참고 인내하는 마을입니다.
휴대폰조차 터지지 않는 산골짜기 내촌 마을에 목수 이정섭은 꼬박 넉달 동안 미장도 타일도 전기도 수도도 보일러도 모조리 혼자 힘으로 해내어 그의 살림집과 목공소를 지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정성어린 노동이 깃든 그의 집과 목공소를 시작으로 내촌 곳곳의 낡은 창고 오래된 철물점, 쇠락한 상회건물 이발소 들이 각각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이 좋고 나무냄새가 좋아 산속에 혼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생선의 등뼈를 연상시키는 천장의 모습을 보니 집 전체가 거대한 나무 조각이고 하루 종일 나무 깎는 일이 지루하지 않다는 이 고집스런 목수가 바로 이정섭입니다. 그는 잘된 집은 자연과의 어우러짐이라 생각하며 그런 집과 어우러지는 좋은 나무로 만든 가구, 편안하고 실용적이어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 그런 가구를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사람입니다. 현대적인 디자인이 눈에 띄지만 그가 만든 목 가구에 손을 대면 어느새 옛 장인들이 목재를 다루는 섬세함과 마주하게 됩니다.
깊은 산골 숲속 내촌에 나무로 만든 한옥집내촌목공소에서 나무로 만든 가구와 공예품들을 만지며 나무이야기를 들으며 바람따라 숨쉬는 나무같은 하루였습니다 .
목공소 전시공간 2층입니다 내촌목공소에서의 이정섭씨를 떠올리며 오늘 백악미술관 전시를 보는 느낌이 남달랐다는 생각이다. 그때 인상적이었던 만큼 오늘 더 애틋한 감정으로 작품들을 보게 되어 많이 행복하기도 했다. 그때 눈길을 끌던 작품 하나가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