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업가 김만덕 (金萬德)
“백성 살려야” 전재산 내놓은 ‘제주의 어머니’
제주도를 살린, 시대 앞선 ‘여성’ CEO 김만덕
조선시대 여인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누가 있을까?
인수대비, 문정왕후, 장희빈,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등등. 이들은 모두
왕실 여인이다. 그럼 왕실과 관계없이 유명한 여인들로는 누가 있을까?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은 양반이거나 양반 계급과 관련 있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중인이나 평민, 천민에 속한 여인들 중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답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한 명은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9월10일 제주특별자치도와 SBS는 ‘김만덕 드라마’ 를 제작해 내년 하반기
방영하기로 합의했다. 김만덕은 누구이기에 현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제주 사람들 “우리를 살린 이, 만덕이로다”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평민 신분으로, 때로는 기녀(妓女)라는 말을
들으며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남성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한 여인이다.
본디 김만덕은 제주의 양갓집 딸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이후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어 한 퇴기(退妓)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나이가 들자 자연히 관아에서 그녀를 관기(官妓)로 삼아버렸다. 하지만 만덕은 관기로 있으면서도 근검절약해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일궈갔던 것이다.
스무 살 무렵, 만덕은 거상(巨商)의 꿈을 이루기 위해 관기에서 벗어나 다시 양민이 된다. 그러고는 모아둔 재산을 밑천 삼아 장사에 뛰어든다. 채제공의 ‘만덕전’
에 보면 “그녀는 재산을 늘리는 데 가장 재능이 있어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낮이를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수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 고 기록돼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린 뒤 제주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도붓장수를 육지로 보내 값이 쌀 때 사서 들여오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 우황 · 미역 · 전복 · 귤 등을 육지로 내다 팔았던 듯하다. 그리고 나중엔 배를 여러 척 거느리고 선주(船主) 노릇도 했던 듯하다.
정조 19년(1795)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의 시신이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 사람의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해 뭍에서 곡식을 사들인 뒤 그중 10분의 1로는
친척들을 살리고, 나머지는 관가에 실어보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했다.
그러자 제주 사람들이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로다!”라며 그의 은혜를 칭찬했다. 마침내 구휼이 끝난 뒤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정조 임금이 만덕에게 소원이 있다면 쉽고 어려움을 따지지 말고 특별히 들어주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에 만덕이 “다른 소원은 없사옵고, 다만 한번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대궐을 보고 금강산까지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참으로
대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조 20년(1796) 만덕이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니, 왕과 왕비가 크게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네가 일개 여자로 의기(義氣)를 발휘해 굶주린 백성 1000여 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이듬해 만덕이 금강산으로 떠나 천하 절경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니, 백성은 물론 선비와 공경대부까지 찾아와 그의 얼굴을 한 번
이라도 보고자 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정승 채제공을 비롯해 당대 문장가인 이가환 · 박제가 · 정약용 등이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며, 사후에는 추사 김정희가 ‘은광연세(恩光衍世 · 은혜의 빛이 널리 퍼지다)’ 라는 편액까지 써주었다. 그는 당시 매우
존경받는 여성 최고경영자 (CEO)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것이다.
이런 그가 육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주에서는 신적 존재인 ‘할망’
으로 인식되고 있다. 제주섬 탄생 설화인 설문대할망 이후로 김만덕은 ‘제주도의 중시조’ 격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30여 년 전까지 제주 화북포구에 있던 그의 묘를 도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사당(모충사)에 항일 의병들과 함께 모신 것만 봐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매년 김만덕의 제사 때는 여성들이 제사를 지낸다.
아직도 제주도의 중시조로 추앙받아
김만덕의 묘가 있던 화북포구는 당시 육지와 무역을 하던 포구였다.
“내가 죽으면 제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 는 그의 유언을 받든 것인데,
‘죽어서도 제주를 지키겠다’ 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김만덕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엇갈렸다. 구한말까지 신적 존재였던 김만덕은 일제강점기엔 기생으로서의 이력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후 모충사에서 제사를 모시면서 영웅으로 부활한다.
영웅이든 기녀든, 김만덕은 요즘처럼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 더욱 부각될 만한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는 물론 함께 사는
세상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 기사: 주간동아 /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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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기근 때 굶주리는 백성을 구한 여성 거상(巨商) 김만덕(金萬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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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으로 장사를 다니던 부친 김응열(金應悅)이 풍랑으로 사망했을 때 만덕의 나이 불과 10여세였다. 파선과 더불어 어린 시절의 행복도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이때의 충격으로 몸져누웠던 어머니 고씨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친척집에서 일을 돌보아주며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그나마 친척집도 가세가 기울자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어느 노기(老妓)의 집으로 보내졌다.
노기는 만덕이 노래와 춤, 거문고에도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 동기(童妓)로 편입
했다. 만덕은 나이가 들면서 양가(良家) 출신인 자신이 천한 신분의 기생이 되어 있는 현실에 불만을 느꼈다. 그녀는 양녀(良女)로 환원되기 위해 관가에 호소
했으나 거절당했다. 만덕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제주목사 신광익
(申光翼)을 찾아가 양녀 환원을 호소했고, 드디어 기녀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주위에서는 양녀로 환원된 그녀가 곧 결혼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덕은
한때 기생이었던 과거를 지닌 채 한 남성과 결혼해 평생을 그 그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남은 인생을 투자하기로 결심
했다. 그녀가 살던 영·정조 시대는 변화의 시대였다. 이앙법 (移秧法: 모내기법)을 비롯한 농업기술의 발달은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고, 이는 더불어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만덕은 유통망이 상업발전의 골간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다. 그녀가 살던 18세기 중엽 내륙에서는 각지에서 5일장인 장시(場市)가 섰고,
해안과 강가의 포구(浦口)도 흥청거렸다. 장시와 장시, 장시와 포구, 포구와 포구가 서로 연계되면서 전국이 하나의 상권으로 편제되어갔다. 내륙에서는 마필(馬匹)에 의한 육운(陸運)이, 연해안 또는 수로에서는 선박에 의한 수운(水運)이
상품을 유통시켰다.
만덕은 제주의 포구가 지닌 이런 가치에 주목해 포구에 객주(客主)를 차렸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했다. 기생 출신이었던 그녀의 객주는 곧 번성했다. 그녀는 객주를 중심으로 기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 특산물인 녹용과 귤 등은 육지에 팔아 많은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관가의 물품도 조달하게 되었고,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浦口主人權)을 획득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덕은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그 자신의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앞장서 이룩한 빛나는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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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재를 털어 제주도민을 구휼한 김만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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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모든 재능이 억압받던 조선에서 그녀의 이런 성공은 이례적인 것이어서
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활은 검소했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는 것이 그녀의 생활철학이었다.
그녀가 성공신화를 구가하던 정조 18년(1794) 무렵 제주는 거듭 태풍의 피해를 보게 된다. 전 제주목사 심낙수(沈樂洙)는 ‘8월 27일과 28일에 동풍이 강하게
불어서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 며
‘만약 2만여 섬의 쌀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 이
라는 장계를 올렸다. 1만 섬만 보내자는 대신들의 건의를 일축하고 정조는 2만 섬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정조 19년 윤2월 곡물 1만 1천 석을 싣고 떠난 두 번째
수송선단 중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보릿고개가 다가오는 제주에는 아사(餓死)의 긴 그림자가 드리었다.
이 소식에 접한 만덕은 자신의 전재산을 희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쌀을 사오게 했다. 이렇게 사온 곡물이 모두 500여 석, 만덕은 이중 1/10을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450여 석을 모두 진휼미로 내놓았다.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은 만덕의 이 기부에 크게 놀랐다.
당시 제주도인 중에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 장교(將校)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梁聖範)이 각각 1백석을 낸 것이 고액기부의 전부였다.
고한록의 기부에 대해 목사 이우현이 ‘무려 300석을 냈다’ 고 보고할 정도였으니
만덕의 기부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정조는 고한록을 특별히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임명했다가 군수(郡守)로 승진시키기로 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을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정조가
‘이들이 1백 석을 자원 납부한 것은 육지의 1천 포(包)와 맞먹는다’ 고 말한 것은 이들의 기부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알 수 있다.
이때가 정조 19년 5월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까지 만덕의 선행은 조정에
보고되지 않았다. 『정조실록』에 만덕의 선행이 기록된 때는 이듬해인 정조 20년(1796) 11월 25일이었다. 양반도 아닌 일개 양인(良人) 여성의 이런 선행에 큰
감명을 받은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에게 만덕의 소원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남성같으면 벼슬을 주었겠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소원을 물어본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만덕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소원을 댄다.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주도 여인들의 출륙(出陸)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소원은 정조에
의해 쾌히 받아들여졌다. 정조는 말을 하사하고, 각 군현과 역(驛)에 편의 제공을 명했다. 정조 20년 상경한 만덕에게 국왕은 내의원(內醫院) 의녀반수(醫女班首)의 벼슬을 내렸고, 그녀는 이 자격으로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 김씨를 배알했다. 이때 정조는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 백 여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다' 라면서 상을 내렸다. 만덕은 이듬해 봄 금강산에 들어가
1만2천봉의 장관을 감상했다.
모든 소원을 푼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기로 결정했다.
귀향 전 만덕은 남인 정승 채제공을 만났다. 정조의 개혁정치 파트너였던 채제공은 이 제주여인에게 큰 흥미를 느끼고 상경 직후 이미 만나 교분을 가진 터였다.
이때 체제공은 77세, 김만덕은 57세였다.
채제공은 「만덕전(萬德傳)」을 지어 그녀에게 주었는데, 이는 그의 「이충백전
(李忠伯傳)」처럼 조선 후기 의협(義俠)을 주제로 한 여타의 전(傳)들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민생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귀향 15년만인 순조 12년(1812년) 10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안장하였다. 그녀 사후 약 20여년 후인 헌종 6년(1840년) 대정현에 유배 온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크게 감동해 그의 양손(養孫) 김종주에게 편액을 써주어 의기를 기리기도 했다.
모충사 기념탑 / 만덕의 은덕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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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덕 등의 기념탑이 서있는 모충사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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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의 무덤은 1960년경부터 제주 시가지가 팽창하면서 1977년 1월 도민의
이름으로 제주시 동쪽 외곽 건입동 사라봉 기슭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사라봉은 천애절벽 밑으로 부딪쳤다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과 해 질 무렵 바다를 물들이는
낙조가 절경이어서 예부터 사봉낙조(紗峰落照)로 불렸다. 모충사 경내에는 세 개의 높은 탑이 있는데 두 개의 탑은 항일열사 조봉호 등을 기리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한 개는 김만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모범여인을 선정해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