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와 닥터 지바고의 삶은 분리되어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의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라기 보다는 시인과 시적 화자(poetic hero)의 관계에 가깝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었다면, 그러한 전통을 마감하는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 이 작품 속에서의 지나친 우연의 남발은 일종의 '고의적인' 시적 기법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노벨상 수상과 데이비드 린의 영화로 더 유명해진 이 소설은 덕분에 20세기의 걸작 몰록에도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만한 유명세도 치르는 듯하다. 덕분에 이 작품은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멜로 드라마적'으로 읽혀왔다.
'눈덮인 설원에서의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쯤으로 요약되어 온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하지만, 작가 자신, 혁명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빚갚음'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고백을 음미해 봄 직하다. 다른 무엇보다는 이 소설은 역사 속에 놓인 한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것이다.
여주인공 라라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두 인물, 지바고와 파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혁명과 관계한다. 지바고는 방관자적 지식인의 비겁한 삶을 끝까지 유지하며, 반대로 파샤는 적극적인 행동가로서 혁명(역사)에 적극 개입하지만, 둘다 불운한 죽음을 맞는다. 파샤는 자살하고, 지바고는 자신의 유고 시들을 남긴 채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죽음이 삶의 의미인 것일까?
작가는 이야기가 종결된 이후에 유리 지바고의 시들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삶이 예술을 통해서 부활함을 암시한다. 한 인간의 삶은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가 남긴 예술적 창작 속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일을 한갓 하찮은 일로 치부했던 라라와 지바고의 세계관에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역사'라는 명분에 굴복(?)하기 보다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내적 망명자의 길을 택한 한 시인의 삶을 존중할 수는 있다.
<닥터 지바고>의 운명은 그러나 주인공의 지바고의 삶과는 대조된다. 이 작품이 1958년 노벨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내적 망명의 삶에서 꺼내어져 스캔들에 휘말려 든 파스테르나크는 2년만인 1960년에 건강악화로 사망함으로써 '역사'의 비정함을 또 한번 입증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파스테르나크의 마지막 시로서 <닥터 지바고>가 남겨졌다.
<보충설명/요약>
지바고는 시베리아늬 부유한 사업가 가전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가 10살때 세상을 뜨고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고아가 된 지바고는 모스크바의 지식인 집안에 맡겨지는데 그는 의학을 공부한 뒤 결혼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종군의사로 전쟁터에 나간 그는 라라라는 간호원을 알게 된다. 라라는 지바고의 집을 파산시킨 변호사에게 능욕을 당했던 적이 있었으나 지바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후 두사람의 사랑은 여러번 어려움에 부딪치지만 지바고는 지병인 심장발작을 일으켜 불운했던 삶을 끝마치게 된다. 영화화되었는데 큰 인기를 끌었다.
첫댓글 잘 보았네요,,,,,
잘 보세융 ㅎㅎ
고등학교때 단체관람영화 옛기억이나네요
옛추억? 라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