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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log.naver.com
[建國 60주년 기획] 건국의 주역들 - 초대 부통령 省齋 李始榮
全재산 팔아 50여 식솔 이끌고 만주行…『신흥무관학교』세워 建國의 기틀 세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묘소 아래 움막에서 살고 있는 99세 며느리와 李始榮의 직계가족들
▲초대 부통령 취임식 당시 모습(1948년 7월 24일 토요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省齋 李始榮(성재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徐且喜) 여사는 올해 99세다. 성재 선생은 1953년 4월 작고해 서울 정릉에 안장됐다가 1964년 수유리로 천장했다. 徐여사는 성재의 묘소 바로 아래 움막에서 시아버지 묘를 32년째 侍墓(시묘)하고 있다. 徐여사 곁에는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막내딸 李再元(이재원·57)씨가 수발하고 있었다.
성재의 집안은 6·25전쟁으로 불행이 연거푸 닥쳤다. 성재를 비롯한 6형제를 수발하던 둘째 아들 李圭悅(이규열)씨가 1952년 12월 세상을 뜨자, 낙담한 성재마저 4개월 후인 1953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고년 주둥이가 벼락이니 법률공부를 시켜라』면서 귀여워하던 막내 손녀 李再元씨마저 소아마비가 찾아왔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북한산 등산코스를 따라 300m쯤 오르면 성재 李始榮 선생의 묘소가 나타난다. 묘지 아래에는 14평 남짓한 움막이 있었다. 성재의 손자 李鍾文(이종문·70)씨가 『누추해 민망하다』며 집 안으로 안내를 했다. 움막 입구에는 다 타버린 연탄 십여 장이 쌓여 있었다.
옥색 스웨터 차림의 徐且喜 여사는 허리가 굽었을 뿐 건강이나 기억력은 아직 괜찮아 보였다.
『시아버지는 6·25전쟁 중이던 1953년 피란처 부산에서 서거했습니다. 시아버지에 대한 정부의 평가는 인색했어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후손들은 시아버지의 묘소를 국립묘지로 옮기고 싶어 하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1976년 사정을 전해 들은 李敏雨(이민우) 당시 국회부의장이 내놓은 60만원으로 선생의 묘지 인근에 움막집을 마련했고, 며느리 徐且喜 여사가 32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다.
徐且喜 여사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큰아들은 네 살 때 상하이(上海·상해)에서 사망했고, 경기女高를 졸업하고 이화女大 영문과에 입학한 큰딸은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다. 둘째 아들은 경기高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셋째 아들인 李鍾文씨는 가난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나 중병을 안고 귀국했다. 그는 현재 100세 가까운 노모, 소아마비인 막내 여동생과 함께 움막에서 살고 있다.
성재 선생의 후손들은 보훈처에서 나오는 연금 80만원으로 움막에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성재 선생이 부통령을 그만둔 이튿날부터 끼니 걱정을 했다는 후손들은 『청백리였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물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徐여사는 『시아버님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며느리라며 대해 주셨는데,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시아버지 묘소를 지키다 죽으련다』고 했다. 徐且喜 여사는 성재 선생의 차남 李圭悅과 1933년 혼인했다. 보성학교 교사를 지낸 친정아버지 徐庭卨(서정설)과 성재는 世交(세교: 대대로 맺어 온 친분)를 나눈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혼례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에서 치러졌고, 古下 宋鎭禹(고하 송진우) 선생이 주례를 섰다.
『시아버지께서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하객이 1000여 명 몰려들었습니다. 日警(일경)들이 비상이 걸렸죠. 축의금으로 가져온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져갔어요. 신혼살림에 보태라고 준 돈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준 게지요.
개성상인(松商)으로서 1930년대까지 대구 약령시를 주름잡던 金弘祖(김홍조)씨가 50만원을 快擲(쾌척)했어요. 독립문을 짓는 데 3852원이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돈이겠어요? 시아버지께서 환국하시자마자 金弘祖씨 산소를 제일 먼저 찾으셨어요』
徐且喜 여사는 결혼한 지 보름 만에 남편 李圭悅과 함께 시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났다. 출발 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現 판문점)에 있는 시댁 祠堂(사당)에서 부부가 단출하게 조상들께 폐백을 올렸다고 한다. 徐且喜 여사는 남편과 함께 인천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결혼 보름 만에 시아버지 찾아 上海로
▲1933년 서차희(徐且喜) 여사가 결혼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찍은 사진.
단발에 중국풍으로 옷을 입었다.
『일경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중국인처럼 가장하고 배를 탔습니다. 더운 날씨라 옷 보따리 하나에 큰 돗자리 두 개, 놋세숫대야 하나를 가져갔어요. 남편은 축의금이 든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상하이 임정 요인들이 소금이 없다고 해서 소금을 보따리에 넣었고요』
남편 李圭悅은 옌타이(煙台)를 거쳐 상하이로 들어가는 이틀 동안, 신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신부가 무심결에 한국말이라도 하면 당장 일경의 감시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결혼식날 처음 보았지만 시아버지도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만났어요. 「아가야, 먼 길에 고생했구나」 하시면서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참으로 인자하고 깔끔한 선비라는 인상을 한눈에 받았습니다』
- 시아버님에게 폐백은 드리셨나요.
『한복 한 벌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내주시더군요. 방이 서너 사람 앉을 정도로 옹색했어요. 床(상)이 없어서 조그마한 의자 위에 대추 등 폐백음식을 올려놓고 시아버지께 절을 올리는데 시아버지, 남편, 저 모두 눈물을 흘렸어요. 시아버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박씨부인) 생각에 우셨답니다』
- 박씨부인이 언제 돌아가셨나요.
『만주로 이주한 이듬해(1911년) 하니허(哈泥河·합니하)에서 산후조리를 못 해 고생하다가 서른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셨어요. 1895년 첫 번째 부인(金弘集의 딸)과 사별하고, 이후 얻은 부인마저 임종을 못 하고 죽자,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셨답니다. 박씨부인은 만주 寶山山莊(보산산장)에 風葬(풍장)을 지냈는데,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어머니를 찾아내 내 뼈를 한줌이라도 합해 합장해 달라」고 유언했답니다.』
며느리 보고 『아들 넷 낳는다』 예언
▲시아버지 李始榮에 대해 이야기하는 며느리 서차희(徐且喜) 여사. 올해 99세시다.
◇서차희(徐且喜) 여사 생졸년 : 1909년~2013년 / 수(壽) 104세
ⓒ연합뉴스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씨(오른쪽)와 그의 막내딸 이재연씨.
- 폐백을 마치고 나서 무슨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새색시를 앞에 두고 다짜고짜 「네 팔자에 아들이 넷이나 있구나, 안심이 되는구나」 하시면서 화선지에 아들 이름자와 號(호)를 단숨에 써주세요. 깜짝 놀랐죠. 당신께서 아들 5형제를 낳아 둘밖에 살리지 못하셨으니 아들에 대한 恨(한)이 많으셨던 거예요.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당신이 언제 잘못될지 모르고요』
- 시아버지 말씀대로 아들 넷을 낳으셨나요.
『그럼요. 아들 넷에 딸 둘을 낳았어요. 시아버지는 周易(주역)에 통달하셔서 사람 얼굴을 보고 인물됨을 평가하셨고, 예지능력이 있으셨습니다. 한약 조제도 하셨어요. 병든 사람이 있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갈 수 없는 곳이면 처방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독립운동가 朴英俊(박영준·작고)씨 부인이 폭탄 파편을 맞아 이마가 터졌는데, 방공호에서 참기름과 밀가루로 「밀태산」을 만들어 붙여 주셨는데 흉이 안 생겼답니다』
성재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며느리 徐且喜에게 『아이를 못 낳게 된다』면서 중국신을 사다 신겨 주었고, 『쪽 찐 사람을 보면 왜놈들이 죽인다』며 문간 출입을 못 하게 하고, 중국여자들처럼 단발머리를 하게 했다.
- 성재 선생은 어디에 거처하고 계셨나요.
『상하이 法國(법국·프랑스) 조계에 살고 계셨어요. 가족이 있는 臨政(임정) 요인들은 臨政으로 출퇴근했어요. 시아버지는 臨政 건물 안 냉골방에서 風爐(풍로)로 진지를 직접 해 드시고 계셨습니다. 소반에 쌀을 한 움큼 놓으시고 돌을 골라 내고 진지를 해 잡수셨답니다.
홀아비 찌든 때가 덕지덕지 묻은 새카만 냄비를 닦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시아버지는 臨政에서 머무시고, 우리 부부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남편의 사촌 李圭鶴(이규학·李鍾贊 前 국정원장의 부친)씨 집에 들어가 얼마간 곁방살이를 했어요』
金九·趙琬九 등 가까이서 모셔
▲서차희 여사의 가족사진. 오른쪽이 남편이 규열씨, 가운데가 큰딸 종순.
성재는 며느리를 金九(김구), 趙素昻(조소앙), 趙琬九(조완구) 선생 등 臨政 요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臨政 요인들의 얼굴을 익히라고 하셔서 金九 선생 댁에 여러 날 머물렀어요. 독립운동가 金毅漢(김의한)씨의 아들 金滋東(김자동·80·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씨가 여섯 살배기로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아버지의 비서를 지낸 閔弼鎬(민필호·1963년 작고) 한독당 선전부장 댁에서 잠시 살았어요. 주거가 마땅치 않으니까 서로 끼어서 살던 시절입니다』
- 일경들의 감시가 심했습니까.
『시아버지는 날마다 오시질 못해요. 임정의 閣議(각의)를 청사에서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집에서 할 때가 있어요. 점심 무렵에 국수를 삶아 놓고 기다리면, 일경들이 어느새 눈치를 채고 집 주위를 어슬렁거려요. 일경들이 왔다는 연락이 오면 식사도 못 하시고 뒷문을 통해 「세대 간 연결통로」로 피신하셨습니다』
차남 규열씨, 박봉 쪼개 일가친척 봉양
- 식재료가 마땅치 않을 텐데 시아버지 식사는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아버님은 철저하게 小食(소식)을 하신 분입니다. 제게 늘 「얘야, 반찬 걱정 하지 마라. 여름에 두부에 호박 숭숭 썰어 넣고 된장 구수하게 풀면 그게 최고다』 하셨어요. 평안도관찰사 시절에 동치미 국물에 국수 말아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답니다』
徐且喜 여사의 남편 李圭悅 선생은 현지에서 영어학교를 수료하고 영국 전차회사에 검사원으로 취직했다. 李圭悅 선생은 성재를 비롯해 아버지의 5형제, 李健榮(이건영)·李石榮(이석영)·李哲榮(이철영)·李會榮(이회영)·李頀榮(이호영) 선생을 봉양했다고 한다.
『남편은 전차회사에서 60원 월급을 받으면, 시아버지와 형제분들 몫으로 40원을 떼고 나머지로 생활했습니다. 朴英俊(박영준,2000년 작고) 前 韓電사장의 부인 申順浩(신순호)씨 이야기가, 제 남편 월급날이면 臨政 요인들 회식하는 날이었대요. 80원으로 생활하기도 빠듯했는데, 30원으로는 정말 반찬 하나 장만할 수 없었어요.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로 있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꼼짝 없이 죽는 겁니다』
- 성재 선생의 둘째 형 李石榮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橘山 李裕元(귤산 이유원, 1814∼1888) 대감 댁에 養子(양자)로 가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지요.
고종 임금이 가까운 집안이니까 養子로 추천을 했대요. 양주의 엄청난 땅을 500만원에 처분해 통화현 하니허(哈泥河)로 갔습니다. 지푸라기 하나 안 남기고 팔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 부지를 구입해 교사·강당·숙사를 신축했습니다.
조상을 두고 만주에 와 후사까지 끊긴 李石榮 할아버지는 『조상 볼 낯이 없다』면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첫애를 낳아 안고 가니 무릎에 앉혀 놓고 어르시다가 혼잣말로 『규열이는 복이 많다』고 하셨어요.
▲1940년 5월 민족주의 진영의 3당이 통합해서 발족한 「한국독립당」의 중앙執監(집감)위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 이청천, 송병조, 조완구, 이시영, 김구, 유동열, 조소앙, 차이석 선생.
『感時漫語』 저술
1933년 여름, 성재 선생은 우연히 중국인 黃炎培(황염배)가 쓴 『朝鮮(조선)』이란 책을 읽게 된다. 성재는 黃炎培의 거친 글과 일본인의 비위를 맞추는 가당찮은 표현을 보고 격분한다. 그는 1934년 66세의 나이에 『黃炎培의 한국사관을 논박한다.』는 부제를 단 「感時漫語(감시만어)』를 저술했다. 「感時漫語』의 한구절이다.
<일본이란 두 글자는 庚戌國恥(경술국치) 이전에는 공식문서에만 마지 못해 쓰던 글자이지 그밖에 사람이나 물건에는 꼭 倭(왜) 자를 덧붙여서 대명사로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은 비록 나라를 잃고 멸족의 참화를 입었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렵게 생각하거나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특수한 정신구조를 지니고 있다. 을사조약을 전후해 10년간 왜적을 공격한 의병의 장거가 꼬리를 이은 것이 그런 인식을 증명한다>
『항조우(杭州·항주) 피란 시절, 『感時漫語』 원고 보따리를 갖고 다니셨던 기억이 납니다. 黃炎培는 일본 총독의 안내를 받으며 한국의 풍물을 둘러보고 나서 책을 저술했던 겁니다. 미개한 한민족을 일본의 힘으로 문물을 발전시켜 문화수준을 높였다는 내용이었답니다.
시아버지는 없는 돈에 100여 권을 찍어 내 중국 각지의 유명서점에 배포했어요. 시아버지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한국사 기술은 日帝 식민사관에 찌들어 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정신적 희열과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성재는 1919년 4월13일 臨政이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선임돼 법률이론에 밝은 趙素昻(조소앙), 南亨祐(남형우), 申翼熙(신익희)를 지휘해 최초의 성문헌법인 『임시헌장 10개조』를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법 1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하고 있어, 그동안 계승돼 온 전제군주제를 그만두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를 지향하게 되었음을 선포했다.
백범이 臨政 주석이 된 이유
▲성재 선생과 백범. 성재는 남북협상을 시도한 백범이
1949년 6월 암살당하자 크게 애통해했다.
- 1933년 성재 선생이 65세 되던 여름, 한국독립당 간부이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臨政고수파 宋秉祚(송병조), 車利錫(차리석) 두 사람
이 臨政이 표류하고 있는 모양을 보다 못해 「정부나 당을 세울 사람이 성재밖에 없다」고 울며 매달렸다고 알려졌습니다.
『시아버지는 두 분과 함께 西湖(서호)로 가서 선상간담회를 열고 가응에 있는 李東寧 선생과 남경의 金九 선생과 상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며칠 후 시아버지는 가흥에서 臨政 요인들과 함께 臨政 개편문제를 논의했고, 주석을 윤번제로 하는 등 臨政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성재 선생은 臨政 주석 石吾 李東寧(석오 이동녕) 선생과 각별한 관계였다. 1939년 石吾가 四川省(사천성)에서 病死(병사)하자 사무친 정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徐且喜 여사는 『임시정부內에서 동성연애를 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의기투합했다』면서 『장례식에 쓸쓸하게 서 계신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고 했다.
- 백범 선생에 대해 기억 나는 것은 없습니까.
『上海에 살 적에 부인 최준례 여사와 함께 시장 모퉁이에 사셨어요. 백범은 오가는 길에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셨어요.』
- 성재 선생이 백범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백범 선생이 臨政 주석에 취임했을 때, 궁금해서 시아버지께 여쭤 보았습니다. 臨政에는 백범보다 경륜이 있는 분들이 많이 계셨거든요. 시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독립운동이란 것은 지식만 갖고 안 된다. 독립운동자는 善質(선질)도 惡質(악질)도 있는데, 이들을 통제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독립운동은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한데 실천력을 갖춘 인물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합당한 인물이 백범을 빼놓고 누가 있는가』라고요』.
성재는 1948년 6월10일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갔다. 성재의 통일론은 과거의 무조건적인 통일론에서 『남한에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北의 공세에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백범이 金日成과의 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간다는 소식을 접한 성재는 그 길로 백범을 찾았던 것이다. 성재는 백범에게 이렇게 말했다.
白凡의 北行 만류
『이 길이 어디까지 가는 길인가? 남로당과 북로당이 몇십 배의 강한 힘을 가지고 서울이 불바다, 피바다로 화하게 뒤집어 놓아서 하지가 東京으로 피란갈 정도라면 모르거니와, 그저 미온적으로 종결점에 나설 리가 없지 않은가.
남북협상 추진이니 강화니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열 번 되풀이해야 호응할 사람이 몇이나 되며, 군소단체의 잡음과 학생들의 선동 등이 누구에 의해 조종되는 바가 아니라 할지라도 은연중 지목받는 것이 뉘게로 가는 것인지 모르는가?』 徐且喜 여사는 백범이 서거하던 1949년 6월26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臨政 시절, 시아버지가 백범에게 지적을 하면 백범은 『또 양반소리 하시네...』라고 하셨어요. 백범이 돌아가시던 날은 잊혀지지 않아요. 큰딸(李鍾舜)의 학교 교감선생을 점심무렵 무교동 집으로 초대해 시아버지와 함께 냉면을 대접해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와 귀엣말로 시아버지께 뭔가 이야기를 전하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셨답니다. 그리고는 『이게 웬일이냐』면서 땅을 치고 우셨습니다.』
손녀 再元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李始榮
▲성재 선생의 손녀 이재원씨. 성재 선생은 피란 중에 얻은
손녀 재원씨의 이름을 지어 주며,『여자도 배워야 산다』고
했다고 한다.
徐且喜 여사는 『시아버지 역시 통일을 위해서는 左·右 상관없이 일치단결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백범의 우직한 애국심이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가지셨다』면서 『백범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한 데서 나온 만류였다』고 했다.
徐여사 곁에 있던 성재의 손녀 李再元씨가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1895년 淸日전쟁 중 觀戰使(관전사)에 임명돼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다롄(大蓮) 등지를 3개월 동안 시찰하고 오셨고, 외부 교섭국장에 취임해 영국정부에 英日동맹의 부당성을 질타하시는 등 중국과 일본의 실체를 꿰뚫어 보신 분이셨어요.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반드시 여자가 공부를 해야 하고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李兌榮(이태영·1998년 작고) 변호사에게 격려를 해주셨고, 金俊燁(김준엽·87) 前 고려大 총장의 부인 閔泳珠(민영주·84) 前 李範奭 광복군지대장 비서는 할아버지가 臨政 시절 방공호에서 한학을 가르친 분들입니다.』
- 성재 선생은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설립하신 『신흥대학』 (現 경희大)은 1949년 2월 광복 후 문교부의 정규인가 1호 대학입니다. 큰아버지 李圭昶(이규창·작고)이 이사, 아버지 李圭悅이 감사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정치적 주장이 집권자 李承晩(이승만) 대통령과 대립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 와중에 신흥대학은 이런저런 일로 수난을 당했고, 趙永植(조영식) 이사장이 학교를 인수해 「경희대학교」로 교명을 바꿨습니다. 역사가 바로 서려면 대학 설립자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기념관이나 동상이라도 校內(교내)에 세워져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 갔으면 합니다.』
- (徐且喜 여사에게) 성재 선생은 臨政에서 재무부장을 20년간 지내고 한국독립당의 감찰위원장을 지낼 만큼 청렴결백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臨政의 채권이 재무부장인 시아버지 명의로 발행됐습니다. 광복군 3지대 구대장이었던 朴英俊(박영준)이 1942년 재무부에서 약 1년간을 근무했는데, 이때 그는 74세 노구의 몸으로 臨政 재무부장으로 국가의 재정을 공명정대하게 관장하는 것을 보고 탄복했답니다.
▲1945년 11월 환국 도중 上海비행장에서 내려 포즈를 취한 임정 요인들. 두 번째 줄 왼쪽부터 김규식,
조완구, 김구 선생이며 두 사람 건너 중절모 쓰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이시영 선생이다. 김구 선생 앞에
있는 소년은 작은할아버지인 이시영 선생을 마중 나온 이종찬 前 국정원장이다.
臨政에서 돈을 맡길 만한 분은 성재와 趙琬九 선생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백지장처럼 깨끗하고 청렴결백한 선비들입니다. 臨政 청사 사용료가 연체돼 집주인이 쫓아내려 할 때 재무부장으로서 지원금을 걷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답니다』
서차희(徐且喜) 여사는 성재의 평소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情이 많으셔서 집안에서 일하던 학생이 軍에 입대하자 보물같이 여기던 日製 소니 라디오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어요. 부통령을 그만두시고 나서 쌀 걱정을 할 정도였어요. 그분이 저희 후손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셨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 6·25전쟁이 발발하자 성재 선생은 피란 가기를 거부하셨다면서요.
『1950년 6월27일 『서울이 불리할 경우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여쭤 보니 『정부 체면과 100만 시민을 생각하면 與城共守(여성공수)할 수밖에 없지』하세요. 자꾸 우리가 피란 가자고 보채니까 면도칼을 한주먹 갖고 오셔서 『여기서 같이 죽자』고 하세요. 만삭인 나를 보며 주위에서 『어린 생명이 무슨 죄냐』며 만류했습니다.
6월28일 새벽 2시경 부통령 비서실장 任泰淳(임태순) 경감이 시아버지를 번쩍 안아다 차에 태웠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한강다리를 차로 건너는데 피란민들이 홍해 물길이 열리듯이 길을 비켜 주었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한강다리를 건너셨습니다. 새벽 3시경인가, 군포 쪽을 가고 있을 때 한강다리가 끊기는 섬광을 보았습니다』
省齋, 36년 만의 환국에 눈물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李鍾贊(이종찬·72·前 국정원장) 우당기념관장은 성재의 仲兄(중형)인 李會榮(이회영)의 손자다. 우당기념관 정면에는 1945년 11월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주선해 준 비행기편으로 충칭(重慶·중경)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가운데 태극기를 들고 있는 소년이 접니다. 가운데 화환을 받은 분이 백범,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눈을 비비는 노인이 성재 할아버님이십니다. 조국을 떠난 지 36년 만에 환국하면서 감개무량해서 우는 모습입니다』
月南 李商在(월남 이상재) 선생은 성재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가서 함께 활동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신 의사가 非百非千(비백비천)이지만, 형제가족 40여 인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去國(거국)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의거를 두고 볼 때…. 진실로 6人의 절의는 百世淸風(백세청풍)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의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 성재 선생 6형제를 비롯해 일가 50여 명은 가산을 처분해 일가 친척 없는 이역땅 만주로 갔습니다.
광복이 돼 살아 돌아온 분은 성재 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黃玹(황현) 선생의 「梅泉野錄(매천야록)」에 할아버지 형제분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요.
1910년 12월 성재의 6형제가 40여 명의 가솔을 인솔하고 남만주로 이주해 서간도 柳河縣(유하현) 三源堡(삼원보)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성재의 중형 李石榮 선생이 李裕元 대감에게 받은 상속재산 가운데 典籍(전적)은 六堂 崔南善(육당 최남선)에게 주고, 땅을 1만여 석(400만원)에 처분해 통화현 하니허(哈泥河)에 신흥무관학교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李鍾贊 관장의 말이 이어진다.
『그곳에서 耕學社(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어요. 李會榮 선생은 1919년 3월1일 베이징(北京)으로 와서 申采浩(신채호)와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32년 체포돼 대련경찰서에서 杖毒(장독)으로 獄死(옥사)했습니다. 형제들이 만주에서 모두 죽고, 성재 선생만 살아서 귀국하게 됩니다.』
李鍾贊 관장은 신흥무관학교 초창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성재의 형제들은 이름 끝자 발음이 李完用(이완용)의 『용(龍)』과 같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인 앞잡이로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선발대로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문이 퍼지자 중국 각 현에서는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차단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중에 고종의 친서가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전달돼 협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45년 11월3일, 重慶의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찍은 사진. 10만원권 화폐의 보조디자인
사진으로 채택됐다. 임정 요인들이 남루한 중국옷을 벗고, 깔끔하게 양복으로 갈아 입었다.
『만주의 살인강도 두령』
▲성재의 둘째 형인 우당 이회영 선생.
1919년 3월1일 北京에서 申采浩 등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32년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신흥강습소는 耕學社(경학사)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됐다. 李東寧 선생이 소장으로 취임하고 이듬해인 1911년 12월 1회 특기생 40여 명을 배출했다. 1년간은 성재 형제가 갖고 온 경비로 운영을 충당할 수 있었으나 「105인 사건」으로 新民會(신민회)로부터 지원금이 오지 않아 경학사는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1913년 5월 사관학교적 성격을 띤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李始榮 선생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기자는 2004년 11월 吉林省 柳河縣 三源堡를 찾았을 때, 당시 신흥강습소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현지 주민은 『당시 강습소를 확장해 현재는 동명소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일본외교사료관 문서는, 「중국인 張九卿(장구경) 소유의 陸田(육전·밭) 350일경(35마지기)과 기타 水田(수전ㆍ논)을 만들기 위한 原野(원야)를 25일경(25마지기)을 李始榮 지휘하에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신흥무관학교는 몇 명의 간부들을 배출했습니까.
『1920년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독립군 간부들을 배출했습니다.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무장항일 독립운동의 주축을 이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발행되는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 1913년 초가을 「李始榮은 만주의 無冠王(무관왕)이요, 만주 일대의 살인강도 두령」이라고 쓴 기사가 나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군대가 이곳을 습격해 학살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주요 간부는 누가 있습니까.
『청산리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의 장교, 그리고 洪範圖(홍범도) 장군 휘하의 장병들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金法麟(김법린) 前 문교부 장관, 卞榮泰(변영태) 前 국무총리, 宋虎聲(송호성) 초대국방경비대 사령관, 李範奭(이범석) 前 국무총리, 吳光鮮(오광선) 광복군 국내지대장 등이 있습니다. 좌익으로 金元鳳(김원봉) 의열단장이 있고요.』
신흥무관학교를 찾은 만해 한용운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있는 초창기 신흥무관학교 자리.
현재는 조선족 초등학교인 동명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기자(왼쪽)는 지난 2004년 11월 이곳을 찾았다.
李鍾贊 관장은 『3·1운동 전, 韓龍雲(한용운) 스님이 우당을 만나러 하나허(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에 갔다가, 일본인 첩자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일평생 고개가 삐딱하게 됐다』면서 『우당이 학생들에게 『이 사람들아, 그때 韓龍雲이 죽었다면 독립선언서도 나오지 못했네』라고 나무랐다.』고 했다.
- 언제 성재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까.
『1945년 광복 직전 어느 날, 깡마른 아저씨가 아버지를 찾아와 수근거리고 가더니 아버지(李圭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분은 한중전시공작대 책임자인 鄭華巖(정화암) 선생이었습니다. 중국말로 원자폭탄을 뇌츠소데(原子炸彈)라고 하는데, 原子는 『단추』라는 뜻도 있어서 단추만 한 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세기에 일본을 멸망시키나, 하고 의아해했어요.
광복이 되니까 아버지가 양복 세 벌을 맞추셨어요. 큰 양복은 金九 선생, 작은 양복 두 벌은 성재 할아버지와 趙琬九 선생의 것이었어요. 重慶으로 보낸 양복을 세 분이 남루한 중국 두루마기와 바꿔 입고 마지막 환국사진을 찍었던 겁니다. 10만원권 화폐에 들어가는 인물 배경 사진이죠』
공산주의를 경계
- 성재 선생은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1951년 4월, 84세의 나이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울산의 한옥집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성재 선생.
『성재 할아버지는 좌익을 상당히 경계했습니다. 그분이 남북협상에 뛰어들지 않은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백범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다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 헌법 전문을 보면, 『대한민국은 臨政의 法統을 계승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臨政에 두기 위해 행정부에 李始榮 臨政 재무부장, 입법부에 申翼熙(신익희) 臨政 외무차장을 두고 대한민국이 출발했습니다. 李範奭 초대 국방부 장관, 池靑天 무임소장관 등 臨政 주요인사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습니다.
성재 할아버지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臨政으로 넘어올 때 교량 역할을 했고, 臨政에서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두 번 하신 겁니다. 여기에 성재 할아버지의 역사적 존재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성재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李承晩 박사는 북한이 단정을 한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북한의 『민주기지론』, 북한에 정권을 먼저 수립하고 남한을
흡수한다는 이론입니다. 북한은 벌써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고, 토지개혁을 하고, 인민군을 창건했어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만 없을 뿐이지, 정부수립을 이미 완료한 겁니다. 李承晩 박사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한 『정읍발언』을 했다고 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북한은 말없이 행동을 한 것이고, 남한은 말을 하고 행동한 것일 뿐입니다.』
- 臨政 내부에는 남한이 單政이 될 경우, 嚴恒燮(엄항섭) 선생 등 백범의 측근들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남북협상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까.
『그런 요소도 있습니다. 남북협상 때 수행한 유일한 기자인 薛國煥(설국환·2007년 작고)씨에게 물어봤어요. 백범 주변 인물들이 결국 李
承晩 박사와의 정치게임에서 밀리니까 협상을 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美 군정의 失政 비판
▲1984년 1월9일, 남산에서 열린 성재 동상 제막식에서
동상건립추진위 명예위원장인 윤보선 前 대통령이 취지문을 낭독하고 있다.
1948년 3월 美 군정장관 하지 중장과 서기관 하우스가 성재 선생을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성재는 한국 통치의 잘못을 지적했다.
『언어와 풍속이 다르니 우리의 정세에 적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2, 3년을 두고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설 터인데, 나는 하지 장군을 현명한 사람으로 알았다. 미국 국민이 우리나라가 反美를 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反美」와 「反軍政」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李鍾贊 관장은 『성재 할아버지는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한 다음, 우리 손으로 국가의 장래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총선거에 대한 찬성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총선거 참여를 권유했다.』고 했다.
『민족적 주권을 세워 놓고 차후에 군정철폐, 동포구제 등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성재 할아버지의 총선 찬성은 개인적인 권력욕이 아니라 우리 국민 스스로의 힘에 의해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것에서 비롯된 겁니다.
美 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신속하게 넘겨받고, 친일파를 응징하고, 軍警의 강화를 통해 국력을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성재 할아버지는 결국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부통령직을 수락합니다』
李承晩은 李始榮을 『형님』이라고 불러
- 성재 선생과 李承晩 대통령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1949년 陸士를 방문한 성재. 오른쪽이 김홍일 교장(준장),
왼쪽이 이한림 부교장.
『李承晩 박사가 성재 할아버지에게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李承晩 박사가 대한독립촉성회 국민회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하자 수락했습니다. 신속히 나라의 정권을 되찾아 한국인에 의한 정부가 탄생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거지요.
臨政에서 백범이 李承晩 박사에게 직접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것은 성재 할아버지를 통했다고 들었습니다. 성재 할아버지는 金九와 손을 잡고 끝까지 독립을 위해 일했습니다. 평소에는 자상하게 백범을 대했으나, 사리판단을 잘 못했을 경우에는 추상과 같은 호령을 친 臨政의 어른이셨습니다』
- 백범의 北行(북행) 결심을 되돌리기 위해 성재 선생이 노력했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성재 할아버지가 부통령에 취임하자 두 사람 사이는 금이 갔어요. 결국 백범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화해를 못 한 상태에서 끝났지요. 성재 할아버지는 항상 그런 아쉬움이 있어요. 성재 할아버지와 백범이 나란히 찍은 사진을 백범 측에서는 지금도 사진을 잘라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4년 1월 두 분 사이를 회복시킨다는 차원에서 남산에 성재 할아버지 동상을 백범과 마주 보도록 세웠습니다. 두분이 화해를 못 한 것은 후손이 볼 때 아쉽지요. 백범이 대한민국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金奎植(김규식) 박사도 성재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성재 할아버지에게 되돌아오려는 찰나에 백범이 간 겁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李承晩과 충돌
- 『거창양민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자 성재 선생은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합니다.
『尸位素饌(시위소찬: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냄)에 머물 수 없다』는 유명한 고별사를 남기고, 국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했습
니다.
▲1925년 일본외사경찰청이 작성한 『不逞鮮人(불령선인) 명부』.
李始榮 선생은 甲호 감시대상이었다. <李始榮(男)은 양반신분으로 호는 성재다. 上海임시정부 요원으로서 활동 중인 인물이다.
성질은 완고하고 대담하다. 1910년 3월 아내와 아들 딸을 데리고 도항했다. 종교는 유교, 지인은 경성의 前 관찰사를 지낸 李圭植(이규식)과 충북 음성군 출신의 李會榮(이회영)이 있다.
도항목적은 『不逞(불령)계획』, 출생지는 경성 남부 저동이다. 현재(1919년) 거주지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다. 키는 5장 6촌, 얼굴이 길고, 눈은 둥글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장발에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있다. 유소년 시절에 한학을 했으며, 1920년 8월6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내란죄로 기소된 자임.>
『6·25전쟁 중 정부가 강제로 소집한 많은 청·장년을 돌보지 않고 얼어죽게 만든 참상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성재 할아버지는 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지금 백성들이 是日渴喪(시일갈상: 나라가 언제 망하느냐)한다고 말하고 있소』라고 직언하자, 李承晩 대통령은 펄펄 뛰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大怒(대로)했답니다. 申性模(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을 『파면하라』고 해도 李박사가 듣지 않으니까 물러나신 겁니다.』
- 성재의 공직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48년 7월20일 부통령에 취임하면서 성재 할아버지는 『부정한 짓은 민족의 가슴에 총칼을 겨눈 왜적보다 더 악독한 망국도배가 아닐 수 없다』고 질책했습니다. 『사람이 官(관)을 택해서는 안 되고, 관이 사람을 택해야 한다.』, 『문관은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무관은 자신의 몸을 살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위정자의 실천원칙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 백범과 李承晩 박사가 성재 선생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면 건국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은 더 확고해졌을 겁니다』
李鍾贊 관장은 『국가의 어른으로서 臨政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교량 역할을 맡아 기꺼이 참여했지만, 李박사가 독재성향을 보이자 민주화를 위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후세들이 본받을 만한 점』이라고 했다.
1948년 2월4일, 崔書勉(최서면·80) 국제한국연구원장은 韓民黨(한민당) 정치부장을 역임한 雪山 張德秀(설산 장덕수) 살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체포된다. 崔書勉씨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갔다.
崔書勉씨의 증언
▲포천지역을 순시한 성재 선생(가운데).
1948년 부통령이 된 李始榮 선생은 崔書勉씨가 『張德秀 암살 사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당시 李仁(이인) 법무부 장관에게 再審(재심)을 요청했으나 美 군정下에서 벌어진 재판이라 재심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수감생활 중 崔重夏에서 崔書勉으로 바뀐다.
『李始榮 부통령이 감방으로 사람을 보내 『열심히 공부하라(書勉)』는 뜻으로 이름을 『崔書勉」이라고 새로 지어 화선지에 써 보내셨습니다. 지금도 내 사무실에 걸려 있어요.』 崔書勉 원장은 1925년 일본외사경찰청이 작성한 『不逞鮮人(불령선인) 명부』를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인 요시찰인 명부를 작성했다. 일제는 요시찰 대상을 甲(갑)과 乙(을)로 분류했다. 甲은 신분확인 즉시 긴급체포 대상, 乙은 긴급체포 대상은 아니지만 계속 감시 대상자를 의미했다.
원장은 『李始榮 선생은 甲호 대상,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는 乙호 요시찰 대상자였다』고 했다.
崔書勉 원장은 『한학에 능통했던 성재 선생은 비서마저 한학자였다』고 회고했다. 성재 선생의 비서는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한학자 朴昌和(박창화·1962년 작고) 선생이다.
崔원장은 『李始榮 선생은 그의 저서 『感時漫語(감시만어)」처럼 舊韓末의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꿰뚫는 혜안이 있었다』면서 『그는 한학의 기본이 治道(치도)에 있고, 정치지도자로서 기본철학이라고 믿었기에 『국민방위군사건』은 권력의 남용, 정치의 기본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던 것』이라고 했다.
崔書勉 원장은 『당시 18세의 애송이 연희전문 학생인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성재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巨木(거목)이란 느낌을 받았다』면서 『張德秀 살해사건으로 고문을 받아 상한 뼈를 치료하라며 범의 앞발인 虎脛骨(호경골)을 보내 주셨다.』고 했다.
국립묘지 이장을 원하는 가족들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성재의 손자 이종문(李鐘文,1940~)씨.
오는 4월 17일은 성재 이시영(李始榮) 선생의 55주기다. 진달래와 목련이 활짝 핀 묘소는 북한산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성재의 손자 이종문(李鍾文)씨는 『묘지 관리에 어려움이 많아 이른 시일 내에 국립묘지로 옮겨 가길 희망한다』고 했다.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은 『선조 때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이 없었더라면 중흥이 없었고, 지금 大韓에 省齋가 아니었다면 光復이 없으리라』고 말했다.
성재 李始榮 부통령의 묘소를 내려오면서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가 비문에 적은 생전에 선생이 남기신 말씀을 떠올렸다.
『나라의 어진이들 마음속에 모셔 두자. 나라의 착한 이들 가슴 안에 수(繡)를 놓자. 이 넋이 꽃피는 날에 이 겨레가 밝으리라.』
■ 李始榮 年譜
1869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와 의정부 찬성을 지낸 李裕承(이유승), 이조판서 鄭順朝(정순조)의 따님 사이에서 출생했다. 구한말 개화당 내각의 총리대신 金弘集(김홍집)의 사위다.
1891년
增廣文科(증광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1894년 副承旨(부승지)에 이어 右承旨(우승지)에 올라 內醫院(내의원)·尙衣院(상의원)의 副提調(부제조)를 겸했고, 參議內務府事(참의내무부사)·宮內府首席參議(궁내부수석참의)를 역임했다.
1896년
장인인 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 1905년 外部交涉局長(외부교섭국장)으로 다시 등용, 이듬해 평안남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民事局長·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1910년
韓日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해 柳河縣(유하현)에서 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의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했다. 1929년 韓國獨立黨(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됐다.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돼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大韓獨立促成會(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非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직을 사직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53년
4월17일 부산 동래에서 별세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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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8년 12월 3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명례동계 저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1가 1-2
[사망] 1953년 4월 17일(수(壽) 84세
경상남도 부산시(現 부산광역시)
[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북한산 순국선열묘역
[부통령 재임기간]
1948년 7월 24일(토)~1951년 5월 14일(월)
■ 이시영부통령 양력
1905 외부 교섭국장
1906 평안남도 관찰사
1907 중추원 칙임의관
1908 한성재판소장
1911.6.10. 신흥강습소 설립
1919.4. 임시정부 법무총장
1919.9.~1926 임시정부 재무총장
1930.1.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1935.10.~1940 임시정부 초대 법무부장
1942.10. 임시정부 제2대 재무부장
1944.4. 임시정부 감찰위원장
1946 성균관 총재
1947.2. 재단법인 성재학원 이사장
1948.7. 초대 대한민국부통령 1949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훈
1952.5. 제2대 대통령 후보(무소속,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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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평안도 관찰사, 외부 교섭국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대한민국 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 선생은 2013년 10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며느리 서차희 여사를 저승에서 만났을 때 뭐라고 하셨을까. “아가, 미안하구나. 이제는 내가 갚아주마” 하며 쌈짓돈이라도 손에 쥐여주지 않았을까. 문득 그 만남을 상상하다 보니 가슴이 떠그워진다.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