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뮤지컬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가수·뮤지컬 배우 차지연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빈잔’을 불렀을 때. 그의 포효하는 목소리와 함께 무대를 가득 채웠던 건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인 어떤 여자의 구음이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언론은 미스터리한 그녀의 신상을 캐기 시작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여자는 알고보니 뮤지컬 배우 차지연. <라이언 킹>으로 데뷔, <마리아 마리아> <드림걸즈> <선덕여왕> <몬테크리스토> <서편제> 등의 뮤지컬에서 파워풀한 보이스와 감성적인 연기로 업계에서 인정받아온 6년차 뮤지컬 배우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그러나 임재범의 코러스 참여 이후 그녀는 ‘벼락 스타’가 됐다. M25도 그녀를 만나러 갔다. 에디터 김수연 포토그래퍼 김도균
‘빈잔’ 이후 무척 바빠진 것 같다. 돌아오는 주말에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마지막 지방공연이 제주도에서 있는데 마침 <엄마를 부탁해> 공연이 끝난 터라 마지막 공연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는 <몬테크리스토>가 마지막 뮤지컬 공연이 될 것 같다. 다른 스케줄이 많아서 내년쯤에나 뮤지컬 무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수다> 한 번의 전파로 많은 것이 달라졌나. 방송 이후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 일례로 내가 모르는 많은 분들이 내 미니홈피나 트위터에 댓글이나 쪽지를 남겨주시는 것도 놀랍다. 아, 이것도 신기하다.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내가 부른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뜨고 내 기사가 뜨는 것. 모든 게 경이롭다. 이런 것들이 내겐 꿈이었는데 정말 이뤄진 건가 싶기도 하고(웃음).
얼마 전 뮤지컬 어워즈에선 <서편제>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렇게 고대했던 가수 데뷔도 했다. 당신 인생 최고의 해 아닌가? 그렇긴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큰 변화를 염려해 주는 이들도 있다. 세간의 갑작스러운 주목 때문에 내가 배고팠던 시절의 초심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언젠가는 초심을 이전보다 덜 생각하는 순간도 오겠지. 그러나 변치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배우 혹은 가수이기 이전에 진심을 지닌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이 인상적이었다. “꿈도 미래도 포기했던 시절, 그저 먹고살기 위해 우연히 시작한 뮤지컬 무대가 나를 다시 살게 해줬다”고 했는데. 뮤지컬은 나를 다시 살게 해준 매개체다. 만약 뮤지컬 배우로 나를 처음 이끌었던 <라이언 킹> 무대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만큼 절박했고 힘들어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뮤지컬은 늘 내게 고맙고 감사한 무대다.
나이 서른에 비로소 가수로 데뷔했다. 제일 처음 가수를 꿈꿨던 때는 언제였나.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북을 치는 타악기 연주가(차지연의 외할아버지는 판소리 고법(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것) 인간문화재 고(故) 박오용 선생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창을 배우고 각종 국악기를 배우며 자랐다)를 하고 싶었던 거지 처음부터 노래가 음악의 목표였던 건 아니다.
공식적인 가수 데뷔는 지금이 처음이지만 첫 녹음은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 OST였던 걸로 안다. 맞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북을 쳤던 삼촌과는 헤어졌지만(박오용 선생에게 고법을 사사한 삼촌은 이상하게도 차지연에게 북 치는 법 가르치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국악을 계속하고 싶어서 원일 선생님(산조와 시나위, 굿 음악을 모태로 우리 음악을 들려주는 ‘바람곶’의 대표)을 찾아갔다. 우연히 원일 선생님이 내 노래를 듣더니 타악기 연주보다 노래를 해보라고 권해주셨다. 마침 선생님께서 음악감독을 맡고 있었던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 가이드 송을 불러 보라는 거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Sky’와 ‘Helen’s Song’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기로 한 유명 여가수가 있었는데 그 음악을 처음 들었던 영화감독(김문생)이 내 목소리를 좋아해 주셔서 그 여가수가 아닌 내가 녹음하게 됐다. 그게 계기가 됐다. 만약 타악을 계속할 수 없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가수를 꿈꾸기 시작했다.
만약에 삼촌이 북 치는 법을 사사했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겠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삼촌이 왜 내게 북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나이가 열둘, 열세 살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북을 가르쳐주지 않는 삼촌이 조금 야속했다. 너무 배우고 싶은데 배우지 못하는 현실도 견디기 힘들었고. 약 7년 정도 배우고 싶은 감정을 꾸역꾸역 참아가면서 버텼다. 그리고 귀동냥, 눈동냥으로 혼자 북을 쳤다. 한참 힘들었던 시절(고등학교 3학년, 건설업을 하던 차지연의 아버지는 사업 부도를 냈고, 가족은 흩어져 지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소녀 가장의 삶을 살았다), 나는 ‘왜 나만 이런 상황에 놓여질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시간과 경험들이 있었기에 무대에서도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과 경험이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됐다. 돌아보면 감사한 경험이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기 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들었다.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가 자꾸 노출되면서 나만 힘들게 살았다고 투정 부리는 것 같아 부끄럽다. 고등학교 때 처음 했던 아르바이트는 음식점 서빙이었다. 나중엔 호프집, 아이들 그림책에 색칠하는 아르바이트, 동물 탈 쓰고 연기하고 사진 찍는 아르바이트, 텔레마케팅 등 아르바이트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아, 식당 전단지를 MBC 방송국 앞에서 돌린 적 있었는데 당시 MBC 방송국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내가 여기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지만 나중에는 저 방송국에 들어가게 되는 날이 오겠지’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MBC 방송국에 가게 됐고, 그 계기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뮤지컬 배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은행에서 안내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친구가 노래만 잘해도 뽑힐 승산이 있다며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해 보라고 했다. 그 오디션이 일본 극단 시키(四季)가 제작한 <라이온 킹>이었다. 처음엔 “연기도 못하는데 뮤지컬은 무슨…”이라고 응수했는데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월급 13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디션에 붙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정도 연습했다. 첫 배역은 앙상블이었다. 그런데 개막 한 달 전 ‘라피키’ 역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한국 공연에 참가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덜컥 내게 기회가 왔다. 홀로 100엔짜리 편의점 도시락 까먹으면서 내 역할도 아닌 배역을 치열하게 연습했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첫 앨범 ‘그대는 어디에’는 어떤 감정으로 녹음했나. 녹음하는 날 생각지도 못했는데 스튜디오에 임재범 선배님이 직접 오셔서 디렉팅을 해주셨다(‘그대는 어디에’는 임재범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차지연이 리메이크한 곡이다). 노래 한 곡 녹음하는 데 8시간
정도 걸렸는데 선배님이 진짜 날 많이 울렸다(웃음).
많이 혼나서 울었나. 혼나서 우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 싫은 과거의 아픈 추억을 다시 꺼내야 해서 울었다. 사람은 너무 아팠던 기억이 있는 그때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잖나. 그래서 아팠던 과거의 근처 정도에서 머물며 노래를 불렀는데, 바로 잡아내시더라. 그러고나선 감정의 벼랑 끝으로 나를 떨어트렸다(웃음). 결국 선배님 디렉팅 덕택(?)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내가 하도 많이 우니까 선배님이 “나가서 바람 좀 쐬고 다시 들어와서 하라”며 감정도 추슬러 주셨다. 또 두루마리 휴지와 물 한 통을 아예 스튜디오 안으로 넣어주기도 했고(웃음). 그렇게 스튜디오 안에 갇혀서 감정을 다 토해내듯 부른 곡이 ‘그대는 어디에’다.
임재범 씨 덕분에 급부상하긴 했지만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임재범과 엮어서 기사를 낼 때는 다소 부담스럽거나 서운하진 않나. ‘임재범의 그녀’ ‘새끼 호랑이’ 등 이름 앞에 붙는 호칭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런 과찬에 ‘완전’ 부담스럽긴 하지만 절대 서운하진 않다.
오히려 과찬처럼 붙여주는 그 호칭에 어울리는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중학생때부터 존경했던 선배님과 함께 견줘진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영광이다. 그런데 ‘임재범의 그녀’보다 ‘임재범의 후배, 그녀’가 더 맞는 표현 아닐까. 선배님의 사랑스러운 그녀들은 선배님 댁에 있다(웃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난 ‘하광훈의 그녀’다. 하광훈 선생님이 가치를 제일 먼저 알아주신 분이니까(웃음).
하광훈과 함께 가수의 꿈을 긴 시간 동안 키워왔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이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해주시는 분이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땐 하광훈 선생님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늪’ ‘홀로 된다는 것’ ‘너에게로 또다시’와 같은 명곡을 작곡한 작곡가라
는 사실도 몰랐다. 그 사실도 2~3년 뒤에나 알았나? 그걸 처음 알고 놀라는 내 모습을 보고 하광훈 선생님은 그냥 웃으셨다. 지금까지도 그게 기억에 남는다(웃음).
실용음악을 따로 배우지 않아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맞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알지만 악보 볼 줄은 모른다. 그래서 실용음악을 전공하신 분들이 전문 용어로 말하는 걸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 하광훈 선생님은 그런 내 사정을 잘 아는지라 나한테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지연아, 노을 지는 바닷가에 서서 네가 바다를 맞이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불러 봐!” 한마디로 나를 위해 눈높이 교육을 해주시는 거다.
뮤지컬이 아닌 드라마나 영화 연기 욕심은 없나. 물론 있다. 아직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조만간 뮤지컬이 아닌 다른 장르의 연기를 선보일 계획이다. 영화 쪽은 무척 욕심나는 매체인데 개인적으로 김기덕, 홍상수,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한다. 회사는 싫어하겠지만 그 감독님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만 주신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개런티 없이 출연할 생각도 있다(웃음).
과거의 당신처럼 자신의 꿈을 좇으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간접적인 것이든 직접적인 것이든 원하는 꿈과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처럼 그분들도 꿈을 이루게 될 날
이 분명히 올 거라고 믿는다.
음악 외에 당신이 이루고 싶은 인생의 또 다른 꿈은 없나. 배우 오드리 헵번의 노년과 같은 삶을 언젠가 살고 싶다. 특히 힘든 아이들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어린 친구들 중에 힘든 친구들을 보면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내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정말이지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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