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8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설교
홍지훈 목사
미가 6:8
야고보 3:18
사랑과 정의와 평화
우리 교우 중에 한 분이 몇 달 전에 제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같은 것일까요?” 이 질문의 깊이를 가늠해 보느라고 답을 드리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교회 이름도 평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또 거짓 평화를 주의하자는 요지의 설교말씀은 제가 자주 하는 것이기에, 정의가 바탕이 된 평화의 의미에 관하여서 우리 교우들은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질문을 <행동>의 치원에서 다시 생각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정의를 지키며,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는가? 그 방법을 묻는 질문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가꾸고 지키는 동일한 방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만일 사랑하기 위해 베풀고, 정의롭기 위해 싸우고, 평화롭기 위해 참으라고 말하면, 세 가지 각각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그림으로 그리면 사랑을 정점으로, 좌우 하변 꼭지점에 정의와 평화를 배치한 정삼각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함께 유지하면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하고 사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말처럼, 그림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북한 동포가 굶주리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신문에 보니 북한의 지도자가 워낙 맥주를 좋아해서, 독일의 유명 맥주회사에 북한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곡식으로 맥주나 만들어 즐길 요량이나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꼬집는 말도 해주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인도적인 사람들은 북한 주민이 굶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오늘도 식량을 보내줍니다. 그 곡물이 군량미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만, 그래도 얼마만큼은 북한주민의 고픈 배를 달래줄 것으로 믿고 보내줍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곡물로 무기를 사고 군사훈련을 하면, 결과적으로 평화를 해치는데 도움을 주는 꼴이 됩니다. 배고픈 주민에게 줄 곡식을 당 간부가 가로채서 자기 배를 불리면, 결과적으로 정의를 해치는 꼴이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을 내심으로 반대합니다. 하지만, 험한 가정과 심난한 학교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체벌의 효과를 잘 알고 계십니다. 오래전 영화 <친구>에서 주인공 유오성이 옥상에서 친구를 만나 한마디 한 것이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삼촌들이 자기가 잘못할 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꾸짖어주기만 했더라고 자기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푸념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분명히 때리는 행위는 평화를 깨는 일입니다. 그리고 힘있다고 때린다면 정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안 될까요? 윽박지르는 폭력적인 말, 자녀를 무시하는 말 말고 진심을 담아 하는 말 말입니다.
제가 신학공부를 시작한지 5년 되었을 때에 만난 스승 한분은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현대신학을 가르쳤습니다. 한 10명이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기말 보고서 주제를 저는 <예수와 비폭력>이라는 주제로 잡았습니다. 당시 제 주장은 예수는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예수는 목숨을 바쳐서 폭력에 로마당국과 종교권력에 항거했고, 그 결과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고 논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 증거가 나오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으로 장사치들을 몰아낸 사건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장로회의 한 교회는 담임목사가 반정부 설교를 한다고 해서 교회에 깡패들은 난입하도록 한 공권력에 항의하고자 종로경찰서 앞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주일만 되면 종로가 시끄럽습니다. 의식 있는 청년들이 그 예배에 가세하기도하고, 예배가 끝나면 거리에서 시위하기도 합니다. 신문방송에서 평가하는 이 교회는 평화를 해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정부가 못하게 하는 시위를 하니 법과 질서를 깨뜨렸다는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사실 그 때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를 향해 바른 말이나 쓴 소리를 하는 목사를 <정치목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몸이 속해있는 현실 사회 속에서 종교만 생각하고 정치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면, 그것은 사랑은 있어도 정의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는 자기들만의 평화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제가 쓴 보고서에서 예수님을 당시 사회적인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가로 묘사하였으니, 학점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20대 후반의 나이인 저는 아예 학점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그런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제게 A학점을 주었습니다. 종강파티 하는 날 함께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가면서 제가 물었습니다. “점수 잘못주신 것 아닙니까?” 그 교수님은 자신과 다른 생각이지만, 성서와 신학에 바탕을 둔 논리와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잘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문제를 나이 먹어가면서 더 많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과 저는 8살 차이가 납니다. 지금도 자주 만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 덕에 학문과 교육의 기준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은 자기와 똑같은 붕어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길을 스스로 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단 한 번에 배웠습니다.
저는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서 다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공존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것이 공존 할 수 있느냐는 질문보다는 “당연히 공존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능성을 묻는 것은 이미 충분히 물은 것이고,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올바른 주장을 하려니 주변이 시끄럽게 되고, 지금 내가 평화를 깨는 사람 같을 때도 있습니다. 워낙 의롭지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낍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교회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의 보다는 은혜가 넘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한 행동은 때로 의롭지 못해도 눈감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사랑이라고 합니다. 정의만 포기하면 다 될 것 같습니다. 늘 정의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미가서 6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미가의 입을 통하여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앞부분을 읽어보면 주님 앞에 드릴 제물만 생각하는 백성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종교행위만 성실하게 수행한다고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사회와 세상이 다 공의롭게 운영되도록 정의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교회 내부의 정의를 세우지 못하거나, 사회정의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종교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함께 읽은 야고보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평화의 씨앗을 뿌려서 거두는 열매가 정의의 열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무시하는 평화는 없다는 뜻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하필이면 제가 야고보서를 인용한 것은 야고보서가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도 사랑하고 평화도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 세 가지가 실천되는 방법을 찾자고 말씀드린 것에 답을 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미가서에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아니냐!”라고 쓰인 것에서 저는 그 답을 찾았습니다. 정의를 추구할 때에는 동시에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말 같지만 좀 생각해 보면 참 맞는 말입니다. 정의를 추구하면서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감추거나, 가리지 않는다면,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언제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범주를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사랑이 상대방에게 잘해주고 원하는 것을 해주는 협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을 사랑하는 일이 다른 편을 미워하는 일이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민족에게 이로우면 다른 민족에게는 해로운 일이 벌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에게 사랑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사랑입니다.
이제 아까 그렸던 삼각형을 다시 그려 보겠습니다. 평면에 그리지 말고 입체로 공간 안에 삼각뿔로 그리겠습니다. 밑면이 정삼각형의 세 꼭지점에 여전히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배치하십시오, 그리고 가운데 기둥을 세워 삼각뿔 정점에 하나님을 놓으십시오. 우리가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범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주면서 다시 돌아올 사랑을 계산하고, 군비를 증강하여 평화를 만들고 지키겠다고 생각하며,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극한 투쟁도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살고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방법으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우리 마음을 열고 따르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신문에 보니 휴전선 바로 아래에 평화학교가 열렸다고 합니다. 학생은 8명입니다. 3년 과정인데, 아직 커리큘럼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을 시작한 목사님은 평화학 전문가입니다. 영국에서 평화학으로 박사를 받고, 펜들힐 퀘이커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평화를 체험한 분입니다. 그분 소원은 이런 학교가 몇 개 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뿐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인성교육과목을 개설해야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학교폭력이 수위를 넘어서 죄책감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자기에게 실망하고 미워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합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평화로운 길을 찾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평화목교회도 많은 생각 끝에 설립했고, 신앙의 평화를 통해서 마음의 평화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실천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친 영혼들입니다. 지친 영혼은 날카로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투기 전에, 평화나무 그늘에서 쉬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평화의 쉼터를 제공하고 평화의 숨을 불어넣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님의 질문처럼,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이 평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큼은 같은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 중심에 하나님만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이 세 가지를 함께 실천 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