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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인, 여진인, 일본인, 동남아인, 이슬람교도 등 숱한 외국인들이 조선 땅에 와서 살아가는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국 초기에는 태국, 자바 등지에서 조선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많은 사신들이 왕래했으며 서역 지방의 위구르인, 이슬람교도들도 조선 땅에 찾아와 벼슬을 살았던 흔적도 있다.
조선 정부는 외국인들의 성품과 그들의 지식, 기술 등을 조사한 후 쓸모 있는 인물로 판단될 경우 조선 처녀와 혼인시켜 조선 사람으로 동화시켰다. 이러한 혼혈의 기록과, 많은 외국인들에게 성씨와 관향을 내려준 사례는 우리가 단일민족, 순수혈통이라는 배타적 민족의식의 고정관념을 허물기에 충분할 정도다
김용삼 월간조선 실장/부장
조공 바치러 온 태국인
우리나라에서도 파란 눈, 검은 피부, 독특한 민속의상 차림의 외국인들을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인들이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나 어학강좌의 강사, 드라마 연기자로 매스컴에 등장하는 것도 이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3D업종의 중소기업 생산현장에는 중국의 조선족 출신을 비롯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태국, 몽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건너온 산업 역군들이 경제활동의 일면을 담당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갔던 외국인의 모습을 숱하게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 초기에 태국, 자바, 이슬람교도들에 얽힌 무수한 사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태조 2년(1393) 6월 16일 섬라곡국(暹羅斛國)이란 나라에서 장사도(張思道) 외 20명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와 소목과 한약 약재인 속향 1000근과 태국 원주민(실록에는 '토인'으로 기록되어 있음) 두 명을 조정에 바친 기록이 보인다.
섬라곡국은 오늘날의 태국이다. 조선 초기 태국에서 사신을 보내올 정도로 조선은 이 시절엔 동북아에서 알아주는 문명국이었던 셈이다. 사신이 태국 원주민을 선물로 바치자 태조 이성계는 태국 원주민에게 대궐 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 용어로 설명하면 청와대 경호 업무를 맡긴 셈이다.
이날 실록에 등장하는 장사도란 사신은 태조 3년(1394) 8월 7일 예빈경(외국 사절의 접대를 담당하던 예빈시 관원)에 임명된 사실로 미루어 이 인물도 조선에 정착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태조~세종 연간에 수 차례 태국 관련기사가 발견되었다. 다음은 태조 5년(1396) 7월 10일의 기록.
<이자영(李子瑛)이 일본에서 왔다. 그는 통신사로서 섬라곡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나라 사신 임득장(林得章)과 함께 돌아오던 길에 전라도 나주 앞바다에서 왜구에게 붙잡혔다. 나머지 사람은 다 죽고 이자영만 사로잡혀 일본에 있다가 이제 돌아온 것이다.>
사건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섬라곡국 사신 임득장을 비롯한 여섯 명의 외교사절은 왜구에게 포로가 돼 억류생활을 하다 이듬해인 태조 6년(1397) 4월 23일 조선으로 도망쳐 왔다. 태조 이성계는 이들에게 옷 한 벌씩을 하사했고, 사흘 후에는 섬라곡국 사신 일행과 투항해 온 왜인들이 조회에 참석한 사실이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조회를 받았다. 항복한 왜인 나가온과 섬라곡국 사람도 조회에 참석했다. 나가온에게 옷 두 벌과 사모 은대 신발을 하사하고 그 일행에게도 베옷 한 벌씩을 하사했다.>
조정에서는 외교사절이 왜구에게 습격을 받거나 백성들이 납치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오면 강경한 외교 공문을 일본에 보내 귀환을 요청했다. 김목과 막금이란 형제의 일본 억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사건의 정황은 이렇게 정리된다.
제주에 살던 어부 형제 김목과 막금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표류해 갔다. 왜인들은 두 형제를 체포했다가 김목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막금은 억류하여 종으로 삼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목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지방 관리는 예조에 보고했고, 예조는 일본에 다음과 같은 항의 공문을 보내 자국 백성의 송환을 요청했다.
<'제주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 김목과 막금 등 두 형제가 불행히 풍랑을 만나 귀국에 표류해 갔습니다. 김목은 돌려보냈으나 그의 아우 막금은 족하(足下:상대편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일본을 나타냄)가 점유하여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모 형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바라보며 생각하는 정이 더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예부터 한집안 같았으니 피차간에 인민을 강점하여 돌려보내지 않는 일은 도리상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백성을 돌려보내면 성의를 가상히 여겨 관대하게 처리할 것입니다.'>(세종 26년 8월 13일)
이 공문을 받고 겁을 먹은 일본의 비전주 태수 원의는 곧바로 김목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감사의 표시로 원의에게 호랑이가죽 두 벌을 비롯한 푸짐한 선물을 보냈다.
자바에서 온 사신 이야기
태종 6년(1406) 4월 14일에는 기남보국(실록에는 '왜놈의 별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이란 나라의 사신이 조정에 와서 토산물을 바쳤고, 두 달 후인 6월 8일에는 조와국(오늘날의 자바)에서 사신이 토산물을 가득 싣고 조선을 향해 오다가 왜구에게 습격당한 사실이 발견됐다.
<남번의 조와국 사신 진언상이 전라도 군산섬 근처에서 왜구에게 약탈당했다. 배에 실었던 타조, 공작, 앵무, 잉꼬, 침향(향료나 약재로 쓰던 나무 기름) 등 여러 약재와 옷감을 모두 강탈당하고 포로로 잡힌 자가 60여 명, 전사자(戰死者)가 21명이었다. 오직 40명만 죽음을 면해 해안으로 올라왔다.
진언상은 일찍이 갑술년(1394)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조봉대부(문관의 종4품) 서운부정 벼슬을 제수했던 사람이다.>
세종 8년(1426) 9월 22일에는 귀화한 남만인(南蠻人:남쪽 오랑캐라는 뜻.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지는 확실치 않음) 우신(禹信)에게 옷감을 내려주고 아내를 얻도록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세종 7년(1425) 5월 22일에는 타타르 출신의 중국 사신이 조선을 다녀간 사례도 있었다.
<이때 김만이 술에 취해 졸다가 놀라며 아뢰기를 '나는 북방 달달(타타르) 태생으로 우직한 사람입니다. 주시는 술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더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높은 사신을 내 집에 맞이하여 취하시게 하려 한 것이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소이까' 했다.>
조선 초기에는 동남아 이외에도 회회인(回回人), 즉 이슬람교도들이 조선에서 살아간 사례들도 자주 발견됐다.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李熙洙) 한양대 교수의 저서 '한-이슬람 교류사'에 의하면 회회인은 '위구르인을 중심으로 하는 무슬림 일반에 대한 통칭'으로 정의하고 있다.
조선 초기 우리나라에 진출한 대부분의 회회인들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라고 한다. 다음은 태종 7년(1407) 1월 17일의 실록.
<일본 단주(丹州)의 사신이 대궐에 나와 하직했다. 회회 사문(이슬람교 승려) 도로(都老)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조선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집을 주어 정착하도록 했다.>
도로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추적해 보니 태종 12년(1412) 2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됐다.
<회회 사문 도로에게 금강산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했다. 도로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수정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쳤는데 임금이 좋다고 칭찬했다. 도로가 아뢰기를 '조선은 산천이 수려하여 진귀한 보화가 많으니 저에게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도록 허가하면 얻을 게 많을 것입니다.'>
이 기록은 이슬람교 지도자가 조선에 와서 광산업 면허를 허가해 달라는 요청이다. 임금이 이 요청을 허락하자 도로는 한 달 후 수정 300 근을 캐서 임금에게 바쳤다(태종 12년 3월 29일).
이듬해인 태종 13년(1413) 7월 16일, 도로가 순흥부에 파견되어 수정 채취작업에 종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각지에서 지하자원 개발사업에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 즉위식에 이슬람교도 참석
태종실록에는 광산 전문가 도로 외에도 이슬람교 지도자(실록에서는 회회 사문이라고 표기함) 다라(多羅), 이슬람 사람 서지(西地) 등에게 임금이 쌀을 내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이슬람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고유의상과 풍습,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으며 살아갔다. 이들의 모습은 세종의 즉위식 석상에서도 발견된다.
<종실과 문무백관이 경복궁 뜰에 늘어섰다. 임금(세종)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들이 절을 올려 하례하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 회회 승도들도 모두 참여했다.>
세종 1년(1419) 5월 3일 임금이 금교역에서 사냥할 때 이슬람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나왔으며, 세종 8년(1426) 1월 1일에도 이슬람 사람들이 왜인, 야인(여진족)과 함께 임금에게 신년 인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세종 9년(1427) 4월 4일에는 조정 대신들이 회회교도의 혼인문제에 대해 임금에게 올린 건의가 발견됐다.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야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입는다면 우리나라 사람과의 혼인도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또 대조회 때 회회교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은 조선의 국가 지도부가 이슬람교도들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키고, 또 조선 사람과 혼인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옷차림과 이슬람교도 특유의 종교의식을 금지시킴으로써 그들은 고유의 문화풍습을 버리고 조선에 동화되어야만 했다.
이희수 교수는 '한-이슬람 교류사'에서 많은 회회인들이 고려 후기부터 개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했을 때 주로 사신이나 통역관, 몽골 귀족의 시종 등으로 고려에 따라 나와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중세 시절 과학기술의 최고 선진국으로서 연금술과 항해술, 천문기상학, 수학, 물리학 등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이런 과학문명이 회회인들을 통해 중국과 조선에 전파되면서 조선은 개국 초기에 천문, 기상, 의학 분야에서 찬란한 과학문명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희수 교수의 저서를 요약한 내용.
<세종 24년(1442)에 만든 측우기를 비롯, 각종 천문 기상 관측기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기기와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보완, 발전시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새로이 제작, 정비된 각종 천문관측기기인 대소간의, 혼천의, 앙부일기, 일성지시 등은 원대(元代)에 중국에 도입됐던 이슬람 천문과학기기의 구조와 기능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격루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미 8세기 압바스 시대에 소리나는 물시계가 고안되었다.
이슬람 의학도 조선에 전래되었는데 조선 초기에 설치한 전의감은 이슬람 의학을 취급하던 원나라 관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여진족들의 귀화 실태
조선왕조실록에는 동남아, 이슬람교도뿐만 아니라 중국인이나 왜인, 야인(野人:만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의 여러 종족) 중에서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해 살아가는 향화인(向化人)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야인들이 언제부터 우리 땅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중종 30년(1535) 10월 9일의 기록에 의하면 '북청의 무해대에는 삼국시대부터 귀화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대목이 보인다.
실록에 야인들이 조선에 귀화를 요청하고 정착하기 시작한 사연은 태조 4년(1395) 12월 14일 실록에서 발견된다. 이 날 실록은 오랑합, 소오, 적개 등 네 명의 야인이 투항해 온 사건과 함께 북방 거주 야인들의 실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삼국 말기에 평양 이북은 모두 야인들의 사냥터가 되었다. 고려 때 남방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의주에서 양덕까지 장성을 쌓아 국경을 지켰으나 삶이 불안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동원해 토벌까지 했다.
의주의 토호 장(張)씨가 조정 명령을 듣지 않고, 남쪽에는 왜구들이 약탈해 성곽이 불타고 해골이 들판에 깔려 있었다. 안변 이북은 여진이 점령하여 국가의 정령(政令)이 미치지 못했다.
임금(태조)이 즉위한 후 성스런 교화가 서북면 백성들에까지 미쳐 편안하게 살게 되고 밭과 들이 날로 개간되어 인구가 날로 번성했다. 그 결과 의주에서 여연에 이르는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섬의 왜인들도 얼굴을 고치고 무역을 하게 되어 남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곳을 정해 호구가 불어나고 바닷가의 땅과 멀리 떨어진 섬까지 개간하여 전쟁을 모르고 날마다 마시고 먹을 뿐이다.
동북면은 왕업(王業)을 처음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되어 야인 추장이 먼 데서 와서 태조를 섬겼다. 그들은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에 들어와 좌우에서 가까이 모셨고, 정벌 때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임금이 즉위한 뒤 만호(萬戶:1만 명을 다스리는 지휘관이라는 원나라 관제. 조선에서는 종4품 무관직)와 천호(千戶) 벼슬을 주고, 여진의 머리를 풀어헤치는 풍습 대신 관대를 띠게 하고, 가축과 짐승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과 혼인시키고 각종 역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다.
야인 추장에게 부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조선의 국민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공주에서 갑산에 이르기까지 읍을 설치하고 진을 두어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며, 학교를 세워 경서를 가르치게 하니 문무(文武)의 정치가 잘되었고 천 리 땅이 다 조선의 판도에 들어와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밖은 풍습이 다르나 풍문을 듣고 조정을 찾아오기도 하고, 혹은 자제들을 보내 볼모로 시위(임금을 호위하고 궁성을 수비하는 일)하기도 하고, 혹은 조정의 벼슬 받기를 원하고 혹은 내지로 옮겨오고 토산물을 바치는 자들이 길에 잇닿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밖에 거주하던 여진 종족은 여진, 올량합, 혐진 올적합, 남돌 올적합, 활아간 올적합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좋은 말이 새끼를 낳으면 다투어 조선에 바쳤고, 흉년이 들어 농사를 망치면 조선에 곡식을 빌리러 오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진족들은 조선에 귀화를 요청하여 정착생활을 시작했으니, 다음은 세종 15년(1433) 6월 4일의 실록.
<임금이 말하기를 '파저강에서 온 김자환(金自還)은 귀화한 지가 겨우 2년 됐는데 생활이 어렵고 무재(武才)로 공을 세웠으니 상을 넉넉히 주는 것이 어떠냐' 하여 옷과 안장 얹은 말, 노비를 주었다. 김자환의 원래 이름은 소소(小所)인데 강계가 고향으로서 야인 임합라(林哈剌)에게 사로잡혀 여러 해 동안 살다가 아내를 데리고 강계로 도망 왔다. 임금이 스스로 온 것을 기쁘게 여겨 자환이라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추장 아들 볼모로 서울 보내
야인들이 조선에 와서 정착한 사례를 분석해 보면 야인 추장들이 자기 가족 중 유능한 인재를 볼모로 서울에 보낸 사실이 발견된다.
이 무렵 조선의 동북쪽 국경선 지역에서는 조선과 세력이 강한 여진 부족 간에 무력 충돌이 잦았는데 조선 조정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여진족 추장 가족들 중 신체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을 볼모로 서울에 보내도록 협약을 맺었다.
조정에서는 야인 추장의 자제가 서울에 오면 임금의 곁에서 호위하고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배치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에 소속시켜 대통령 경호 임무를 맡긴 것이다.
여진족 입장에선 조선에서의 시위 생활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문명국 조선에 보내 선진 문물을 습득하는 유학의 기회였다. 조선 입장에서는 말썽 많은 여진족들과 무력충돌을 방지하고 유사시 볼모로 삼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 시위를 살러 오는 여진족들은 활을 잘 쏘고 무예가 뛰어나며 말을 잘 타는 용맹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야인들은 우리나라와 접경한 지가 오래되었고 국경 안에 사는 자도 있지만 의식(衣食)에 욕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는 잠저 때부터 개국에 이르도록 야인들을 어루만져 여진, 올량합, 올적합 등의 무리 중 시위를 삼은 자가 자못 많았다.
우리도 성질이 순량하고 무술 재주가 뛰어나며 그 친족이 국경 안에 사는 자이면 시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북방 사람이 와서 벼슬을 살고 양식을 주어 편안히 살게 하면 북쪽 변방이 걱정이 없게 되니 비록 1000석을 쓰더라도 무엇이 아깝겠느냐.'>(세종 9년 9월 18일)
이처럼 야인들에게 시위를 살게 하는 이유는 '변방지역의 안정과 평화'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시위를 사는 야인에게 벼슬과 양식을 제공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진족 부락에서는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한국행' 붐과 사정이 비슷했을 것이다.
야인들이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어오자 세종 8년 2월3일 관련부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자원하여 시위를 살고 있는 올적합, 알타리, 올량합의 여진인 중에는 늙었거나 재간이 없거나 생활이 곤란해 떠돌아다니다 시위를 살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심으로 귀의하는 사람을 제외한 그 밖의 잡종들은 경성과 경원의 절제사가 신분과 재능을 조사하여 마땅한 사람만 증명을 주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소서.'>
말하자면 출입국 심사를 강화하여 유자격자에게만 비자를 발급한 셈이다. 이처럼 입국심사를 강화하여 무예가 출중하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자, 글을 아는 자들은 입국시킨 반면 자질이 불량한 자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자, 범죄자들은 가차없이 송환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여진족들이 조선에 얼마나 많이 와서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귀화 야인의 수가 너무 많아 녹봉을 받아먹고 하는 일이 없어 떼를 지어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고, 술 취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상해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두운 밤에 모여 마시고 방종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걱정됩니다.
부득이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한 불필요한 잡류들은 정부와 의논하여 본토로 돌려보내소서.'>
광해군 1년(1609) 4월 10일 실록은 '귀화 오랑캐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간원이 비밀보고를 올렸다.
'귀화한 오랑캐들이 해서(海西)로부터 경기, 호남, 호서의 해변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으며 그중에도 호남과 호서에 더욱 많습니다. 이들은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으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자가 날로 불어나 4도에 뿌리박고 있는 배가 200여 척에 이릅니다. 이들은 해로(海路)에 익숙해 배 부리기를 말 부리듯 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미치지 못할 지경입니다.'>
광해군 6년 7월 25일 실록을 보면 우리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귀화한 오랑캐의 마을에 들어가 사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숙종 26년(1700) 10월 12일 고창 선비 유신우가 '향화인도 우리 백성과 똑같기 때문에 세금과 요역을 부과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사실이 발견됐다.
<'향화인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백성이 된 자입니다. 우리 백성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데 늘 향화인이라 일컬으며 어업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신역(身役)이 없습니다. 거주지 관원이 호적을 정리하여 갯가에 거주하는 자는 수군에, 육지 거주자는 육군으로 입대시키면 수만 명의 정예 병사를 얻게 될 것입니다.'>
향화인 출신으로 수만 명의 정병을 얻을 수 있다면 전체 향화인 수는 수십 만을 넘었다는 계산이 성립된다.
외국인 남성과 조선 처녀의 혼인을 장려
조선 초기에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에 와서 살았지만 여진족에 비해 왜인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세조 7년(1461) 4월22일 임금이 왜인들에게 시위를 장려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왜인 평무속(平茂續)이 하직하니 임금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올량합(여진족)은 우리 조정에 시위하는 자가 많은데 너희들 왜인은 한 사람도 시위하는 자가 없다. 이제 네가 우리 조정에 와서 시위하고, 또 재주도 있어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고는 옷과 신발, 안장을 갖춘 말을 내려주었다.>
실록에는 조선에 시위를 살러 온 야인들을 조선 처녀와 혼인시킨 사례가 숱하게 등장한다. 당시에는 인구수가 곧 국력이던 시절이므로 인구 증가를 위해서라도 조선 여성과 외국인 남성과의 결혼을 장려한 것으로 짐작된다.
<임금이 명하기를 '서울에 머물러 시위하고 있는 알타리의 금서징아와 금오광아 등에게 아내를 얻도록 하라.'>(세종 5년 12월 12일)
귀화 외국인을 조선 사회에 동화시키고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혼인문제가 시급했다. 조정에서는 세종 20년 1월 28일 외국인들을 혼인시켜야 할 경우를 대비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했다.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귀화한 여진 사람 시가로와 야질대 등에게 의복과 가재도구, 노비를 주고 공사 노비 중에서 양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도록 하소서. 이후로는 귀화한 사람 중 장가가기를 원하는 자는 양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를 주는 것을 영구히 항식으로 삼으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혼인의 사례 외에도 조선은 이민족을 적극 포용하기 위해 귀화를 원하는 외국인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었다. 그중 가장 흔한 사례는 귀화인이나 시위를 살러 오는 외국인에게 의복과 양식, 주택 등을 내려주는 일이었다. 다음은 세종 16년 4월 11일의 실록.
<예조에서 아뢰었다.
'귀화하여 시위하는 왜인과 야인이 살 집은 관청에 속한 빈집으로 주시되, 만약 빈집이 없으면 큰길의 좌우 변에 있는 빈 행랑에 선공감이 그 가족의 많고 적음을 요량하여 2칸, 혹은 3칸을 지어주소서.'>
이 밖에도 시위를 자원하는 자에게는 노비, 옷과 갓, 신발, 말 등을 내려주어 생활의 안정을 꾀하도록 했다.
그런데 귀화인들이 조정에서 내려준 노비를 학대하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세종 25년(1443) 6월2일 예조에서는 귀화인들의 노비 학대 근절을 위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여러 종류의 귀화인들은 성질 사나운 자가 많아 관(官)에서 내준 노비를 학대하니 심히 불쌍합니다. 앞으로는 무리하게 노비를 학대하는 자는 노비를 회수했다가 한 달, 혹은 한 해 지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보고 다른 노비를 하사하소서.'>
과거 통해 벼슬길에 오르기도
조선 초기 야인이 귀화하면 3년까지 양식을 공급하고, 토지 세금은 3년, 요역(국가에서 무상으로 백성들을 사역시키는 것)은 10년간 면제하는 법률을 시행했다(세종 6년 7월 17일).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는 이유는 많은 야인들을 흡수, 동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에 와서 시위를 살고 있는 야인들이 부모의 병으로 귀향할 때 약품을 하사하고, 귀화인이 사망하면 장사를 치러준 기록도 보인다. 다음은 세종 8년 1월28일 실록.
<'귀화인 이을지(李乙支)는 여러 해 동안 시위하다 병들어 죽으니 가엾고 민망하다. 지금 종이와 쌀 등을 주어 장사 지내게 했으니 그의 처자에게 통고하고, 그들의 상복에 쓸 옷감과 쌀 등을 넉넉히 주어라. 또 그 처자가 내륙 지방에 옮겨 살고자 하면 빈집과 식량과 소금을 주어서 생활을 돌봐주어라.'>
이 밖에도 귀화한 여진족 중에 생계가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정에서 도왔으며, 귀화인들의 청원이나 부탁은 너그럽게 들어주었음을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병조에서 아뢰었다.
'전라도 임실에 안치한 귀화인 가오하(家吾下)와 통역관 황천봉(黃天奉)이 말하기를 '우리는 서울에서 살기 위해 귀화한 것인데 외방에 두셨습니다. 저의 나이 65세로 오른팔이 불구이고 자식마저 약질입니다. 저와 아내는 농사를 지을 줄 모르니 비록 좋은 밭을 주셨으나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서울에 가서 임금의 덕택 속에서 살게 하소서.''>(세종 7년 6월 27일)
보고를 받은 대신들은 '이 사람이 임금의 덕을 사모하여 왔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면서 '소원대로 서울로 불러 직업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이처럼 국가에서 귀화 장려책을 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이들의 유지 관리에 막대한 예산이 낭비됐고, 귀화인들도 점차 교만해져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세종 31년 3월 9일 기록에 의하면 예조에서는 향화인과 시위 살러 온 야인들 중 부지런한 자는 정착시키고, 게으른 자는 돌려보내는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요즘 용어로 설명하면 인사고과를 통해 인원을 선별 정리한 것이다.
또 귀화 외국인이 일정한 학문의 경지에 오르면 과거 응시를 허락하기도 했다.
과거 응시가 허용됐으니 재주 있는 귀화인이라면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세종 25년 9월 1일 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과거를 통해, 혹은 귀화인에 대한 특혜로 관직을 제수 받은 사례가 상당수에 달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특전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귀화인도 있었던 모양이다. 세종 24년(1442) 10월 4일에 발생한 사건이 전형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이도을치가 귀화하여 벼슬이 4품에 이르렀는데도 성상의 은혜는 돌보지 않고 본토로 도망했으니 흉악하고 사나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그 처자를 모두 천인(賤人)으로 만들어 뒷사람을 징계하게 하소서.'>
귀화인 중에는 벼슬 지위가 낮고 월급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돌아가려 한 자도 있었다.
<향화 왜인 변좌(邊左)와 그 아들 변효충(邊孝忠), 변효생(邊孝生)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했다. 변좌 등이 직위가 낮고 녹봉이 박해 본토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관향과 성씨 내려주기
귀화 외국인에 대한 각종 특혜조치가 귀화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귀화인을 우리 민족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 성씨 내려주기, 이른바 사성(賜姓)이다. 사성의 사례는 고려 시절부터 외국인들을 정착시키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한-이슬람 교류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성 사례는 고려시대 충렬왕의 부인이 된 제국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왔던 삼가(三哥)라는 무슬림일 것이다.
그는 충렬왕에게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하사 받고 고려 여인과 혼인하여 귀화했는데, 그가 바로 덕수 장(張)씨의 시조라고 한다. 이후 관향(본관)과 사성(賜姓)은 외국인들을 조선에 정착시키는 유인책이 되었다.
조선 개국 초기 실록에 일본 규슈(九州) 지방의 실력자였던 의홍(義弘)이란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정종 1년 7월 10일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예물을 바쳤는데 '나는 백제의 후손이니 조선 사람의 성씨를 내려주기 바란다'고 요청해 왔다.
<임금이 의홍의 요청에 대해 그 가문을 조사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 확인할 수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 온조 고(高)씨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00결을 주기로 의논하자 권근(權近)이 부당함을 주장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홍이 우리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해 적을 쳐부쉈는데(규슈의 왜구를 제압했다는 뜻) 그가 원하는 것은 조선 사람 성씨를 달라는 것과 토전뿐이다. 이것은 실속 없는 은혜를 베풀어 실속 있는 보답을 얻는 것이니….'>
태조 5년(1396) 11월 23일에는 위구르인으로 조선에 귀화한 설장수에게 계림을 관향으로 삼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설장수는 위구르의 고창 사람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승문감 벼슬을 살았던 아버지 설손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설씨 가문은 문장이 뛰어나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시의 일부가 김종직(金宗直)의 시선집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도 '경주부의 사성(賜姓)이 1이니 설이며, 설장수가 관향을 주기를 청하여 태조가 계림으로 본관을 삼도록 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정종 1년(1399) 10월 19일 설장수의 졸기(卒記: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학문이 뛰어나 명나라에 여러 차례 외교 사절로 파견됐으며, '직해소학'을 저술했다. 인물의 바탕이 민첩하고 굳세며 말을 잘해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 7년(1425) 1월16일에는 임금이 설장수의 조카 설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발견된다.
<임금:'너의 선조가 중국에 있을 때 어디 살았으며 언제 벼슬했느냐.'
설순:'선조가 회골(위구르) 땅에 살았사오며 원나라 태조 때 벼슬했습니다.'
임금:'너의 숙부는 몇 살 때 (조선에) 왔으며 우리 언어를 아느냐.'
설순:'신의 숙부 설장수는 19세에 여기 왔으며 언어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태종 6년(1406) 12월 9일에는 원나라 관리 백안(佰顔)의 자손인 이현(李玄)이 본향을 내려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신의 증조부인 백안은 황제의 이모 제국공주(고려 충렬왕 부인)를 받들고 왔는데 자손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나라에 적을 두지 못했으니 다른 귀화인의 예에 따라 사향(賜鄕'본향을 내려준다는 뜻)하소서.'>
상소를 접한 임금은 이현에게 임주(林州)로 본향을 삼도록 허락했다. 이현에 대한 추가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임천군에서 발견된다.
<사성(賜姓)이 1이니 이(李)다. 이현은 본래 외오아국(畏吾兒國:원나라 때 서북방에 살던 종족 이름으로 서유기에는 '畏午兒'로 표기) 사람으로 귀화하여 통역의 공이 있으므로 적을 임주에 붙이게 했다.>
귀화인이 외교 문서 작성
태종 초기 인물인 당성(唐誠)도 조정으로부터 성씨를 받은 귀화인이다. 다음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밀양 도호부의 기록.
<사성(賜姓)이 1이니 당(唐)이다. 당성(唐誠)은 절강성 명주 사람인데 원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와서 개국 초기부터 사대 이문(事大吏文․중국과 주고받는 외교 공문에 쓰이던 문체)을 맡았다. 그러므로 적을 주어 밀양으로 관향을 삼게 했다.>
통역관으로 활약하던 당성은 태종 13년(1413) 11월 3일 사망했는데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된 그의 졸기다.
<당성이 죽었다. 당성은 절강의 명주 사람이었는데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동쪽으로 왔다. 성질이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나이 70이 넘어도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무릇 사대 문자가 있을 때는 직접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실수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믿고 맡겼다. 본향을 밀양으로 내려주었으며, 죽을 때 나이가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문하고 쌀과 콩 각각 40석과 종이 150권을 내려주었다.>
세조 8년(1462) 4월 24일에는 귀화 왜인 평순(平順)과 피상의(皮尙宜)에게 본향을 내려준 기록이 보인다.
<이조에서 아뢰었다.
'평순의 아비 평원해(平原海:조선 초기의 명의)는 지난 병자년에, 피상의의 아비 피사고(皮沙古)는 지난 기묘년에 나와서 시위하다 죽었습니다. 평순 등이 말하기를 '신은 여기서 나고 자랐으며 성상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3품에 이르렀으나 본향이 없어 자손들도 일본을 본향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매우, 당몽장(唐夢璋)의 예에 따라 본향을 내려주소서'하고 요구했습니다.
평순과 피상의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시위한 지가 오래됐으니 본향을 내려주소서.'>
보고를 받은 임금은 피상의에게 동래를, 평순에게는 창원을 본향으로 내려주었다. 평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로 활동하며 아픈 사람을 치료했는데 그만 귀화한 위구르인 설장수의 친척인 설순(循)을 치료하다 목숨을 잃게 한 기록도 보인다.
<설순은 설경수(慶壽)의 아들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책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하여 임금이 그를 존중했다. 병을 앓고 있어 의원 평순에게 치료하게 했더니 평순이 뜸을 잘못 떠서 죽었다.
임금이 노하여 평순을 조사하니 형률에 의하면 참형이지만 임금이 '평순은 귀화한 사람의 아들이니 형률대로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여 곤장 100대를 쳤다. 평순은 귀화 왜인 평원해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8년(1595) 3월 5일에는 귀화한 왜병(倭兵) 15명에게 단체로 이(李)씨 성을 내려준 기록도 발견됐다.
<비변사에서 아뢰었다.
'사고소우 등 15명은 작년 봄부터 이빈의 진중에 있으며 길들인 지 이미 오래고 성품이 공순하여 모두 이(李)씨로 성을 삼았습니다. 이는 이빈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포를 쏘는 것이나 화약 제조에 능숙하다 하니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재주를 발휘하도록 하소서.'>
출세하여 조선 상류층에 오르기도
조선에 뿌리를 내린 외국인들은 과거 응시의 문호가 개방됐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은 고위 관직에 오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성종 즉위년(1469) 12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향화인으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으로 김상미(金尙美), 동청주(童淸周), 낭삼파(浪三波), 태호시내(太好時乃)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 중 김상미는 활솜씨가 뛰어났는데, 성종 9년 11월 9일 실록에 의하면 그만 술을 너무 마시고 활을 쏘다 실수하는 바람에 졸경을 치르는 장면이 발견됐다.
<후원에 나가 활쏘기를 했다. 겸사복 낭삼파 등 18명을 좌측에, 태호시내 등 18명을 오른쪽에 세웠다. 입시 승지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했는데 활쏘기를 마치고 좌우의 맞힌 수를 계산하니 서로 같았다. 한 사람이 화살 하나를 가지고 승부를 겨루게 했는데 오른쪽이 이겼다. 향화한 김상미도 활 쏘는 대열에 있었는데, 술이 취해 쏠 수 없다 하여 임금이 물었다.
임금:'누가 그대에게 술을 권하여 이렇게 취했느냐.'
김상미:'신이 활을 잘 쏘려다가 지나치게 마셨습니다.'
박숙진:'김상미가 술이 취해 실례를 했으니 국문하게 하소서.'>
여진족 김파다상은 성종 3년(1472) 조선에 귀화하여 첨지 벼슬을 얻었고, 성종 5년(1474) 가선대부 도만호(각 도의 수군을 거느리던 종3품 무관)에 올랐다.
이 밖에도 조정에 와서 시위를 살며 관직을 제수받은 귀화인의 사례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세종 26년(1444) 6월 2일 실록에 의하면 귀화한 왜인 등구랑(藤九郞)은 조선 해안에 노략질하러 온 왜적을 잡는 데 공을 세워 임금이 은대와 사모를 내려주었다.
등구랑은 유능한 조선 기술자로서 세종 26년 10월 12일 조정에 '여러 나라 병선(兵船)을 보니 중국 배가 제일 좋고, 유구국이 그 다음이고 조선 것이 가장 하등'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등구랑에게 신형 전투함을 제작하라는 명을 내렸다.
<귀화 왜인 등구랑에게 명하여 마포에서 왜선 체제를 모방하여 배를 만들게 했는데 이때 완성됐다. 여러 진의 배를 양화도에 모으고 새로 만든 배를 적선(敵船)으로 삼아 화포를 어지럽게 발사하여 훈련하고, 의정부와 육조 관리들이 이를 지켜보았다.>(세종 27년 9월 22일)
조선에 온 외국인들은 등구랑처럼 선진 기술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례가 있는 반면, 사회 각층으로 진출해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세종 27년(1445) 2월 7일에 등장하는 왜인 야마사기는 조선에 귀화하여 일급 군사기밀인 화약 제조법을 배웠다. 그런데 대마도주가 야마사기를 송환해 달라고 요청하자 논의 끝에 그를 송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소오 사다모리)이 야마사기를 보내 달라고 하나 이 사람은 내이포에 와서 걸식하던 것을 임금의 명으로 불러온 것이지 종정성이 우리나라를 위해 보낸 자가 아닙니다. 그의 기술은 칼 만드는 기술 한 가지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기술을 다 배워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군기감 장인들과 함께 거처한 지가 오래되어 비밀히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웠으니 머물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제 주민 박산동개(朴山同介)도 귀화 왜인이다. 그는 중종 5년(1510) 8월 23일 왜적이 거제에 침입했을 때 선두에서 돌격하여 많은 적을 죽인 공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는 면포 15필과 말 한 필을 상으로 주었다.
왕실 경호대장에 오른 동청례
외국인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올랐고 실록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함경도 회령 출신의 동청례(童淸禮) 장군이다. 그는 조선에서 시위를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의 아들로서, 조선에 귀화한 후 성종 시절 무과에 급제했고, 연산군 시절엔 왕실 경호대장까지 올랐다.
성종 6년(1475) 4월 20일 모화관에서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 사열과 사격 시범이 열렸다. 임금은 활을 잘 쏜 동청례에게 활과 화살을 선물로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청례는 성종 13년 12월 11일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국경을 넘어온 여진족 이아을가무 일행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듬해인 성종 14년(1483) 2월 19일에는 변방지역을 두루 돌면서 도망한 향화인을 설득해 이끌고 돌아왔다.
실록에 의하면 동청례는 무예뿐만이 아니라 글솜씨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성종 9년(1478) 11월 9일 임금은 동청례가 소장하고 있던 '몽고 세조 황제책(皇帝冊)' '지풍우책'(知風雨冊) '선악(善惡)보응책' '음양점복책' 등의 서적을 사역원(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부서)에 보내 학습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발견됐다.
동청례는 문무(文武)겸전의 인재였지만 여진족이라는 출신성분의 한계로 인한 설움을 맛봐야 했다. 성종 9년 9월 1일, 동청례가 고향의 부모 묘소에 성묘를 위해 휴가를 청하자 조정 대신이 반대하는 보고를 올렸다.
<'중국에서 구원병을 모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청례의 형인 동아망합이 건주위에 있으므로 만약 서로 통하면 기밀이 누설될까 두렵습니다. 그를 보내지 마소서.'>
성종 24년(1493) 1월 8일 임금이 동청례를 습독관(훈련원의 최하위직)에 임명하자 훈련원 관리들이 인사의 부당함을 상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동청례가 비록 무과에 올랐으나 그 아비 동소로가무는 처음에 면모만 고치고 와서 복종한 사람입니다. 포악한 풍속이 다 고쳐지지 않았으니 동청례와 대오를 이루기 부끄럽습니다.'>
연산군 3년(1497) 6월 12일 임금은 여진족 추장들을 회유하기 위해 동청례를 북방에 파견하면서 선물로 부채 130자루를 준비해 준다. 연산군 6년(1500) 6월 3일에는 동청례의 인간됨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동청례는 위장(衛將:조선 전기 중앙군인 오위에 속해 있던 종2품 무관직. 오위장이라고도 함)에 임명할 만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사간원에서는 '위장은 임무가 중하기 때문에 향화인을 임명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임금은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위장에 임명했다.
이 와중에 동청례는 궁에서 쫓겨난 궁녀를 간통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사헌부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여진족들, 동청례 살해에 분노
<'동청례가 전일 방출한 궁녀 간통 건에 대해 사헌부에서 처벌을 건의하자 전하께서 '향화한 사람은 따질 것이 못 되니 논하지 말라' 하셨고, 그를 위장에 임명하셨습니다. 위장은 금병(禁兵:임금의 호위군이자 왕실 친위부대)을 지휘하고 부하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자리이므로 오랑캐에게 직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연산군의 파행과 음행이 겹겹이 쌓이며 연산군 타도를 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연산군은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로 위리안치됐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 쿠데타의 세 주인공들(이를 삼대장이라 한다)의 추대에 의해 중종 정권이 출범했다. 국왕을 폐위하는 이 쿠데타에 당대의 걸출한 무장(武將)이자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동청례도 힘을 보탰지만 그는 귀화인의 설움을 맛봐야 했다. 논공행상에서 차별대우를 받자 동청례는 여러 사람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와중에 도가 지나친 발언을 했는데, 이것이 밀고되어 역모죄로 체포됐다.
<'동청례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연산군을 출궁(出宮)시킬 때 나도 공로가 있으므로 정국공신(중종 쿠데타 당시 공을 세운 103인에게 내린 공신 칭호)에 오를 만한데 등급이 낮춰져 원종 1등으로 제수 받았다. 이는 삼대장의 논공이 잘못된 것으로 사람들이 원망한다' 했습니다. 또 '주상께서 병으로 몸이 편찮으시니 금년 명년에 액이 있을 것이고 종친들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화가 머리까지 치민 중종 임금은 '동청례를 체포해 엄히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다. 동청례는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중종 3년(1508) 12월 3일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의 처자는 종이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당했다.
동청례의 존재는 향화인이나 조선에서 시위를 살던 여진족들에게 희망의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향화인들은 동청례가 출신성분의 한계를 딛고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노력만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대리 만족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뚜렷한 죄목도 모른 채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실이 동청례의 고향에 알려지자 북방 지역의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조정에 진출한 여진족 관리들 사이에도 동청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갔다. 다음은 중종 5년(1510) 8월 11일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온 송징의 보고.
<'신이 중국에서 건주위(야인의 일족) 출신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조선에서 동청례를 죽였다는데 사실인가'하고 물었습니다. 신이 '동청례는 우리나라에서 후대하여 벼슬이 중추(무관의 고위직)에 올랐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대가 잘못 들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의 말을 믿지 않고 '동청례는 나와 조상이 같다. 만약 조정에서 죽였다면 내가 보복하겠다'고 했습니다.'>
동청례의 사형 사건에 충격을 받은 귀화 야인들 중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자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은 중종 6년(1511) 4월 18일의 실록.
<북도 사람 양번석, 번치 형제가 동청례를 따라 올라와 그를 의지하고 살았다. 동청례가 참형을 당하자 '우리는 본토로 돌아가려니 금하지 마소서'라고 했다. 이들이 무례하다 하여 잡아다 중죄로 다스린 후 외딴 섬에 유배시켰다.>
동청례는 비록 말로가 비참했지만 조선 조정의 요직에 올라 국정을 논할 수 있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귀화한 외국인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올랐다면 우리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동청례의 사례는 조선시대가 오늘날에 비해 인종적 차원에서는 훨씬 더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사회였음을 증명하는 물증이다.
외국인 범죄사건으로 골치
조선시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살았던 만큼 이들이 범죄를 저질러 옥에 갇히거나 곤장을 얻어맞는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세종 21년(1439) 1월 24일 귀화 여진족 김고을도개가 술에 취해 길에서 만난 성균관 학생을 말채찍으로 때린 사건이 발생해 곤장 80대 형에 처해졌다. 그는 또 세종 25년(1443) 1월 7일 예조에서 무례하게 굴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상호군 벼슬에서 파직됐다.
같은 해 6월 11일에는 귀화인들이 밤에 떼를 지어 술 마시고 여러 동네를 드나들며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사건도 있었다.
세종 26년(1444) 6월에는 강도짓을 한 상호군 동나송개를 파면했으며, 7월에는 관청 노비를 살해한 이두치, 합금음동 등 귀화인을 국문한 기록도 보인다. 세종 28년(1446) 11월 20일엔 귀화 여진족 동산(童山)이 재물과 말을 빼앗은 노상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동산이 귀화인인 점을 감안, 곤장 80대로 감형하고 형을 집행했다.
중종 15년(1520) 11월 23일에는 중종 쿠데타의 3대장 중 한 사람이었던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의 첩을 향화인이 간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죽은 영의정 박원종에게 진주(眞珠)라는 첩이 있었다. 향화인 낭근손(浪根孫)이 간통하려 했으나 진주가 들어주지 않자 진주네 집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진주가 피해 달아났기 때문에 끝내 간통하지 못했다.>
광해군 1년 8월 25일에는 용인에 거주하는 향화인들이 범죄단체를 결성해 조직폭력배식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발각됐다.
<'용인에 거주하는 향화인 박길상(朴吉相)이 지난 봄부터 휘하의 16~18명을 거느리고 밤에 활과 화살, 장검과 몽둥이를 들고 무리 지어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읍내의 밭을 이유 없이 빼앗아 경작하거나 무성하게 자란 벼 곡식을 베어가며, 말과 소를 멋대로 놓아 기릅니다' 하니 임금이 '멀리 떨어진 섬에 나누어 보내고, 경기 근처에 살고 있는 종족은 다른 곳으로 옮겨라'고 지시했다.>
외국인 범죄 중에는 단순범죄나 강력사건 같은 일반범죄 외에도 민족 간의 문화적 갈등으로 인한 범죄도 적지 않았다. 태종 15년(1415) 3월 1일 변방 관리의 보고에 의하면 귀화 야인들이 친척간에 함부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키기 위해 처벌을 건의하는 내용이 보인다.
<'각 고을에 산재한 향화인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데 4~5촌도 꺼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살며 윤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일절 금지시켜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되,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주소서.'>
4~5촌과 혼인하고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사는 풍속은 북방 유목민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관습이 조선에서는 윤리강상을 더럽히는 죄로 처벌받았으니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왜관(倭館)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많은 왜인들이 조선을 드나들며 상업에 종사하거나 의약품, 서적, 양식 등을 구해 갔다. 왜인과의 교류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집중된 왜구 침략은 이성계(李成桂)라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왜구의 약탈이 그치지 않자 세종 1년(1419) 이종무(李從茂)가 지휘하는 정벌군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토벌했다. 이 정벌로 먹고 살 대책이 막막해진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소오 사다모리)이 무역 재개를 요구해 왔다.
조정은 세종 25년(1443) 대마도와 계혜(癸亥)조약을 체결하고 왜구와의 무역을 허가했다. 당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쌀 200석을 주고, 조선을 왕래하는 일본 무역선은 대마도주의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1년간 세견선(대마도주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의 수는 50척을 넘을 수 없고, 개항장은 제포(乃而浦:경남 창원군), 부산포, 염포(경남 울산시) 세 포구에 한한다.
세 포구에 사무 연락을 담당하는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일본인 거주를 허가한다.>(최영희씨 저서 '임진왜란' 내용 참조).
계해조약 체결 이전에도 많은 왜인들이 조선에 건너온 사실을 세종 1년 9월 21일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일본 사신이 그래도 적더니 최근에 와서는 칼 한 자루 바치는 자까지도 사신이라 칭하고 자기가 나서서 물건을 매매하려 합니다. 이들이 가지고 온 재화가 길에 연달아 있고, 왕왕 예조까지 올라와 공을 따지고 성내어 소리치는 자까지 있습니다.
국가에서 일년 동안 이들에게 내리는 양곡이 1만여 석에 달합니다. 이들의 내왕을 허락한다면 도성 밖에 왜관을 지어 거기 머물게 하고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 도도웅와(都都熊瓦) 및 종준(宗俊) 등의 문서를 가지고 온 자들은 접대하고 그 밖의 사람은 왕래를 엄격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에 건너오는 왜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왜관(倭館)이다. 당시 왜관의 출입 절차가 까다로워 '왜관에는 사면의 난간과 담을 높이 쌓고, 해가 돋은 뒤 문을 열고 해가 질 때 문을 닫아 출입을 엄히 한다'(세종 16년 6월 24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왜인들은 온갖 꾀를 내어 왜관을 빠져나가 무역을 하고 쌀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세종 20년 1월 7일 실록.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왜인이 식량을 많이 받기 위해 뱃사공 수효를 문서에는 많이 기재하고 실상은 수효를 줄여서 데려옵니다. 수효를 점고할 때는 먼저 온 다른 뱃사공을 불러다 이름을 속이고 문서대로 타가니 이에 대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인 막사 둘레에 목책을 설치하고 바깥 둘레에도 겹쳐 설치한 다음 서쪽, 북쪽 두 곳에만 문을 설치합니다. 이곳을 상시로 파수하여 출입하는 왜인의 수를 헤아려 간사한 왜인이 남의 이름으로 식료를 받아가는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일본과의 교역사
당시 일본과의 무역은 대등한 관계에서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조선이 종주국으로서 속국을 돕는 조공무역 형식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소량의 진상물을 받는 대가로 막대한 양곡과 옷감, 서적, 의약품 등을 공급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소득 없는 거래였지만 왜구의 노략질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의 투자로 생각했다.
일본 입장에선 조선에 한 번 다녀가면 막대한 이득이 생겼으니 기를 쓰고 조선으로 건너오려고 노력했다. 일본은 계해조약의 규정을 무시하고 많은 무역선을 보냈으며, 삼포의 왜관은 날로 번성하여 조약 체결 50년 후에는 제포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3400여 명에 달했다.
중종 5년(1510) 4월, 엄청나게 불어난 왜인들이 난폭한 행동을 서슴지 않자 부산첨사 이우증(李友曾)이 왜인 범죄자를 잡아다 곤장을 쳤다. 분노한 삼포 거주 왜인들이 비밀리에 대마도에 연락하여 4000~5000명의 원군을 불러들여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반란은 곧 진압됐고 대마도주가 국서를 보내 사죄하자 조정은 다시 일본과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임신약조에 의해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주는 세사미(歲賜米)와 세견선을 반으로 줄이고 삼포 거주 왜인을 철수시켰으며, 제포에만 사무소를 두어 왜인이 거주하게 했다.
중종 39년(1544) 왜선 20여 척이 경남 통영군에 침입하자 조정은 교역을 중단했다. 일본은 다시 무역을 간청하여 정미조약을 체결했으나 무역에 엄격한 제한을 가했다.
그 후 명종 10년(1555) 왜구 해적선 70여 척이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에 침입해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으니,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 이후 30여 년 간 일본은 외교사절을 조선에 보내지 않았다. 그들 내부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 등이 일본 통일전쟁을 통해 국력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넘치는 힘이 조선에 미친 것이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의 요청에 못 이겨 조정은 왜관을 다시 설치하고 무역 거래를 지속했다. 광해군 5년(1613) 3월 15일에는 왜인들이 왜관을 벗어나 밖에 나와 놀았으며, 왜관을 몰래 드나드는 조선 장사꾼들을 잡아 가둔 사건도 있었다(광해군 12년 10월 5일).
조선에 건너온 왜구들은 장사를 위해 기를 쓰고 왜관을 빠져 나왔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출입국 관리를 엄격하게 했음에도 '돈벌이'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왜인의 활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인들의 출입국 관리가 어려운 이유는 왜관을 지키는 군관은 겨우 몇 사람인데 비해 왜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러 그들의 출입을 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술한 출입국 관리의 틈새를 뚫고 나간 왜인들 중에는 상업행위 이외에 조선의 선진문화를 몰래 빼가거나 간첩행위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다.
<동래부사 안진이 보고를 올렸다.
'왜관에는 문을 지키는 군관이 있고, 또 복병을 두어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근래 왜관의 왜인들이 생선과 채소를 매매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출입하는가 하면, 심지어 십 리 밖에 있는 선암사에 왕래하며 법당의 제도를 그려갔다고 합니다.'>(현종 6년 5월 17일)
심지어 왜인들이 조보(朝報:오늘날의 관보에 해당)를 베껴가거나 국가 기밀을 빼내가는 사례(광해군 13년 5월 2일)가 발생하자 광해군 13년 10월 30일 임금은 '왜인들이 멋대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몰래 장사하는 것도 엄금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숙종 38년(1712) 4월 22일에는 유성룡의 저서 '징비록'이 왜인들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사실이 밝혀져 조정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왜인들의 성범죄 행각
숙종 24년(1698) 2월 5일에는 왜관에 머무는 왜인의 수가 점점 많아져 500~600명, 심지어 800명이며, 오래 머무른 자는 10~20년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수의 왜인들이 장기간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만큼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현종 2년 5월 28일에는 동래 사람 박선동(朴善同)이 왜인들의 뇌물을 받고 조선 여인을 왜관에 몰래 들여보내 간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는 바람에 박선동과 여인은 왜관 문 밖에 효시하고, 왜인과 술 마신 여인, 왜구와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 판 백성들을 유배했다.
숙종 1년(1675) 5월 3일 기록은 이 시절 왜관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각종 성범죄로 골칫거리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동래부 사람 어부동(於夫同)이 자기 아내를 간통하는 왜인을 쳐죽여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는데 그를 석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이때는 변방의 금령이 해이해져 왜관에 있는 왜인들이 여염으로 다니며 부녀자를 간음했다. 그래서 동래와 부산 여성 중에 왜인의 출산이 많았으며, 서북 사람도 그러하여 오랑캐의 귀와 눈이 되어 나라의 일을 일러주므로 식자들이 이를 근심했다.>
현종 13년(1672) 4월 4일에는 왜인을 살해한 동래 백성을 효수한 기록이 보인다.
<동래의 한 백성이 왜관의 왜인에게 베를 꾸어 쓰고는 오랫동안 갚지 않았다. 하루는 왜인이 몰래 와서 꾸어간 베를 급히 조르자 왜인을 죽인 일이 발각되어 그를 효수했다. 나라 기강이 점차 무너지고 금령이 날로 해이해져 변방 백성들이 왜인과 교통하는 것을 예사로 여기고, 변방을 지키는 자도 적임자가 아니어서 엄하게 금하지 못해 모욕을 당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진실로 가슴 아프다.>
숙종 36년(1690) 4월 12일 실록에는 왜인들과의 접촉에서 무너져 가는 성 풍속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발견됐다.
<왜인이 초량촌에서 옮겨간 후 여염에 왕래할 수 없게 되자 아침에 저자가 설 때마다 우리나라 남녀들이 섞여 가면 남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팔리지 않고, 여인들이 가진 것은 나쁜 것이라도 꼭 팔리기 때문에 아침 저자에 나가는 사람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타이르기를 '이는 물고기와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다. 그대들도 사람인데 어찌 이런 짓을 하느냐' 했다.>
이처럼 각종 성범죄가 만연하자 숙종 38년(1710) 3월 5일,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이 대마도주와 간통사건에 대한 처벌조약을 새로 맺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 사람이 왜관 밖으로 나가 강간한 경우는 사형에 처하고, 유인하여 화간한 경우 및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경우는 영원히 먼 곳으로 유배한다.>
왜관도 사람 사는 동네였던 만큼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효종 3년(1652) 9월 22일에는 왜인 90여 명이 왜관을 뛰쳐나와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 백성이 법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했지만 왜인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처벌하지 않아 법 집행의 불평등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래 사람이 왜관의 왜인에게 인삼을 팔다 발각되자 동래부에서는 그 사람을 법대로 죽였으나 왜인은 인삼 산 자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동래부에서 누 차 법을 어기면 서로 간에 어긴 자를 죽이기로 한 약속에 대해 힐문했지만 왜인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조선시대는 여진, 위구르, 이슬람교도, 왜인들을 우리 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숱한 외국인들이 우리 민족으로 동화되어 각자 평등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배달겨레의 단일민족, 순수혈통이란 고정관념을 버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은 인접한 여러 민족들과 수없는 접촉을 통해 피를 섞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은 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접촉해 오면서 혼혈을 해온 복합민족이지만 배달겨레 단군의 자손이 주축을 이루어 온 민족이라는 인식의 확립이 중요하다. 국수주의(國粹主義)적인 민족의식과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에서 탈피하는 시각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다.