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 10. 11
1.21사태 때,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무장공비~~~김신조 목사 인터뷰
“김일성은 당시 남한의 산업발전이 박정희대통령의 공로라는 걸 인정했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공산화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빨리 죽이려고 한 겁니다.
김신조 일당은 1968년 1월 21일 밤 청와대 약 300여m 앞에서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에게 저지당하자 총격전을 시작했다.
김목사는 “당시 수경사 30대대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는데, 이 부대와의 교전에서 께지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생포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가 수류탄을 깠는데 불발이 되서 잡혔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냥 손들고 나온것”
이라며, “당시 26세인데 김일성을 위해 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고 했다.
▲김신조 목사 인터뷰 동영상
[조선일보]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단 31명을 이끌고 청와대를 습격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 목사가 지난 11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성경교육관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이덕훈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월남에서 백마부대 29연대장을 하던 시절 예하기지를 방문해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1967년 8월 수도 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부임한 전두환 중령은 군인은 늘 긴장감 없으면 않된다는 생각으로 박격포대와 조명탄 발사기를 연병장 한쪽에 배치하고, 보초병들은 M1소총으로 이른바(사격태세 보초자세)로 근무토록 했다.
서울 한복판에 흡사 전방의 포병 부대같이 해놓았다. 특히 서울 같은 후방부대에 근무하면 그 정신이나 자세가 해이해지기 쉽기 때문에 긴장감을 불어 넣으려고 전두환 대대장이 고안했다. 물론 보초병 집총자세도 마찬 가지다.
다음해 1968년 1월21일 이였다.
전두환 중령이 대대장으로 부임한지 꼭 다섯 달 만이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른바 1.21사태가 발생했다.
무장공비 김신조일당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제1사단 구역안의 개울을 따라 서울까지 침투, 청와대 바로 앞까지 유유히 행진해 들어왔다.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대장은 즉각 박격포를 쏘아 올리고 조명탄을 터뜨려 서울의 상공을 대낮처럼 밝혔다.
생포된 김신조는 뒷날 실토했다.
“박격포가 터지고 조명탄이 오르는 것을 보고 포위된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버텨 봐야 개죽음 뿐 이란 것을 알고는 싸울 뜻을 잃고 손을 들었지요."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가 말했다.
“서울 한복판까지, 더구나 청와대 문 앞까지 공비들이 나타나다니 어이없는 일이예요.
그런 가운데 30대대 대대장 전두환 중령의 선견지명이 놀랐습니다.
태평한 서울 한복판에 박격포를 가설하여 대비하다니“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후방부대인 제30대대가 그로부터 전방부대 못지않은
철저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부대가 된 것은 물론이다.
[출처] 전두환 대대장 시절 전설적인 일화.jpg|작성자 국가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